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츤데레 위스키 문학>

- PART.44 글렌스코시아10, 캠벨타운 영화관 100주년(feat. 홍상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의 명대사는 지금도 영화속 장면과 함께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사랑하는 연인의 무덤덤함을 견디고 견디다 내뱉은 유지태의 한 마디는 그만큼 강렬했다. 나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변곡점을 마주해봤기 때문이다.

길항력. 어떤 힘이 주어지면 그 힘에 대응하기 위해 나타나는 어떤 힘을 말한다. 내가 누군가의 마음의 변화에 좌절했다면, 나도 마음이 변해 누군가를 상처 준 일이 있다. 사랑을 하다보면 그 끝은 둘 중 하나임에 분명하지만, 우리는 또 새로운 사랑을 한다.

가게 문을 열고 한 중년 남자가 들어온다. 흰 머리는 짧게 깎았고 얼굴은 우직해보인다. 콧수염을 상당히 잘 가다듬은 듯 굉장히 매끄러워 보인다. 무신경한 듯 흰 셔츠에 검은 바지. 구두는 갈색 악어가죽 같다. 나이에 비해 좋은 패션감각이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저희 스탭 중 한 명이 추천해줘서 왔습니다. 그 친구가 위스키를 알려줬거든요."

물수건을 건네고 그의 주문을 기다린다. 백바를 천천히 훑어보던 그가 한 병의 위스키를 가리킨다.

"저게 스프링뱅크라는 위스키죠? 지난 번에 한 번 마셔봤는데 좋더군요. 한 잔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위스키를 글렌캐런 잔에 담아 그에게 건넨다. 잔을 받아든 그가 잠시 향을 맡더니 한 모금 마시고 맛을 음미하면서 이야기를 꺼낸다.

"프랑스에 다녀왔습니다. 영화제에 참석하느라고요."

그는 영화 <그 후> 출품 차 프랑스 칸영화제를 찾았다. 그에게 칸영화제는 익숙한 것이었지만, 올 해는 좀 달랐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긴장이 좀 되더군요. 그래도 작년보다는 좀 나아지긴 했지만요. 작년엔...어휴~"

그는 젊은 영화배우와 사랑에 빠졌다. 그것은 좋았으나, 그가 아직 이혼하지 않은 사실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한 여자와는 법으로, 다른 한 여자와는 사랑으로 묶여있었다. 세상은 도덕의 잣대로 그를 비난했지만, 스스로의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맞고 그 때는 틀렸던 것 같습니다. 이제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으니까요."

그가 잔에 남은 위스키를 다 마시고 다음 잔을 청한다. 백바에서 검은 바탕에 건물 그림이 그려진 위스키를 꺼내 그에게 한 잔 건넨다.

"글렌스코시아 10년입니다. 이건 한정판으로 피트가 강한 원액을 쉐리 캐스크에서 숙성했습니다. 6000병 한정 생산에 도수는 50도입니다."

그가 잔을 받아들더니 물끄러미 위스키 병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예리한 그의 눈은 'CAMPBELTOWN PICTURE HOUSE'라고 써있는 지점에서 멈춘다. 

"이 그림은 영화관 같군요?"

"네, 맞습니다. 글렌스코시아 증류소가 있는 캠벨타운의 영화관 그림입니다. 이 영화관은 1913년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 100주년을 기념해 특별히 만든 위스키입니다."

그가 잔을 코에 대고 향을 맡더니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다. 잠깐의 정적. 위스키를 음미하는 그의 표정에서 잔잔한 행복감이 퍼져나간다. 

"영화인으로서 이런 위스키를 보니 참을 수가 없군요. 언젠가 제 영화도 이런 전통있는 영화관에서 상영되면 좋겠습니다. 사실, 영화라는 게 많은 관객을 끌어모아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널리 알려져서 더 많은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네, 사실 감독님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저는 좀 긴장을 했습니다. 저도 감독님의 상당한 팬이거든요."

"아,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뭐 제 영화는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니..."

"그래도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님 중 한 분이죠. 그런 분께 딱 어울리는 한 잔을 대접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하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엔 그저 불륜 저지른 중년 남성에 불과한 걸요."

"사랑이야 변하는 거니까요. 저는 어릴적부터 영화관에 자주 갔습니다. 그 2시간은 세상과 단절되 온전히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죠. 감독님 같은 분의 이야기를요. 이 위스키 라벨에 그려진 영화관처럼, 100년이 지난 영화관에는 얼마나 많은 영화가 상영되었을까요? 그리고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을까요?"

"그렇게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영화라는 게 그래요. 제 이야기를 하는 거거든요. 누군가는 글로, 누군가는 그림으로, 누군가는 음악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죠. 저는 영화로 자기를 표현하는 것 뿐입니다. 요즘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을 노래하고 있는 거죠."

"저는 그런 솔직함 때문에 감독님 영화를 좋아합니다. 아까 지금은 맞다고 하셨지만, 또 몇 년이 지나 지금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또 그걸 솔직히 말할 분이니까요. 영화관에서는 늘 신작만 상영하는 게 아니죠. 가끔은 관객들의 향수를 불러오려고 고전 작품을 재상영하기도 합니다. 좋아하던 옛날 영화를 집이 아닌 영화관에서 다시 보면, 정말 감회가 남다르죠. 잊고 지내던 영화에 대한 사랑이 다시 솟아납니다.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요?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요. 저는 몇 년 후 감독님이 어떤 영화를 만들어낼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