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일한 지 벌써 몇 시간이 되었다. 케이키는 의자에서 일어나 진흙투성이 손을 대충 털어내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만들고 있던, 머리 높이까지 오는 조형물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며칠째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서 피곤했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 이번 진흙상은 지금까지 만든 토용 중에서 가장 사람과 가깝게 생겼다. 멀리서 보면 병마용갱의 병사 인형과도 닮았다. 오랜만에 들어온 회로였고, 그만큼 지난번보다 더 나은 몸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지난번 토용은 휴지곽 만한 크기의 거미 형태였는데, 예상보다 힘이 약해 수리에 참여할 수가 없어서, 고장이 있는지 살피는 간단한 일만 할 수 있었다. 한 번 토용에 꽂은 회로는 진흙을 굽고 난 다음에는 망가뜨리지 않고서야 빼낼 수가 없어서, 케이키는 거미 모양 토용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케이키는 손가락을 좀 더 움직이기 편하게 깎아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조각칼을 찾아 탁자로 향했다. 탁자 위 너저분하게 널린 진흙 조각과 도자기 회로도 사이로 칼을 예리하게 찾아내고는, 다시 조형물로 돌아갔다.
솔직히 케이키도 토용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관절 형태를 잡으면 토용이 그걸 팔처럼 움직이고, 구멍을 뚫으면 거기로 본다는 정도는 알았지만, 그 너머부터는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손가락 같은 섬세한 기관이 특히 더 그랬다. 처음에는 잘못 깎아놓았다 생각했던 것이,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노련하게 움직였다. 직접 따라 했으면 병원에 실려 갔을 기괴한 자세로. 그 이후로는 그저 이것저것 시도하면서, 직관에 반하더라도 더 나은 결과가 나온 방식을 택했다.
진흙상의 손날에 칼날을 대자마자 스피커가 울렸다. 1번과 36번 구역에서 압력 용기에 균열이 났다고 했다. 케이키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구역마다 초록 불이 들어와 있는 지도의 양 끝 두 불만 붉은색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평소처럼 6번에서 10번대가 아닌, 하필이면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끝자락이었다. 케이키는 어쩔 수 없이 작업장을 가로질러, 벽 한쪽 끝에 줄지어 서 있는 토용 중 둘을 골랐다. 말처럼 생겼지만, 주둥이와 이빨은 손과 손가락을 더 닮았다. 케이키는 거의 비슷하게 생긴 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설명서를 읽으며 수리 방법을 알려주었다. 말들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픈 대화수단이었지만, 토용이 글을 써서 뭔가 알려주려면 반나절이 꼬박 걸려서 달리 수가 없었다. 토용의 관절은 힘은 강해도 유연하지 않았다.
지시사항을 들은 말들은 수리 도구를 입으로 물고 종종걸음으로 작업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1번 구역의 말은 가장 가까우니 금방 돌아오겠지만, 36번 구역에 간 말은 한참이 걸릴 거였다. 다시 작업하려고 앉았지만, 왠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수리하러 토용을 보낼 때마다 비슷한 기분이었다. 먼지 낀 사무실에서 케이키를 고용한 사람은 숙식도 제공하고 전용 작업실도 내어주겠다고 했지만, 바로 그 작업실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계약서에 크게 적혀 있어서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었다. 지도에는 작업실을 제외하고는 36번 구역까지, 그리고 그 너머까지 전부 제한 구역이라고 작게 쓰여 있었다. 어쩌면 사람이 작업하기엔 너무 위험해서 토용을 보내야 한다는 그 사람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지만, 케이키는 직접 토용과 함께, 설비를 보고, 파악하고, 수리하고 싶었다. 지금처럼 불빛이 붉은빛에서 초록빛으로 변하는지만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한참 동안 조각칼을 뭉그적거리면서 지도만 쳐다보고 있는데, 스피커에서는 균열이 더 커지고 있다며 고용주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지진이 일어났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작업장에 있던 물건들이 떠올랐다. 케이키는 용기가 터져버렸나 생각하면서도, 작업하던 진흙상이 혹여나 망가질까 두려워 양손으로 껴안았다. 얼굴로 진흙의 차가운 촉감이 전해졌다. 몸이 잠시 떠올랐다. 어딘가 잘못된 것만 같은 비현실적인 감각에 머리가 아팠다. 진흙상에서 떨어져 나간 흙먼지가 머리 주위를 떠다녔다.
몇 분이 지나서야 몸은 무게를 되찾았다. 떠올랐던 물건들은 천천히 내려왔지만, 바닥은 이전보다도 더 난잡해졌다. 도구들과 재료들이 어지러이 흩어졌다. 케이키는 진흙상을 내려놓으려다 순간 멈췄다. 혼란 속에서도 한 가지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두 불이 동시에 초록빛으로 변해 있었다.
케이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지도가 걸린 액자를 바라보았다. 말이 되지가 않았다. 구역 번호는 작업실로부터 거리순으로 매겨졌으니, 단순 계산해도 36번 구역은 가는 데 서른여섯 배는 더 오래 걸려야 했다. 두 토용의 속도는 비슷하니 수리 속도의 차이가 있더라도 동시에 두 구역이 모두 고쳐지는 건 불가능했다.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잡아당겨 보니 지도는 액자에서 쉽게 빠졌다. 빈 액자 뒤로 온통 초록빛인 전구들이 배선을 드러내며 음산하게 빛났다.
케이키는 떨리는 손으로 지도를 둥글게 말았다.
*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렌코가 노트북을 쳐다보며 말했다. 화면에는 CCTV 실시간 영상 열댓 개가 줄지어 떠 있었지만, 오후 햇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자료 조사를 돕는다고 빈 강의실에 틀이 박혀 몇 시간 째 있으니 눈이 아파져 왔다. 화면 너머로 전통 가옥 옆에 전통 의복을 입은 사람들이 오갔다. 다들 어수선하게 어딘가로 달려갔고, 몇몇은 하늘을 날기까지 했지만, 그게 다였다. 백 년 전이라면 모를까, 요즈음은 그런 걸 보고 놀라기에는 기이한 일이 너무 잦았다. 렌코는 어릴 때 TV 채널을 돌리다 아파트 CCTV 화면을 보여주는 채널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이따금 차 한두 대 지나가는 거 말고 화면은 변화가 없었고,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이 몇몇 뛰놀았지만, 그뿐이었다.
“그래도 어떡하겠어, 이번 리포트도 평점 거지같이 받으면 얄짤없이 학사경고라고. 뭐라도 좀 찾아줘. 다른 거 보는 거 아니지? 좀 도와줘. 응?”
메리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메리는 또 다른 노트북으로 자판을 치고 있었다.
“뭘 보려고 해도 요즘은 별일이 없어. 신문에서 대서특필된 것도 기껏해야 지난주에 시공사 하나가 법적 분쟁이 끝나서 자산 권리를 넘겨받았다는 게 전부고.”
렌코는 어깨를 기울여 메리가 쓰고 있는 보고서를 보았다. 10 포인트 글꼴에 쪽 수만 열 장이 넘어갔다. 메리의 전공인 심리역학은 사회학의 탈을 쓴 양자역학이나 마찬가지라서, 똑같이 난해하고 똑같이 비직관적이었다. 민속촌에서 일어나는 현실 개변 현상을 조사한다는 이 보고서 내용도, 역시 얼핏 보기에는 이해가 갔지만, 다시 보면 또 아리송했다.
“분량은 차치하더라도 겉보기에는 내 것보다 훨씬 잘 쓴 거 같은데, 혹시 너네 학과 학생들이 더 잘 쓰거나 그런가?”
“아니, 네가 지난번에 술 처마시고 썼던 것보다 더 심할걸.”
“나 그거 A 받았거든. 쨌든 간에, 그러면 뭐야, 왜 점수가 그래? 교수 얼굴에 침이라도 뱉었어?”
“아니, 교수가 날 맘에 안 들어 해서 그래. 난 평범하게 수업을 듣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아부는 기본이고 명절마다 꼬박꼬박 비싼 선물도 부치는 게 학과 관행이더라고. 어째 첫날에 교수가 출석부를 때 표정이 이상하다더니. 아니면 뭐, 내가 교환학생이라 멀리하는 거일 수도 있고.”
렌코는 메리가 한 말을 곱씹었다. 물리학과에서 그런 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 달에만 몇 번씩, 온라인이던 직접 만나든 간에 국제적으로 연구 결과를 나누고, 연계하니까. 안 그래도 지금 손가락 까딱하기 힘든 이 피로도 학회와 답사를 마치고 오늘 새벽이 되어서야 공항에 도착해서 생긴 거였다. 학회에서는 정말 다양한 과학자들이 모였고, 그만큼 생각도 각양각색이었다. 그곳에서 다름은 개성이자 추구 대상이었다. 심리역학과에서는 다름이 개성도 추구 대상도 아닌 모양이었다.
“봐봐, 지금 네가 보는 저 CCTV 화면도 경희가 바뀐 비밀번호를 알려줘서 겨우 쓰는 거지, 난 로그인 창에서 막히고 나서야 알았어. 나는 아예 학과 톡방에 끼워주지도 않았나 보더라고. 게다가 요 며칠 전에 담당 교수에게 질문했거든? 바로 학과 총장실로 불려갔다?”
“총장실에? 뭘 했길래?”
“뭘 했기는, 실험에 대해서 질문 좀 한 게 다야. 실험 장소도 세부사항도 너무 모호해서, 좀 더 자세히 알려 줄 수 있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총장실로 불려 나가지고는, 교수에게 그런 식으로 물어본다니 태도가 별로라더니, 사회생활을 못 한다더니, 갖은 욕은 다 얻어먹고 또 이런 모습 보이면 학사경고로 안 끝난다고 협박까지 받고 나왔지.”
“그걸 꼬투리 잡는다고? 너네 학과는 교수고 학생이고 뭐 정상이 없냐?”
“몰라. 내가 보기에는 그 총장이라는 작자도 바지사장이야. 총장실 제대로 쓰지도 않아서 책장은 먼지투성이에 거울은 가려놓은 지 오래더만.”
“나 같았으면 책상 뒤엎고 바로 나갔다.”
“나도 나가고 싶어. 이게 전공만 아니었어도.”
렌코는 다시 CCTV를 쳐다보았다. 구름이 해를 가렸는지 햇살이 사라졌다. 여전히 지루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변하는 것만 찾으면 되었다. 요전에 메리가 대신 화면을 봐 달라고 했을 때는 너무 비효율적이라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십 개 화면을 뚫어지라 쳐다보다 뭐 변한 거 있으면 그걸 기록한다고? 녹화 기능이나, 움직임 감지 기능 그런 거 없어?”
메리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렌코는 할 말을 잃었었다. 인터넷에서 몇십 분 만에 녹화 프로그램을 깔아다 (강의실 인터넷 비밀번호를 찾느라 좀 걸렸다) 관련 설정을 만지작거리는 걸 본 메리가 말했었다.
“이렇게 일했으면 내가 지난 일주일 동안 밤샘했을 필요가 없지. 어떻게 이런 걸 다 알아?”
“원래 게으른 사람일수록 편리한 길을 찾는 거야. 근데 이거 실험하려고 만든 소프트웨어 맞아? 실험 진행하려면 필요할 기능들이 아예 없다시피 한 수준이잖아. 지난 세기 것도 아니고.”
렌코는 어이가 없었던 요전을 떠올리며 눈을 비볐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다른 화면에서는 대부분 움직임이 보인다는 초록빛이 들어와 있었는데 몇 시간 전부터 유독 화면 하나에서만 움직임이 없다고 불이 꺼져 있었다. 렌코는 그 화면만 골라 최대화시켰다. 작아서 자세히 신경 안 쓴 화면은 커지자 눈에 급작스레 다가왔다.
화면에는 원통 안에 들어가서 반대편을 본 것처럼, 구부러진 땅 위로 건너편의 숲이 희미하게 떠 있었다. 렌코는 지금 똑바로 보고 있는 것이 맞나 확인한 다음, 메리를 불렀다. 메리는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것 같더니, 입을 떡 벌리고 다물지를 못했다.
“이건…. 우주 정거장이잖아. 실험을 왜 거기서 한데?”
카메라는 아마 뭔 일이 있어서 돌아간 것 같았다. 카메라가 비춘 바로는 원통형 우주 정거장이었고, 크기는 제법 컸다. 마을 하나가 어렵잖게 들어갈 만했다. 렌코는 메리가 당황하는 사이에 전화를 꺼내 찾아보았다.
“어디인지 알아냈어. 우주 정거장이 흔한 건 아니잖아. 이 정도 크기의 정거장인데 고층 빌딩 하나 안 들어선 거라면 딱 하나밖에 없거든? 그 왜, 한 십수 년 전에 경제 위기 터졌던 그때 만들어진 유령 정거장 말이야. 여기 보니까 원래는 접이식 태양 가리개에 호화 호텔에 부촌도 들어설 예정이었는데, 불경기라서 아무도 입주를 안 해서 시공사가 도산했대. 그 뒤 소유권이 흐지부지되었고.”
“그러니까 내가 궁금한 건, 왜 하필이면 우주에서 실험을 하냐 이거야.”
“뭐 이유야 많겠지. 땅값이 싸다거나, 누가 오는 걸 막으려고 한다거나. 요즘 땅값이 어지간히 비싼 게 아니잖아. 호황 때 우주 정거장이 갑자기 그렇게 많이 만들어진 것도 그래서 아니겠어?”
“뭐, 그때는 진짜로 뭐든 할 만큼 사정이 좋았었다고 하긴 했지. 좋았겠어, 그때는.”
메리가 말하다 순간 멈칫했다.
“잠깐만. 화면 좀 봐봐. 지금 불이 하나도 빠짐없이 초록빛으로 바뀌었어.”
“뭐? 지진이라도 난 거야?”
“그럴 수도 있고. 아, 끝났네. 혹시 이거 녹화본 있어?”
“녹화본이야 있지. 프로그램 자체를 녹화하는 거니까 불빛도 함께 찍혔을 거야. 잠깐만.”
조금 전에는 정말로 정거장에 지진이 났던 모양이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와가 떨어져 나간 집도 하나둘 보였다. 렌코는 영상을 몇 번 다시 돌려보았다. 어쩐지 진동하는 모습이 규칙적이었다. 마을을 찍은 다른 영상들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초록 불이 거의 연속적으로 들어왔지만, 조금 전 정거장 건너편을 향하던 화면 하나만큼은 먼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지라 지진의 감지 여부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진동은 일반적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인위적이었다.
길게 세 번, 짧게 세 번, 그리고 다시 길게 세 번.
“모스 부호잖아.”
렌코가 말했다.
*
하늘엔 구름 한 점이 없었다. 파랬다. 히메는 저 위를 날아간다면 어떨까 고민했다. 그러다 관두었다.
찻집에는 늘 그렇듯이 둘뿐이었다. 안은 거의 비어 있었는데도 분위기는 차분하지가 못하고 어수선했다. 히메는 냉차가 든 유리잔의 꼭대기를 집어올려 흔들었다. 각얼음끼리 부딪히면서 또각 소리를 내었다. 냉차를 마저 마시고 고개를 돌리자 반키가 보였다.
“도와줘?”
히메가 물었다. 반키는 쓰레받기를 들고 깨진 유리 조각을 치우고 있었다. 빗자루가 움직일 때마다 물기에 젖은 반짝이는 유리조각들이 이리저리 밀려갔다. 여름용 셔츠에 어울리지 않게 맨 두꺼운 스카프 탓인지, 반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것이 보였다.
“아니, 유리조각에 찔리지나 마. 넌 신발을 못 신잖아.”
히메는 밖에서 볼 때 다리가 보이는지 무의식적으로 곁눈질했다. 히메의 다리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였다. 건조한 상태로 너무 오래 있으면 피부가 갈라지는 탓에, 히메가 앉는 의자는 밑에 나무 상자를 깔고 안에 물을 채워놓았다. 피부에 물이 찰랑거리는 느낌은 손으로 차가운 물을 뜰 때처럼 시원했다.
“오전에 있었던 지진, 이상하지 않았어?”
“글쎄, 나야 지금까지 지진을 겪어본 적이 없으니, 모르지. 왜?”
마을에서 지진은 기상 현상에 버금갈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지금까지 히메가 알기로는 마을에 비가 내린 적도, 눈이 내린 적도, 심지어 하늘에 구름이 낀 적도 없었다. 남들은 그런 거에 개의치 않는 듯했다. 무당과 그 패거리들은 자기들이 날씨를 다룰 줄 안다고 했지만, 어째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설령 맞는 말이더라도, 같은 요괴면서 자기편은 마을을 지배하고 다른 편은 위험하다고 몰아세우는 태도에 질려 그쪽에서 하는 말이라면 믿고 싶지도 않았다. 바로 그 편 가르기 때문에 둘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마을 가장자리에서 몰래 숨어지내야 했다. 마을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는 일은 어렵고 위험해져서, 더는 친구를 만나는 일이 즐겁지가 않았다.
“그냥, 이상해서. 지난번에 그 하늘에서 왔다는 걔도 땅을 뒤흔들었잖아. 그때도 물건들이 다 떴어?”
물건이 뜨는 동시에 몸도 동시에 가벼워졌다. 나중에 모든 것이 가라앉았을 때 내부 장식들은 널브러져 떨어졌고, 떠오른 물은 흩어져 가게 사방을 적셔놓았다. 히메는 대걸레로 주위를 닦아 놓기는 했지만 바닥은 여전히 미끄러웠다.
“아니. 이번엔 나는 것 같은 기분도 들기는 했는데.”
반키가 쓰레기통에 유리 부스러기를 쓸어 넣으면서 말했다.
“그게 언제였더라.”
“글쎄. 망할 달력이 있어야지.”
“잠깐만.”
반키가 고개를 들었다.
“누가 왔어.”
반키가 가게 주변에 심어 놓은 머리 중 하나가 누가 오는 것을 본 것 같았다. 히메는 정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리는 한산했다. 누가 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앞문 말고 뒷문.”
반키가 스카프 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 반키는 머리 개수를 늘릴 수가 있었지만, 목에 붙이고 다닐 수는 없었다. 지금 어깨 위에 달린 머리도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사실 잘린 목에다 적당히 고정해 놓은 거라서, 단면을 들키면 안 되었다. 더워도 스카프로 목을 보이지 않게 둘러싸고 다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히메는 옆 의자로 잠시 건너간 다음 상자를 꼬리지느러미로 차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옮겼다. 다시 상자에 들어가자마자 뒷문이 벌컥 열렸다. 각도상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힐끗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예술을 하는지 옷에는 석고 가루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한참을 뛰었는지 숨이 차 계속 헉헉거렸다.
“그, 여기가 어디죠?”
“여기는 찻집이긴 한데…. 어떡해, 냉차라도 한 잔 줘요?”
“아, 네.”
예술가처럼 보이는 사람은 대답을 마치고는 근처에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만 삼천 원이에요.”
“카드 되나요?”
히메는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터무니없는 바가지일 텐데 저렇게 선뜻 사간다고?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가게에 들르지 않았다.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의도한 거였다. 건너편 찻집에서는 기껏해야 500원에 더 좋은 차를 팔았다. 경제관념이 없는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저 사람이 마을 사람이 아닌 건 거의 확실했다.
“어, 아뇨. 현금만 받아요.”
“지금 현금이 없는데….”
예술가를 닮은 사람은 지갑을 뒤지더니 풀이 죽었다. 그러더니 창가를 쳐다보고는 화들짝 놀라 정문을 향해 뛰쳐나갔다.
“방금 누구였을까?”
상자를 다시 원위치시키며 히메가 물었다.
“글쎄. 뭐 안 들켰으니 나야 좋긴 한데. 기왕이면 돈도 벌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아, 바닥에 진흙 떨어졌다.”
반키가 빗자루를 찾아 일어나며 말했다.
몇 시간 뒤 히메는 반키에게 신문 한 부를 건네받았다. 미친 사람이 잡혀 들었다는 기사가 표지에 실려 있었다. 인상착의를 보니 오후에 가게에 왔던 사람이었다.
“미친 사람이라 돌려보냈다고?”
“지친 사람 같아 보였는데.”
늘 그랬듯이 신문에는 발행일이 적혀 있지 않았다.
*
“이건 구조 신호야.”
렌코가 말했다.
“SOS?”
“그런 거 같긴 한데…. 모스 부호 표를 보니까 ‘OSO’래. 아마 완벽히 알고 쓴 건 아닌가 봐.”
메리는 노트북 화면을 뚫어지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 렌코는 메리를 곁눈질했다.
“이상한데.”
“뭐가?”
“너답지가 않아. 보통 이때쯤 이건 대사건이라면서 누가 보냈는지 찾으러 가자고 하잖아, 안 그래?”
메리가 렌코를 쳐다보았다.
“그건 나다운 게 아니라 너다운 거고. 게다가 모험도 한두 번이지, 이건…. 좀 위험하잖아.”
메리가 머뭇거렸다.
“그래도 저렇게 일부러 구조 신호를 보냈다면, 누가 저기 갇혀 있다는 거잖아.”
“누가 갇혔으면 당연히 구하는 게 맞기는 하는데…. 이게 지금 하는 과제도 있고, 실험도 그렇고, 난 걱정이 돼. 이번이 정말 마지막인데, 또 사고를 일으키고 싶지가 않아. 게다가 연구원이 직접 사회학 실험에 개입하는 건 되도록 피해야 하기도 한다고. 실험이 오염되잖아.”
렌코는 한참 동안 메리를 쳐다보았다. 메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직접 가지 않는다면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지.”
“그래, 그래야지….”
“아니면, 내가 직접 건너가서 찾아볼까? 네가 가는 게 정 안 좋다면.”
렌코가 물었다.
“그래? 그러면 고맙지. 정말 고마워. 내가 도와줄게.”
렌코는 메리가 갑자기 활기가 도는 걸 보고 당황했다.
“그러면, 이번 주 밥은 네가 사.”
“알겠어. 당연하고말고.”
렌코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좋아, 그러면 여기서 세 가지 문제가 있어. 첫째. 누가 구조신호를 보냈나? 둘째. 그 사람은 어디에 있나? 셋째. 거기까지 어떻게 가나?”
“첫째와 둘째는 잘 모르겠는데, 셋째는 짚이는 곳이 있어.”
“어디?”
“아까 총장실 얘기한 거 기억나? 거기 거울 말이지. 보자기를 둘러싸 맸는데 거울이라고 바로 알아챈 이유가 다른 게 아닌 것 같아.”
*
“작업실 밖을 나가면 안 된다고 했잖아.”
케이키의 고용주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고용주를 다시 보는 건 일자리를 얻은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런 건 말해주지 않았잖아요. 지금까지의 수많은 비밀 엄수 조항들, 야근들, 전부 이걸 숨기려고 했던 거에요? 어째서요? 무엇 때문에 그런 거에요?”
캐이키가 말했다. 케이키에겐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자기가 있는 곳이 우주 정거장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작업실을 뛰쳐나와 비상계단을 무작정 올라가 보니 거기에다 또 웬 민속촌이 있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보아도 여기가 어딘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 깜짝할 사이에 케이키의 고용주가 케이키의 팔을 붙잡더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시 작업실이었다. 케이키는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의심해 보았다.
“잘 들어. 나는 지금 여러 일을 하느라 바쁘고, 그래서 이렇게 외진 곳에 있는 거고, 너에게 말해줄 겨를도 없어. 오늘 시의회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고. 그러니까 작업실에 꼼짝 말고 있어. 원래는 널 해고해 버릴 수도 있는데, 그건 나중에 돌아와서 결정할 거야. 지금 밖에 일거리를 찾는 기술자들은 넘쳐나니까. 알겠어?”
고용주는 케이키에게 소리치고는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고용주의 하수인으로 보이는 사람 둘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또 이상한 짓 하면 가두는 거로 끝나지 않을 거야.”
케이키는 얼이 빠진 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간신히 의자에 걸터앉았다. 하수인들은 가만히 서서 케이키를 감시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진흙상이라도 빚으러 조각칼을 집었더니, 둘 중 하나가 손을 들어 칼을 산산조각냈다. 케이키는 고통스럽게 앓는 소리를 냈다. 나뭇조각이 손을 훑고 지나가 손가락에서 피가 났다.
“...뭐 하는 거예요?”
“...저항하려는 것처럼 보여서.”
칼을 날려버린 하수인이 말했다. 케이키는 원망 어린 눈길로 하수인을 노려보았다. 심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아팠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의심 가는 행동을 하지 말했어야지.”
나이가 더 어린 하수인이 말했다. 케이키는 흙투성이 윗옷으로 상처를 문댔다.
“이건 그저 작업하는 거였다고요.”
“그런 거라면 계속해도 좋아.”
케이키의 칼을 쏜 하수인은 돌아서서 나이가 더 적은 하수인과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전부 사소한 얘기들이었다. 정원에 꽃이 피었다느니, 이따가 밤에 포장마차에 가서 국수를 먹자느니, 맥락 없이 들으면 부모와 자식이 다정하게 나누는 대화 같았다. 케이키는 그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문득 케이키의 뇌리에 말 토용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둘은 요전에 용기를 고치기는 했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혹여나 둘이 계속 그 장소에 있다면? 심장이 요동쳤다.
케이키는 몸을 돌려 하수인들을 등지게 앉았다. 하수인들은 지루했는지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시선에 거미 토용이 들어왔다. 케이키는 토용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거미는 알아듣고 발을 뗐지만, 첫걸음을 내자마자 작게 또각 소리가 났다. 토용의 도자기 발은 매끈한 바닥에 소리를 내었다. 케이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다행히 하수인들은 자기들끼리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토용에게는 귀가 없었지만 케이키의 표정을 보고 눈치를 채었던지, 이번에는 바닥에 널브러진 부드러운 진흙 조각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작업실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케이키는 터질 듯한 심박을 애써 무시하며 숨을 참고 있다가, 최대한 몸을 길게 뻗어 토용을 집어 들었다. 꽤 묵직했다.
케이키는 찰흙 조각을 얇게 펴 문장 하나를 새끼손가락으로 새겼다. 나뭇조각에 쓸린 손이라 한 자 한 자를 쓰기가 쓰라렸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케이키는 거미 토용의 등에 진흙 판을 둥글게 붙이고는, 토용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떨리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거미는 두 하수인이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로 재빨리 기어간 다음,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 난 좁은 환풍구를 통해 소리 없이 사라졌다.
*
“꼭 이렇게 미친 사람처럼 가리고 뛰어야 하는 거야?”
렌코가 투덜거렸다. 둘은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총장실로 뛰어가고 있었다.
“총장이 이 학교 CCTV 기록을 들춰보면 어떡하려고? 설마 총장실 안에도 CCTV를 설치해 놓지는 않았겠지.”
메리가 말했다. 둘은 몇 계단을 내려가 1층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한 다음 총장실 앞에 섰다.
“문이 잠겨있잖아. 어떡하지?”
메리가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봐. 이거 잠금장치가 너무 새것 같지 않아?”
렌코가 잠금장치를 밑에서 바라보더니 말했다. 렌코는 일어나 지문이 남지 않게 목장갑을 낀 손으로 잠금장치에 숫자 몇 자를 입력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어떻게 한 거야?”
메리가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거의 안 썼다면서, 먼지도 떨지 않을 정도면 잠금장치 비밀번호도 초기번호에서 바꿀 생각을 안 하지 않았을까?”
문을 기울여 누가 있는지 확인한 후 렌코가 말했다. 둘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야, 잠만! 옷 내려놓지 마! 여기에도 CCTV를 설치해놓았어.”
메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렌코가 물었다.
“저기 화면에 우리도 나와 있잖아. 옷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우리인지는 모르겠네.”
메리가 웃옷을 걸친 상태로 말했다. 렌코는 눈을 찡그린 채로 시선을 돌렸다. 머리에 걸친 옷의 교차한 솔기 사이로 희미하게 CCTV 화면이 보였다. 총장이 끄고 나가는 것을 까먹은 것 같았다. 아니면, 예전에 들른 행정실에서처럼 상시 켜져 있는 거던가.
“각도를 보니 저기에 설치되었나 보다.”
메리가 카메라를 향해 웃옷을 집어 던졌다. 웃옷이 카메라를 고정한 철골에 걸리면서 CCTV 화면 하나가 순식간에 검어졌다. 렌코가 웃옷을 푸는 사이 메리는 거울을 감싼 천을 걷어내렷다.
“뭐 보여?”
렌코가 물었다.
“어. 똑같이 총장실을 비추고 있기는 한데…. 이게 여기와 저기를 잇는 통로가 맞는 것 같아. 이 비현실감도 그렇고, 방 안이 훨씬 깨끗하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건너편에 우리 둘이 없어.”
렌코의 눈에 보이는 거울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바라보면 약간 머리가 아픈 것 말고는 완전히 평범했다. 렌코는 메리 같은 시야를 가지면 거울 쓰기도 참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봐봐.”
메리가 손을 거울에 가져다 대자 손은 거울을 통과했다.
“진짜네. 그러면 이제 누구를 어디서 찾을지만 알면 되겠네.”
“그런 셈이지. 근데 이 CCTV 화면, 대학교 내부에다 실험장까지 전부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 이거 보고 찾으면 되겠네. 가만, 이거 다시보기도 되나?”
렌코는 소파 위에 있는 리모컨을 집어 되감기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과거로 돌아갔다.
“이게 되네?”
“중요한 일 처리는 전부 건너편에서 하나 봐. 어차피 아무도 안 쓰면 비밀번호 걸 필요도 없기야 할 텐데, 그래도 이건 좀….”
“내가 나중에 총장 되면 비밀번호를 사중으로 걸어놓을 거야.”
렌코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렌코가 화면을 돌리며 이상한 점을 찾아보는 동안 메리는 주머니에서 무선 이어폰을 꺼내 렌코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알기로는 거울을 통해서도 전파가 통할 거야. CCTV를 계속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뭐 이상한 거 있으면 바로바로 알릴게.”
“알겠어.”
렌코는 좀 더 찾아보다가, 탄성을 질렀다.
“나 방금 이상한 거 찾았어.”
“뭐?”
“누가 어떤 가게에서 헐레벌떡 나와서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누구를 만나더니, 갑자기 사라졌어.”
“누구를 만난 거야? 이거 확대 할 수 있어?”
“TV라서 바로는 안 돼. 그냥 가까이 다가가서 보는 게 어떨까?”
“아, 그래.”
메리는 코앞까지 TV에 다가섰다.
“이전 총장이잖아? 예전에 학과 OT 때 사진으로 봤어.”
“그러니까 너네 총장은 순간이동을 할 줄 안다고. 그거 좀 걱정되는데. 언제든지 여기 들이닥칠 수 있단 거 아냐.”
“그러면 뭐, 여기 오려고 생각을 하기도 전에 끝내야지.”
메리가 말했다. 렌코는 메리를 쳐다보고는, 머리카락을 넘겨 이어폰을 낀 귀를 가리고, 마지막으로 불안한 눈빛으로 거울을 바라본 뒤, 거기로 뛰어들었다.
*
정자세로 누워 잠을 설치다, 잠에 빠져드는 걸 의식할 때, 귀가 터널을 통과할 때처럼 먹먹해지는 느낌. 거울을 통과하는 건 꼭 그런 느낌이 들었다. 거울 밖으로 몸이 빠져나가자마자 렌코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지만 누가 조금 전에 급히 나간 것 같았다. 책상 위에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은 컴퓨터 옆에 편지 몇 통이 펴져 있었다. 내부는 건너가기 전 총장실과 똑같았지만 먼지 한 올이 없었다. 방 안은 불이 꺼져 있었지만 바깥으로 햇살이 들어와서 어둡지 않았다. 예상과는 달리 지상이었다.
“잘 건너간 거 맞지? 방 안은 비어 있고?”
메리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타고 들려왔다. 조금 전에 떨어졌는데도 이렇게 목소리를 들으니 반가웠다.
“어. 조명이라 그런지 햇빛이 사방에서 들어오네. 잠깐 좀 둘러 볼게.”
렌코는 편지지들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시의회에서 이 실험을 감독하려고 감찰관을 오늘 오후에 보냈대. 이미 여기 와 있겠지? 근데 추가 예산 심의는 뭐지.”
“돈이 궁했나 봐.”
“하긴, 보통 큰 실험이 아니니까. 아, 그래 그 시공사 권리 넘어간 거 그거 때문에 그런 거 아냐? 정거장 주인이 결정이 나면 임대료를 내야 하니까. 근데 이 실험이 시의회에서 예산을 받는 줄은 몰랐네.”
렌코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고 넘어가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렌코가 나온 곳은 고풍스러운 건물이었다. 하늘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고, 거리는 한산했다. 렌코는 메리에게 주위 모습을 설명했다.
“어디인지 알겠어? 가게로 향하는 길 좀 알려줘.”
렌코는 가게로 가는 길을 들은 다음 재빠르게 거리로 나왔다. 움직이는 것은 극도로 신중하게 해야 했다. CCTV에 띄지 않으면서도 주민들이 눈치채지 않게 자연스러워야 했다. 시선을 보아하니 이 정도 옷차림이면 크게 눈에 띄지는 않는 듯했다. 바닥에 신문 한 부가 떨어진 것을 주워다 보니 아까 영상에서 전 총장과 함께 사라졌던 사람의 사진이 표지에 나와 있었다.
“우리가 찾던 사람이잖아.”
렌코가 말했다. 렌코는 메리에게 인상착의를 좀 더 상세하게 설명했다. 아쉽게도 잡혔다는 말 말고는 더 자세한 내용은 없었다. 렌코는 신문을 주머니에 욱여넣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근데 심리역학이랑 이거랑 어떤 관계가 있는 거야?”
“거야 현실이 어떻게 변하나 알아보기 적합한 환경에서 연구하려고 만든 거지.”
메리가 이어폰 너머로 말했다.
“전에 간단하게 설명해 준 적 있지? 패러다임 반대랑 비슷하다고. 패러다임 이론이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주류 견해인 패러다임이 있고, 그걸 설명 못 하는 현상이 더 많아지면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난다는 거잖아.”
가령 상대성이론이 고전역학을 대체한 것처럼. 렌코는 생각했다. 모퉁이를 지나자 사람들이 더 많이 오갔다. 어쩌면 차라리 이렇게 북적이는 거리가 몸을 숨기기 알맞을 수 있었다. 렌코는 몸이 부딪히지 않게 긴장하며 걸었다. 중간에 요괴가 보일 때는 몸이 움츠러들기는 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아무 장구 없이 날아다니는 사람들은 요괴가 틀림없었다.
“심리역학은 현실이 주류 견해를 반영해 변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학문인 거지. 백 년 전만 해도 없던 학과잖아. 가짜 뉴스가 극성이었을 때 모두가 그거에 속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나 봐. 그래서 이렇게 공간이동에 심령 현상에 별의별 현상이 생기고, 기존 과학이 다루는 범위가 아니니까 심리역학과가 만들어진 걸 테고. 또 현대보다 미신을 더 믿는 예전이 현실이 어떻게 변하나 보기 훨씬 낫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만든 거 아닐까.”
“여전히 이상해. 너네 실험하는 거 규모에 비해 학회에 거의 안 실리는 데다가 전 총장이라는 사람이 실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렌코가 작게 말했다.
“그러게. 나도 잘은 모르겠어. 실험이 이렇게 오염되었으면 내 리포트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하아. 아무튼, 가게 보여?”
“어. 들어가서 질문한다.”
렌코는 찻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게 주인이 렌코를 쳐다보았다. 렌코는 순간 흠칫했지만 침착하게 메뉴판을 보고는 말했다.
“냉차 한 잔 주세요.”
“13,000원.”
렌코는 생각보다 저렴하다고 생각하면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지폐를 꺼냈다. 가게 주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그 사람에 대해 아느냐고 물어볼까 고민하던 그때, 뒤에서 누가 말을 걸었다. 그 한 마디가 렌코를 얼어붙게 했다.
“밖에서 왔지?”
*
히메는 담요로 다리를 가리고 있었다. 새로 온 외지인은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뭔 일이야? 혹시 오전에 온 사람 찾는 거야?”
히메가 물었다. 새로운 외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한 번에 알아챘어요?”
외지인이 물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바가지를 쓰는 사람은 외부인들밖에 없거든. 아마 밖에 물가가 높아서 그런가 보지. 그래, 지금 날짜가 언제야?”
외지인은 시와 분까지 알려 주었다.
“벌써 20년이나 흐른 거였어? 어쩐지.”
“잠시만요. 그러면 혹시 이게 실험인 거를 알고 있던 거에요?”
“그래.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근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흘렀을 줄은 몰랐지. 시간을 알 방법이 없으니까 시간관념이 안 생겨서.”
“시계 없이 마을이 돌아가요?”
“원래 몇백 년 전만 해도 달력 없이 사계절 흘러가는 거에 맞춰서 농사도 짓고 다 했어. 여긴 정거장이니까 사계절이 없어서 그렇지.”
“나가고 싶지 않아요?”
“글쎄, 난 괜찮은데, 나가고 싶은 사람이 가끔 생기기는 하지. 실험에 성실히 참여를 한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계약을 해지하고 나갈 수 있어. 마을 주민부터 연구원에 요괴까지 모두 다.”
“그럼 왜 나가고 싶은 사람들은 나가지 않죠?”
외지인이 물었다.
“그게, 거기에 함정이 있어.”
히메가 말했다.
“실험에 성실히 참여하려면 이게 실험이라는 걸 잊어버려야 하거든.”
“그런데 그 다리는….”
외지인이 물었다. 히메는 다리를 보았다. 담요가 흘러서 지느러미가 보였다.
“뭐, 날 때부터 발이 이상하게 났어. 마을에서 쫓겨나기 전에는 다들 내 뭉툭한 다리를 보고 물고기 다리라고 하더라고. 그 생각이 굳어져서인지 어느 날 일어나 보니, 지느러미가 생겨 있었어. 반키가 날 뚫어지라 쳐다보기 전까지는 내가 헤엄치고 있다는 것도 몰랐지. 난 그냥 이대로 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 거기에 더해 날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지만.”
외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가 요괴라는 얘기는 안 했지?”
반키가 외지인에게 물었다.
“네.”
“높으신 분들이 자기편 아닌 사람은 전부 비행은 물론 마을 출입도 금했거든. 밝혀지면 우리야 좋지 않지.”
“요괴들은 다 날아다녀요?”
“아마?”
반키는 스카프를 만지작거렸다.
“아까 요전에 온 외지인은 뒷문으로 왔어. 이미 잡혀갔으니까 잡으러 온 건 아닐 테고, 구하러 온 거겠지. 잘 해봐.”
외지인은 고맙다고 말하더니 뒷문으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아, 맞다. 돈 받아야 했는데. 또 잊었어.”
반키가 뒤늦게 말했다.
“관둬. 그건 그렇고, 아까 쟤가 했던 말 기억나?”
“뭐?”
“요괴는 원래 다 날아다녔지…. 그래 생각해 보니 요괴들은 원래 다 날아다녔잖아.”
“그런데?”
“아냐, 그냥 생각이 나서.”
히메는 창밖을 보았다. 마을 건너편에 있는 숲이 희미하게 보일락 말락 했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아까 그 외지인 잡으려고 온 건가?”
“그러겠지? 이제야 알아챈 건가?”
“이제야 올 수 있었던 거겠지.”
반키가 말했다.
*
렌코는 돌이켜 보아도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게 뒷문으로 나와 주위를 샅샅이 뒤지다 해치를 발견하고 아래를 내려간 이후로는 기억이 꿈을 꿈 것처럼 정확하지 않았다. 렌코가 구출할 사람을 찾기 전에 구출할 사람이 렌코를 먼저 찾아냈다. 그 뒤로는 혼돈의 연속이었다. 모퉁이 하나를 돌자마자 그 사람을 가둔 사람들이 렌코를 알아보고는 소리쳤다. 렌코는 영문도 모른 채 다시 모퉁이 뒤로 숨으려 했지만, 그 사람들이 쏜 무언가에 심하게 맞아 뒤로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들은 렌코가 다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아니, 기다려 줄 수밖에 없었다. 병마용갱에서 튀어나온 듯한 말 두 마리가 달려와 가둔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발길질했다. 열린 문 너머로 그 사람이 말문을 잃은 채 서 있었다.
CCTV에서 찾은, 신문에서 나온, 바로 그 사람이었다. 진흙투성이 앞치마를 두르고 있어 마치 미대생 같아 보였다.
렌코는 길게 생각할 것 없이 쓰러진 사람들을 뛰어넘어, 미대생을 닮은 구출 대상의 팔을 붙잡고 뛰었다. 상대방도 렌코가 구하러 왔다는 걸 이해했는지 길게 말하지 않고 함께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멈추지 않고 계단을 뛰어오르자 밖은 이미 어두웠다.
“총장실을…. 찾아야 하는데.”
렌코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때 미대생을 닮은 사람이 짧게 탄식했다.
“아.”
전 총장이 하늘에 와 있었고, 시선은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렌코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더는 무엇을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째서 가만히 있는 거지? 렌코는 하늘을 다시 바라보았다. 하늘이 밝아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밤으로 설정된 가리개가 벗겨지고 있었다. 가리개가 접히며 지나간 빈자리에 원래 가려져 있던 것은 지구였다.
지구가 푸른빛으로 타올랐다. 모두가 할 말을 잃고 지구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거울 이변이라고 소리쳤다. 그 말을 따라 해 외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귀가 먹먹해졌다.
인어 하나가 지구를 가로질러 날아가, 지느러미로 전 총장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
“난 정말 모르겠어.”
렌코가 말했다. 둘은 대학교 내 편의점에 앉아 깡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메리가 그랬기 때문이다.
“두통은 두통으로 승부해야지.”
머리만 아프고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술값을 메리가 냈기 때문에 렌코는 입을 다물었다.
“케이키 씨는 어떻데?”
한잔 하며 렌코가 물었다. 케이키는 요전에 렌코가 무작정 데리고 나온 사람의 이름이었다.
“잘 모르겠네. 그 진흙 인형? 회로? 그거를 챙겨왔대. 그걸 특기로 다른 직장에 지원해 볼 거라고 하던데.”
케이키를 배웅하는 건 메리가 했다. 그때 렌코는 너무 지쳐서 완전히 뻗어 있었다.
“그래 너 보고 도와줘서 고맙다고 전해달라더라.”
“그 사람, 취직할 수 있겠지?”
“글쎄, 요즘은 이과도 취업이 잘 안 되어서. 아니 생각해보니 내 팔자가 더 대단하네. 지금 내 스펙으로 취직할 수 있는 곳은 고대 그리스 말고는 없을 거야.”
“심리역학과면 첩보기관 같은 데서 스카우트하지 않을까? 마음먹고 이용하면 꽤 무서워 보이던데, 그거. SNS로 여론을 완전히 조작하면 그대로 일어나는 거 아냐.”
“글쎄. 첩보기관이 그런 방식을 쓰고 있다면 이미 심리역학계 총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을까?”
“그러네. 너 취업은 글렀다 야.”
메리는 소주잔을 흔들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때 그 지구는 뭐고,”
“너 그때 거의 기절했다시피 해서 잘 기억을 못 하던 것 같던데, 아니, 야. 내가 한참을 전화기에 대고 네 이름을 불렀는데 네가 도통 대답을 안 하잖아.”
“아.”
가게에 들어선 이후로 메리의 목소리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답답해서 내가 직접 갔어. 저편 총장실 컴퓨터 모니터에 붙은 포스트잇에 떡 하니 우주 정거장 시스템 비밀번호가 적혀 있던데.”
“아 그런 게 있었어? 난 몰랐어.”
렌코가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런데 우리, 걸린 건 아니겠지?”
“걸렸으면 벌써 불려갔지.”
메리가 새 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넘어가서 오늘 자 CCTV 영상 파일도 다 지우고 왔으니까. 못 찾아, 절대.”
“뭐 그럼 좋긴 한데, 그거 너 논문 쓰는 데 필요하지 않아? 심리역학과는?”
“오늘 자 영상만 지웠으니까 괜찮겠지. 그리고, 어차피 내 논문은 끝났어.”
“또 무슨 일인데.”
“연구원들이 실험에 그렇게 간섭한 걸 알았는데, 연구 결과가 제대로 나오겠어? 지금까지 쓰던 논문도 완전히 오염된 결과였다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그냥 내 버려, 뭐라도 건질 게 있겠지. 가령 실험을 잘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거나. 근데, 전 총장은 왜 그렇게 실험에 집착했데?”
렌코가 물었다.
“내 생각에는, 신이 되는 기분이 좋아서 그랬던 것 같아.”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한 번 권력을 갖게 되면, 그걸 유지하려고 뭐든 하게 된다고 하던데.”
“글고 보니 결국 실험은 그대로 계속되겠네. 예산은 타고 돌아와서 너 패러 온 거 아냐.”
“어쩌겠어. 다음에 뭔가 할 수 있겠지.”
렌코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새 병을 땄다. 옆에서 도자기 거미가 탁자 위로 기어왔다. 렌코는 멍하게 거미를 쓰다듬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보름달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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