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어떠한 국가나 지역이던지 문화와 문명을 보유하고 있고 이 문화와 문명은 비교적 유사한 문화 및 문명의 집합체라 정의할 수 있는 문화권 내지는 문명권에 소속되어 있다. 예) 서구 문명권, 회교 문명권, 인도 문명권 등
그러한 문명권 중에서 극동을 살펴본다면 뭐니뭐니해도 중국 중심의 동아( 東亞: Eastern Asia ) 문명권을 꼽아볼 수가 있을 것이다. 기실 중국문명의 발자취는 그 문명이 세계 4대 문명 중의 하나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만 보아도 그 연원의 유구함과 형적에서 실로 휘황한 바가 있으며, 동아대륙에서의 찬란한 고전문화의 업적도 중국에 의해서 주도된 점이 많다. 중국문명은 세계사적으로도 기타 3대 문명인 애급,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문명과는 달리 그 문명과 문화가 크게 변형되거나 중도에 단절됨이 없이 민족적 긍지와 전통을 계승해 온 동아대륙 역사의 주역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동아 문명권에서의 중심( Major ) 문명으로 승리의 행진을 구가하던 중국의 동아 문명권도 여타 문명권과의 \' 문명의 충돌( Clash of Civilizations ) \'에서 패퇴를 겪기도 하였으매 세계의 역사에서는 바로 그러한 중국문명의 좌절이 종종 보여지고 있다. 이 장에서는 서구 문명의 중국침탈을 제외하고 문명의 충돌에서 중국문명 팽창과 확산의 좌절의 대표적인 사례를 열거해보려 한다.
1. 동남아와 토번( Tibet )
기원년을 전후하여 중국의 동아문명은 현 중국 남부 지역을 문명권에 편입시키고 더 나아가 월남 북부를 정복하여 이를 기반으로 동남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인도의 인도교 문명 역시 흥기하여 기원후 3세기에서 4세기 경 동남아에 진출하여 영향력을 끼치자 중국문명과 인도문명은 동남아에 대한 문화적 주도권을 놓고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수세기에 걸친 장기간의 문화쟁탈전에서 4세기 경에 동남아에서 인도 문화가 급속히 전파되고 5세기 중엽에는 흉노의 인도 침입으로 인한 인도인의 동남아 이주로 인하여 말련, 월남, 조와( Java ), 인니 및 현 동남아 대부분의 지역이 문화면에서 인도화되어 인도문명권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동남아권으로 현존하게 된다. 중국 동아문명과 인도문명의 동남아 문화주도권을 놓고 벌어진 경쟁에서 중국문명은 인도문명에게 문화적 영향권에서 밀려나 동남아에서는 월남만을 동아문명권에 편입시킨채 현존하게 된다.( 그나마 근세까지 월남 중남부는 월남에게 정복되기 전까지 인도문명권인 점파( 占波 )와 진랍의 영역이었다. ) 또한 유사한 시기에 토번에서 벌어졌었던 문화쟁탈전에 있어서도 중국문명은 인도문명에게 밀려나 토번은 범어( 梵語: 산스크리트 )계의 언어를 사용하는 불교문명권의 국가로써 현존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인도에서 불교가 발흥하여 동아권에 전파됨에 따라 중국문명권은 오히려 인도문명권의 산물인 불교의 지대한 영향을 받기까지 하였으며 중국의 동아문명은 정작 이후 인도에서는 거의 소멸되어 버린 불교를 도입, 인도의 불교를 대신하여 극동의 문명을 보강하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2. 중앙아시아
이같은 동남아에서의 진출과 동시에 중국의 동아문명은 한조부터 중앙아시아 경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중국문명의 중앙아시아 경략은 중국의 분렬로 뒤로 미루어졌으며 이로부터 수백년후 8세기 중반 당조 치하의 전성기에서 중국의 동아문명은 그 역량을 바탕으로 중앙아시아를 향한 진출을 재개한다. 그 유명한 고선지의 원정으로써 절정을 이룬 중국문명의 팽창은 " 타림과 이리분지와 이식쿨 지방의 안주인이었고 타쉬켄트의 주군이었으며, 파미르 계곡을 호령하고 토하리스탄. 카불. 카쉬미르의 보호자(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 "의 결과로써 사실상 중앙아시아를 중국 동아문명권에 복속시키게 되었다. 허나 이러한 중앙아시아에 대한 중국문명의 승리의 진군은 예기치 않았던 강대한 신흥문명의 도전을 받게 되었으매 아랍에서 발흥하여 중동지역을 휩쓸어버리고 중앙아시아로 육박해오는 아랍 회교문명이 바로 그 맞수였다. 결국 운명의 달라사 전투( 751 )에서 고선지의 당군이 지야드 이븐 살리흐의 흑의대식( 黑衣大食: Abbasid caliphate )군에게 패배해버림에 따라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의 평가대로 중앙아시아는 중국이 아니라 회교도 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으며 회교문명의 중앙아시아 침투와 지배는 곧 중앙아시아의 회교화를 가져왔으며 현재 중앙아시아에는 회교도 인구가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이후 기나긴 혼란과 내전으로 중국은 중앙아시아에 진출할 여력을 상실하여 버렸고 중앙아시아에서 중국문명은 회교문명에 완전히 쫓겨나 버렸으며 그로부터 천여년 이후인 청조에 들어서야 중국의 동아문명이 중앙아시아에 다시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 역사적인 운명의 날의 패배로 인하여 동아문명은 단 한 번의 승부로 중앙아시아의 제국을 상실해버렸던 것이다.
3. 비률빈( Philippines )
그로부터 천여년후인 17세기 중국문명은 재차 동남아에 진출할 계기를 마련하였다. 명청교체기의 혼란 속에서 명조의 유장 정성공은 청조에 맞서 명조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그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당시 화란의 식민통치 하에 놓여있었던 대만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화란세력을 축출( 1661 )해버림으로써 그간 동아문명의 변경지였던 대만을 중국문명에 편입시키는 장거를 거두게 된다. 대만에 근거지를 세운 정성공은 곧이어 대만 건너편에 있었던 비률빈을 주시하게 된다. 당시 비률빈은 인도문명, 회교문명, 중국문명이 전래되기는 하였지만 그들 문명이 교차하는 문명의 변경지대로써 여러 부족들이 할거하였던 원시적인 상태에서 서반아의 정복( 1565 )과 식민통치로 넘어가고 있었으며 중국의 화교들도 본격적으로 유입되어 서반아의 여러 차례의 추방과 학살에도 불구하고 비률빈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서반아의 화교 탄압이 계속되자 이에 격분한 정성공은 비률빈을 공격하여 서반아세력을 축출해버리려고 하다가 사망하여 정성공의 비률빈 원정계획은 무산되었으며 정성공의 계승자인 정경 역시도 비률빈에 원정하려고 하다가 중도에 취소하여 불발이 되어버렸으며 정경의 계승자 정극상의 치세에는 대만이 청의 공격을 받아 위태로와지자 비률빈을 정복하여 권토중래를 도모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유약한 정극상과 의기소침해 있었던 무장들은 이를 실천에 결행치 못하고 결국 청에 투항함으로써 정씨왕국은 종결되고 말았으며 그와 더불어 중국문명의 비률빈 진출 또한 좌절되어 버렸다. 비록 화교의 동남아 진출이 계속되긴 하였지만 동아문명은 대만에 이은 또하나의 신천지를 개척할 기회를 놓치고 만 셈이다.
4. 몽골
청조의 치하에서 중국은 극성기에 치달았으며 중국의 동아문명은 이전의 중국문명권의 범위를 초월하여 동아문명의 변경지역이었던 만주와 대만까지 중국문명에 포함시키고 한조와 당조의 선례를 따라 재차 중앙아시아로 팽창하여 비록 늦은 감이 있었지만 중앙아시아권인 몽골, 토번, 유오이( Uighur )를 다시금 동아문명권의 지배에 복속하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만주제국이 멸망하자 다민족제국이었던 중화제국은 사실상 해체되어 버렸으며 그 중에서도 중국문명권과는 본래 이질적인 유오이, 토번, 몽골의 이탈은 중국의 동아문명권에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이중에서 외몽골은 이미 제정 노서아의 지지 하에 분리 독립을 선언( 1911 )하였다가 중화민국 원세개정부와 노서아와의 타협으로 외몽골의 독립을 취소시키고 자치로써 일단 낙착을 보게된다. 그러나 소련 공산혁명 이후 외몽골은 적백내전의 와중에서 중국에게서 다시 분리 독립을 시도하여 소련 공산당의 조력에 힘입어 중국과 노서아 백위군 및 봉건 성속( 聖俗 ) 영주들을 물리치고 드디어 독립( 1923 )하게 되었으며 이후 중화민국은 드디어 외몽골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승인( 1946 )하여 이로써 외몽골은 자주 독립국가로 완전히 인정받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시대에 중국은 재차 내몽골 및 유오이( 1949 )와 토번( 1950 )를 병합시킴으로써 구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중국문명의 통치를 상당 부분 복구시켰지만 같은 공산국가이자 소련의 후원을 받았던 외몽골만은 중국에 편입하지 못하였으며 그리하여 몽골은 중국문명의 지배에서 독립하여 몽골인민공화국으로 현존하고 있다. 이로써 중국의 동아문명은 최후의 문화권의 상실을 경험하였다.
이리하여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동아문명의 팽창과 확산의 좌절에 관하여 대표적인 몇가지 사례를 들어 보았다. 중국문명은 어찌하여 극동을 넘어 더욱 확산되지 못하였는가?
문명의 고립성 및 호환성 부족을 첫번째 이유로 들 수 있다. 중국문명은 상술하였던 것처럼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로 단절성없는 문명권을 누려왔다. 그러나 반대로 중국의 문명은 지리적 원격함으로 다른 3대 문명들에 비하여 교류가 극히 드물게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중국문명은 동아문명의 한문이나 유교, 중화사상 및 철저한 농경문화 등으로 대표되는 독특하고 고립적인 문명을 발전시켰다. 이같은 동아 문명의 속성은 고도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부여해준 반면에 기타 문명권과의 공통점이나 호환성의 부족과도 같은 단점도 야기시켜 문명권의 전파에 장애를 만들었다.
문명의 종교적 팽창성 부족을 두번째 이유로 들 수가 있다. 중국문명은 유교와 중화사상 등 철학으로 종교를 거의 대체하여 종교성이 그다지 특기되지 않는 문명권을 형성하였다. 이같은 색다른 중국 위주의 동아문명의 특징은 동아문명에게서 인도교나 회교, 기독교문명권과 같은 역동적인 종교적 팽창의 부족으로 인한 문명 진출의 원동력을 결여시켰다.( 중국의 대표적인 종교인 도교는 중국 외에서는 한인들 이외에 신도가 거의 없어 동아문명권, 심지어 중국 자체 내에서도 호환이 안되며 이보다는 덜하지만 마찬가지로 중화사상이나 유교는 외부 문명권에 있어서 문화 전파에 있어서는 종교의 팽창력에는 못미친다. 그나마 불교 - 이것도 서술하였던 것처럼 외부의 산물인데 - 만이 동아문명에 있어서 미약한 종교의 존재를 보충해주고 있다. )
동아대륙에 있어서 중국의 비중을 세번째 이유로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기타 문명권에서의 대국의 위상과는 달리 중국의 존재는 하나의 국가임을 초월하여 거의 이미 독자적인 문명권에 근접해 있다. 이같이 자체 문명권이 소화하기도 지대물박( 地大物博 )한 중국의 존재는 동아문명의 외부 진출의 필요성을 상당부분 감소시켰고 동아문명권에서의 자급자족적인 성격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외부로의 진출보다는 동아권 내에서 천하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 즉 동아권의 맹주 중국의 패권투쟁에 더 몰두하게끔 하는 현상을 조성하였다.
마지막으로 거대국가 중국의 존재로 인한 선입견도 이유로 들 수 있다. 전술하였던 것처럼 중국은 단순한 대국이 아닌 그 이상의 문명권과 더 유사하다. 이 중국 내에서 수많은 문화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딘알국가인 중국의 광대성으로 말미암아 일반인들은 동아문명권의 국가가 기타 문명권의 국가들에 비하여 적어보임으로써 동아문명권이 상대적으로 빈약해보이는 착각을 유발하는 것이다.( 만일 중국이 복수의 국가로 병립되어 현존하였더라면 이같은 빈약감은 상당히 감소되었을듯 )
결국 이같은 동아문명에서의 중국의 압도적인 비중 - 이같은 사정으로 이 장에서는 동아문명과 중국문명이 종종 혼용되기도 하였다. -으로 인하여 동아문명의 팽창과 확산은 동아권 개별 집단들의 문명적 확산보다는 교화와 민족동화로 대표되는 한족 위주 중국문명의 확대가 그 주를 이루면서 진행되었으며 동아문명권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고 그리고 중국문명을 많이 수용하였으며 그와 더불어 그 중국에 대해 문명적인 면역성도 보유하였던 한국, 일본, 월남( 동아시아권은 아니지만 )만이 문명권의 성격까지 띤 천하국가 중국의 동화력에서 독립국가이자 주변( Minor ) 문명으로써 현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 장에서는 중국 위주의 동아문명의 진출과 좌절 및 동아문명이 극동지역에 국한될 수 밖에 없었던 문명적 원인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앞에서 나열하였던 것처럼 동아문명은 이런저런 내외부의 상황으로 더욱 확대될 기회를 놓치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중국문명이 열등하다는 증거는 결코 아니며 또한 그렇게 생각되리라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 최소한 그 문명의 영향을 수혜한 한국인들이 할 말은 못되니까 - 그렇다면 중국 위주의 동아문명권이 실제 역사와는 달리 문화쟁패에서 패배하거나 좌절된 지역까지 포괄하였다면 대략 어느 정도의 규모을 보일까? 만약 동아문명이 더 확대될 수 있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전변하였을까? 그와 유사한 지도를 보고 세계 문명의 역사를 상상해면서 오늘의 장을 마무리하도록 하자. 많은 성원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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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조와 그 영향권의 지도 - 비률빈과 동남아제도만 추가된다면 동아문명권의 최대 확산 상상영역에 제일 근접할 것이다.
중국인이 직접 만든 크고 아름다운(?) 중국의 내뇌망상 지도 - 인도, 호주, 파푸아뉴기니, 뉴질랜드, 이란, 이라크만 제외된다면 유사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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