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기이한 나라다. 어떤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사람들이 너무 친절하고, 질서도 잘 지키고 선진국이어서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주 비열하고 겉과 속이 다르고 미개하다고 하고.. 대체 뭐가 맞는걸까...
일본에 대해서 썰을 좀 풀어본다. (뭐 내 말이 교과서처럼 다 맞다는 건 아니니 감안해서 읽어라.)
일본인과 일본사회를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몇가지 단어를 꼽자면 바로 ‘공포’와 ‘안심’이라는 단어일 것 같다. 먼저 공포부터 설명해 보자면.. 지진에 대한 공포냐구? 물론 지진에 대한 공포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한 것이 바로 일상속의 공포다. 자신이 속한 집단 (학교, 회사, 사회, 국가등)의 눈 밖에 났을 때 가해지는 엄청난 단죄가 실제로 존재하지만,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더 무서운 공포가 된다.
흔히들 이지메라고 표현하는 일본사회의 보이지 않는 룰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왕따나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 집단 따돌림과 거의 비슷하게 보이지만, 본질은 매우 다르다. 이것은 매우 뿌리가 깊고, 사회 전반에 걸쳐 존재하는 관습과도 같은 거다. 일본인들의 결벽증에 가까운 질서의식은 긍정적인 면도 많지만, 그 근원은 성숙한 시민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다는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이지메를 당할수도 있다.. 라는 원초적인 공포에서 비롯되는 거다.
그렇다면 ‘안심’은 뭔가? 버스를 타건, 지하철을 타건 학교에서 공부를 하건, 회사에서 일을 하건.. 매 순간순간마다 지켜야 하는 룰이 있고 이 룰을 잘 지켜서 자신이 눈 밖에 나지않으면 ‘안심’을 하게 되는거다. 또 하나...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집단의 눈 밖에 나서 이른바 이지메를 당하게되면 “휴~~ 쟤가 있어서 나는 다행이네..”라는 의미의 안심이 하나 더 있다.
일본의 뉴스에서는 범죄자들을 다룰 때 얼굴, 이름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없는것까지 다 꺼집어내서 완벽하게 털어버린다. 인권? 얘는 룰을 어겼기 때문에 인권같은건 없는거고 완전한 사회적 매장을 시켜버려야 방송국, 시청자 모두가 안심이 되는거다. 이제는 일본도 많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젊은 세대들은 이런 부분에서 어느정도는 자유롭게 살고 있지만, (기존의 관습에 저항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났다는게 아니라, 히키코모리로 대변되는 자폐성향이 강한 젊은이들이 증가하는 추세이고 이런 사람들은 집단과는 별 관계없이 살아간다는 이야기.) 어쨌든 이런 뿌리깊은 관습이 갑자기 없어지기는 어렵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하루하루를 공포와 안심의 이중 콤보 속에서 살고 있다.
도전 골든벨이라는 프로를 보면 정답을 맞춘 학생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떨어져 나간다. 일본사회는 이런 골든벨 프로의 확장판이라고 보면 된다. 매순간마다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생기기 때문에 자신은 살아남으려 발버둥을 치게되고, 남은 사람들은 더욱 강한 응집력을 발휘하여 뭉치게 되는 거다.
이런 공포와 안심이 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학교, 회사, 작은단위의 마을, 시, 도, 국가의 개념으로 확장 및 진화 되는데, 외국인들이 볼 때에는 일본인들은 기이할 정도로 룰을 잘 지키는 사람들, 그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집단주의를 지닌 민족으로 보이는 거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다수는 바로 정의正義요, 선善이며 강자이고, 소수는 불의이며 악이며 약자인 것이다. 그 극명한 예가 바로 일본인들이 대놓고 이지메를 해도 되는 (?) 대상인 부라쿠민, 재일조선인, (자이니찌), 외국인등이다. 부라쿠민이란 部落民 과거 신분제도가 있던시절 최하위 계층의 불가촉천민을 뜻하는데, 부라쿠민 차별 문제는 금기시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일본사회에 망령처럼 남아있으며,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역시 이러한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들의 잘잘못은 사실 중요치않다. (잘못을 저지르면 더 좋고) 집단이 안심을 느끼기 위해서는 외부의 적이 필요하고, 살아남은 자들, 살아남아야만 하는 자들은 동네북처럼 두들겨팰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부라쿠민이나 재일조선인들은 그 대상으로 당첨이 된 것 뿐이다. (물론 재일교포들은 완전무결한데 일본놈들이 무조건 나빠서 그렇다는 극단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외국인은 어떨까? 외국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전에 먼저 外人 외인 (가이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아는 것이 좋다. 가이진은 외국인을 칭하는 단어로서 미묘하게 배타주의, 차별주의가 내포된 말이다. 정식으로 외국인을 뜻하는 단어는 外国人(가이코쿠진)이며, 가이진과는 뉘앙스가 다른 말이다. 가이코쿠진은 공식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쓸 수 있지만, 가이진은 비공식적 용어이기 때문에 조심해서 써야 되는 단어라 보면 된다.
그렇다면 가이진과 가이코쿠진은 어떻게 구별할까? 모든 상황에 다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이렇다. 바다건너에 사는 모든 외국인들은 가이코쿠진이다. 왜냐하면 일본인들 자신과는 마주할일도 별로 없고 쉽게 말해서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일본에 관광을 온 목에 카메라 매고, 손에 지도들고, 큰 배낭 맨 외국인들도 가이코쿠진이다. 어차피 몇일 관광 왔다가 돌아갈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들과는 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에 있기는해도 일본말을 아예 못하거나 거의 못하는... 그야말로 잠깐 왔다가는 여행이나 출장 뜨네기들은 그냥 가이코쿠진이라 보면 된다. (영어를 쓰게되면 완전무결한 가이코쿠진이 될 수 있으며 영어를 쓰는 서양인이라면 뭐 두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가이진이다. 일본말을 하기는 하는데 뭔가 어설프고 억양도 이상하고 누가봐도 외국인같으며, 이거 뭔가 일본에 여행을 온게 아니라 일본에서 사는 놈 같다.. 싶으면 가이진이다. 돈 많은 외국의 왕자가 아니라 일본에 생계형으로 돈 벌러 온 놈 같고 행색도 추레하고 싸구려 아파트 월세방에서 살면 가이진이다. (일본에서 아파트라는 용어는 한국에서의 아파트와 달라서 싸구려 빌라 느낌이 강함.) 서양인이 아니라 한국놈, 중국놈 같으면 100% 가이진 당첨이다.
인터넷에 보면 일본 사람들 정말 친절하고 좋다는 의견과, 일본놈들 정말 재수없다는 의견이 항상 대립을 하는데 그 근원이 바로 가이코쿠진과 가이진의 차이에 있다.
흔히들 일본에 여행가서 일본인들의 놀라운 친절함에 충격받아 일뽕 한사발 하는 사람들의 경우 일본에서 가이코쿠진 대접을 받고 온 것이다. (대표적인 예 : 윤서인등..) 일본에 가서 지도 보여주면서 손짓발짓으로 길을 물어봤더니 엄청나게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막 따라오면서 가르쳐주고 아름다운 일본인들의 친절뽕을 충만하게 받았다면 일백푸로 가이코쿠진에 당첨이 된 것이다.
일본에서 살다 왔는데 아주 재수없는 놈들이라며 욕하는 사람들은 불가촉천민이나 다름없는 가이진뽕을 수백방 맞고 온 것이다. 일본인들은 무의식적으로 가이코쿠진과 가이진을 구별하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한눈에 딱 봐도 저 사람이 한국에 관광을 온 외국인인지, 아니면 외국인 노동자인지 금방 구별하듯이..) 가이진 생활에 익숙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가이진의 분위기를 뿜어내기 마련이며, 일본인들도 자동적으로 가이진에 걸맞는 대접을 해주는 경우가 많다.)
너무 극단적으로 일반화한 점이 없지않아 있기 때문에 불쾌한 사람들이 있다면 사과한다. (일본에서 가이진으로 살아도 친절한 사람 정말 많고, 이번의 시장 스시 사건처럼 여행가서 재수없는 경험 하는 사람들도 있고 사실 다 케이스바이 케이스이기는 한데 대체적으로는 그렇다는 거다.)
일본 여행 경험이 있고, 일본에 호감을 가지는 사람들은 본인 스스로도 가이코쿠진이라 느끼고, 일본 사람들도 가이코쿠진이라 보기 때문에 어찌보면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듯 일본을 경험하고 느끼는 면이 없지않아 있다. 즉 가이코쿠진과 가이진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느껴보지도 못한채 일본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가이코쿠진이 가이진이 되는순간 사방에서 어택해오는 차별과 푸대접은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올수도 있다.
일본에 수십번 여행을 갔지만, 그런적 없는데??? 뭐 약간 불친절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친절한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편견일 뿐이다... 라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일본에 여행을 가는것과 일본에서 거주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일본에 9박 10일짜리 여행을 36.5번 가면 일본에서의 체류기간이 365일정도 되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잠깐 체류하며 머무는 관광객으로서의 경험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거주를 하는 가이진들이 겪는 경험은 거의 하지 못한채 완벽한 외국인으로서의 경험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 365일동안 일을 한 외노자와, 한국에서 365일어치 만큼의 체류경험을 지닌 외국인관광객이 과연 같은 경험을 하고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이것은 한국과 칠레만큼의 거리차가 있는 전혀 다른 시공간 차원의 이야기일 뿐이다. 일본에서의 여행 경험을 에세이, 만화등등으로 출판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예를들어 일본 풍경 사진 한 장 찍어놓고 그 밑에 써놓은 일기같은 글들) 일본에서 가이진 역할을 수행해 본 사람들이 볼때에는 이런 것들이 거의 판타지 소설 내지는 이쁘게 잘 포장된 허구로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가이진, 가이코쿠진의 차이에 있는 것이다.
가이코쿠진이 택시를 타면 아주 친절하게 응대를 하지만, 가이진이 택시를 타면 온갖 짜증과 함께 기본요금밖에 안되는 거리를 간다며 쿠사리를 받을수도 있다. (택시에서 이런일은 좀 드물겠지만서도..) 가이코쿠진이 식당에 가서 음식을 시키면 종업원이 친절하게 먹는 방식까지 가르쳐주지만 가이진이 식당에 가면 인사를 해도 받지도 않고 누가봐도 명백한 손님에 대한 이지메까지 들어오기도 한다. 가이진이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르면 미용사가 한국 사람에 대한 험담을 대놓고 하면서 이발이 다 끝나도 일부러 얼굴에 묻은 머리를 털어주지 않을수도 있다. 일뽕 과하게 맞은 사람들은 우리 니혼진짱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일본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일본을 무턱대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부분들은 실제로 일본에 존재하는 관습 비스무리한 현상이며 일본인들 스스로도 인정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번의 시장 스시 사건의 경우, 이것이 과연 가이진 운운할 문제인지, 단순히 혐한과 관련된 사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영어를 쓰는 서양인 손님이었다면 그런 응대는 없었을것이 거의 틀림없다. 결국 두가지 원인이 믹스된 복합적인 문제라는 이야기다.
가이진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가이진의 본질은 부라쿠민, 재일조선인과 같이 자신들과 함께 살고는 있지만 자신들의 집단, 체제에 들어와서는 안되는 영원한 이방인을 뜻한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여전히 부라쿠민들의 출신이 문제가 되어 결혼이나 취업에 불이익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천민(?)들을 차별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어쩔수 없지 않는가... 라는 것이 일본인들의 진심 (혼네)다. 그것은 일종의 룰이기 때문에 일개 개인이 바꿀수가 없는 것이며, 사회적으로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금기시 되어도 개개인들의 마음속에서는 룰을 지켜야 한다는 반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같은 생각을 하는 개개인들의 머리수가 많아지면 책임소재가 모호해진다. 아주 큰 운동장에 일본인 5만명이 들어있는데, 그 중의 한명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치자.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여기서 누가 책임자냐?!! 누가 잘못한거냐!!”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도 주동자와 책임자를 찾기가 힘들어진다. 반면에 아주 좁은 방안에 몇 명만 들어있으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금방 탄로가 나고 추궁을 통해 책임소재가 밝혀지기 마련이다. 일본인들은 본능적으로 방 안에 있는 것보다는 큰 운동장에 몰려 있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실 그저 본능적으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이걸 두고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자기들 사는곳의 구조 자체가 그렇다는데...
문제는 큰 운동장 안에서 어떠한 룰이 생기게되면 모든 일본인들이 아무런 의문없이 그 룰을 지키기위해 목숨을 건다는거다. 그런데 큰 운동장 외부에 있는 외국인이 그 룰이 잘못된 것 아니냐고 의문을 표하면, 일본인들은 혼란에 빠지게된다. 자신들은 룰이 있기 때문에 그 룰을 지켰을뿐,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쉽게 인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이런 올가미에서 빠져나올 논리를 전방위적으로 구축해놓는다.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저지른 만행들은 바로 당시의 룰에 의해서 일본인들이 행한 선善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까는 것은 바로 죄악이 되어버린다. 당시에는 그런 룰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따랐을 뿐이며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별개의 문제라는 거다. 여기에서 더 나가게되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미 지나간 일이니 이제 덮어두고 논의를 그만하자... 는 논리가 나오게 된다. 여기에서 특이점이 오게되면 아예 그것들을 미화화는 단계로까지 진화하게 된다. 일본인들 스스로가 2차 세계대전의 피해자라고 (?) 주장하는 몇몇 영화, 드라마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골치 아프니 그냥 미화해버리자.. 라는 암묵적인 합의일 뿐이다.
일본의 총리가 수차례 한국과 중국에 사죄를 해도, 의원들의 망언이 되풀이되는것은, “해외에서 보는눈도 있고, 외교적인 문제등으로 겉으로는 사죄의 액션을 취했지만, 사실은 아니거든???” 이라는 그들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는 한 상징이다.
일본이 아시아 각국에 저지른 만행은 누구의 책임인가? 아무도 모른다. 군부? 군부는 천황에 충성을 했을 뿐이다. 천황? 천황은 정치적인 일은 하지 않는 완전 무결한 자연인일 뿐이다. 그렇다면 일본 국민들의 잘못인가? 근데 그것도 아니다. 일본 국민들은 그냥 당시의 룰을 따랐을 뿐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임회피의 연결고리는 일본인들의 집단주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세계에서 가장 착한 사람들만 모여있을 것 같은 일본인들이 때로는 극악무도한 이중성을 보여주는데에는 큰 운동장에 모여서 모두가 똑같이 행동하면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집단의식에 그 원인이 있다. 룰이 옳건 그르건 간에, 모두가 룰을 지키면 법률, 도덕도 모두 초월할 수 있는 면죄부가 주어지고, 국가가 국민에게, 국민이 국가에게, 가족끼리, 친구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면죄부를 주며 모두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이러한 이중성은 개개인간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커다란 문제, 외교적인 문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심화되고 있는 혐한 분위기는 이러한 현상의 라스트 클라이막스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보다 경제력이 약한 나라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지리적 거리가 멀고 생김새가 다른 xxxxx 등등의 나라들은 아웃오브안중인 경우가 많고, 그나마 지리적으로 가깝고 역사적 관계가 깊은 중국, 한국등이 그나마 인오브안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점은 한국, 중국도 마찬가지라 본다.)
그런데 왜 하필 혐중이 아니라 혐한인가? 본래 일본인들은 중국역시 한국 못지않게 싫어했었는데, 중국은 이제 너무 강하고 인구수도 많고 GDP도 추월당했기 때문에 (경제의 질적 수준은 별개의 이야기지만) 뭔가 이지메의 대상으로는 적합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이지메라는 것은 강자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약간 애매한 것이 한국의 경우 과거에는 일본에 비해 명백한 약자가인것이 분명했는데, 언젠가부터 묘한 관계설정이 되고있는 것이 불편한 심기의 뇌관을 건드린 것이다.
한국은 일본보다 인구도 적고 국력도 약하고 경제력도 약하고 뭐든지 아래였는데, 언젠가부터 슬금슬금 기어오르는 것 같고, 경제력 격차도 좁혀지고, 가끔씩 보면 스포츠에서도 자꾸 한국에 지는 것 같고, 10년 가까이 한류운운하는 기사가 매스컴에 오르내리는등... 꼴보기 싫은 점이 수십만가지는 되기 때문에 이지메의 명분이 충분하다못해 거의 폭발일보직전까지 간 것이다. 여기에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방문등의 도발이 다이나마이트에 불을 붙였고, 그 폭발의 결과는 2016년 현재 일본의 혐한 유행 그대로다.
2011년의 동일본대지진과 원전사고로 인해서 일본과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는 거의 만신창이가 되었고, 일본인들의 정신을 좀 먹고 있는 관동대지진에 대한 공포 (일본 정부와 매스컴은 어쩌면 관동대지진이 올 수도 있다.. 가 아니라 관동대지진은 반드시 온다.. 라고 이미 선언한 바 있음. 관동대지진은 주기적으로 오는 지진이기 때문.) 및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경제는 일본 정부와 국민들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패러다임대신 일본과 일본인들은 매우 부정적인 악수를 두게되니, 그것은 바로 혐한~~ 두둥..
한국이 뜬금없이 모든 부정적인 에너지를 활력으로 바꿀 원전 내지는 새로운 적 내지는 약자로 당첨이 되면서 의문의 1패를 하게 된 거다. 사실 한국은 경제, 문화의 성장등으로 인하여 일본에 대한 열등감을 많이 털어낸 상태이며, 실제로도 반일 분위기는 대단히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인데, 오히려 과거에는 잠잠하던 일본이 전 국력을 동원한 병림픽을 벌이고 있다보니 한국은 어리둥절행으로 빠진 점이 없지않아 있다고 본다.
어찌되었든 일본이 전방위적으로 구축한 혐한이라는 매우 강력한 룰이 이미 굳건하게 구축이 된 상태이며, 큰 운동장에 들어찬 일본인들은 이 룰을 지키고 사수하기 위해 거의 목숨을 걸고, 필사적인 투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통 좁게 국내 수준에서 이지메를 하는게 아니라, 이제는 그 대상이 아예 해외로 이전되어 한국이라는 나라를 통째로 이지메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속시원함과 민족 대단결의 쾌감이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게 된거다. (무조건 밑도 끝도 없이 두드려 깐다 이기야...)
일본인들의 이런 집단성과 이중성은 외국인들이 비판한다고 해서 고쳐질 문제도 아니고, 한국인들의 빨리빨리 문화와 같이 그냥 그들이 안고가야할 숙명과도 같다.
현재 일본 열도에 드리워진 온갖 불안요소가 혐한이라는 에너지로 응축되었고 이번 시장스시 사건역시 이런 사회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해프닝으로 보인다. 정치, 역사적인 문제도 그 원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늘 한 수 아래로 보았던 한국의 성장이 자신들을 위협하는 가이진 국가의 도발로 받아들여졌고, 언제가는 터질 문제가 조금 더 일찍 터진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판단과 선택은 일본인들의 몫일테니 가이진이 왈가왈부 할 것은 아니지만, 한일 관계가 조금 더 성숙해졌으면 하고, 한국인들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갑자기 결론을 내리자면 한국인들이 잘한다고 해서 무언가가 크게 바뀔일은 없을것이고 혐한뽕의 약빨이 다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릴때까지 그냥 굿이나 보면서 그런가보다.. 하면 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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