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연한 풍파를 겪을 때마다 찾아보게 되는 것은 역시 수양서나 섭세법서(涉世法書), 또는 인생론 같은 책들이다. 나는 주로 ‘채근담(菜根譚)’을 애용하고 있는데, 그런 책들이 가르쳐주는 것은 언제나 같다. “참고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가 그것인데, 그럴듯한 말로 들리긴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서는 어쩐지 허전하여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인생살이의 방법을 일러주는 책들은 대개 역경을 인내로 극복하라고 가르치면서, 고통을 즐거움으로 감수할 때 결국 행복이 찾아온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매사가 꼭 그렇게 된다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죄 없이 억울하게 사형당하는 사람도 있고, 태어나자마자 정신박약아나 불구자인 사람도 있다.
그래서 내가 요즘 다시 새삼스레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 바로 ‘운명적 체념과 인내’ 처방의 불합리성이다. 특히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을 겪고 나서 나는 ‘인간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지 못하는 세상’, ‘개개인의 생각과 인권이 존중되는 세상’,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세상’ 등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내가 강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학기도중 인신구속까지 당하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판매금지를 위한 재판은 있었어도 외설을 이유로 작가를 구속한 일은 없었다) 법적 폭력의 피해를 입은 것은, 내 사주팔자에 수옥살(囚獄煞)이 들어 있고 1992년 신수(身數)에 관재구설수(官災口舌數)가 들어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진자 이유는 표현의 자유나 절차의 민주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성에 대한 논의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위선적 이중성에 바탕한 ‘도덕적 테러리즘’ 현상만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의 낙후된 경직성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또한 치과의사의 잘못된 치료로 서른살 젊은 나이에 부분틀니 신세를 지게 된 것 역시 내가 어이없는 사고로 고통을 당할 운수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사라면 무조건 믿어야만 한다고 강조하면서 환자의 신중한 의사선택권에 대해서는 별로 강조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잘못된 의료윤리 때문이었다.
이혼 역시 그래서, 내 사주팔자에 처복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성적 취향의 일치나 성격의 조화 같은 것에는 별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하고 오로지 낭만적 열정만으로 결혼에 뛰어들었던 것이 첫째 원인이었고, 누구나 결혼을 꼭 해야만 한다고 믿게끔 만드는 이 시대의 획일적 결혼관습이 둘째 원인이었다.
물론 운명의 불가항력적 힘이 그런 결과들을 낳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마음을 가라앉혀 줄지는 모르지만 보다 진취적인 미래를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인생의 의미는 개척해나가는 데 있지 과거를 합리화하여 스스로 자위하는 데 있지 않다.
나는 이빨로 고생하게 되면서부터 나 자신이 의학에 대해 어느정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우선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한의학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리고 한의학이 갖고 있는 동양적 유물론에 바탕한 진짜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육체중심적 인간관에 매료되었다.
한의학에서는 서양의학처럼 정신적 원인에 의해서 생기는 병을 별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를테면 조울증이나 무당내리는 병, 즉 신병(神病)까지도 약을 통해 치료하는 경우가 흔하다. 내 보기에 한의학 이론의 골자는 “육체가 정신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의학에서는 5장 6부 가운데 뇌를 넣지 않고 있다. 뇌의 역할을 맡은 것을 한의학에서는 심장으로 보는데, 이는 뇌가 지배하는 정신영역까지도 심장이 주도하는 육체의 물질적 대사작용이 좌지우지한다는 이론으로서, 귀신의 장난이나 하늘의 섭리 또는 부도덕한 영혼 등 형이상학적 요소를 질병의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신념이 상징적으로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앞서 말한 ‘마음의 힘’이란 정신력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심장의 힘’을 가리킨 것이고, 나아가 5장 6부의 대사작용이 합쳐서 이루어지는 ‘육체적 물리현상’을 뜻한다. 한의학의 견지에서 볼 때 ‘마음’의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심장 말고도 많다. 예컨대 ‘간이 크면’ 용감한 심성이 되고, ‘쓸개가 빠지면’ 비겁해지고, ‘허파에 바람이 들면’ 과대망상에 빠지게 되는 것 따위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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