내 인생은 반지하 인생이다.
실제 내가 반지하에 살고 있기도 하거니와 지하로 아예 꺼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지상으로 드러난 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모습이 현재 내 모습과 소름 끼칠 만큼 똑같기 때문이다.
반지하 단칸방에 혼자 사는 삶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지옥과도 같다.
비가 오면 늘 빗물이 집 안으로 들이쳐 물바다가 되는 게 일상이고, 간혹 창문 너머 던져 들어오는 담배꽁초나 쓰레기들 때문에 창문을 열고 사는 것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때때론 철없는 애새끼들이 반지하 창문 너머로 날 발견하고는 창살을 쿵쿵 두들겨대며 장난을 치곤 했다.
처음에야 뛰쳐 나가며 쫓아냈지, 이제는 더 이상 그러고 싶은 생각도 기력도 없었다.
곰팡이 냄새만이 날 반겨주는 이 공간에서 내가 하는 거라곤 그저 수거함에서 한밤중에 몰래 질질 끌고 온 매트리스 위에 드러누워 있는 것 뿐이었다.
이대로 그냥 자는 듯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누워 있다가도 본능적인 욕구엔 또 약했던 나는,
배고프면 먹고, 마려우면 싸고, 졸리면 잤다.
그러던 내게 기적이 일어난 것은, 반지하 창문으로도 햇살이 희미하게 스며들던 어느 화창한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매트에 베개도 없이 시체처럼 드러누워 자다 일어난 나는 방바닥 한가운데에 놓인 어떤 검은 물체를 발견한 채로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발견한 그것은 뜬금없게도 공책이었다.
아직 잠이 덜 깼나 싶어 눈을 비비고 봐도 검은 표지의 공책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제서야 저것이 환각이 아니라 확신하게 된 나는 조심스럽게 공책을 집어 들었다.
공책은 겉표지가 검은색의 빳빳한 종이로 되어 있었지만, 뭐 하나 적혀 있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공책의 첫 장을 넘겨 본 순간, 나는 이 공책이 뭔지 어렴풋이 짐작할 것만 같았다.
[이 공책에 이름을 적으면 이름의 주인은 존재가 지워진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거기서 어쭙잖게 비튼 문구가 붉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조악한 글씨체는 역시나 어디서 본 것 같은 낯설지 않은 글씨체였다.
한동안 벙찐 채로 공책을 응시하던 중 문득 어디선가 크큭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빠르게 둘러봤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때 시야에 열린 창문이 들어왔다.
딱히 열어둔 기억이 없는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열린 창문 틈으로 을씨년스러운 찬 바람이 흘러들어 왔다.
그제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된 나는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않았다.
"에이 씨팔 진짜!"
괴물이라도 된 것처럼 쿵쾅대며 밖으로 나가보았지만 바깥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분을 삭히지 못해 근처에 있던 깡통을 걷어차 버리고 다시 집 안에 들어선 나는 당장이라도 공책을 찢어버릴 생각으로 가위를 집어들었다.
가위가 종이에 닿은 그 순간, 문득 나는 어떤 생각이 스쳐 가위를 던져두고 이번엔 펜을 집어들었다.
펜이 잘 나오지 않아 빈 종이에 원을 몇 번 강하게 그려준 후에 공책에 무언가를 적었다.
[박종철]
매 주 월요일만 되면 내려와서 시끄럽게 현관을 두드려대며 빚쟁이마냥 월세를 요구해대던 집 주인의 이름이었다.
내가 일부러 안 주는 것도 아니건만 며칠이라도 밀리면 득달같이 달려와서 지랄해대는 것이 무척 아니꼬왔던 인간이었다.
어차피 장난으로 방 안에 던져둔 공책이라면, 나도 장난에 어울려 주겠다는 심보로 집 주인의 이름을 휘갈기고는 방 구석에 집어던졌다.
3일 후, 다시 월요일이 되었건만 오늘 아침엔 현관이 조용했다.
오늘은 조용하네, 라며 그냥 넘어가려던 나는 문득 그 공책이 떠올라 퍼뜩 일어나 방 구석에 쳐 박아둔 공책을 펼쳐 보았다.
[박종철]
공책에는 여전히 집 주인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 나는 저녁이 되어서야 조심스럽게 집을 나섰다.
계단을 올라가자 빌라 입구엔 때마침 집 주인 옆집에 사는 아줌마가 박스를 정리하고 있었다.
간단히 목례만 하고 지나가려다가 아줌마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 혹시 [박종철] 아저씨 무슨 일 생겼습니까?"
"응? 뭐라구? 누구 아저씨?"
"집 주인 아저씨요, [박종철] 아저씨."
아줌마는 한동안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대뜸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뭔 소릴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네. [박종철]이 도대체 누군데 그래?"
나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면서 대충 대화를 얼버무리고는 도망치듯 빌라를 빠져나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공책은 진짜였다!
이제 더 이상 월세 독촉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보다도 이 공책이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한번 더 실험해 보기로 했다.
이번엔 길을 걷다가 가장 처음 이름을 알게 된 사람을 지워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머지않아 바로 찾아왔다.
공책을 쥔 채로 터덜터덜 걷던 나와 어떤 남자가 어깨를 부딪혔다.
보아하니 2,30대 쯤 되어보이는 직장인이었다.
남자는 나와 어깨를 부딪히고는 몸을 돌려 죄송하다며 꾸벅 인사를 한 채 뛰어가고 있었다.
그가 인사하던 찰나에 목에 메고 있던 명찰에서 이름을 포착했던 나는 곧바로 나를 등진 채 뛰어가는 저 남자의 이름을 공책에 적었다.
그리고 공책에 이름을 적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엄청난 광경이 벌어졌다.
[김지호]
이 이름을 노트에 적고나서 얼마 되지 않아 저 멀리 뛰어가던 남자가 다리 쪽에서부터 서서히 희미해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략 5초 정도 걸렸을까, 남자는 그렇게 순식간에 내 시야에서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내 몸이 들썩거리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고, 입술이 찢어질 듯 올라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집으로 가는 동안 내 머릿속에선 이 공책을 활용할 수 있는 수백가지의 시나리오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공책을 갖게 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하지만 내 생각만큼 삶은 급격하게 변하진 않았다.
일단 내 출발 지점이 워낙 밑바닥이었던 것도 있지만, 나부터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쫄보였던지라 과감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개선된 것이 있다면, 내 마인드일 것이다.
확실히 믿을 구석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자 없던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삶에 대한 의욕이 다시 샘솟기 시작했다.
눈에 거슬리는 모든 인간을 지워 버릴 수 있는 엄청난 물건을 갖게 된 나였기에 정말 내 삶이 궤도에 오르기만 하면 탄탄대로는 정해진 것이었다.
문제는 그 궤도에 오르기까진 아직 멀었다는 거였고, 이를 위해 뭐든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알바를 시작했다. 원래라면 나가는 것조차 귀찮아 꿈도 못 꿨을 일이건만 일을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알바를 하던 중에 은근히 나한테 꼽을 주던 선배 알바생이 있었는데, 곧바로 지워버렸더니 더 이상 성질을 건드는 사람이 없어서 쾌적하게 일을 하고 있다.
솔직히 사장도 은근 나를 무시하고 피하는 느낌이 없잖아 있어서 거슬리긴 한데, 지워버리면 돈 줄 사람이 없으니 일단 참고 있다.
몇 달 정도 일해서 목돈만 만들고 나면 바로 때려치우면서 지워버릴 생각이다.
이 노트가 흉내내고 있는, 아니 어쩌면 이 노트가 모티브일지도 모르는 그 만화의 주인공처럼, 나 역시 신이 된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정확히 그 날이 오기 전까진.
눈이 유난히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뉴스에도 나올 정도로 이례적일 만큼 엄청난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그 날, 알바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눈이 많이 와서 그런지 집으로 가던 길이 유난히 미끄러웠다.
알바 장소에서 집으로 갈 때는 꽤 길게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어느 경로로 가던지 간에 결국엔 무조건 이 계단을 내려가야만 집에 다다랐기 때문에 길이 미끄러워진 오늘은 내심 걱정스러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계단 앞에 다다랐다.
저녁 시간이라 어두워진 계단 아래는 흐린 날씨 탓에 유난히 더 깜깜해 보였다.
나는 난간을 잡은 채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가다 보니 앞쪽에서 먼저 계단을 내려가던 여성이 보였다.
그녀도 나처럼 불안했는지 난간을 부여잡은 채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가고 있었다.
그 내려가는 모습이 지금 내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문득 헛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거의 계단을 다 내려왔을 쯤이 되자 계단 꼭대기에선 보이지도 않던 아래쪽 땅바닥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놓였던 그 순간, 내 한 쪽 발이 슥 하고 크게 미끄러졌다.
순식간에 중심을 잃은 나는 아래쪽으로 붕 뜨며 날아가듯 떨어졌고, 머지않아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나는 어딘가 부딪히지 않았다. 심지어 의식조차 잃지 않고 또렷했다.
내가 계단 맨 아래 쪽 지상에 드러누운 듯한 자세로 있다는 걸 인지했을 때, 문득 머릿속에 앞서 봤던 그 여성이 스쳤다.
몸을 바둥거리며 일으킨 나는 내 아래에 깔린 채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여성을 발견했다.
순간적인 상황에 몸이 얼어붙어 일단은 여성을 바로 눕힌 뒤 떨리는 검지 손가락을 그녀의 코에 갖다댔다.
다행히 손가락에는 미약하지만 숨결이 느껴졌다.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119에 전화하려다 문득 손가락을 멈췄다.
만약 이 여자를 살렸는데 그녀가 이상한 말을 하면 어쩌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자 폭설이 내리는 어두운 밤에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찬바람이 내 얼굴을 때리는 걸 가만히 두며 곰곰이 이 상황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한 줄기 빛을 발견했다.
나는 왜 진작 이 생각을 바로 떠올리지 못한 걸까.
가방에서 공책과 볼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방과 몸을 뒤져 신분증을 찾아냈다.
[채아라]
공책에 적으면 아예 존재가 사라져 버리니까, 설령 내가 특정됐다고 해도 결정적인 물증이 없으니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이름을 적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존재가 자체가 사라지기에 그녀가 입었던 옷, 그녀의 소지품까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됐다는 걸 확신한 후에야 나는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고 집으로 뛰어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입고 있던 옷을 급하게 벗어 던졌다.
내일 날이 밝자마자 저 옷을 폐기해 버리고 다시 한번 그 장소에 가서 두고 온 게 없는지 살펴 볼 생각이었다.
아까 들어올 때 문에 뭔가가 붙어 있었는데, 급하게 들어오느라 보질 못했다. 내일 나가면서 확인해 봐야 겠다.
집에 올 때까지만 해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귀에 들릴 정도로 강하게 뛰었는데, 집에 도착하고 나니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급격히 노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씻지도 않은 채로 매트리스에 쓰러지듯 드러누웠고, 그대로 죽은 듯이 잠에 들었다.
마침 내일은 쉬는 날이니까, 푹 자다 일어나야지.
잠에서 깬 것은 현관에서 들리는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시간을 보니 이제 막 해가 떴을 법한 시간이었다.
부모도 친구도 없는 나에게 도대체 누가 찾아왔을까?
아직도 잠이 덜 깨 비몽사몽하던 내 뇌가 '경찰'을 떠올렸을 때서야 나는 번뜩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문 앞엔 남성과 여성이 서 있었다.
"누구...시죠?"
내가 조심스럽게 물어보기 무섭게 두 남녀는 갑자기 나를 덮치며 제압하듯 몸을 뒤집었다.
그러더니 여자는 진술이니 선임이니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주절주절 얘기하고 있고, 남자는 내 팔을 거칠게 꺾어 손목에 뭔가를 채웠다.
그 이후로는 정신이 있었어도 잃은 것처럼 순식간에 많은 상황들이 이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나는 어떤 방 안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스스로 정리하려고 애쓰며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장면들을 하나씩 곱씹었다.
대부분의 장면들은 뭉개져 있었지만, 유독 한 장면이 흐릿하게 남았다.
내가 끌려가듯 집을 나서는 와중에 문 앞에 붙어 있던 포스트잇.
그 포스트잇에 쓰여 있던 내용을 보았던 것 같다.
거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새끼야. 이젠 아예 대꾸도 안 하는 작전으로 가나 본데. 이번 주까지 안 들어오면 그냥 강제로 빼버릴 거야. 쓰레기 새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마치 집주인이라도 되는 듯이 행세하는 글이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문득 내 공책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공책의 존재를 들켜버리면 어떡하지. 그 형사 년놈들 중 누군가 그 공책을 발견하고 몰래 챙겨뒀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방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아까 본 그 남자였다. 그는 내 앞에 앉더니 가져온 노트북을 펼치고 한동안 말없이 두드렸다.
긴장된 마음을 애써 숨기며 기다리고 있자 이윽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박무인 씨, 본인 맞죠?"
경상도 사투리가 녹아 있는 남자의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가만히 남자만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자는 다시 노트북에 시선을 옮겨 무언가를 입력한 후 다시 나에게 물었다.
"아까 뭐 때문에 본인이 체포됐는지는 다 들었죠?"
"......"
이번에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한동안 긴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갑자기 남자가 조용히 일어나더니 내 앞으로 다가와 내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그제서야 화들짝 놀란 내가 남자를 놀란 눈으로 올려다 보자 남자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야. 박무인."
"......"
"야!"
"예!"
"이 새끼가..."
결국 대답을 해버렸다는 것에 대한 치욕을 느낄 새도 없이 남자는 다시 자기 자리에 앉더니 무언가를 줄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본인은 12월 23일 밤 11시 45분경 계단을 내려가던 중 미끄러져 앞서 내려가던 채아라 씨를 치고 깔아 뭉갰지만, 의식을 잃고 쓰러진 채아라 씨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그냥 도망쳤습니다... 맞죠?"
순간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이 남자는 그 날의 일을 마치 내다본 것처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설령 어딘가에 카메라가 있어서 그 일을 알 수 있었다 한들 존재를 지워버렸기에 사건도 없는 일이었어야 했다.
"어떻게...다 알아요?"
어렵게 입을 뗀 나를 형사는 경멸하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요즘에 CCTV가 없는 곳이 없는데 그런 짓거릴 하고 도망 가? 이 미친 새끼야?"
"무, 무슨...말씀 하시는 거에요..."
그와 동시에 또 다시 진득한 욕설을 내뱉으며 형사는 나를 걷어차 버렸고, 뒤로 벌러덩 쓰러진 내가 바둥거리는 사이 방 안으로 동료 형사들이 뛰쳐 들어와 날 발로 찬 그 형사를 끌고 데려갔다.
다른 형사들이 나를 다시 일으켜 앉힌 뒤 이번엔 아까 봤던 여자 형사가 내 앞에 앉아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박무인 씨, 일단 이걸 보세요."
여자 형사는 자신이 보고 있던 노트북 화면을 돌려 내게 보여주었다.
거기엔 내가 쓰러진 여자 앞에서 안절부절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영상 속 내가 무언가를 꺼내는 시늉을 하더니 이내 뭔가를 열심히 적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랬다, 정확히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일어나 황급히 뛰어가는 것으로 영상을 끝이 났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영상 속에서는 공책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분명 그 날의 나는 공책과 펜을 직접 꺼내서 직접 수기로 이름을 적은 것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충격 받은 내 모습을 보고 있던 여자 형사는 뒤이어 말을 했다.
"당시 여성 분은 살아 계셨어요. 아시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박무인 씨는 그냥 방치하고 도망치셨어요. 왜 그랬나요?"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존재를 지웠기 때문이라고 말해버리면 그들이 분명 공책의 존재를 알게 되어버릴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둘러댈 만한 말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아까 본 영상에서 공책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어쩌면 그 공책은 나만 인지할 수 있는 물건일 수도 있었다.
"......존재를 지웠으니까요."
"네?"
"솔직히...저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존재를 지우면 원래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도 없는 일이 되는 거 아닌가요?"
이번엔 여자 형사가 아연실색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다들 나를 그런 표정으로 보는 거지?
마음 같아서는 이 방 안에 있던 모든 인간들의 이름을 공책에 적어버리고 싶었다.
"일단...잠시만요."
여자 형사는 다시 방을 나갔고, 처음 체포됐을 때처럼 상황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후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여자는 당시에 충분히 살 수 있었음에도 내가 방치하고 도망간 바람에 결국 사망했으며, 앞서 나를 거칠게 대했던 남자 형사는 그 여자의 남편이었다고 한다.
나는 어찌저찌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까지 겹쳐져 결국 징역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게다가 내가 정신 질환적 행동을 보인다는 이유로 혼거실이 아닌 독방에 가둔다고 했다.
결국 또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늘 저주하던 반지하 방보다도 못한 독방에 혼자 누워 있게 되었다.
어차피 거기 있었을 때도 결국 누워 있던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같았으니 상관은 없으려나.
앞으로 몇 년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을 이 어두운 방에서 홀로 있어야 한다는 것자체는 조금 무섭긴 했다.
혼자서 이런 의미없는 생각이나 하면서 눈을 감고 있던 중에 문득 독방에 아주 조그맣게 난 창구멍 쪽에서 크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놀란 내가 몸을 벌떡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을 땐 독방에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독방의 차가운 바닥 한 가운데에 검은 공책이 하나 놓여 있었다.
나는 그 공책을 보자마자 몸의 떨림을 멈출 수 없었다. 입꼬리가 귀를 향해 마구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공책을 집어들었다.
첫 장을 펼치자 낯익은 글씨체로 [이 공책에 이름을 적으면 이름의 주인은 존재가 지워진다.] 라고 적힌 붉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낯익은 글씨체.
왜 처음 봤을 때부터 의문을 가지지 못했을까.
나는 공책을 계속 넘겨보았다. 내가 그동안 적은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결국 뭔가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주머니에 있던 펜을 꺼내 공책에 이름을 하나 적었다.
이제 와서, 주머니에 펜이 있었는지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박무인]
이름을 적고 나서 나는 공책을 방 한 켠에 놓아두고 다른 쪽 구석에 누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이대로 자는 듯이 서서히 사라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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