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찌다 모리지 持田盛二 1885~1974
검도를 배울때는 항상 기초기술에 중점을 많이 두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기초기술을 다 알고 있다고
오해를 하고 있지만,이것은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오랜 검도 트레이닝을 하면서 대부분의 검사들이
무엇이기초 기술인가를 잊어 버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나는 기초기술을 배우는 데만 50년이 걸렸다.
그리고 검도 트레이닝을 시작했고 마음으로 하는
검도를하기위해 노력했다.
사람들이 60살이 되었을때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해졌다.
그때부터 나는 노년에 오는 신체의 불이익을 마음으로
다스리기위한 기초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70살이 되었을때 부터는 몸 전체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마인드 콘트롤의
트레이닝을시작했다.
80살이 되었을때는 마인드를 콘트롤할 수가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 머리에 사사로운 생각이 들때가 있다.
이제부터 나는 무심(無心)의 훈련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사제의 인연
1929년 5월 천람무도대회 지정한 선수부에서 우승한 모찌다 모리지(持田盛二) 범사는 우승에 교만해 하지 않고 검도수련에 더욱 정진하고자 이듬해 조선총독부 경찰국의 사범직을 그만두고 동경으로 돌아가 강담사 노마(野間)도장의 사범이 되었다. 강담사의 노마(野間淸治) 사장이 천람시합의 내용과 범사의 인품에 매료되어 그곳의 사범으로 초빙했던 것이다.
당시의 일본 검도계는 다까노 사사브로(高野佐三郞) 범사의 수도학원(修道學院)과 나까야마 히로미찌(中山博道) 범사의 유신관(有信館) 등 파벌색이 강하고, 서로 간에는 전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이런 상태가 계속 되어서는 검도의 보급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모찌다 범사는 사범 취임과 동시에 문파에 구애됨 없이 누구에게나 노마도장을 개방했다.
모찌다 범사의 이런 방침은 크게 주효해서 수련에 참가하려는 검도인들이 거리의 원근을 불문하고 끊이질 않았다. 일본 제일의 실력을 갖춘 모찌다 선생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문파의 사람들과도 교검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노마도장은 일본 검도계의 일대 교류의 장으로서 대성황을 이루었다.
한편 모찌다 선생은 자신이 교토의 무도전문학교에서 지도를 받았던 나이도오(內藤高治) 범사에게서 물려받은 원간대기(遠間大技)의 게이코 방식을 노마도장에서 장려하였다. 그럼으로 해서 그때까지 동경 지방에서 주로 행해졌던 근간 게이코의 결점이 시정되었고, 아울러 두 방법이 상호보완됨으로써 근대적인 이합(理合)의 검도가 확대되어 갔다.
이 무렵 오가와 츄우타로오(小川忠太郞) 범사는 국사관전문학교에서 검도강사를 하고 있었는데, 모찌다 선생이 노마도장의 사범이 되는 계기로 선생의 지도를 받고자 그곳에 다니기 시작했다. 오가와 선생은 그때까지 수도학원에서 다까노 선생에게 사사를 받으면서도 사이무라(齋村五郞), 오오시마(大島治喜太), 나까야마(中山博道) 선생 등에게 가르침을 구하여 파벌에 구애되지 않는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주위에서는 오가와 선생에 대하여 절조가 없다는 등 말들이 많았지만, 파벌을 초월했던 그의 신념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 오가와 선생이 노마도장을 찾게 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노마도장(1952년부터는 묘의도장)에서 모찌다 선생의 수련을 받으면서 오가와 선생은 점점 모찌다 선생에게 경도되어 갔다. 천하일품이라고 일컫는 모찌다 선생의 훌륭한 기술과 강함에서 우러나는 품위있는 검풍은 물론이지만, 그보다 더욱 강하게 오가와 선생의 마음을 끌어당겼던 것은 모찌다 선생의 인간성과 그 생활방식이었다.
오가와 선생은 당시 임제정종석종활 노사(老師)에게 참선을 배우면서 선(禪)의 수행에 힘쓰고 있었는데, 일체의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오로지 검의 도에 정진하는 모찌다 선생의 자세에서 선(禪)의 정신을 발견해 내고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모찌다 선생의 인물됨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많이 있지만,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1957년에 검도10단 제도가 생겨서 그 최초의 10단으로 사이무라 범사, 모찌다 범사, 오가와(小川金之助) 범사, 나까노(中野宗助) 범사 이렇게 네 분이 승단되었다.
모찌다 선생에 지도를 받고 있던 사람들은 스승의 10단 승단을 기념하여 묘의도장에서 축하회를 열려고 계획을 세웠던 적이 있었다. 당일 수련이 끝나고 축하회가 열리는 시간에 맞춰 계획대로 10단 면장을 갖고 오는 사람이 도착하고, 그때까지 비밀로 하고 있던 모찌다 선생에게 관계자가 일의 경위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선생은 면장을 열어보지도 못하게 하시면서 "나는 이런 것을 받을 실력이 없습니다. 나는 아직 수행의 과정에 있으며, 갈 길은 아직 먼데 해가 지고 있는 도정에 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면장을 옆으로 획 밀쳐버렸다. 선생이 면장을 받아쥐는 것을 신호로 축하연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던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입장이 무척 난처했다고 한다. 이 하나의 일을 갖고서도 모찌다 선생이 명리(名利)에 얼마나 무관심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찌다 선생의 사고방식에 공명하고 있던 오가와 선생 역시 자신의 10단 승단을 받아드리지 않았다. 물론 10단 심사를 받을 자격이 있고, 해마다 주위에서 간청을 드렸지만 한번도 지역 검도연맹의 추천을 승낙하지 않았다.
10단이라고 하면 최고 단위로, 그 위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을 완성시킨 인물에게 수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검도가 인간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완성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석가모니도 아직까지 수행중"으로 도의 수행에는 당연히 종결이란 없다. 모찌다 선생도 오가와 선생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오가와 선생의 다음 말씀이 그런 추정을 가능케 해준다. "인간이 인간에게 최고의 것을 수여한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 8단 9단 정도에서도 그 지위에 안주하여 수행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
모찌다 선생은 만년, 자기의 수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검도는 50을 지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수행에 들어갔다. 마음으로 검도를 하려고 노력하면서부터이다. 60이 되면 다리 허리가 약해진다. 이것을 보강하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을 활용하여 약점을 강화하려고 노력하였다. 70이 되면 몸 전체가 약해진다. 이 때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수행을 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되면 상대의 마음이 이쪽의 거울에 비춰진다. 마음을 조용하게 갖으며 동요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1954년 11월 오가와 선생에게 100회 게이꼬을 제안했던 것이 모찌다 선생 69세 때이다. 바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수행"으로 들어갈 무렵이었다.
오가와 선생은 그 때 53세. "검(劍)은 마음이며, 선(禪)도 마음이다"라는 검선삼매(劍禪三昧)로 마음을 단련하는 수행에 매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승의 그런 제안은 마치 "내가 마침내 뜻을 이루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만큼이나 고무적인 일이었다.
오가와 선생은 항상 "훌륭한 스승(正師)을 만나지 못하면 차라리 배우지 않음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면서 도의 수행에는 정맥(正脈)의 스승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오가와 선생에 있어서는 모찌다 선생이 확실히 검도에 있어서 정맥의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어느날, 묘의도장에서 젊은 문하생들이 "오가와 선생 정도는 맘먹은 대로 때릴 수 있다"고 수군거리는 것을 어쩌다 모찌다 선생이 듣고는, 미소를 지으며 "당신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게요. 나는 오가와 선생의 검도를 아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데, 그분처럼 이(理)에 맞게 검도를 하는 사람이 흔치 않아요"라고 일언,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한다.
또 모찌다 선생이 돌아가시기 2개월 전, 오가와 선생이 스승의 병상을 찾았을 때, 선생은 "오가와상, 당신은 나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오가와 선생은 감격으로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문자 그대로 사제동행(師弟同行)이요, 간담상조(肝膽相照:간과 쓸개를 서로 드러내 보인다는 뜻. 서로 마음을 터놓고 사귐)로, 사제간의 두터운 유대와 신뢰감이 엿보이는 이야기다.
아훔(ahum: 밀교에서 일체 만법의 시작과 끝을 비유하는말)의 호흡으로 마음과 마음의 검도를 지향했던 두 범사. 백회의 게이꼬 과정에서 과연 그런 교감들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고 있을까.
1992년 盛夏
검도시대 편집국장 小澤 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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