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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병진 방송을 망친 나는 나쁜 놈

운영자 2024.05.20 10:25:24
조회 96 추천 1 댓글 0

어제저녁이었다. 창가에 앉아 흐려져 가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방파제 끝에 있는 작은 등대에서 신비로운 녹색의 불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동해항에 정박 중인 대형 화물선에서 노란 불빛들이 따뜻하게 피어 올랐다.

나는 한적하고 여유가 느껴지는 바닷가의 도시에 노년의 둥지를 틀었다. 머리속을 텅 비운 채 저물어 가는 바다를 보는 나는 잔잔한 행복감을 느낀다. 평생 이렇게 마음의 평화를 누려본 적이 거의 없었다. 숲에서 벗어나야 숲이 보이듯 세상에서 한 걸음 벗어나니까 살아왔던 세상이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요즈음 삼십년 전 내가 맡았던 대도사건을 되새김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노년의 일상을 글로 채운다. 세월은 나의 시각도 마음의 프리즘도 바꾸어 놓았다. 변호사가 아닌 보통의 한 노인 시각에서 과거를 보니 모든 게 전혀 다르게 보인다. 내 글의 준엄한 평론가인 아내는 이제 대도에 대해 그만 쓰라고 한다. 가까운 독자로서도 지겨운 모양이다.

나는 대도란 인간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 사건을 통해 내가 보았던 세상을 기록해 두고 싶은 것이다.

도서관에서 아주 희귀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육이오전쟁당시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던 서울에서 삼 개월간 숨어있던 사람이 그 시간의 세상과 자신의 내면을 공책에 꼼꼼하게 기록한 내용이었다. 사회가 뒤집혀졌는데도 팔월의 태양은 여전히 쨍쨍한 빛을 뿜어대고 글 쓰는 이의 내면에는 여러 가지 상념이 흐르고 있었다. 그걸 묘사한 글이 참 귀하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독자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글을 쓰지는 않는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과 고백을 개인 블러그에 올린다. 소수의 동지가 읽어주면 만족한다. 쓸 거리가 있을 때 까지만 쓴다. 없으면 그만이다.


오늘은 대도가 석방된 후 내가 일으켰던 방송사고를 다시 보고 반성하고 싶다.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의 촬영을 나는 갑자기 도중에 거부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를 것 같다. 사실 이유는 간단했다. 책임자인 피디에게서 연민을 발견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이다. 어쩔 수 없는 타고난 운명이다. 이익이 있더라도 기분 나쁘면 다 둘러엎곤 했다. 남들은 그런 나를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이 내가 일한 변호사업계의 평가다.

하여튼 그 당시로 돌아가 늙은 나의 영혼이 사십대 중반의 내 행동을 다시 내려다 보고 있다.

시사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주병진씨가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당시 내 판단에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떤 유명 인사도 그에게 걸리면 롤러코스트에 태우고 흔들어 놓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시청율이 높은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대도와 내가 방송에 출연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도를 개그의 놀잇감으로 만드는 건 싫습니다.”

내가 거절했다. 대도는 도둑이었을 뿐이다. 대중의 흥미를 채워주는 일회성 오락거리가 아니다. 그는 많은 숙제를 앞두고 있는 어리석은 죄인일 뿐이었다. 참회하고 낮은대로 내려가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해야 했다. 그 후에야 대중들에게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병진씨가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 생각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

“제가 개그맨 출신이지만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사람입니다. 요구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송이 된다면 제 프로에 응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다. 나는 주병진씨에게 교도소내에서 맞아죽은 박영두의 죽음을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이미 시사잡지에 기고를 했는데 공중파 방송에서 다루어 준다면 불이 활활 타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며칠 후 나는 옷이 없는 대도에게 내 와이셔츠를 입혀 주병진씨가 진행하는 생방송 프로그램의 스튜디오로 갔다. 밝은 조명아래 스텝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스튜디오 옆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방송의 대본인 ‘큐시트’가 책상위에 엎어져 있었다. 나는 그걸 하나 집어서 보았다. 대도가 출연하는 십분간의 대화 내용들이 적혀있었다. 석방되는 날 두부를 먹었느냐는 첫 멘트로 시작해서 도둑질 하러 간 국무총리집은 어땠냐는 등 흥미성얘기만 가득 차 있었다. 감옥안의 인권문제는 한 마디도 없었다. 배신감이 들었다. 잠시후 스텝진과 함께 주병진씨가 그 방으로 들어왔다.

“이건 약속하고 다르잖습니까? 저희는 돌아갈랍니다.”

내가 큐시트를 보이면서 주병진씨에게 항의했다.

“아무래도 시청자들은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병진씨가 나를 달랬다. 당황한 표정이었다.

“대도는 노리개가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방송 관계자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생방송이 사고가 나든 안 나든 그건 방송국의 문제였다. 주병진씨가 다급하게 막아서면서 말했다.

“잠깐만요, 엄변호사님 사회자로서 형식적으로 그런 질문을 안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질문을 하더라도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하십시요.”

그때 그 프로그램의 고정 초대손님인 김동길 교수가 그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 시대의 사회원로였다. 김동길 교수가 대도를 알아보고 다가와 그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나는 오늘 대도라는 분하고 만나게 되면 인권 문제를 물어보려고 했는데 방송국 간부들이 내가 방송사고를 낼까 봐 갑자기 나를 빼 논 것 같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김동길 교수는 나를 보더니 이런 말을 했다.

“이봐요, 엄 변호사. 방송국 간부들이 미리 권력에 겁을 먹고 알아서 긴다니까. 나는 오늘 정말 여러 가지를 얘기하고 싶었는데 아쉽네.”

뭔가 알 것 같았다. 주병진씨는 중간입장인 것 같았다.

나는 대도가 분위기에 휩쓸리게 하지 않도록 이런 주의를 주었다.

“사회자가 혹시 웃기는 말이나 장난을 치더라도 화답하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또 흥미성으로 과거의 도둑질한 보석얘기를 화제로 꺼내면 동문서답으로 내가 정리해 준 인권 문제를 얘기하세요. 생방송이라 강제로 중단시키지는 못할 겁니다. 사회자에 휘둘리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리세요.”

대도사건을 통해 내가 추구하려는 목표는 박영두라는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인권 문제였다.

잠시 후 주병진씨와 대도가 스튜디오 위에 마주 앉았다. 광고방송이 흐르고 나서 카메라에 빨간불이 켜졌다.

“시청자 여러분 오늘 대도라고 알려졌던 분을 모셨습니다. 석방됐던 날 두부는 드셨는지 먼저 묻겠습니다.”

주병진 씨가 대본대로 물었다.

“제가 감옥에 있을 때 교도관들이 사람을 때려 죽이고 근처 야산에 묻어버렸어요. 그걸 항의한다고 나를 묶은 채 독방에서 개 같이 엎드려 밥을 먹게 했어요. 엄변호사님이 그런 사실을 세상에 고발했죠. 정말 정부라는 게 지독히 교활해요. 교도소 안에서 그런 일이 없었다면서 인권운동단체 사람들 하고 기자들을 청송교도소로 불러 그 안을 구경시키는 거예요. 당연히 나에게 했던 그런 것들을 숨기고 좋은 것만 보여줬죠. 국민이 낸 세금으로 티켓다방 아가씨까지 동원해서 그곳에 온 기자들에게 밤새 술 접대까지 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정부는 한 짓이 들통이 날 것 같다고 그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도둑인 나보다 더 비겁하잖아요?”

스튜디오 뒤에서 보고 있는 내 옆 피디의 이어폰에서 신경질 적인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주조정실에서 난리가 난 모양이다. 내 옆으로 다가온 작가가 말했다.

“야단났어요. 지금 항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어요. 왜 도둑놈을 방송이 미화시키고 있느냐는 내용들이예요.”

피디가 내가 무대에 나가 합석해 줄 것을 부탁했다. 대도를 말리라는 의미 같았다. 내가 무대로 나가 사회자인 주병진씨 앞에 앉았다.

“처음 대도를 봤을 때 인상을 말해 주시죠.”

그는 나를 통해 대도의 입을 막고 방향을 바꾸려는 것 같았다. 나는 작정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처음 대도를 만났을 때 특이한 부탁을 했습니다. 자신이 석방되지 않아도 좋으니 교도소 내의 인권유린을 사회에 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고민을 했습니다. 결국 결심을 하고 그 사실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공명심에 들떴다는 비난과 함께 많은 욕을 먹었습니다. 저는 가볍게 행동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이 보지 못하는 담려락 저쪽 구석의 어둠을 변호사가 비추어 주는 것이 사회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교도소 내의 인권 문제를 압축해서 말했다. 시간이 흘러가고 대도와 내가 다음 출연자의 시간까지 빼앗고 있었다. 카메라 뒤에서 작가가 판넬에 ‘제발 중지해 주세요’라고 써서 들고 내게 사정했다. 사회자인 주병진씨에게 쪽지 하나가 전해졌다. 주조정실의 지시 같기도 했다. 나는 중단하지 않고 할 말을 다했다. 내 말이 끝나자 주병진씨가 카메라를 향하더니 어두운 표정이 되어 이런 멘트를 했다.

“시청자 여러분 저는 이 자리에서 결코 절도범을 미화시키자는 게 아닙니다. 혹독한 감옥생활을 마치고 이제 새사람이 되자는 그의 각오와 참회를 시청자와 함께 검증해 보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새 출발을 하려는 대도에게 우리 모두 격려의 마음을 보냈으면 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광고 방송이 나가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작가가 다가와 말했다.

“항의 전화가 백팔십통이나 왔어요.”

옆에 앉아있던 주병진씨가 허탈한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내일 어떤 반응이 나타날지 여파가 어떻게 번질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날 비난 기사들이 터져 나왔다. 정부 측의 반론이 없는 방송사고였다는 것이다. 사고의 원인은 나 때문이라고 적혀있었다. 방송국 관계자들은 모든 책임을 나에게 돌렸다. 방송심의위원회에서 나에게 연락이 왔다. 일방적으로 나간 방송 내용에 대해 조사에 착수하는 데 내 진술을 받아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업무방해로 인한 엄청난 금액의 손해배상 소송이 논의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객들의 칼싸움에서 내 살이 베이지 않고 상대방의 뼈를 꺽을 수 없다는 게 그때 나의 생각이었다. 삼십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보면 나는 참 어리석고 무모한 인간이었다. 뭐가 나를 그렇게 시켰는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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