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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주딱한테 십년동안 만든철학 피드백받는중 (50)<완>

ㅇㅇ(112.170) 2022.10.31 16:04:06
조회 569 추천 8 댓글 27
														

철학 연재글 링크모음(디씨글자수제한 때문에 모아놓음) - 인디철학 미니 갤러리 (dcinside.com)

(50) 마지막 그림 : 요약과 변호



일단 간략하게 전반을 요약하겠습니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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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론적으로 여기던 "<무의식성-의식성>의 맥락"의 극단적 관점 활용,

"무의식"과 "의식" 중, "무의식"이라는 다분히 개인을 수동적이게 만드는 개념을 개선해내고자

"의식"의 맥락에서, "<무자각성-자각성>의 맥락"으로 극단을 만들어 쪼개어 냅니다.


아무리 무의식적일지라도, 무자각하게 "의식"할 수 있는 범주까지,

우리가 의식해낼 수 있는 곳까지만을 취급함으로써

우리의 인지적 한계에 능동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조성합니다.


단, 맥락이라는 개념 자체가, 주관적이고 비가시적인 이론적 개념이기 때문에,

연장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의 능동성을 더욱 높게 치부하고자,

"의식"의 맥락보다도 더욱 넓도록 "무자각성-자각성"의 스펙트럼은 자의적으로 넓혀진 상태로

가정될 수 있으며,

위의 그림상 점선보다도 넓게 맥락 넓이를 가짐이, 그 가정의 형태입니다.


즉, 당장은 의식해볼 수 없더라도, 무자각성의 영역으로 적극적으로 내포시켜

향후에 능동적으로 의식해볼 수 있는 잠재성을 긍정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최대의, 인지적 한계의 마지노선을

"(맥락적) 무"로 규정하며, 잠재성으로도 극복 못할 개인의 한계는 또한 수긍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무자각성-자각성>의 맥락"으로, 논의를 전개해나가는 것이에요.


나의 내면적 한계 극복을 "내면성의 이론적 설정", "<무자각성-자각성>의 맥락"으로써

긍정적이고, 능동적으로 여겨보자는 취지에 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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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말 그대로 "이론적 설정"에 불과하죠.

"이론"은, 곧 현실에서의 "공상" 취급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유튜브에서 본 내용인데,

이론적으로 설명이 잘 되는 "초끈 이론"은, 11차원을 전제하지만,

11차원이란 게 "현실에서 논의되기 거의 불가하니", 공상 취급 당하기도 하더라고요.


저의 "<무자각성-자각성>의 맥락"도 이런 한계점을 가지고 있고요.

따라서 현실, 사실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것에 대한 답변이 불가피했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자각"을 이론적 개념으로 두지 않고, 직접 체험해보기로 하였고,

무자각해지고, 무자각해지는 과정으로의 결과는 "느낌"만이 남게 됐다는 것입니다.


느낌만이 남으니 저는 "느낌"을 성찰해가며 정리했죠.

더 근원적인, 깊은 곳의 느낌이 있다. 그것이 종합감과 분리감이며, 이것을 엮어

"맥락감"이라고 일컫고,

세 가지 내지 네 가지로 분류되는 기존의 느낌들은, 이 맥락감으로부터 생산되므로,

기존의 느낌을 "느낌 산물", 그리고 맥락감을 "느낌"이라고

독자를 고려하지 않고 필자인 나의 편의에 맞게 일컫겠다.


그리고 이 "느낌", "느낌 산물"로부터의 생산된 것인, "산물"이 있으므로,

내적 작용 및 내면적 상태를 "느낌(맥락감)", "느낌 산물", "산물" 이렇게 구분지어 명칭 짓겠다고요.


이 세 가지를 두어서 서로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뭐 잠재한다느니,

과정 발생의 시간이 변칙적이라느니, 과정의 논의로 많이 이야기하였고요.

거기다가 세계 반영 뭐시기 해서, "느낌", "몇 느낌 산물"을 묶어서 "느낌"이라고 두고,

"몇 느낌 산물", "산물"을 묶어서 "산물"이라고 둔 다음,

각각의 조합으로 "1차 스펙트럼"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이해"와 "학습"의 기타 등을 다루기도 하였습니다.


소개하는 김에

느낌 매개, 무자각 자아와 자각 자아를 자투리처럼 다루기도 하였고요.

물론 굉장히 중요한 파트이지만요.



어쨌든 "느낌의 논의" 이야기가 끝나고, 무자각성과 자각성의 구분법을 지금까지의 논의를

총망라하여,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2차 스펙트럼"이라는 이름으로 "<무자각성-자각성>의 맥락"으로 되돌아와서

이제 이거를 응용해보자 하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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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확장", "갈등의 확장", "감명의 확장"으로 활용하는데,

이쪽은 따로 요약하지는 않겠습니다.

* 필요하다는 요청이 있다면, 이후에 요약하겠습니다.


"세계의 확장"은 형이상학적으로 해석을 시도해보는 활용이고,

"갈등의 확장"은 모형논리적이라고 불러도 될 진 모르겠지만, 이것을 통하여 해석을 시도해보는 활용이고,

"감명의 확장"은 심리학적 및 미학적이라고 불러도 될 진 모르겠지만,

원뿔형 스펙트럼을 통하여 해석을 시도해보는 활용이었습니다.


각자 목표에 맞게 심화하여서 접근한 것이고, 아직은 개화하는 단계에 있었겠습니다.

어쨌든 각자의 파트가 결국은

개인의 능동적 잠재성 그 자체와 일상의 중시를 강조하였으므로, 어느 정도는 유사한 면에서

은근하게 전반의 의의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중요한 건, 그 무엇의 느낌이나 생각이든,

"나의 선택"으로 획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철학을 이해하시고 계신다면,

무의식에 더 이상 잡아먹히거나, 잡아먹힌다는 핑계로 머무르실 수는 없으십니다.


능동적 잠재성의 개인에게 남아있는 건

"무자각성으로부터의 목표를 향한 의지의 발휘", 그것 뿐입니다.

문제는 철학을 만들어낸 저 또한 지지부진하니,

가장 핵심이건대 가장 어려운 과제라고 바라볼 수도 있겠네요.


다들 "나"를 위하여서 화이팅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진부하거나 거창할 필요 없이, 이게 저의 최종 메세지입니다.

고되고 바쁜 시대에서 모두가 나를 위하여서 힘내셨으면 좋겠다는,

그냥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일반 사람으로서의 격려 쯤으로 받아들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용이 과한 거죠... 일단 앞길이 막막한 나부터 화이팅.



────────────────────────────────


나의 철학과 어글리에 대한 변호



이것만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독창을 위한 게 아니라, 무지한 나의 자기만족을 위했다는 것을요.


독창은 단순히 보상심리였을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가만히 성찰해보면요. 저는 그저 제가 몰랐던 데가 나름의 이해로써 부풀어오르는 데에서

생기는 그 희열, 그저 퍼즐을 풀어냈다는 그 자기만족으로 나는 철학을 해왔던 것입니다.


좀 고등학생 시절부터 오래간 착각을 해오고 있었어요.

"창의적이다", "독창적이다", "내가 해냈다", "유일한 천재" 따위로써요.


근데 철학과에 진학한 건, 제 철학의 관점으로만 보아서 내 오만의 급소를 후벼꽂는 비수로 작용했습니다.

하긴, 다 했더라고요.

어떤 철학자를 보면, 내 철학의 팔이 뜯겨져나가고, 어떤 철학자를 또 보면, 내 철학의 다리가 뜯겨져나가고,

내가 할 수 있는 발상은, 그 누군가가 할 수 있는 발상이었던 점입니다.


그래서 창의성을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누군가에게 물들지 않아서 순수한 나의 창의성을 지켜내겠다는 명목으로 보호하며

공부를 등한시하였었는데, 그 때부터 뒤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화이트헤드가 가장 묵직한 쐐기였죠.

이전의 글에서 언급한, 영향 받은 철학자들, 저에게는 전부 묵직한 쐐기였죠.

당시에는 속이 많이 따갑고 아팠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안일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면서 눈 감은 느낌으로, 시각장애를 표방하며 나의 길을 걷겠다는,

사실은 다 깔린 포장도로를 걸어냈으면서, 이미 역사로부터 보장된 철학의 안에서

편안하게 철학하고 있었으면서 눈 가리고 모르는 채 해왔던 거에요.

그, 발상의 희열을 나만의 독창성이라는 보상심리에 잘못 엮어버려서요.


그럼 이용할 수 없는 지금까지의 걸음을 후회하냐? 물으신다면,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물론 후회함은, 공부를 등한시하는 악습관을 길러버렸다는 것인데,

그 외에는,

여기부터는 솔직히 정신 승리라고 하셔도 할 말은 없는데요.

느낀 바는 이렇습니다.


어쩄든 할 때는 즐겁고, 재밌었으니까요. 그리고 좀 많이 정신적으로 아파왔었지만,

그래도 좋은 방향의 방어 기제로 승화하지 않았나 싶어요.

후유증은 있지만, 정말 즐거웠던 기억만으로 저는 됐습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그만큼 행복하고 좋았어요.

단지 지금 제 철학에 남을 미련은, 끝까지 외로울까봐, 단지 그것 하나 뿐인 거고요.


나의 그림.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나와 같은 그림을, 아파 하면서 그려 오고 있다면,

철학이 아니라도, 글에서, 음악에서, 게임에서, 미술에서, 대인관계에서, 아마추어 같은 솜씨로

휘적이고 있더라도요.


저는 그곳에서 "나"만의 독창성, 특출난 실력 따위가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아무렴 당신이 즐거웠다면, 시간을 이겨내온 그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지나온 당신의 연속된 손을 잡고 격려해주고 싶습니다.


살아가는 건 살아가는 쪽으로. 다만 행복한 과정이 있어왔다면,

이것만큼이면, 그 무엇보다도 값진 경험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저는 끝까지 정신 승리를 하고, 합리화를 하고 있는 걸까요?

하지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다들 잘 살아가려는 생을 지향하기보다도, 만족하는 과정에서 잘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철학에서도, 독창으로 눈치보지 마시고, 여타 예술처럼 나의 만족을 위하여 행하셨으면.


저는 만족하였으므로,

이 글을 통째로 나의 메세지로 함축하여서, 여기저기 전달해보고 떠나가겠습니다.


만약 나중에라도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이 계시다면,

"저만의" 세월에 긁힌 스케치북을 뒤적여주셔서 감사드려요. 진짜 생판 남인데.

기대는 하지 않겠습니다. 누가 읽을 만한 친절도, 편의도 베풀지 못한 아마추어의 글이니까요.


하지만 지극히 나를 위하여 각자를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그 누구에게도 소금물 같은 소외가 없었으면 싶어요.


글 마치겠습니다.



p.s.

인디철학 갤러리 만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2022-11-01, 15:32. <50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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