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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체험한 언론의 색깔

운영자 2024.04.29 09:47:24
조회 67 추천 1 댓글 0

내가 법정에서 교도소 내의 가혹행위를 폭로하자 MBC는 특집을 만들어 즉각 귀를 기울여주었다. 그러나 언론마다 보는 시각이 다른 것 같았다.

SBS의 저녁 텔레비젼 뉴스가 있었다. 내가 맡은 사건이 뉴스의 제목으로 나타나면서 앵커의 멘트가 이렇게 시작됐다.

“세월이 이상하니까 도둑놈도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전신에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 보도의 핵심이 인권이 아니라 내가 재심을 신청한 도둑의 악성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든 신뢰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주간지 등에서 선정적인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만큼의 보석을 훔쳤는지 그리고 도둑이 감옥에 들어갈 때 그 보석들을 어디에 숨겨놨는지, 그렇게 보물이 많은 사람은 누구였는지 등이 관심사였다.

저녁 늦게 동아일보의 젊은 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기자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말했다.

“데스크에서 가보라고 해서 저녁을 먹다가 왔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대도라고 불리는 사람이 누굽니까? 보도자료를 주시죠.”

나는 그 기자의 무성의하고 관료적인 태도에 말해줄 의욕이 사라졌다.


불의한 사실과 마주쳤을 때 변호사는 변호사가 해야 할 일이 있고 기자는 기자의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내가 왜 보도자료를 만들어 그에게 주고 설명하고 납득하게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정치 감각이 없는 나의 생각이었다. 나는 찾아온 기자에게 이렇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기본도 모르고 온 기자하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둑의 사진이라도 한 장 주시죠”

“없습니다.”

변호사는 교도소 내에 사진기나 녹음기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도록 통제되어 있었다. 기자는 그걸 모르는 것 같았다.

어느 날 MBC보도국의 이상호 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시원한 눈매를 가진 처음 보는 기자였다.

“저희 방송국 특집을 보고 대통령이 한마디 하는 바람에 검찰이 초비상입니다. 전체 교도소를 지휘하는 법무부 교정국장을 왜 검사가 하느냐고 한마디 하셨대요. 교정국장은 감옥의 실태를 잘 아는 교정공무원이 해야 한다는 뜻이죠. 대통령도 교도소 생활을 오래 하셨으니까 교정 정책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검찰이라는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린 것 같았다. 교도관 출신의 모든 공무원의 꿈은 검사장이 하는 차관급의 교정국장이 되는 것이었다. 모든 교정공무원의 염원과 검찰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싸움이 대통령의 한마디로 점화됐다는 얘기였다. 이상호 기자가 덧붙였다.

“저희 MBC 사회부장이 엄 변호사가 하는 사건의 재판장을 만났습니다. 그 재판장이 하는 말이 검찰에서 항의가 들어 왔는데 엄 변호사가 법정에서 인권 문제를 떠드는 걸 막아달라고 했답니다.”

나는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악질 죄인이라도 고문을 받거나 가혹행위를 당했을 때 담당 변호사는 당연히 그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검사는 그런 일을 수사해서 인권을 보호해야 할 사회적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마치 법무부 내부의 비밀을 폭로하는 고발자의 위치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법원에 미리 제출한 신문사항 같은 서류들이 사전에 법무부에 보고되고 있었다. 법무부 관계자가 내가 말하기 전에 출입 기자와 인터뷰를 해서 반박내용을 흘렸다. 이런 내용의 기사가 신문에 실린 걸 봤다.

‘대도라고 불리는 절도범이 감옥 안에서도 두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었다. 그렇다면 수감생활이 모범적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는 검거 당시에도 세간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장물액수를 사법당국이 고의로 축소했다는 등의 행동을 한 교활한 인물이다. 사회 일각에서는 그를 의적인 양 추켜세우기도 했다. 아직 사회보호법은 합헌으로 유효하므로 여론의 동정에 의해 그의 석방을 주장 해서는 안 될 것으로 본다.’

검찰의 언론플레이였다. 애초에 싹을 밟아버리려는 의도 같았다. 나는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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