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사후에 만들어진 기독교적 내세관은 인간의 적극적 운명개척에 오히려 지장을 초래하였다. 이를테면 예수가 한 말인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같은 비유를 글자 그대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가 이 비유를 현실적 효용성에 목적을 두고서 만들었다고 본다.
소수의 부자들이 이 세상의 재화(財貨)를 소유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부자는 마땅히 그들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해줘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하늘나라’의 현세적 실현이 확실히 가능하다는 것을 예수는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 어렵다고 한 것은 다분히 부자들을 위협하여 내세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나누어주게끔 유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예수의 이러한 생각은 사회민주주의적 정치관의 결과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득권화된 기독교는 중세에 이르러 훨씬 더 예수의 생각에 반하는 쪽으로 흘러 하느님의 뜻을 핑계삼아 가렴주구를 서슴지 않았고, 마녀사냥 등 인권유린을 서슴지 않았다. 보카치오의 소설 ‘데카메론’에는 당시 성직자들의 이중인격적 위선이 유감없이 폭로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 기독교계의 평균적 정신수준은 혼란된 난맥상을 보이고 있다. 일부 보수파에서는 성의식에 있어 ‘쾌락으로서의 성’을 부정하고 자위행위조차 죄악시했던 중세기적 결벽주의를 한 발자국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으며, 같은 기독교라 하더라도 교파가 다르면 서로 사이비로 몰아붙여 사탄시(視)하며 싸우는 일도 일어난다.
또한 개인의 잠재적 콤플렉스와 적개심들을 윤리적 경건주의에 갖다붙여 ‘도덕을 빙자한 부도덕한 테러리즘’(즉 moralterrorism)으로 한풀이하려 드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라든가,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여기고 현세를 무조건 악의 온상으로 보아 내세적 열락(悅樂)에만 모든 노력을 집중시키는 것 등, 우리나라 기독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상당히 많다. 특히 한국의 기독교는 비교적 자유롭고 융통성 있는 유럽식 기독교가 아니라 1920년대에 금주법을 실시했을 정도로 보수적인 미국식 청교도주의가 주종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진보적 세계관과 적극적, 창조적인 인생관의 보급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특히 고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고난받는 신민(神民)으로서의 긍지를 강조하는 것은, 자칫하면 사람들을 고난중독성 마조히스트로 만들어 진취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할 우려가 있다. 또 우리나라엔 신비주의적 종파가 많은데, 기이한 환상을 경험한 사람들이 오히려 훌륭한 신자로 추앙받는 것은 특히나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포이에르바흐는 ‘기독교의 본질’이란 책에서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단언했다. 인간은 ‘상상력’과 ‘욕망’ 그리고 ‘이기심’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욕구하고 있지만 도저히 실현시킬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상들을 ‘신’이라는 존재를 통하여 구현시켜 도움과 위안을 받으려고 한다. 신이란 결국 인간의 욕망이 상상 속에서 상징적 존재로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이며, 환상을 통해서라도 실현시켜보고자 애쓰는 인간 욕망의 부산물이란 얘기다.
포이에르바흐의 말은 건전한 상식에 바탕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상식을 무시하는 한국 기독교의 병폐를 지적하는데 가장 적절한 쓰임새를 갖는 진술이라고 생각된다. 이기적 욕망을 종교적 환상을 통해 자폐증적으로만 충족시키려들 때 그 사회는 정체될 수밖에 없다. 이기적 욕망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이기적 욕망은 환상이 아니라 실제적 노력에 의해 구체적 쾌락의 형태로 당당하게 성취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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