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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 유래한 단어와 음식들.jpg
다들 알다시피 고려는 몽골제국에게 100년간지배를 받았고 그동안 한국의 유전자는거의 몽골화가되어 백제가 건너가 세운일본과는 유전적으로 굉장히 멀어졌고 오죽하면 몽골지배 70년이 지났을 시점부터는고려여인들사이에 누가더 몽골군인과 잤는지경쟁이붙을 정도라했으니 말다했다.더 치욕적인 부분이있으나 생략하겠다.1. 두레박 (帖落)고려시대 외국어 교재인 『노걸대』(老乞大)는 몽골어를 포함한 다국어 회화체 교재로, ‘노걸대’는 ‘Mr. Chinese’를 뜻하는 외래어이다. 『노걸대』 원본에 등장하는 ‘帖落’(첩락)은 몽골어 ‘토르호’(torho)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이는 오늘날 ‘두레박’을 의미한다. 『노걸대박통사집람』(최세진 저)에서 ‘酒子’는 버드나무 가지로 엮은 물 긷는 도구이며, 원나라 말로 ‘첩락’이라 표기한 점을 근거로 한다. 따라서 두레박이라는 생활용구 명칭에도 몽골어가 차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2. 씨름 (Ссирѳм)한국 전통의 ‘씨름’은 샅바를 잡고 겨루는 민속 경기로, 몽골어 ‘Ссирѳм’(씨룸)과 발음뿐만 아니라 경기 규칙에서도 유사성이 발견된다. 이는 몽골과 고려 간 문화 교류 과정에서 씨름의 명칭 및 경기 방식 일부가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3. 보라매, 송골매13세기 몽골에서 매사냥이 성행했으며, 이 풍습은 고려에 전파되었다. ‘보라매’는 몽골어 ‘boro’에서 유래하였고, ‘송골매’는 몽골어 ‘songhol’에서 온 단어이다. 특히 송골매는 칭기즈칸 일화와 연결되며, 몽골의 상징적인 국조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외에도 ‘수지니’, ‘날지니’, ‘쿽친’, ‘익더귀’ 등 매와 관련된 여러 어휘가 몽골어에서 차용되었다4. 사돈 (xaдam)‘사돈’이라는 단어는 고려시대의 민간 설화와 달리, 몽골어 ‘хадам’(xaдam)에서 차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몽골어 단어는 ‘일가 친척’을 뜻하며, 한자 표기는 음을 빌린 것이다. 따라서 ‘사돈’은 언어적 유희에서 비롯된 민간 유래설과는 달리, 명확한 몽골어 어원에 기반한다.5. 조랑말, 얼룩말말(馬) 관련 어휘 중 ‘말’ 자체도 몽골어 ‘мал’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제주도의 말 관련 지명과 단어에 몽골어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조랑말’은 몽골어 ‘җороо морь’(조로말, ‘작은 말’ 의미)에서,‘얼룩말’은 몽골어 ‘алаг морь’(알락말, ‘얼룩말’ 의미)에서 유래하였다.6. 접미사 ‘-치’ (장사치, 벼슬아치)몽골어에서 ‘길’을 뜻하는 ‘jam’과, 길 안내인을 의미하는 접미사 ‘-chi’가 합쳐져 ‘잠치’가 되었다. 한국어에서는 이 접미사가 확장되어 ‘나루치’(나루+치, 뱃사공), ‘장사치’, ‘벼슬아치’ 등 다양한 직업이나 신분을 나타내는 접미사로 쓰인다. 이는 몽골어 접미사의 파생적 용법이 한국어에 차용된 사례로 해석된다.위 사례들은 몽골 제국 및 원나라 시기 몽골어가 100년간 지배한 고려 및 조선 초기 한국어 어휘에 미친 영향을 반영한다. 특히 생활용구 명칭, 민속 경기 명칭, 동물 명칭, 친족 호칭, 접미사 활용 등 다양한 영역에서 몽골어 어휘가 차용되어, 한국어 어휘와 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준다그렇다면 음식에는 영향을 줬는가?1. 소주(燒酒)기원: 소주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부터 전해진 증류주로, 중국과 몽골 등 중앙아시아 지역의 증류술이 한반도에 전파되면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몽골 제국 시대에 중앙아시아 및 중국 대륙 전역에 증류주 문화가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증류 기술과 함께 증류주 음용 문화가 고려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따라서 소주 증류법이 몽골이나 몽골 제국의 영향 아래 있던 주변 문화권을 통해 전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2. 국물 요리 (탕, 찌개)몽골식 육수 중심 조리법이 한국의 국·탕 문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예를 들어, ‘곰탕’이나 ‘설렁탕’ 같은 고기 육수 기반 탕류는 몽골의 유목 생활에서 발전한 고기 중심 조리법과 비슷한 맥락이 있다3. 육포, 건조육몽골 유목민들의 건조육 문화가 한반도 육포 문화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더한국의 ‘육포’나 ‘편육’과 같은 고기 건조·보존법이 그 예4.고기 꼬치구이몽골 및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은 꼬치에 고기를 꽂아 굽는 방식이 일반적이다한국의 ‘꼬치구이’ 문화와 조리법이 이와 비슷한 점이 있으나 직접 기원으로 보기엔 어렵고, 유목민의 영향이 일부 반영됐을 가능성만 제기된다5. 곱창과 순대몽골 유목민들도 동물의 내장(특히 양 내장)을 세척해 삶거나 채워서 요리하는 음식이 있었고, 이를 통해 고려 내장 요리 문화가 더 다양화되었을 수 있다.특히 순대 형태의 음식(창자에 무언가를 채워 익히는 방식)은 몽골과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게 유력하다몽골지배 이전-그전에도 내장을 먹었을 가능성은 있음그러나 구체적 증거는 매우 부족몽골지배중~이후-내장 요리 방식(삶기, 굽기, 채우기 등)의 보급 및 다양화 가능성 높음조선 이후-곱창, 순대, 간 등 내장 요리 보편화- dc official App
작성자 : 네거티장애고정닉
대만(중화민국) 타이베이 충렬사 다녀온 사진, 영상들.jpg
충렬사(忠烈祠)는 한자문화권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열사, 호국영령을 기념하고 제사지내는 사당을 의미함.한국에도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1606년에 건립된 통영 충렬사(사적 제233호)임경업 장군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충주 충렬사(사적 제189호)임진왜란에서 순국한 송상현과 정발 등 90여 위를 모신 부산 충렬사(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등 여러곳의 충렬사가 있음.내가 대만 여행간 방문한 충렬사는 타이베이에 위치한 국민혁명충렬사(國民革命忠烈祠)로 중화민국의 현충원 비슷한 지위에 해당하는 곳으로일제를 위해 순국(?)한 대만인들의 위패를 기리는 야스쿠니 신사의 분원같은 대만호국신사(臺灣護國神社) 신사 건물을 1966년에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1969년에 북경 고궁(자금성) 태화전을 모티브로 지어진 충렬사 사당임.(靖国神社の祭神で台湾に縁故がある国事殉難者, 야스쿠니 신사의 제신으로 대만에 인연이 있는 국사순난자)현재는 중화민국 건국 공로자(신해혁명), 중일전쟁(항일투쟁), 국공내전, 진먼 포격전 전사자, 일치시기(日治時期)의 일본에 항거하다 희생된 자 등 중화민국을 위해 순국한 39만여명을 기리고 있으며충렬사 안치 기준은1. 작전 시 승리를 얻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움을 불사하여 공을 이뤘으나 희생당한 자2. 작전 시 맡은 바 최선을 다하여 죽음을 달게 받던 자.3. 위험 특수 임무를 수행하다가 사망하여 총통에 의해 표창령을 받은 자충렬사의 패루(牌樓).중앙에 잘보면 위병 2명이 근무를 서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좀 지나치게 부동자세에 칼각이여서 가까이 가서 의장복 옷깃이 바람에 휘날리는걸 보기 전까지 마네킹인줄 알았음;;충렬사의 산문(山門).바닥에 다섯줄로 길~게 녹슨 자국같은게 보이는데, 뭔지는 밑에 나옴.본당군열사(軍列寺)문열사(文列寺)충렬사 전체 면적은 5만 2천여 평방미터로 타이베이 시내에 위치한 것 치고 상당히 넓은 면적임.내부에는 나 말고 다른 관람객들이 없는데이유는 아마도 보통 의장병들 사열식만 구경하고 가고 내부 사당까지 보러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라고 생각됨.위병 2명이 보초를 서고 있는 본당 가운데 위치한 위패는 특정한 인물의 것은 아니고, 순국자 전체를 기리는 것.신해혁명 당시 광저우 봉기를 묘사하는 부조(浮彫).중일전쟁 당시 상하이 전투에서의 항일투쟁을 묘사한 부조(浮彫).장총통, 국민당 1차 동정(북벌)의 성패를 결정지은 대승, 면호전투를 묘사한 부조(浮彫).1949년 금문도 전투(금문도에 상륙한 공산군 제 10군단을 격퇴한 전투, 이 전투의 승리로 금문도를 완전히 확보했고 공산군의 대만 침공 계획을 중단시켜서 대만섬의 중화민국 정부가 존속할 수 있게 됨)를 묘사한 부조(浮彫).군열사(軍列寺) 내부 위폐들.백마탄 장총통.1945년 9월 9일 장제스 총통에게 항복하는 지나파견군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대장.오카무라 야스지 대장은 제1군 참모장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와 함께 중국에서의 삼광작전(三光作戰) 살광(殺光, 전부 죽이고) 소광(燒光, 전부 태우고) 창광(搶光, 전부 빼앗아라)을 주도한 인물이며 육군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구상한 인물이다.육군에서 위안소를 추진한 이는 파견군 참모부장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였다고 합니다.그 동기는 점령지에서 빈발한 중국인 여성에 대한 일본군인들의 강간 사건으로 중국인의 반일 감정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방지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데 있었습니다. 또 장병이 성병에 걸려, 병력이 저하되는 것도 막으려고 생각하였습니다.예전의 전쟁 시대에는 위안부 등은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부끄럽지만 위안부단 창설자이다.쇼와 7년(1932년) 상하이 사변 때 두세 건의 강간 사건이 발생하였기에 파견군 참모부장이었던 나는 같은 지역 해군을 본떠, 나가사키현 지사에게 요청하여 위안부단을 불렀고, 그 후 전혀 강간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기뻐하였다.현재 각 병단은 거의 모두 위안부단을 수행하여 병참의 일 분대가 된 형태다. 제6사단 같은 부대는 위안부단을 데리고 다니면서도 강간이 끊이지 않는 상태이다."오카무라 야스지 대장 자료 제1 전장 회상편" 1970년, 302~303쪽매우 덥고 습한 날씨에 하복이라곤 해도 긴팔 의장복 풀세트를 갖추고 근무 교대를 위해 사열하는 의장대 병사들.(1시간에 한번씩 교대함)이날 타이베이 날씨는 구름도 안낀 떙볕에 최고 온도 44도 가량에 습도 90%였음.바닥에 다섯줄로 길~게 녹슨 자국이 있었던 이유:징박힌 전투화를 신은 의장병들이 수십년 동안 완전히 같은 동선으로 계속 이동해서;;여기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불쾌했던 부분은중일전쟁(항일투쟁) 순국자를 기리고 일본군의 만행 관련한 전시가 있는 현충원 같은 곳에서단체 버스타고 온 일본인 관광객들이 의장병들 사열하는 모습 보면서 "헤에~ 스게~" 해대면서 웃고 떠들었다는 점...아마 패키지 여행으로 온 일반인 관광객들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 알고와서 그랬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가이드가 어떤 장소인지 별로 설명도 안하고 의장대 사열만 보고 바로 가버림)내 기준에선 "일본인"이 아니라 "쪽바리" 같은 느낌이었음.
작성자 : 마아가림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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