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ight Journal, Oct 2000 by Brown, Eric
1937년 가을, 독일 공군성 기술부는 메셔슈미트 109의 대체기를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해 말, 포케볼프 사의 최고 디자이너인 쿠르트 탕크 박사와의 토의 후, 공군성은 포케볼프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공군성은 109와 영국 전투기보다 훨씬 더 나은 전투 성능을 가진 전투기의 필요성을 특별히 주문했다.
탕크 박사는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엔진을 찾았는데, 이것은 18기통 공냉식 BMW 139엔진이었다. 이 엔진은 경쟁자인 12기통 수냉식 DB 601엔진보다 325마력의 출력을 더 낼 수 있었다. 이 결정은 공군 장교들을 놀라게 했지만, 앞으로의 다이믈러-벤츠 엔진의 공급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졌다. (DB 엔진은 109, 110, Arado 240 전투기의 엔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포케 볼프사의 디자인 팀은 명확한 생각을 지니고 일을 시작했다.: 109가 이륙과 착륙시에 경험했던 심각한 방향 조절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 또 새로운 전폭기의 수직 속도에 견딜 수 있는 강력하고 넓은 랜딩 기어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탕크 박사는 1차 대전 당시 군인으로 근무했으므로, 군대의 기기는 간단하고, 강하고 또한 신뢰성이 있고, 유지 보수가 쉬워야 한다는 것을 배웠었다. 그는 새로운 전투기 Fw190에 이러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결심했다.
탕크 박사는 포케 볼프 사의 사장이기도 했지만, 또한 2차 대전 당시의 유명한 테스트 비행사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테스트 비행사로서의 경험을 최대한 살려서, 전투 비행사들의 짐을 최대한 덜어주기 위해서 항상 노력했다.
공냉식 1550마력 BMW 139엔진을 장착한 첫번째 시제기가 브레멘 공항에서 1939년 6월 1일 첫 비행을 선보였다. 처음은 항력을 줄이기 위해 특별 도관 스피너를 지니고 있었지만, 곧 엔진이 과열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 발견되어, 앞쪽 엔진 커버에는 프로펠러에 장치된 냉각 팬을 가진 신형 특수 냉각 NACA 엔진 커버를 장착했다. BMW는 이미 14기통의 801엔진을 시험 가동하고 있었는데, 이 엔진은 BMW 139엔진에 비해서 약 50cm 길었고 180파운드 더 무게가 나갔지만 약 100마력 정도의 파워를 더 낼 수 있었다. 따라서, 포케 볼프는 이 신형 엔진에 맞추기로 결정했다
BMW 801엔진을 장착하면서, Fw190의 기본 동체에 상당한 수정이 가해졌다. 엔진의 첨가로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리는 것을 상쇄하기 위해서 조종석이 더 뒤쪽으로 움직였다. 이 때문에 조종석은 좀 줄어들었지만, 동체 무기를 위한 공간은 더 확보될 수 있었다. 무게의 증가를 상쇄하기 위해 주익의 길이와 익면적을 증가시켜야 했다. 이 변화로 인해 속도는 약 10km/h 가 떨어졌지만, 상승 속도와 선회력은 증가시킬 수 있었다. 레흘린 시험 센터에서의 성공적인 비행 후, 독일 공군성은 100대의 Fw 190A-1의 생산을 주문했다.
Fw 190A-1은 날씬한 동체에 잘 맞는 1660마력 BMW 801C-1 공랭식 엔진이 장착된 작은 단엽기였고, 잘 연마된 조종석 캐노피는 매우 뛰어난 전방향 시야을 제공했다. Fw 190A-1은 초두랄미늄의 동체에 네 정의 30 caliber (7.9mm) 기관총으로 장착된 형태였다. 이 기체는 1941년 3월 완전한 전대 편성을 갖추었으며, 9월 27일 Spitfire V와 처음으로 교전하여 선회전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더 뛰어난 성능을 보였다.
1942년 1월, Fw 190A-2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기체는 BMW 801C-2 엔진을 사용하였고, 2정의 7.9mm 기총을 엔진 위에, 20mm 기관포를 주익에 장착하고 있었다. 또한 2정의 7.9mm 기총이 종종 주익 바깥쪽 패널에 장착되기도 하였다.
첫번째 대량 생산 버전은 A-3다. 이것의 동력원은 1700마력 BMW 801D-2 엔진이었고, 이정의 20mm MG FF 기관포 대신 더 빠른 발사 속도를 지닌 MG 151 20mm 기관포로 교체되었고, 프로펠러의 바깥쪽으로 위치가 옮겨졌다. 조종석은 더 강한 장갑에 의해 보호되었으며, 조종석 캐노피는 폭발형 볼트에 의해 사출될 수 있는 형태였다. A-3는 다목적 항공기였으므로, 전투기, 전폭기, 정찰기, 뇌격기, 지상 공격기 등의 버전이 생산되었다. 이 버전은 1942년 3월부터 임무를 수행했으며, 그때까지 달마다 250대 이상의 Fw190이 생산되었다. 1942년 10월부터 1943년 3월까지 72대의 Fw190 A-3가 터키에 인도되기도 하였다.
Fw190이 영국 공군의 스핏파이어에 비해 우세가 확실해짐에 따라서, 스핏파이어 V 전대의 파일럿들의 사기는 눈에 띠게 떨어졌다. 영국 공군성에서는 이 상황이 곧 절망적이 될 것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프랑스에 있는 독일 루프트바페 기지에 침투하여 Fw 190을 빼내 오는 특공 작전을 계획했다. 그런데, 연합군에게 행운이 떨어졌다. 1942년 6월 23일 오후 8시 25분, 한 독일 공군 파일럿이 영국 해협에서 스핏파이어와의 교전 후, 방향을 착각하여 세부르크 반도의 독일 비행장인 줄 알고 남 웨일스의 RAF 펨브리 공항에 Fw 190A3를 착륙시켰다. (-_-;;; 삽질이군요) 믿어지지 않게도, 멀쩡한 적군의 최신 전투기가 RAF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A-3는 판보루에 있는 왕립 항공 기지로 수송되어 동체와 엔진이 분해되어 분석되었다. 이후 다시 조립되어, 7월 3일부터 약 10일간의 시험 비행을 하게 되었다. 이 시험 비행에서 Fw 190은 매우 빠른 롤레이트와 인상적인 급강하 가속력을 지닌 정말로 뛰어난 전투기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전투기의 아킬레스건은 스핏파이어와 선회전에 돌입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급격한 가속력 저하였다. 이 테스트를 통하여 또한, 25000피트 이상의 고도에서는 신형 스핏파이어 IX가 Fw190보다 더 나은 성능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정보는 물론, 곧 모든 연합군 전투기 부대에 전달되었고, Fw 190 파일럿은 상승 및 급강하 공격을 즐기는 반면, 연합군 전투기들은 저고도 선회전에 집작하게 되었다.
1942년 늦여름, Fw 190A-4가 등장했다. 이 전투기는 MW-50 물/메탄올 주입 장치를 장착하고 있었으며, 이 장치는 BMW 801D-2엔진을 짧은 시간 동안 2100마력이 나게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은 미군기가 물 주입 장치를 장착하기 2년 전의 일이었다. 또 이 버전은 수직 꼬리 날개의 위에 짧은 라디오 마스트를 장착함으로써 더 나은 통신 성능을 보일 수 있었다.
1943년 4월에서 6월까지, 야간 교전 도중, 세 대의 Fw190A-4가 잉글랜드 남동부의 공항에 착륙했다. (다시 한번의 삽질....) 이 중 하나가 내가 RAF 판보로에서 시험 비행한 기체였다. 나는 내가 처음 쿠르트 탕크의 걸작, 그가 Wurger (butcher bird)라고 불렀던 이 기체를 처음 탔을 때의 흥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 너무 기니까 몇 편에 나누어서 올리겠습니다. 다음 편은 Fw 190A-4의 시승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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