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중문리 안에서만 열 번 이상 이사를 다녔다. 정착할 집과 땅이 없어서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버지는 안 해본 일 없이 장사란 장사는 다 손을 대보셨다고 한다. 과자가게, 농약상, 신발가게, 책방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업종을 거치셨다.
그러나 운이 없었는지 연이어 손을 대는 사업마다 실패를 거듭하셨다. 대체로 동네 사람들을 상대로 하다 보니 인정상 외상미수금을 정리하지 못해 망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모질게 장사를 하지 못했다. 장사꾼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냉철한 프로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면 흔히들 하는 말로 장사꾼 체질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 틀림없다.
아마도 아버지가 농약상을 하시던 때였으리라. 그 때는 집집마다 대부분 농사를 지어서 농약을 하나씩 사갔기 때문에 동네에 외상값이 걸리지 않은 집이 없었다. 그들도 농사를 지어 수확을 본 후에라야 소득을 얻는 평범한 농사꾼들이었다. 돈이 생겨야 외상을 갚곤 했는데 여름이나 겨울 같은 농한기철 집에는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사정은 그 쪽보다 우리가 더 나빴다. 아버지는 농약이며 종자 등을 도매상에서 상자와 묶음으로 들여와 장사를 했다. 하지만 막상 팔 물건을 풀어 놓고 장사를 하다 보면 목돈으로 사들인 물건은 푼돈이 되어 돌아왔다.
그때는 사람 좋은 웃음 한 번이면 웬만한 구멍가게에서는 모두 외상을 주고 받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의 거래 장부는 깨알 같은 미수금 내역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몇 장을 넘겨도 외상값을 받았다는 표시로 그어 놓은 빨간 줄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시간 날 때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장부를 들여다보셨다.
“김 씨네는 지난 달에 둘째 아들이 장가를 가서 돈이 말랐을 테고, 박 가네는 소가 죽어서 집안이 온통 초상집이고, 이 씨는 허릿병이 도져서 몸져 누웠다고 하는데 문병은 못할망정 밀린 외상값을 받으러 갈 순 없겠고…”
이런 식으로 열거를 하다 보면 결국 동네에 외상값을 받을 사람은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어쩌다 벼르고 별러 외상을 갚기로 한 기일이 훌쩍 지나면 아버지는 나와 형을 대신 보내기도 하셨다. 대부분은 못 받기가 일쑤였지만 간혹 어린 우리 형제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주머니를 털어 돈을 내주는 사람도 있었다.
외상을 가져갈 때는 온갖 너스레를 다 떨던 사람들도 며칠 후 막상 돈을 받으러 가면 피하거나 나중에 갖다 주겠다고 얼버무리곤 했다. 대충 그 상황만 때우면 그만이라는 식이었다. 밭에 일 나간 집주인을 마루에 앉아서 한나절 동안이나 기다리다 올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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