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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훈 에세이] 서울의 ‘전문의사’를 꿈꾸며

운영자 2006.02.06 16:45:49
조회 2376 추천 1 댓글 3

  4. 도시 계획 전문가, 세계로 향하다

  
서울의 ‘전문의사’를 꿈꾸며

  1994년 어느 날 나는 UNDP와 세계 은행이 공동으로 초청한 회의에 참석하여 세계 건축가 및 도시 계획가, 금융인, 행정가들과 모임을 가졌다.

  이어 이 회의의 연관 선상에서 브라질 제3의 도시인 쿠리치바(Curitiba)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쿠리치바는 명성 그대로 자연 친화적이며 교통이 편리한 도시였다. 도심에는 긴 보행자 전용 도로가 이어져 있고, 동사무소 같은 건물들에다 등대를 달아 시민들의 등대 역할을 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도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쇼핑몰에는 아이들의 놀이터와 실내 농구장, 시청 및 구청의 민원실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했고, 시청 회의실 중 한 곳은 숲 속 공원 안에 나무로 만들어서 일반적으로 느끼는 사무실과는 정반대의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실제로 물이 흐르는 계곡이 건물 바로 옆에 있었고, 앵무새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과연 유엔이 ‘세계에서 가장 자연 친화적으로 잘 지어진 도시’로 선정할 만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곳에서 시장과 세계 은행 부총재, 그리고 세계적인 건축가와 도시 계획가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간단한 회의를 했다. 시장 말로는 아침 회의는 꼭 그곳에서 한다고 했다.

  나는 그곳에서 차를 마시며 쿠리치바와 서울의 현실을 번갈아 생각했다. 그리고 쿠리치바가 그토록 시민 교통이 편리하고 자연 친화적이고, 걷고 싶은 도시로 거듭나는 데는 그 도시의 시장인 제레미 레르너가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였다는 점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최근 세계 건축가협회 UIA의 회장이 되었다.

  내가 1996년에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도지사가 되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나에게 뜻밖의 충고를 했다. “어느 도시가 되었든 옆에서 아무리 조언을 해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제대로 된 도시를 만들고자 하는 도시 계획 전문가라면 그 자신이 직접 시장으로 나서는 게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닥터 곽도 직접 시장이 되어 서울을 발전시키는 게 어떻습니까?”

  그가 이렇게 말하자 주위에 함께 있던 여러 교수와 학자들도 ‘좋은 생각’이라며 거들고 나섰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사실 한강 개발과 지하철 계획을 포함해서 올림픽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여러 가지 정책적인 한계에 부딪힌 경험이 있었다. 아무리 좋은 제안을 해도 묵살되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허다했고, 건축 및 도시 계획과 관련된 시 위원회의 동료 위원들도 제대로 설득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집행 단계에서도 공무원들이 제대로 따라 주질 않았다. 이러는 사이에 서울의 많은 구릉지나 나즈막한 산들은 마구 파헤쳐지고, 지형 지세와는 무관하게 대규모의 아파트들이 공룡처럼 들어서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조국의 수도 서울은 암세포가 퍼지듯 더욱 병세가 심각해지고 있었으며, 그 아프게 신음하는 소리가 늘 내 귀를 때리고 있었다.  안타까운 서울의 현실을 가슴으로 느끼던 나는 서울에 돌아온 뒤 마침내 시장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골병을 앓는 서울을 두고 언제까지 정책 오류와 시스템 미비만을 탓하고 있겠는가. 그 또한 사랑하는 이에 대한 예의나 도리가 아니었으며, 명백한 직무 유기와 다름 아니었다.

  1997년 중반부터 정가에는 나의 서울시장 출마설이 조심스럽게 나돌기 시작했다. 한 신문은 일찌감치 국민회의의 서울시장 후보는 노무현 현 대통령이, 한나라당 후보는 내가 맡을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민의 신문에는 나란히 우리의 견해를 비교하여 실었다. 그러나 상황은 계획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나는 경선도 치르지 못하고 서울시장의 꿈을 접고 말았다.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사회와의 괴리감으로 아픔을 느껴야 했다. 서울을 사랑하는 마음과 열정만으로는 안 되는 그 어떤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초 내가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어떤 정치적인 야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아울러 내가 오랫동안 정치판에 몸을 담아 지명도를 가진 사람도 아니고 그만큼 선거판에서 이길 가능성이 낮은 것도 사실이라면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서울 시민의 의식 수준을 굳게 믿었고, 시민들이 내 순수한 뜻을 알게 되면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울러 나는 서울이 안고 있는 병을 고쳐 나가는 ‘전문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병들어 가는 서울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 그 고질병을 고치는 일을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 나아가 병을 고치는 수준을 훨씬 넘어 세계인들이 꼭 오고 싶은 21세기 최상의 도시로 만들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당내 경선조차 해보지 못한 채 서울시장 출마의 뜻을 접어야 했던 그 며칠 후, 국민신당 쪽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국민신당 후보로 서울시장 선거에 나설 것을 권유했다. “한국에도 이제 곽 회장 같은 이공계 엔지니어들이 나서서 국가 경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장쩌민도, 주룽지도 다 엔지니어 출신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제안을 선뜻 수용할 수 없었다. 그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최병렬 후보에게 승복을 한 결과가 되었는데, 나 스스로 그 승복 의사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나 또한 결과를 위해 그 과정의 부도덕함은 전혀 개의치 않는 정치판의 습성과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내가 고사 의사를 밝히자 여러 차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이번에 꼭 후보로 나서야 합니다. 만약 이번에 당선되지 않더라도 다음 선거 때는 꼭 될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설득력 있고 고마웠지만,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세상에는 결과보다 훨씬 중요한 가치가 있고, 그 가치는 바로 상식과 도덕이 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결국 서울시장에는 국민회의 후보가 당선되었고, 도시 전문가로서 ‘서울을 위한 참 좋은 생각’을 펼쳐 보겠다는 내 꿈도 일단 접어 두어야 했다. 150년 전 파리를 세계적인 도시로 만든 사람은 도시 계획 전문성이 있는 오스만이라는 시장이었고, 유엔이 ‘세계에서 가장 잘 지어진 도시’라고 격찬하는 브라질의 쿠리치바 역시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인 시장에 의해 건설되었다. 따라서 꼭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정치인이나 관료가 아니라 도시 계획 전문가가 나서야만 교통 문제와 녹지 문제 등 산적한 도시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면 오랜 지병에 시달리고 있는 서울의 상처가 아물게 될 것이고, 서울은 세계인이 찾는 멋있고 개성 있는 도시, 모두가 살고 싶은 삶터가 될 것이다.

  시장 출마의 기회를 가졌건 가지지 못했건, 나는 늘 서울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한다. 그것이 어쩌면 짝사랑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치지 않고 그 사랑을 계속할 생각이다. 특히 4대문 안의 자연을 회복시키는 일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진심으로 도울 것이다. 서울에 대한 내 간절한 사랑은 이 나라에 대한 간절한 사랑의 뿌리에 다름 아니다. 서울 사랑과 한국 사랑, 그 지독한 사랑을 계속하며 내 남은 인생을 산다면 언젠가 내 죽은 뒤에라도 서울과 한국이 그 깊은 사랑을 알아 주고 내 구애를 받아 주지 않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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