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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에 나타난 유태민족의 운명관

운영자 2008.10.17 18:19:43
조회 1081 추천 1 댓글 5

 
  구약시대 유태민족의 운명관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은 구약성서에 들어 있는 ‘욥기(記)다. 욥은 여호와에 대한 신앙심이 투철하고 인품도 훌륭한 부자였다. 그것을 보고 사탄은 여호와를 부추겨 그를 시험해보도록 꾄다. 그래서 욥은 재산을 잃고 병까지 걸리는 등 갖가지 재난을 겪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사탄과 여호와가 동격의 신으로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악의 화산인 사탄은 여호와 신과 적대적 관계에 있으면서도 절대자 여호와에 의해 멸망되지 않는다. 여호와가 무소불능(無所不能)의 힘을 가진 신인데도 불구하고 사탄을 처치하지 못한다는 것은, 언뜻 동양의 음양(陰陽) 이론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실제로 속을 들여다보면 사탄은 항상 인간의 신앙심을 시험하기 위한 필요악적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모든 불행을 사탄의 유혹에 속아넘어간 인간의 잘못으로 돌리려는 ‘교묘한 자기합리화’가 잠복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칙적으로 기독교는 인간의 행, 불행이 인간의 선행이나 악행과는 무관하게 무조건 여호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불행이 사탄의 유혹에 빠진 죄과(罪果) 때문이라는 보조적 원인을 설정해놓음으로써, 모든 불행의 책임을 인간에게 덮어씌우고 있다. 말하자면 자업자득론(自業自得論)과 도덕적 인과율로 인간 개개인의 자유로운 쾌락추구를 저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욥은 갖가지 불행을 경험하면서 깊은 회의에 빠진다. 친구들은 그의 불행이 그가 저지른 죄 때문이라고 몰아붙여 그를 회개시켜보려 하지만 그는 회개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졸지에 원인 모르게 닥쳐오는 불행에 아연실색해질 때가 많은데, 욥의 고뇌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그가 회의와 번뇌에 빠지자 여호와가 드디어 직접 욥 앞에 나타난다.


 욥이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며 여호와에게 하소연하자 여호와는 자신의 전응함과 위대함을 자랑하며 대자연의 엄혹(嚴酷)한 운행질서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여호와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것이 내 맘대로다”라는 것이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이나 잔잔한 바다 위에 파도가 몰아치는 것이나 다 ‘내 뜻’이요, ‘내 의지’니 만큼 그 이유를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때 욥은 홀연히 깨닫고서 이렇게 외친다. “주는 것도 여호와 마음대로요, 빼앗는 것도 여호와 마음대로다”라고.


 그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동시에(아무리 생각해봐도 불행으로 보상해야 할 죄가 없으므로) 그렇다고 해서 여호와를 원망하지도 않는 지혜를 보인 것이다. 말하자면 운명 앞에 비굴해지지 않으면서 절대적 체념의 경지 또한 이룩해낸 셈이다. 그러자 여호와는 욥의 ‘깨달음’을 가상히 여겨 그전보다 몇배나 더 큰 현세적 복락을 허락해주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욥기’는 인과응보적 도식론에 빠지지 않으면서 인간의 불행을 설명해보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탁월한 문학성을 보이는 저작물이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여호와신을 인간운명의 주재자로 가정하여 인간의 불행을 합리화시켰다는 점에서 기존의 일반적 운명론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진짜 체념 뒤에 찾아오는 행복’은 그것의 외형이 기독교든 불교든 또는 여타의 사탕발림식 인생론이든, 인간의 진보적 운명개척 의지에 쐐기를 박는다는 점에서 득보다는 실이 많은 자위책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에 욥의 체념이 행복을 되찾아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그는 계속 여호와를 원망하지 않는 상태로 의연하게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었을까? 나는 ‘졸지에 찾아오는 불행’이라 할지라도 그 기본적 원인을 악착같이 찾아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운명의 힘(또는 신의 뜻) 때문도 아니고 죄의 대가 때문도 아닌, 그 어떤 ‘물리적 원인’이 불행을 초래한다는 사고방식만이 인류의 행복한 미래를 보장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욥이 걸린 병이 예컨대 문둥병이라면, 문둥병은 하늘이 내린 형벌이 아니라 병균의 장난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난 뒤라야 병균의 발견이 이루어질 수 있고, 문등병의 근절 또한 이루어질 수 있다. 지금 문둥병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 아니라 의학의 발전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병균의 발견이 이루어진 뒤라야 ‘하느님의 뜻’이 부정되곤 했다. 19세기 중엽 프랑스 의학자 파스퇴르의 의학혁명이 좋은 예다. 하지만 아직도 성병을 하늘이 내린 형벌로 본다든지, 지구의 종말을 주장하며 그것을 민중 개개인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신의 응징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그들의 주장은 대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기 위해 각자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논리에 바탕하고 있다.


 하지만 굳이 죄를 따진다면 대개의 병의 경우는 병균이 죄요, 살인이나 절도 등의 경우라면 개인을 죄에 빠지도록 만든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사회제도가 죄다. 대부분의 도덕적 자성론(自省論)들은 소외된 약자로서 갖는 마조히즘 심리와 부도덕한 권력에 대한 나약한 순응을 합리화시키는 데 머물고 있다.


 물리적 원인이 없는 고통은 하나도 없다. 정치적, 사회제도적 가학(加虐)의 대상이 되는 것 이외에도, 이를테면 건강한 사람이 어느날 뜬금없이 심장마비로 죽는다 해도 그것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마음’의 물리적 메커니즘 때문이다. 지독한 권태감이라든가 현실도피를 하고 싶은 마음이 심장마비를 무의식적으로 불러들였을 것이다.


 욥이 겪은 고통 역시 그래서, 지나친 행복에 대한 쓸데없는 불안감과 죄의식이 스스로 자신의 고통을 불러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좀더 당당하고 뻔뻔스런 무신론자거나 쾌락주의자였더라면 그런 고통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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