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심이란 결국 잘먹고 잘살며 잘 사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적 이데올로기보다는 육체적 본성에 더 충실할 수 있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 벗은 임금님’을 보면, 임금님이 벌거벗고 다닌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하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사기꾼 재단사들이 임금님이 입은 새 옷은 마음씨 착한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고 공갈을 쳐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면 자기자신이 나쁜 놈으로 낙인 찍힐까봐 두려워서이다.
그러나 한 어린아이의 눈에 임금님은 그저 벌거벗고 있는 것으로만 보였다. 어린아이는 육체적 감성에만 충실할 뿐, 쓸데없는 윤리적 선입관이나 눈치보기식 처세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진짜 평상심인 것이고, 이러한 평상심을 벗어난 상태가 바로 무명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성철스님이 타계하자 그가 조계종 종정(宗正) 취임설법 때 말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가 다시금 새롭게 화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 말은 성철스님이 독창적으로 지어낸 말이 아니라 예로부터 선가(禪家)에서 자주 애용되어온 말이다. 설익은 수행(修行)을 하면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이다”라고 말하게 되는데, 그 단계를 뛰어넘게 되면 결국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로 돌아오게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관념의 장난에 빠져 “벌거벗은 임금님은 옷을 입었다”가 되었다가, 다시금 “벌거벗은 임금님은 벌거벗었다”라는 평상심의 경지로 돌아온다는 얘기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평상심을 이토록 강조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평상심을 가져야만 내세가 아닌 현세에 불국토(佛國土)를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구원이 어디 있는가? 하늘 위에 있는가, 땅 위에 있는가? 구원은 나 자신의 본성 이외에는 아무데도 없다. ‘밥 먹고 똥 싸고 잠자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본성이요 평상심인 바, 나아가 더 좋은 밥(요리) 먹고 더 편하게 똥싸며, 더 편안히 잠자고 더 기분 좋게 섹스하는 것을 욕구하는 것도 평상심인 것이다.
인류가 만약 금욕주의나 고행주의로만 일관해왔다면 식량증산은 물론 맛있게 요리하는 방법도 개발되지 못했을 것이고, 편하게 잠잘 수 있는 방법(이를테면 집 짓는 기술이나 난방기술, 또는 안락한 침대 만드는 기술)도 개발되지 못했을 것이다. 더더구나 하찮은(?) 똥 따위를 편하고 불쾌감 없이 누기 위해 수세식 좌변기 같은 것을 개발하는 것도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또한 더 편하게 사랑하기 위해 피임법 같은 것을 개발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오랫동안 고민했었다. 그러다가 짜증으로 발전하기까지 했는데, 별것도 아닌 얘길 가지고 유별나게 폼을 잡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렴풋하게나마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되었다. 평상심이 곧 도(道)라는 말은 우리가 진솔한 본성에 눈떠 순수한 욕망에 정직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도가 열린다는 말이고, 그때 열리는 도는 신통력을 동반할 수도 있다는 얘기인 것이다.
그런데 그 신통력은 요상한 주문에 의해서 생기는 초자연적인 힘이 아니라, 우리가 평상심에 바탕한 신실한 욕구들을 지상에서 이루려고 노력할 때 얻어지는 과학적 진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전의 고승들은 긴 인고의 수행과정을 거쳐 천리안(千里眼)을 얻었지만, 우리는 망원경 하나로 쉽게 천리안을 얻을 수 있다. 누구나 천리안, 만리안이 될 수 있고 무병장수의 건강 등 그밖의 여러 방면에서 무애(無碍)한 신통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불국토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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