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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

지랄 2006.12.05 16: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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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있는 왜관장대리(倭館長代理) 야마노시로  유우쬡오(山之城祐長)는 일본전권대사를 정중히 대접하라는  위협적인 구술서(口述書)를  동래부사 (東來府使)에게 전달했다. 『일본전권대사 일행이 장차 강화도로 가서 귀국의  전권대신(全權大臣)과 회담을 청하려는 것이 귀국방문의 목적입니다. 만일 귀국의 전권대신이 국 빈으로 정중히 마중하지 않으면 서울로 직접 들어가서 정부와 직접 담판을 할 것입니다. 일행의 승선이 강화부에 도착하는 시일은 마침  엄동기의 풍 파가 심하기 때문에 아마 칠, 팔일 후가 될 듯하니 귀관은 이 소식을 빨리 귀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도 일본 함대는 부산에 머물러서 무슨 정보수집을 하는 모양이더니, 본국으로 이개대대(二個大隊)의 육군 병력을 증파(增派)해 달라고 급사(急 使)를 본국 시모노세끼(下關)로 보냈다. 일본 사절단은 부산에서 정보를 수집한 결과 조선 조정에서는 아직도 일본 에 대한 외교정책이 확립되지 못한 것과 은퇴해 있던 대원군이  종전의 배 일운동을 다시 일으키고 있는 정세를 알고, 만일의 경우 위험한 사태가 벌 어질지 모르므로 그런데에 예비책까지 준비했다. 이런 만반준비를 갖춘 그들은 고종  십삼년 일월 삼일에 강화도에  들어왔 다.  먼저 군함 맹춘호(孟春號)가 초지진(草芝鎭) 앞바다에 들어와서 강화 부판관(江華府判官) 박제근(朴齊近)과 함장(艦長) 가사마 히로다데(笠間廣 盾) 사이에 교섭이 시작되었다. "귀국과 국교 문제로 친선관계를 맺으려고 일본전권대사가 왔으니,  이 뜻 을 조정에 전해주시오." 이런 간단한 요구에 대해서 강화부 판관은 "곧 품달하겠으니 회답을 기다려 주시오." 하고 대답할 정도의  간단한 회 견이었다.   이 정보를 그날로 받은  조정에서는 전직, 현직의 중신들을  비상소집하고 고종 어전에서 중대 회의를 열어 대책을 토의한 결과 그들을 정식외교사절 로 대하고 회담을 하기로 결정했다.  외교문서도 접수하지 않고  일방적으 로 퇴해 보내던 대원군 시대의 대일정책은 이것으로  완전히 쇄국(鎖國)의 문을 개방하였다. 그리고 접견대관(接見大官)으로는 어영대장(御營大將) 신헌(申櫶), 도총부 부총관(都摠附副摠管) 윤자승(尹滋承)을  접견부사(接見副使)로  임명해서 일본 사신과 교섭하게 했다. 그러나 이 강화도회담의 광경은 나라의 체면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들 은 당당한 군함으로 호위된 강국의 규모와 사기(士氣)로  기세가 당당했지 만 우리 대표단의 진용과 그 배경의 군사시설은 초라하고 사기도 없었다. 우선 그들은 여섯척의 군함에서 거대한 대포로 예포(禮砲)를  쏘아서 우리 대표와 강화도 수비병과 백성을 놀나게 했다.  그런 공포 속에 그들  대표 는 사백명의 서양식 무장을 한 의장병(儀仗兵)을 거느리고  당당히 상륙했 다. "친선 회담을 하려는데 왜 대포를 쏴서 민심을 놀라게 하오?" 우리 대표가 말하자 그들은 도리어 의아스러운 표정과 경멸하는 태도로 "당신들 오는데에 경의를 표하고, 이번 친선 회담을  축하하는 예포(禮砲) 입니다. 소리는나도 탄환은 없는 공포인데 놀랄 것이 무엇입니까?" 신식 국제예법도 모르느냐는 조롱까지 받은 우리 대표단은 더 할  말이 없 었다. 예포에도 놀라는  무지무력(無知無力)을 첫순간부터 스스로  폭로한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도 그들이 그때부터  이십사년 전인 1853년, 미국  사절단에게 강제로 일본의 문호개방(門戶開放)을 당하던 때에는 지금 조선의  모습 그 대로였던 것을 잊은 듯했다. 그때의 일본 모습이 오늘의 조선 같았고 오늘 의 일본은 그때의 미국과 같았던 것이다. 1853년에 미국 외교사절 폐리 제독은 일본에게 통상수교(通商修交)를 하려 고 쇄국정책을 고집하던 도꾸가와(德川) 정부에게 강요했던 것인데,  폐리 제독은 미국의 태평양 방면 대함대를 거느리고 동경만(東京灣)  우라가(浦 賀)에 달려 들었다. 그 때 일본의  국민들은 그 쇠로 만들고 검게  빛나는 거대한 군함을 처음 보고 <구로부네(黑艦)>라고 벌벌 떨었다. 일본이 서양 의 문명을 조선보다 먼저 발달시킨 것은 미국의 <검은 배>였는데  그 위협 외교수단도 그대로 조선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검은 배가 아닌 일본의 이 검은 배는, 과연  미국이 일본에 가져다 준 것처럼 새문명의 선물을 조선에 주려는 것일까? 또는 일본 모양 으로 조선은 그 검은 배의 선물을 제 나라에 유익하도록 활용할 마음의 자 세와 목적의식이 있는 것인가. 아무튼 일본의 위협적 분위기 속에 회의는 수차 거듭한 끝에  이월 이십칠 일에 십이개도에 달하는 소위 강화도 조약이라는 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 約)이 정식 조인되었다.  그러나 조선측의 태도가 마지 못해서 하는  것으 로 보아 후일에 딴 소리를 할까 염려한 일본측은 조인과 동시에 국왕의 비 준(批准)을 고집했다. 이에 대해서 비준에는 상당한 절차가 필요하니 후일로  미루자고 주저하자 일본측은 노해서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구로다 전권은  강화도를 떠나 버렸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남은 부전군 이노우에와  절충하고 고종의 비준까지 교환했다. 그런데 이 비준에 있어서 고종은 물론 민비까지도 아직 확고한  태도를 정 하지 못해서 이상한 고충의 소극(笑劇)까지 남겼다. 고종은 비준문에 친서 (親署)하는 대신에, 그러면 만일의 경우에 무슨 책임이나 체면을  면할 줄 로 알았든지  <조선국주지보(朝鮮國主之寶>라는 진짜 옥쇄가 아닌 소도장 을 신주(新鑄)해서 찍었던 것이다.   이러한 곡절을 겪고 체결된 소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의  병자수호조약 (丙子修護條約)은 근대 조선이 외국에 대하여 최초로 체결한  조약으로 실 로 역사적인 개국정책(開國政策)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조약  내용 은 당시에 약국(弱國)이던 조선엔 불리하고 강국이던 일본에겐  유리한 조 약으로서 국내외에 주의할 만한 몇 가지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국제정 세와 외교술책에 어두운 당시 조정에서는 알면서도 꺾이고  몰라서도 속은 흔적이 남아 있다. 조약문의 첫머리에 있는 『조선은 자주(自主)의 나라이므로 일본과 더불어 평등의 권리를  보유(保 有)한다.』 이 문귀는 당연한 듯해서 조선 대표들이 기뻐했을지 모르나,  그것은 전통 적으로 자주독립국(自主獨立國)의 취급을 하지 않은 청국에 대해서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조선에 관계된 이익과 발언권을 청국과  평등하게 보장하려 는 일본의 속셈이었다. 다음에 부산항 이외의 항구, 곧 인천항과 원산항을 일본에게 개방하게 한 것은 청국과 아라사와의 장래 경쟁을 위해서 경제적 으로, 군사적으로 필요한  일본의 포석(布石)이었다. 또  조선연해(朝鮮沿 海)의 해도(海圖) 작성과 해안 측량을 허용케 했으며 일본  거류민의 치외 법권(治外法權)을 인정해서 그 재판권은 <조선에 있는 지정  된 강국>이라 고 정해서 불평등한 권익을 승인시켰던 것이다. 이런 외교적 흉계는 서양의 강대국이 약소국을 기만한  마술로서 불란서가 이미 안남(安南)에 대해서 그러했고 또 일본 자신이 미국에게 당한 대우였 다.  일본은 그런 술법을 조선에도 써서 성공했던 것이다.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 체결되자 일본에서는 자기 나라의 개화된  문명 과 부강한 국력을 자랑하려고 조선 조정의 친선 사절을 초청했다.  조정에 서는 이를 받아  들여 예조참의(禮曹參議) 김기수(金綺秀)를  수신사(修信 使)로 임명해서 보냈는데 이때의 사절단 파견에는 나라의 위신도 세우려고 상당한 규모를 차렸다. 사절단 일행은 칠십명이나 되었으므로 일본의 화륜선(火輪船) 황룡환(黃龍 丸)을 전세로 빌려 타고 고종 십삼년 사월 사일에 부산항을 떠났다.  그러 나 김기수 이하의 사절단은 모두 비장한 각오로 공포에 떨고 있었다. "놈들이 우리를 청해다가 죽이거나 인질(人質)로 잡아 두지나 않을까?" "사대부(士大夫)로서 만리 이역에 무슨 봉변을 하더라도 임금을 위해서 몸 을 잊고 나라를 위해서 집을 잊자." 그들은 사당에 참배하고 살아서는 못 돌아올 각오까지 했던 것이다. "왜놈은 양놈들의 앞잡이니까,  놈들에게 속아서 기밀을  누설해선 안  된 다." 하고 그들은 기선 안에서도 서로 다짐했다. 128- 외국 문물에 사모하는 부녀자들 그러나 일행이 일본 땅에 상륙한 순간부터 뜻밖에도 친절하고 융숭한 영접 을 받았다.  일행은 예기하지도 않고 희망하지도 않았는데 아까사까(赤坂) 이궁(離宮)에서 명치천황과의 접견식까지 마련해 주었다. 이에 대해서 수신사 김기수는 비로소 당황했다. 조선왕의 대리자격으로 일 본 왕이 만나겠다는데 실상은 고종 황제의 친서(親書)도 갖고 오지 않았던 것이다. "실은 국서도 받아 오지 않았으니 예의상으로도 사양하겠습니다." 김기수는 일본 외교관에게 솔직히 사양했다. 일본에 사절은 보내면서도 친 서를 준비해 주지 않았던 것은 타의(他意)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한 외교 경험이 없는데서 온 실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본은 사절단의  환심을 사려고, 그런 형식  문제에는 개의하지 않고 외교예의상 특별대우를  해서 명치천황의 접견식을  거행해 주었다. 그리고 총리대신, 외무대신이  베푼 두번의 공식 연회와  사연(私 宴) 여섯번에다 은밀히 미기(美妓)들의 특별보상까지 곁들여 여수(旅愁)를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체류기간 이십일 동안에 그들은 서양문물을 모방한 근대식 시설의 군사, 산업, 교육기관의 중요한 시찰로 분주한 시간을 보냈 다. 그들은 모든 공식 생활에 양복을 착용했고 머리를 깎고 있었다. 그들 사이 에서 칙사대접을 받는 조선사절단은 상투에  큰 갓을 쓴 한복  차림이어서 일반 일본인들이 기이하게 바라보았다. "우리나라도 명치유신 전에는 모양은 다르지만 상투를 틀고 일본복으로 사 무를 보았으나 지금은 편리하고 능률적인 양복을 입고 머리를 깎게 되었습 니다. 서양 것도 편리하고 좋은  것은 택하고 보시다시피 일본 것도  좋은 것은 그대로 보호 유지합니다." 하고 은근히 조선도 빨리 서양문명을 섭취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이처럼 융숭한 대우를 받고 귀국한 사절단은 일본에 대한 인식이  아주 달 라졌다. 종전에 외국 사절이라고는 청국을 대국(大國)으로 섬기는 소국(小 國)으로서 상전을 문안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독립국가로서 외국에게 동등 한 대우를 받은 것이 사절단으로서는 제일 기뻤다.   그리고 사절이 놀란 것은 청국의 문물제도는 그대로 대규모를 자랑하는 구 문화에 지나지 않았으나, 근대 국가로 신흥한 일본의 문물제도는 서양식의 신문화가 백화만발하려는 딴 세상이었다. "우리나라도 빨리 서양의 신문화를 섭취해서 적어도 일본에 뒤떨어져선 안 된다." 이것은 사절단이 일본의 실정을 보고 부러워하는 생각이었다. 그들의 대일 인식도 불과 이십일동안의 사찰로 천양지판의 전환을 했던 것이다. 일본왕 과 대신들이 보낸 진귀한 예물을 갖고 돌아와서 바치자 고종은  수신사 김 기수를 자미당(紫薇堂)으로 불러서 복명(復命)을 받았는데, 고종은 민비와 함께 일본 실정에 대한 문답을 했다. "일본왕의 인물이 어떻게 보였소?" 고종은 명치천황의 인상을 물었다. "매우 정명(精明) 하였습니다." (頗爲精明) "국민들의 풍속과 범절은?" "대개 나라의 부강을 위해서 힘쓰고 있었습니다." (槪以富强爲務) "어떤 방법으로?" "열심으로 부하고 강해질 기술을 숭상하며 실천하고 있습니다." (專尙富强 之術) "일본인들의 생활태도와 정도는?" "국민이 모두 각자의 직업을 갖고 근면히 일하며 놀고 먹는  백성이 없고, 길가에는 걸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질이 유순하고 친절하며 사 나운 자가 없었습니다."  (人皆柔順款曲 則無 强悍者矣) "기술이란 어떤 것인고?" "서양식 기계로 물품을 만들기 때문에, 물건이 좋고 빨라서,  그런 기술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계를 다루는 솜씨에 익 숙해 있습니다."  (蓋欲學器械 無技不學矣 敎鍊之法 果熟矣) "그럼 동양 고래의 경전(經傳) 같은 것은 다 버렸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기계 위주의 새 문명에 열중하면서도  도덕면에서는 고 래의 경전을 숭상해서 지킵니다."  (經傳尙傳) 이 모양으로 김기수는 일본의 문물과 풍속을 모두 찬양해 마지 않았다. 이 리하여 조정의 대일정책에도 큰 영향은 끼쳤지만 국제적  흥정에는 세계정 세에 어둡고 또 국력도 약한 조선이 항상 밑지기만 했다. 이러한 민비 정권의 대일정책에 대해서는 대원군을 선봉으로  하는 반대론 이 점점 강하게 일어났다. 그런데 여기서 기이한 현상은 그 전에 배일정책 의 주동자인 대원군의 섭정을 반대하고 극렬한 상소문 사건을 일으켜 대원 군을 몰락시킨 최익현이가, 이번에는 강화도에서 대일수호조약이 진행되고 있는데 오란망(五亂亡)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역시 과격한 반대  상소문을 올렸던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일본과 화친을 한다고 하여 만구(萬口)가  모두 분개하고 사경(四境)이 흉흉하니, 만일 그렇게 되면 상감의 처사는  큰 실책입니다. 화친문제로 그들이 애원할 정도로 우리가 강한 입장에 있어서 그들을 견제 할 수 있다면 그 화친은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두려 워해서 화친을 구하면 목전의 고식지책에 지나지 못합니다. 금후의 그들의 흉악한 야욕을 무엇으로 충족시키겠습니까? 이것이 난망(亂亡)의 첫째  화 근입니다. 그들의 물화(物貨)는 모두 사치하고 신기하며 우리의 물화는  겨우 백성의 명맥을 유지할 정도의 소박한 것이라  그들과 통상을 하면 수년을  못가서 지탱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반드시 망할 것이니 이것이 망란의 둘째 화근 입니다. 그들은 일본의 탈을 썼으나 실을 양적(洋賊)이므로 그들과  화친하면 서양 의 사학(邪學)을 전해서 나라를 휩쓸게 할 것이니 이것이 망란의  셋째 화 근입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자유로 왕래해서 큰 집에서 호화스럽게  생활하면 부녀 자들이 그들을 사모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망란의 넷째 화근입니다. 그들은 재욕(財欲)과 색욕(色欲)만 알고 인정과 의리가 없으니  무슨 해괴 한 일이 생길지 모르며, 이것이 망란의 다섯째 화근입니다. 후세의 춘추(春秋=歷史)의 붓을 잡는 자 이 일을  쓴다면 모년모월(某年某 月)에 양인(洋人)이 조선에 들어와서 모처에서 화친을 맹세하였다  할것이 매 이것은 기성고강(箕聖故疆)이 일조에 멸망했다고 통탄할 것입니다.  오 늘날 오는 왜인(倭人)은 양복을 입고 양포(洋砲)를 쓰고  양선(洋船)을 타 고 있으니 이것은 왜양 일체(倭洋一體)의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속으려고 하십니까...』 최익현의 반대 상소문은 일본자체의 침략성을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반대 하는 동시에 그들의 중개로  서양문화가 전파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오늘로 보면 일리(一理)에는 밝았으나 일리에는 어두운 주장이었다. 같은 날짜로 상소한 전사간(前司諫) 장호근(張皓根)은 최익현보다도  강경 한 대일주전론(對日主戰論)을 강조했다. 『추류(醜類)가 사백명이나 우리 땅에 하륙하였다 하오니 수백년  굳게 닫 혔던 문을 열고 도적을 맞아 들이는 것이 웬일입니까. 그들이 정한 십삼조 라는 것은 더욱 해괴망측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군신 상하가  일치 단결해 서 죽기를 맹세하고 그들을  배척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조정의 대신들이 그런 논의는 하지 않고 혹 그런 의견을 상소 하면 모조리 축출해 서 충간(忠諫)의 길까지 막아 버리고 발본책(拔本策)은 세우지  않고 있습 니다. 목하의 급무는 국방 태세를  엄중히 하고 인재를 등용해서  요해(要 海)를 굳게 방비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이선(異船)을 소탕할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일본과 통상한 후에 신기한 일본 상품이  사치폐단만 조장시키는 무용지물이라는 비자해자졌다. 그리고  조약에 따라서 원산항을  개방하려 할 때 유림들이 반대하고 유통(儒通)이라는 역문을 돌렸기 때문에 그 대표 자를 잡아서 귀양보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인천개항(仁川開港) 문제가  시끄러워졌을 때는 원로  이유원(李裕 元)이 자기만 반대하는 척하고 사의(辭意)를 표명했다.  그러자 김병학(金 炳學), 홍순목(洪淳穆), 한계원(韓啓源), 이최응(李最應)의 각료들도 일시 에 단결해서, 자기들도 인천개항을  찬성한 바가 없다고 이유원을  반박했 다. 이처럼 처음엔 민비 세력에 아부하기 위해서 개국론에  찬성하던 자들까지 그후에 일본의 이권 강요가 계속되자, 책임을 회피하려고 분렬하기 시작했 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통상조약이 체결된 병자년(丙子年)에 큰 흉작이 들었는 데다가, 민비의 낭비로 국고가  탕진되었기 때문에 백성은 기아에  허덕이 고, 정부관리와 군대에게 봉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큰  경제위기에 봉착 했다. "일본과 친해지면 잘 산다더니, 하늘도 미워해서 이런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은 이와 같은 불평을 터뜨렸다. 대원군은 이런 정치 분위기와 국민 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유림을 모아 개화당(開化黨)이라는 이름을 내건 민비 정권에게 대하여 일대  반격을 착 착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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