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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선] 나무지옥대보살앱에서 작성

ㅇㅇ(1.218)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10.11 21:12:01
조회 456 추천 9 댓글 6
														

나무지옥대보살​

안개는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는 부자를 포위하고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의 등에 업힌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산의 경사는 완만했으나 발은 자주 미끄러졌다. 소한의 냉랭함에 얼어붙은 안개가 지면에 스몄다. 계단삼아 경사에 박아넣은 통나무는 반질반질하게 얼어붙어 발목을 잡았다. 아버지의 몸이 휘청일때마다 힘없이 뻗어있는 오른다리가 시계추처럼 흔들렸다. 살들이 흉측하게 엉겨붙은 흉터가 언뜻언뜻 보였다.

"무서워.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애." 소년이 말했다.

"나오긴 뭐가 나오냐." 숨을 내쉬며 아버지가 말했다.

"요괴…… 그게 아니라면 산짐승이라도. 안개 속에서……"

"눈이라도 감고 있어라, 무서우면." 아버지는 소년의 말을 끊었다. 소년은 말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의 대응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눈꺼플 뒤의 암흑은 안개 너머에 있는 무언가만큼 무서울 터였다. 소년은 다시 입을 연다.

"마을에 요괴가 돌아다닌데. 아빠도 알아?" 거친 숨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소년은 계속 말한다.
" 아이가 혼자 있을 때 집 문을 두드린데. 목소리와 몸집을 자유자재로 바꿔서 속인데. 덜컥 믿고 문을 열어버리면 안된데. 옆집의 신스케도 그래서 실종된 거래. 만약 문을 열어버리면-"

잡아먹힌데.

발걸음이 멈췄다. 소년은 눈을 뜬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아버지의 목덜미가 먼저 보이고, 그 뒤로 사방을 감싼 안개가 있다. 흰 장막처럼 펼쳐진 풍경의 한 구석이 유난히 꾸물거리더니, 그 안에서 어떤 형체가 어렴풋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형체는 경사면 위에서 천천히 내려온다. 소년과 아버지를 향해 온다. 소년은 눈을 질끈 감고 어깨를 힘껏 오므려 몸을 아버지의 등에 밀착시킨다. 아버지가 자신을 내동댕이치고 갈 걸 예측하기라도 한 것마냥 필사적이다. 목소리가 들린다.

어서오세요.

안개같은 목소리, 아니 그보다는 좀 더 단단하게 응집되고 안정되어 있었다. 풍경과 닮은 듯 하지만 그보다는 온기가 있었다. 소년은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슬며시 눈을 떴다. 미처 눈이 닿지 않던 시야 구석에서 명련사, 라고 씌인 현판과 기둥문이 눈에 들어왔다. "도착했다." 아버지가 말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네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와 감사를 표했다."면목이 없습니다만, 오늘도 부탁드리겠습니다. 해가 떨어질때까지 나무를 베고 산등성이를 넘어 밤에 열리는 야시에라도 내놓지 않으면, 이 겨울에 푸생거리나마 구해 먹기도 벅차서……."
얼굴을 못 드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민망한 모양이었다. 호구지책을 이유로 보시도 없이 소년을 맡겨온 나날이 어언 한 달이 다 되가니, 상판을 올릴 염치가 닳아 없어질 만도 했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너는 호탕하게 웃으며 손사레를 쳤다. "그보다, 아내분은 차도가 있으신가요."

"모르겠습니다. 의원에서는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데, 폐 안에 재가 덜 빠졌는지 자꾸 쇳소리만 내고 눈을 뜨지를 못합니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숨만 연신 껄떡입니다. 집이 불타 얹혀사는 신세에 아내와 애가 저 모양이니, 처남네의 눈총이 말이 아닙니다." 기다렸다는 듯 소년의 아버지는 한탄을 쏟아 놓다가, 다시금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의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녀석이, 허드렛일도 못 시킬테고 밥만 축낼 텐데." 아버지의 말에 소년은 고개를 푹 내리깔았다. 겸손이 과해 자식에게까지 자신의 무능을 투영해 버리고마는 사람. 너는 거기에 부아가 치밀어, 정말 도움이 된다며 소년을 힘주어 칭찬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숱없는 머리를 멋쩍게 긁적이더니, 마지막까지 사과의 말을 남기고 절을 떠났다.


너의 부축을 받으며 소년은 본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갈하게 쌓인 장작더미를 지나쳐 계단을 오르면, 비질의 흔적이 선연한 포석 너머로 비사문천을 모신 본당이 보였다.
무채색일변도인 겨울의 색채가 이곳에서는 한 발짝 물러서 있었다. 본당 뒤로는 참가시나무니, 차나무니 하는 침엽수가 눈 아래 푸르고, 뜨락에는 동백나무가 빨간 양초같은 꽃망울을 피워내고 있었다. 장지문 안에서 비춰나오는 호박색 불빛이 켜켜히 쌓이는 안개를 틈틈히 쫓았고, 아득하게 들려오는 독경소리에 겨울의 적막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소년은 너와 같이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는 설법을 드리는 대웅전과 팔 하나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어 귀를 기울이면 대웅전에서의 소리가 다 들렸다. 등진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내세우며, 너는 수행을 뺄때마다 서재로 향하곤 했다. 이곳 한 켠에 있는 작은 다다미방에서 소년은 먼 동네의 신자들에게 전달할 불경을 필사했다. 화상을 입은 다리로 또래와 뛰어 놀수도, 허드렛일도 할 수 없어 홀로 눈싸움만 히던 소년을 눈여겨 본 네가 남들 몰래 부탁한 일이었다. 소년이 도움이 된다던 말은 영 예의치례는 아니었던 셈이었다. 하지만 업무를 남에게 떠넘기지 말라는 본존님의 꾸지람이 걸려서였는지, 너는 항상 소년에게 변명하듯 신세한탄을 늘어놓았다. 평소의 허드렛일에다 수행을 마치고, 대화재로 반이 시꺼멓게 타버린 마을로 향해서 막힌 우물 뚫기, 잔해 치우기에 다리 보수에 때때로 장례까지 치뤄주는 마당에 글까지 쓰라는 건 도를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고,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오늘도 둘은 다다미에 걸터 앉아 수다를 떨었다. 너는 수행의 엄격함, 주지스님이나 본존님의 고지식함, 대화재 이후로 거처를 잃어 절에 숨어들어온 신원불명의 부랑자들, 떠돌이들이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그저 듣고만 있던 소년도, 시간이 지나며 한 두마디 말을 붙이기 시작하더니, 최근에는 제법 앙증맞은 농까지 던졌다. 소년이 경전에서 읽은 반야니, 육바라밀이니 하며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하면, 너는 "욘석이, 아주 나를 파계승으로 만드는구나."하며 옆구리를 쿡 찌르는 것을 시작으로 오늘도 둘은 한참을 떠들었다.
"누나, 그거 알아요?" 소년은 문득 마을에 도는 요괴에 대해 말했다.
"모습을 바꿔 애들 꾀어낸다는 요괴 말이지? 나도 들었어. 비겁해도 그런 비겁한 놈이 또 없다. 틀림없이 3류도 안되는 잡귀 녀석이겠지. 무녀도, 우리도 증언을 바탕으로 탐색중이야. 곧 혼쭐을 내 줘야지." 너는 짐짓 힘주어 말했다. 그러고는 내가 그 얘기를 했었나, 하고 첫 요괴의 퇴치담을 또 꺼내는 것이었다. 요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너는 질리지도 않고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소년은 몇번 씩이나 들은 눈치였으나, 너를 배려해 처음듣는 듯한 눈치로 호응을 해 주었다.
미코시뉴도란 이름이었지. 마을 어귀에 나타나 몸짓을 불리며 슬금슬금 다가와서는, 달아나거나 뒤를 돌아보는 행인의 목을 꺾어 죽여버리는 요괴였지. 그런데, 그 녀석이 출몰하는 데가 아주 중요한 길이었어. 마을로 들어오는 장사꾼이며 옆동네의 색시며, 중요한 사람들은 다 거길 통해 마을로 들어왔거든.
우리 마을 사람들은 꾀를 냈어. 재비뽑기로 한 집을 뽑으면, 그 집 사람이 먼저 그 길로 나가 뉴도의 주의를 끌었어. 그 사람이 목이 꺾이기 전에, 재빨리 마을로 뛰어오는 식이었지.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 차례가 왔어. 대표로는 맏이인 내가 나왔지. 그 길로 나오니 처음엔 무사워서 벌벌떨었어.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요괴 얼굴도 못 보고 꼴까닥, 하는건 좀 억울하겠더라구. 그래서 도망가는 대신 뒤로 몸을 홱 돌렸어. 몸집을 커다랗게 불린 녀석이 보이더라구. 홧김에, "미코시뉴도, 네가 보인다!" 갑자기 그리 소리치니까 녀석도 놀래가지고, 그만 도망을 가 버리더라구. 그렇게 퇴치하게 된거야. 그러니까 내말은, 좀 더 어깨에 힘을 주고 당당해 지란거지. 특히나 그런 비겁한 녀석에게는 말이야. 가만히 듣던 소년은 말없이 웃었다.


나직히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에 둘은 입을 다물었다. 주지스님의 설법이 시작되었다. 엄숙한 분위기에 실수로 목소리를 크게 했다간 떠드는 소리가 본당에까지 들릴 터였다. 둘은 나름의 방법으로 침묵을 유지했다. 소년은 박박갈아 뜬 먹으로 글씨를 썼고, 너는 그 옆에 걸터앉아 꾸벅꾸벅 졸며 눈꺼플을 밀어내었다. 글씨를 쓰던 소년의 손은 종종 멈췄다. 비극, 책임, 그리고 요괴. 주지스님의 입에서 나온 몇가지의 단어들이 소년의 귓바퀴를 멤돌아 심상을 어지럽힌 듯 했다.

우리 모두는 부처의 씨앗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지스님은 설법은 이 말로 시작되었다. 스스로에게 떳떳하고자하는 극기심으로부터 자비와 사랑이 발생한다고, 주지스님은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겪었던 어떤 거대한 비극들은 우리의 선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떳떳하고자 하는 다짐은 고통으로 인하여 자신만이 떳떳한, 온전한 고통의 희생양이라는 착각으로 변질됩니다. 나와 당신의 고통에 차등을 부여함으로서, 마음에는 분별이 생기는 고로 차별이 일어납니다. 스스로를 동정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누군가가 이 비극에 온전한 책임을 가지고 있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책임은 대체로 약자들에게 전가됩니다. 주지스님은 거적을 대충 뒤집어쓴 부랑자들 하나하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흉측하고 더러워 보고싶지 않은 이들. 세상에서 자립하지 못하고 사회의 경계에 사는 이들 사이에서 요괴는 태어납니다." 온전한 피해자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보통의 사람들은 사회에서 혐오되는 것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뒤집어 씌웠다. 상관관계가 불투명한 논리에 권위를 부여하여 약자들의 처단을 정당화함으로써 사회는 안정을 얻었다. 역병이 돌면 문둥이들을 죽였다. 아이들이 아프면 마녀를 불태웠다. 비극의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적 제의로부터 요괴들은 태어났다. 촌락에서 나오는 온갖 터부시들을 품고 퇴치당하는 액막이 인형의 역할을 부여받고서.
"따라서 우리는 비탄을 멈춰야 합이다.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의 괴로움마저 품어야 합니다.타자를 요괴로 만드는 사고방식을 인지하고,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무연대비를 이룸이란 나와 너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니, 분노와 비탄에서 벗어나 어려운 이웃을 품는 것이야말로 윤회에서 벗어나는 첫 걸음인 것입니다……."
소년은 붓을 든 손을 천천히 내린다. 눈앞의 등잔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눈동자에 불꽃이 담겨 원망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이 일렁였다. "남 탓이라도 하는 사치라도 부려보고 싶어요, 저는."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답은 없었다. 너는 진즉 곯아떨어져 있었다. 곧 소년도 벽에 등을 기대고 선잠에 빠져들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소년은 눈을 뜬다. 처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서재 바닥을 쏘다니는 회색 쥐새끼 한 마리. 코를 벌름거리며 갈 길을 분주히 알아보는 모양새다. 소년은 쥐와 눈이 마주친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라도 한 듯, 쥐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는다.
"너도 나랑 같구나. 밥이나 축내고, 온갖 나쁜 일들의 근원인것이 말이야."
소년의 말을 알아듣기라고 한 듯 쥐가 소년을 향해 찍찍거리던 직후, 발 하나가 불쑥 시야로 난입해 쥐의 머리통을 그대로 으깼다.
소년은 비명을 질렀다.


"어이가 없네." 너는 한심하단 표정으로 서재 한 구석에 나동그라진 녀석과 죽은 쥐의 시체를 반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얘는 놀라서 그랬다지만, 넌 뭘 혼자 자빠져 있는 거야?"

"요 꼬맹이가 갑자기 비명을 꽥 지른 걸 나더러 어떻하란 말인가!" 옛 관복 같은 겉옷의 먼지를 털어내며 녀석은 항변했다. 작달만한 키에 제 키만한 관모를 늘어뜨리고 돌아다니는 어딘가 어설픈 행동거지에 반쯤 반어적인 의미로 도사님, 하고 불리곤 했다. 화재 직후, 명련사의 피해 복구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불렸다는데, 실력은 괜찮았지만 경박한 언행이며 툭하면 절안의 사람들과 싸워대는 통에 평판이 나빴다. 나때는 말일세, 마을의 온갖 해악들은 이런 암자에 숨어있는 법이었다네. 난리통에 숨어든 도적이며, 부랑자들, 세금이 무서워 도망친 화천민들을 이런 절에서 검거하곤 했다네. 그는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또한 설법에 있어서 녀석은 일종의 작은 재앙처럼 굴었다. 종종 불량한 태도로 설법을 듣다 뜬금없이 민감한 질문을 툭툭 던져 매를 불렀다. 일전에는 대뜸, 배고픔에 굶주리는 중생들을 위해 제자들로 하여금 제 고기를 바칠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희생은 강요되먄 의미가 없고, 극단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는 주지스님의 답변을 듣고도 녀석은 여전히 비아냥거렸다. "그래서 못 하겠다는 거 아닌가?" 그 모습이 아이들 사이에서도 좋게 보이지 않았는지, 꼬맹이들 사이에서도 종종 비웃음이 나오곤 하는 것이었다.

소년이 말했다. "쥐를 밟았어요. 저 도사님이. 대뜸 콱 하고,"
"그래, 잽싸게 밟아죽인게 뭐 대수인가? 쥐새끼란, 놔두면 놔둘수록 세를 불리는 법이니 쥐약을 치지 않았다면 본 즉시 해치워야 하는 법일세."

너는 삿대질을 하며 녀석에게 쏘아붙였다. "보이자마자 밟아 죽이는 너 같은 과격파가 흔한 게 아니란다. 애초에, 여기는 왜 어슬렁대는거야? 이교도의 가르침이 가득한 책장, 질색하는 거 아녔어?"

"자네가 왠 꼬맹이를 데리고 들어가는 걸 봤네. 연고도 없는 꼬맹이라 잡아먹을 심산이다 싶었다만."

"얘가 연고가 없긴 왜 없어? 오늘도 아버지가 데리고 왔구만."

"……그 만날 보이는데다 다리도 그 모양이니…… 어려운 상황에 내다버린 줄로만……." 네가 예상외로 강하게 나오자 녀석은 한껏 움츠려들었다. 자신만만한 태도치고 본성은 꽤나 소심한 편인 것이 그나마 녀석의 봐줄만한 점이었다.

"환장하겠네." 네가 질린다는 표정을 하고 한 마디 하려는 찰나, 탱화의 사천왕처럼 눈을 부라리는 본존님이 소란에 이끌려 찾아온 탓으로, 너는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었다. 반면 녀석은 머리를 쥐어박히고서야 침묵을 지켰다.

소년이 묽은 된장에 오래 묵어 큽큽한 조밥을 삼키는 사이, 밤은 어느 새 내려와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오늘 내로 소년을 데리러 올 기약이 없는 듯 했다. 소년은 비슷한 신세인 계집아이와 함께 툇마루로 나 있는 손님방으로 안내받았다. 계집애는 시큼한 냄새가 났다. 머리에 난 종기를 떠트려 피와 짓물이 범벅된 손가락을 연신 빨았다. 엄마가 올 것이라며 잠을 자지 않으려는 통에 소년은 진땀을 뺐다. 네가 본존님께 끌려간 복도 너머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다가 소년은 까무룩 잠들었다.


소년은 악몽을 꾸었다. 그날 밤이었다. 아니, 그날 밤과 몹시 닮은 밤이었다.

심연에서 시빨건 불꽃이 눈 앞으로 훅 끼쳤다. 열기도 매큼한 내음도 없었지만 그 빛깔만은 불지옥의 업화처럼 선명하여서, 이제까지 본 불꽃들은 이것의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소년은 등을 돌려 멀리 도망쳤다. 어둠속을 걷고 걷다, 무심코 소년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엄마는 어디갔어, 엄마는.

항상 집을 빠져나온 뒤에야 생각이 났다. 소년은 뒤돌아 달린다. 암흑에 보이지도 않는 발을 휘저으며 어둠을 필사적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소년은 이 달리기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 "정말, 네 엄마가 있는지 몰랐단 말이냐." 아버지는 물었다.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셔서, 폐가 시꺼멓더라고, 그렇다고 하드라." 그렇게 말하고 삼촌은 울었다. "군식구는 셋인데, 하나는 오늘 내일하고, 다른 하나는 병신이니, 이걸 어떻게 먹여 살리라고,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러는 법이여!" 숙모는 장짓문 너머에서 울부짖었다. 그래도 소년은 달린다.
있던 곳으로 되돌아 온 소년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다. 불꽃 속에서 나동그라져 있는 어머니가, 생생하게 보이는 듯 했다. 어머니는 연신 콜록거리며, 닫힌 문을 두드리고 있다. 연기를 들이키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쉬어 그르륵 거리는 쇳소리로 끊임없이 애원하고 있다.

문 좀 열어주세요.

소년은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깼다. 그러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걸쇠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덜그럭거렸다. 소년이 자는 문 앞에서, 무언가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소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새까만 실루엣이 장짓문 바깥에서 어른거렸다. 문은 계속 흔들렸다.
"여기 있는걸로 아는데, 이 문좀 열어주시겠어요? 잠깐이면 되요" 쇳소리가 섞인 여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누군가를 찾았다. 소년은 눈만 껌뻑였다. 힘이 들어가 빳빳이 굳어버린 손마디에 핏줄이 터질 듯 불거졌다. 소년이 정신을 차릴 수 있던 것은 계집애 때문이었다. 굳어버린 소년 앞으로, 어느새 다가온 계집애는 당돌한 걸음걸이로 잠겨있는 걸쇠에 손을 댄다. 소년은 빛처럼 튀어나가 계집애를 잡아 세웠다.
"무슨 짓이야!" 소년이 묻자 계집애는 멀뚱한 얼굴로 장짓문을 가르켰다.
"엄마 목소리, 저기에."
소년은 소리친다. "아냐! 네 엄마가 아냐…… 이 밤중에 올리가 없잖아!" 멍한 표정의 계집애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입을 크게 벌리고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문 열어! 당장!" 문 밖에서는 노성이 터져나왔다. 문을 부술 작정인 듯 장짓문이 크게 흔들리는 순간,

"죽어라! 이 요괴 새끼야아아!"

우렁한 기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왓다. 바닥을 박차오르는 소리가 이어지고, 곧이어 소년이 등을 뉘인 벽에 사람만한 크기의 구멍이 뚫렸다. 그곳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낮에 봤던 꼬맹이 도사였다. 소년과 계집애를 스쳐지나간 인영은 그대로 장짓문과 충돌, 장짓문 밖의 무언가와 함께 시야에서 사라졌다. 기침소리와 신음소리가 저 너머에서 흐릿하게 들렸다.
그리고 소년은 자신을 감싼 온기를 느꼈다. "괜찮아.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너의 목소리에 소년은 그제서야 안심한 듯 울음을 터트린다. 너는 엉엉 우는 두 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이제는 괜찮다고 달랬다.

울음을 그친 소년은 손님방을 떠나 네가 생활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다른 식구들은 마을 복구로 잠시 절을 떠나 있어, 너 외엔 아무도 없는 방이었다. 지챠 잠든 계집애를 뉘이고 이부자리를 피는 사이, 녀석이 질린 듯한 얼굴을 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 퇴치한 거야?"
"퇴치고 뭐고 할 필요가 없었네." 녀석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일단 오늘은 걱정 말게나. 난 점 쉬어야 겠네.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하지." 그렇게만 말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어때? 괜찮을 거라고 했지? 저래봐도 저 녀석, 섬씨 하나는 좋거든." 너는 싱긋 웃었다.

무언갈 골똘히 생각하는 듯 침묵을 지키던 소년은 대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
무슨 소리냐고 묻는 네게 소년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입을 움직이기도 전에 이미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소년은 말했다. 화재 이후, 뭉게진 다리민큼이나 자신을 얽매던 말들에 대해서. 그저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짊어져야 했던 책임에 대해서. 돌이킬 수 없을 비극의 한 순간으로 되돌아가, 못했던 것을 해내는 자신의 모습을 수백, 수천번 상상한 일에 대해서.
"요괴는 절 찾고 있어요." 그렇게 소년은 정리했다.
"요괴는 인간들이 책임을 돌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주지스님이 그러셨죠……. 그래서 그런 거에요. 제가 모든 걸 망치고, 모두를 힘들게 했다는 사실을 임정하지 못해서…… 책임도 지지 않고 뻔뻔하게 살아 있어서…… 그래서……."
소년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아의 형성이 막 시작 될 시기에 비극을 맞딱드린 아이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사고방식이었다. 모든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것. 상황을 파악할 만큼 냉정하지 못하고, 책임을 돌릴 정도로 모질지 못한 아이들은 차라리 모든 문제를 떠맡는 것을 택했다.
너는 그런 아이들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도 그랬어." 너는 그렇게 말했다.
"뉴도를 퇴치하고 돌아왔을 때, 부모님은 한편으로 안도했지만, 나머지 한편으로는…… 절망하셨어. 요괴가 퇴치되었어도, 흉년은 여전히 흉년이었고, 살림은 여전히 쪼들린 채였으니까. 그때 깨달았어. 사람들이 진정으로 무서워 한 건 요괴가 아니었구나. 비어가는 쌀독과, 밥 달라고 잉잉 울어대는 아이들이, 어른들에게는 훨씬 더 무서웠겠구나. 그래서 그날로 집을 나갔어. 이걸로 되었다고 생각했지. 그때는."
그치만, 너는 무리해서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세월이 지날수록, 후회하게 되더라고. 지금보다 더 나은 날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건 아냐. 다만, 나이가 들고 생각해보면 좀 더 나은 방법을 떠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점이 후회되더라. 혼자만의 목소리에 사로잡히지 않고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고, 직접 대면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있었을텐데. 그게 항상 아쉬워, 나는."

소년은 팔로 무릎을 감싼 채, 흉하게 짓무른 오른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손을 뻗어 화상자국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현재진행형인 네 앞에서 이미 지나가버린 일을 말한다는게 위로가 되지 않을 거 알아. 그렇지만, 이거 하나만은 장담할 수 있어. 살아있기만 한다면, 언젠가 나쁘지 않은 날들이 온다는 거. 그거 하난 장담할게."
소년은 침묵을 지켰다. 다만 손깍지를 풀고 다리를 편히 뻗어 잠을 청하려는 듯 조용히 눈을 감을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계집애의 어머니가 왔다. 그녀는 계집애를 업고 뒤뚱뒤뚱 내려갔다. 곧이어 아버지도 와, 소년은 절을 뒤로 했다.
그 후에도 소년은 종종 명련사에 맡겨졌다. 몇몇 또래의 아이들과 친해졌고, 그들과 함께 자고가는 날도 더러 있었다. 다만, 그 계집애만은 다시 보지 못했다. 실종되었다고, 어른들은 말했다. 잡아먹혔다고, 아이들은 믿었다.

"대체 어디에 숨은 거야, 이 사이비 음양사가!" 너는 씩씩대며 소리쳤다. 계집아이의 실종소식이 들려온 날의 저녘이었다. 제대로 퇴치 된 것인지 직접 확인을 해봤어야 했다고, 그 녀석의 말만 믿고 어물쩡 넘어간 것이 잘못이었다고 너는 한탄했다. 녀석이 평소 싸돌아다니던 장소를 찾아봤지만 번번이 허탕이었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주지가 저녁예불을 드리는 본당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나직하게 울려퍼질 독경소리가 들리지 않아 의아해하던 찰나, 반쯤 열린 문으로 덩그러니 서 있는 녀석을 발견했다.
너는 문을 밀어 열었다. 본당 안은 촛불을 교체하지 않은 듯 다소 어둡다.
"언니는 어디 갔어. 이 시각이면, 분명 여기 있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나와 같이 있었네. 부득이한 일이 있어서, 먼저 자리를 비웠네만." 녀석은 너를 향해 몸통을 돌렸다. 소매에 팔을 집어넣어 손이 보이지 않았다. 어깨까지는 바로 섰지만, 고개만이 비뚜름하게 기울어져 있다.
너는 녀석을 향해 걸어갔다. "퇴치했다고 말했잖아. 빌어먹을 자식아, 어떻게 된거야?!"

"내 말을 멋대로 왜곡하지 말아주겠나. 퇴치했다고 말한 기억은 없네.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만 말했었지."

"지금 나랑, 말장난 하자는 거야? 그때 퇴치를 못했으면 우리한테 정보공유라도 해야하는 거……"

"그 아이의 어머니였네." 너는 말을 삼켰다. 녀석은 계속 말했다.

"틀림없는 인간이었어. 요괴가 아니었단 말이네.
오밤중에 아이를 찾으니 수상쩍긴 했다만, 자네가 싸고드는 꼬맹이가 패닉이고, 이 밤중에 위험하기도 하니 오늘 밤은 여기서 묵고 아침에 데려가라 말을 해두었지."

"요괴가 아니었다면, 그럼 그 애는, 실종된 게 아니라, 아니……"

"고정관념이 문제였네. 비상식이 상식으로 여겨지는 땅에 있다보니, 나 역시 눈이 흐려져 있더군. 모습을 마음대로 바꾸는 요괴가 있다, 부모의 모습과 목소리를 완벽하게 흉내낸다. 아이를 꾀어내 잡아먹는다. 이 소문에서, 우리는 지엽적인 부분만 파고들었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요괴라던가, 기원이라던가……. 그러나 바깥세상의 관점으로 다가가보면, 가장 의심스러운 부분은 따로있네. 소문의 주체인 요괴의 존재, 그 자체  지. 괴력난신을 제외하고 보면 요괴의 정체는 분명해지지. 아이를 버리는 부모, 우리같은 옛날 사람들에게 있어서, 분명 환상향의 요괴만큼이나 친숙한 존재였지. 그렇지 않나?"
빈곤이 있다. 굶주리는 가족이 있다. 일어날 기운도 없는 부모와 앙상한 팔로 젖을 보채는 아이들이 있다. 부모는 결심을 한다. 어느 날 문 밖에서 부모는 아이를 불렀다. 집을 보고 있던 아이는 의심한다. 그러나 목소리가 틀림없이 부모님이기에 결국 문을 연다. 눈 앞에 있는 이들은 분명 자신의 부모님이다. 다행이다, 요괴 같은게 아니었구나. 아이는 부모를 따라 나선다. 부모는 외딴 산으로 향한다. 아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부모는 소문을 만든다. 요괴가 우리 아이를 잡아갔다고. 요괴는 자신의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인간이 발명하는 것이라고, 주지스님은 말했다. 민중이 겪는 수난과 부박함이야말로 요괴의 존재를 지탱해온 가장 오래된 기둥이었다.

분노인지 서글픔인지 모를 것이 네 눈가에서 꾸물대었다. "그렇게 자신을 속여봐야, 기다리는 건 끝없는 죄책감의 뿐일텐데."

"진실을 숨겼다는 것으로 그들을 비판할 수는 없네. 그들은 단지 짐승의 시간을 인간처럼 살기 위해 발버둥쳤을 따름이니.
무엇보다도 말일세, 이미 현세라는 지옥에서 허우적대는 이들에게, 지옥에 떨어진다는 경고는 잘 들리지 않는 법 아니겠는가." 녀석은 본당 한켠에 놓인 암흑 속에 잠긴 채로, 위로인지 조롱인지 모를 답변을 내놓았다.


푸하하하, 경박한 웃음소리가 무거운 침묵을 깼다. 어둠속에서 성큼성큼 걸어나온 녀석은 앙증맞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 말게나, 으스대는 목소리로 녀석은 말했다.
"이미 내가 주지와 얘기를 해서 대책을 세워 놓았네. 자네 주지는 뭐랄까, 정말로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더군. 더 이상 요괴의 이름으로 피해를 보는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진실을 폭로하고 버려질 위기의 아이들을 절에서 보살펴 주기로 했다네. 물론, 우리 역시 적극적으로 협력할 생각이네. 이야, 잘 된거 아닌가? 나쁜 어른들은 책임을 지고, 요괴들은 누명을 벗고, 요괴와 인간의 관계는 자네들이 바라는 것 처럼 한층 더 돈독해질걸세. 참 잘됐어.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 그렇네……." 갑작스럽게 바뀐 분위기에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그대로 너를 지나쳐 반쯤 열려 있는 문으로 향했다.

"잠…… 잠깐만." 눈가를 찡그린 채, 너는 녀석을 불러세웠다. "모든 일이 잘 되리라고 확신하는 근거가 있어? 대사묘는, 새로 들어올 아이들을 위한 식량 같은 것들을 구비한 상태냐는 말이야."

  "그런 걸 걱정할 필요는 없다네. 준비가 되어있던 그렇지 않던 상관이 없어. 도탄에 빠진 민중이 있는 한, 자네의 주지는 이 선택을 강행할테니 말일세. 불길이 몰아치던, 큰 파도가 휩쓸던간에, 결정에는 뱐화가 없을 걸세."

"너무 위험해! 식량사정도 그렇고, 아이가 많아지면 절에 숨어지내는 요괴들이 습격하는 걸 통제하기도 어려워져. 사고가 터지면, 오히려 관계가 악화될 가능성도……"

"그게 어쨌단 말인가?" 홱 돌아서서, 녀석은 너를 향해 다가왔다. 만면에 천진한 웃음을 띄고 너를 올려다본다. 검은 눈이 형형하게 빛난다. 일종의 희열이 그 안에서 번뜩였다.
"혹시 자네는 주지를 설득할 셈인가? 눈을 가리고, 도탄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들의 손을 밟고 지나가라고? 자신과 무리의 안녕만을 추구하자고?
정말 비겁하구만 자네는! 자신은 구원받았던 주제에, 주지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건져내어, 결국 자네가 탄 이 배를 가라앉힐 걸 두려워하는건가? 그래서 자네의 은인에게 불의하라고, 손해 앞에서 비겁해지라는 설법을 하려는 건가?
이거 참, 자네는 정말이지……!"

녀석을 말을 끝내지 못했다. 안면을 강타한 충격에 녀석의 몸이 문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무언가가 박살난 듯한 타격감이 일었다. 코를 부러뜨린 것 같았다. 핏방울이 복도에 점점이 튀었다.
"그만해!" 너는 말했다. 흙먼지가 가라앉는다. 녀석은 입을 나불대는 걸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는다.
"인간은 피로 씻기는 거울이지. 비극에는 책임을 쟈 줄 희생양이 필요하단 말일세. 자네에게 감정은 없네. 다만, 요괴도 인간도 품으려드는 욕심쟁이들이, 현상황에선 가장 불태우기 적당한 표적이었을 뿐일세."
이만 가봐야겠군. 신음소리와 함께 녀석은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아참, 문득 생각난 듯 녀석이 말했다.
"자네가 싸고 들던 그 꼬맹이, 그 녀석의 아버지가 요새 요괴의 산 기슭에서 어슬렁거린다더군. 그 녀석도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일세. 요괴를 만나기까지 말이야."
자갈을 밟는 소리가 점차 잦아든다. 지면으로부터 모락모락 피어오른 안개에 가려 사위는 어둡다. 본당으로부터 멀어져가는 녀석은 시야 가장자리에서 꿈틀대는 암흑으로 변했다. 본당의 촛불은 사력을 다해 주위를 밝혔으나 불상은 여전히 암흑속에 서 있다. 전능하신 비사문천이시어, 당신이 보이지 않는다.

너는 쪼그려 울음을 참는 습관이 있다. 오지 않을 부모님을 기다리며 길가에서도, 집을 떠나기 직전 대문 앞에서도, 너는 지금처럼 무릎을 감싸고 흐느낌이 들릴까 숨을 참았다.
비극과 고통의 방정식. 사람들의 선택은 언제나 이 위에서 이루어졌다. 하나의 비극이 지닌 고통의 총량은 늘이거나 줄일 수 없는 상수이기에, 고통을 분배하는 것만이 가능했다. 그 수식에 인간은 변수로서 존재했다.
주지스님은 명련사라는 변수를 중심으로 방정식을 풀었다. 아이를 버리는 대신, 명련사에 의지하게 된다면 마을 사람들의 고통은 줄어든다. 그러나 절이 부담하는 고통은 가중된다. 식량은 부족해질 것이며, 절에 의탁한 요괴들과 그들의 먹잇감인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고들은 통제될 수 없을 것이다. 비극을 계기로 인간과 요괴는 다시 분열될 것이다. 경계에 있는 우리는 어디에서도 지지받지 못하고 무너질 터였다. 천 년 전과 같이.
다른 한편으로, 주지를 말려 명련사가 더 이상의 책임을 지지 않게 된다면, 고통은 그대로 마을에 있는 약자들, 가난한 집의 아이들과, 진실을 알게된 소년을 향해 흘러갈 터였다. 아이들은 버려질 것이고, 곧 죽을 것이다. 소년은 문을 두드리는 것이 요괴가 아닌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견딜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다. 사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괴로움만이 뚜렷하다. 오온과 십이처와 십팔계가 그것으로 신음한다.
하지만 너는 그 와중에도 뒤를 볼아 볼 수 있었다. 지옥의 업화와 같은 괴로움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주위를 응시하여 같이 불타고 있는 타인을 볼 수 있었다. 그걸 두고만 볼 수 없어, 가장 커다란 고난을 자신에게 흘려보냈다. 집을 떠남으로서 식구들이 겪어야 할 고통은 경감되었지만, 줄어든 만큼의 고통은 고난이 되어 네게 찾아왔다.
너는 그 이유를 설명해내지 못했다. 마주친 사람들, 마주할 인연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다가 불현듯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충만함이 섬광과 같이 스쳤다고만 이야기 할 뿐이었다.
확실한 것은 그 다음 네가 일어섰다는 사실이다. 요괴의 그림자가 드리운 길에서, 집에서 나오고 별빛 하나 없어 막막한 거리에서, 발걸음을 내딛었다는 것이었다. "한 번 해보자." 이번에도 너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석의 말대로, 인간의 방식으로 지켜내지 못한다면,
"요괴의 방식으로라도 구해내야지."
밤은 여전히 어둡고 깊었다. 그러나 지나가고 있었다.

소년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너를 보자 소년은 놀란 듯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그보다…… 괜찮아요? 얼굴이 완전 쾡해서……"
"요즘 워낙 바빠서. 잘 지내지?"
얼마간 안부를 주고받다 소년은 문득, 마을에서 새로 요괴의 소문을 꺼낸다.
"그보다 들으셨어요? 아이들을 잡아간다는 요괴…… 이제는 어른들한테도 습격을 감행하는 모양이에요.
가족이나 지인과 똑 닮은 누군가가 문 밖에서 노크를 하는데, 정작 문을 열어보면 아무도 없고, 그래서 닫으려고 하면 갑자기 집의 식기들이 부서지거나 뭔가 뛰어다니는 소리가 집 안에서 들린다거나 한데요. 아무래도 더 강해진 것 같아요."
그래 그렇구나, 너는 말한다. "사실 내가 온 것도 그것 때문이야. 퇴치법을 알려주려고."
"나름대로 조사를 해 봤는데, 아무래도 그 녀석은 아직 너를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소년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너는 부드럽게 웃으며 소년을 진정시킨다.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퇴치법은 간단해. 일단 요괴가 문을 열지 못하게 아무도 없을땐 문을 잠궈. 요괴가 나오면 눈을 감고, 이 염주를 쥔 다음, 요괴가 흉내낸 사람이 너를 잡아먹지 않을 이유를 말해 줘. 너의 경우는 아마 아버지일 거야. 누워있는 어머니를 흉내내면 금방 들킬 거니까. 요괴란 것들은 말이야, 논리에 약하거든. 그러니까 요괴에게 가르쳐주는거야. 네가 얼마나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이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소년에게 일깨워 준다. 삼촌의 집에서 눈치보지 않도록, 한끼 식사나마 제대로 하도록, 가파른 산길을 불평하나 없이 오르내리던 이가 누구였는지.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며, 그것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증명되는지를.
넌 할 수 있어. 너는 소년의 손을 맞잡았다. 눈을 피하던 소년이 고개를 들고 결심에 찬 눈으로 너를 마주 볼 때까지 너는 소년을 떠나지 않았다.


요괴가 소년을 찾아왔다. 땅거미가 질 즈음이었다. 너는 거리 한 켠에서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잠긴 문을 두드리며 소리치는 요괴에게 소년은 마치 마음에 있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소년은 그 날 이후 잃어버린 것과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것들에 대해 말했다. 다시는 달리지 못하게 된 것, 어머니가 영원히 떠날 수도 있다는 것, 아버지가 자신을 버릴 것 같은 공포를 견디는 것이 자신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에 대하여.
요괴는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이 있었다. 소년은 그것도 이야기했다. 어느 새벽녘, 잠든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는 흙내음이 나는 손의 온기, 지독한 오한을 겼던 소년을 밤새 지켜주었던 숨소리,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둠이 무섭다던 소년을 위해 불러주던 노랫소리. 희망으로 남아 소년을 지탱해주던 분명한 감각들.
요괴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흘렸다.

소년은 아버지가 좋았다. 그렇기에 발목만 잡던 자신이 견딜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살고 싶었다. 예전처럼. 겨울이 가고 필 꽃구경을 가고 싶다고, 소년은 말했다. 달에게 소원을 빌듯, 엄마와 아빠와 함께 가고 싶다고.
소년의 말이 끝나자 요괴는 사라졌다. 그 자리에 있던 중년의 남자만이, 왔던 길로 돌아갈 따름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돌아가려는데, 등 뒤로부터 기척이 느꺄졌다. 눈에 익은 불제봉이 뺨을 스치며, 목 뒤에서 쑥 나왔다.
"퇴치당하기 전에, 할 말 있냐?" 익숙한 목소리가, 네게 물었다. 너는 대답없이 웃었다.

소년은 왼발과 지팡이에 번갈아 힘을 주며 걸었다. 다른 사람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 여기까지 나온건 처음이었다.
그날로부터 1년이 지났으니, 하늘에 있는 엄마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에서라도 내려가 보고 싶어요. 걱정스러워하는 주지에게, 소년은 선언했다. 말투가 그 아이를 닮아가네요, 무심코 주지스님은 말을 꺼내고, 잠시 후 앗 하며 손을 입에 갖다대었다. "실언을 했네요. 무의식중에 그만……."
"괜찮아요! 그 사건엔 신경쓰지 않을 생각이에요 저는." 소년은 웃으며 말했다.

무녀에게 네가 퇴치당하고 연행되는 와중 구지옥으로 도주한 이후, 연속 유괴사건의 범인은 너로 확정된 듯 했다.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요괴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았고, 무엇보다 사건 당시 여기저기서 너를 봤다는 제보가 쏟아져 나왔다. 평소의 파계적인 행각을 벌였다는 평판까지 겹쳐져, 졸지에 너는 아이들을 꾀어 잡아먹는 비열한 요괴로 남겨진 것이었다.

의문은 존재했다. 그 핵심은 특정 시점을 기점으로 활동방식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었다. 미코시뉴도는 소리를 흉내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돌던 소문에는 형태뿐만 아니라 소리까지 흉내내 꾀어낸다는 내용이 있었다. 또한 요란하지만 피해는 없던 후기의 활동에만 목격소문이 집중되어 있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주요 용의자가 구지옥으로 도주한 바람에 사정청취가 불가능했던 관계로, 사건은 새 국면을 맞이하는 일 없이 그대로 종결되었다.

다행히도, 명련사는 파장에서 무사했다. 대화재의 복구작업을 진두지휘한 것이 누구였는지는 명백했고, 너의 행동이 명련사의 묵인 아래 이뤄졌다는 증걷ㅎ 없었다. 무엇보다도, 너로 인한 피해자들, 특히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어떠한 원망도 없이 철저한 침묵을 지켰다는 점이, 절을 적대하는 세력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도록 하는 명분을 제공했다.

그 아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하산하려는 소년을 향해 주지스님이 물었다. 소년은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다고. 마을 사람들이나 무녀님의 말이 사실일지언정, 최소한 나에게는 그와 배치되는 사실이 존재했다고. 처음에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고도 노력해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의 애매하고 머호한 상황 자체가 진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이런걸 공, 이라고 하셨죠?하며 소년이 장난스레 물어보니, 주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글쎄요, 하고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싱그러운 여름의 정취에 흠뻑 젖은 채 내려오는 소년의 눈에 무언가 보였다. 소년의 허리까지오는 높이의 지장보살이 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소년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잠시 멈춰서 나무 지옥대보살, 하고 염불을 외웠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뒤로할 수 없어, 스스로 지옥에 들어가겠다는 선사들이 읊곤 했던 말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고마운 마음에 조금 힘을 써서 바람을 일으켰다. 갑작스레 불어오는 선풍에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희미해진 절의 풍경을 응시하던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미코시뉴도, 네가 보인다."

그렇구나. 너도 들었니. 이제는 내가 보인단다. 안개 속에서, 제 아비의 등만 바라보던 녀석이 글쎄, 이제는 풍경을 볼 줄 아는구나. 그렇다면, 이번에는 네가 답할 차례가 아니냐. 자, 내가 전해줄테니, 어서.

조심히 내려가렴.
산들바람으로부터,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을, 소년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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