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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일본제국에 내려쳐진 철퇴--- 소련참전

ㅓㅓㅓ 2006.08.12 03:4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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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일본제국에 내려쳐진 철퇴--- 소련참전 소련의 대일선전포고 소련은 대독전에서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이제 승리가 확실해지자 일본에 대한 공격을 계획했다. 포츠담회담에서 스탈린은 소련의 대일참전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영 양국의 요청을 제안했다. 그래서 트루먼은 모스크바선언(1943년 10월 30일)과 아직 발효되지 않은 국제연합헌장 제 103조를 인용하여 소련의 공동행동을 인정하는 서한을 보낸 일이 있었다.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모스크바로 돌아온 것은 8월 6일. 이날 일본외상 도고가 소련 주재 사또오대사에게 잇따라 화평 교섭의 중재역을 소련에게 맡기라는 급전을 보냈다.  하지만 이튿날 사또오가 도고에게 보낸 것은 소련의 선전포고문이었다. 이 선전포고문에서는 대일참전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었다.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거부함으로써 일본은 대소 조정 제안의 기초가 상실되었다. 연합국이 소련에 대해 대일 참전을 제안하였고 소련은 연합국과의 의무에 따라 이것을 수락하기에 이르렀으므로 명 8월 9일부터 일본과 전쟁상태로 들어감을 선언한다.” 이 전보를 받은 도고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8월 9일 주일 소련대사 말리크가 도고에게 면회를 신청했다. 그러나 도고는 이 요청을 거부하고 10일 상오 11시로 연장해 놓았다. 이튿날 말리크가 선전포고문을 낭독하는 것을 듣고 난 도고는 입술을 떨면서 말했다. “갑자기 국교를 단절하고 전쟁 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동양에 있어서도 장래의 사태를 생각해서도 이것은 유감천만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는 세계의 역사가 올바른 심판을 내릴 것이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소련이 소일중립조약의 유효기간 중에 이것을 파기하고 선전을 포고한 것은 이미 그동안 수없는 패전으로 전력을 거의 상실하고 원폭으로 국민들의 전의마저 바닥으로 떨어진 일본에게는 등에 비수를 꽂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에 앞서 소련은 이해 4월 5일 소일 중립조약의 불연장을 통고했었다. 이것은 소련의 대일정책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을 바타내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 수뇌부는 강화조건에 관한 구체적인 결정도 없이 우선 소련의 참전을 방지하고 그 `호의적인 중립`에 의한 강화중개를 의뢰할 생각이었다. 일본정부는 독일이 항복한 이해 5월 15일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추축동맹의 파기를 선언했었다. 그리고 소련과의 예비회담을 위해 전 수상 히로다로 하여금 주일대사 말리크를 상대로 회담을 추진토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말리크는 병중이라는 이유로 히로다와의 회담을 회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고노에를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일왕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하는 구상이 대두되었다. 7월 중순 이래 일본 외무성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모스크바의 반응만을 살피고 있었다. 일본 정부가 말리크로부터 선전포고문을 정식으로 접수한 것은 10일 상오 11시가 약간 지난 무렵이었다. 극동의 병력상황 1944년 말까지 소련의 극동지역 병력은 약 70만명을 헤아리고 있었으며 1,500대의 항공기와 1,000량의 전차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음해 2월로 접어들면서 소련은 시베리아철도를 통해 병력증강을 시작하여 이해 5월에는 수송력을 최대로 가동하여 잇따라 극동지방에 병력을 이동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6월 말에는 약 130만 병력에 항공기 5,600대, 전차 3,000대로 늘어났고 작전 준비기간이 끝나는 9월 말에는 50개 사단이 집결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본 일본육군은 황급히 남방지역에서 병력을 이동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남서태평양과 필리핀, 오끼나와의 잇따른 패전에 도리어 남방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고 남방지역으로 이동된 병력은 마치 블랙홀에 삼켜지는 것처럼 미군의 화력에 삼켜져 갔다. 1944년부터 45년 초에 걸쳐 일본육군은 만주에서 도합 11개 사단을 빼냈고 다시 한반도에서 1개 사단을 빼돌려 남방으로 파견했다. 이미 국경수비대로 개편한 8개 사단과 4개 여단이 있었지만 이것도 본토결전을 대비한다는 이름으로 본국으로 4개 사단이 보내졌고 다시 한반도 남부에서 2개 사단이 일본본토로 돌려졌다. 이렇게 되자 알맹이가 다 빠져버린 관동군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소련군의 극동지역 이동이 본격화된 5월로 접어들자 일본 육군 수뇌부는 할 수 없이 중국 본토에서 4개 사단을 만주로 이동시키고 한반도 북부작전도 관동군이 담당하도록 편제를 개편하여 여태까지 한반도 북부에 주둔하고 있던 제 79사단이 관동군에 편입되었다. 이리하여 이 방면의 일본군은 8월 현재 24개 사단에 9개 혼성여단, 도합 78만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며 항공기는 구식기까지 포함하여 총 23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껍데기만의 전력이었으며 숫자놀음의 전력이었다. 전해 5월에 새로 편성된 제 109사단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억지동원으로 징발된 신병과 노병부대였다. 따라서 관동군의 실제 형편은 과거 8, 9개 사단으로 구성되던 때의 전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태였고 그 장비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미 대독전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노련한 파일럿이 조종하는 최신예기에 대항할 것은 이미 구식화된 제로전투기가 고작이었고  2차대전 최고의 전차라는 명성을 얻은 T-34/85에 대항할 것은 미군의 구식 M3경전차에도 겨우 도전할 만한 성능의 89식 전차뿐이었다. 게다가 그 수도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한편 한반도에는 1944년 말 한때 1개 사단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1945년 초부터 병력을 보충하기 시작하여 5월 30일 관동군 지휘 아래 들어간 이후 남부에서는 대미작전을 북부에서는 대소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소련군의 침공 8월 8일 밤, 어둠으로 뒤덮인 만주평원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날 밤 0시 경, 우쉬레프스키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소련 극동군은 소만국경을 돌파하여 3면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했다. 소련군의 침입은 우선 동부로부터 멜렌코프가 지휘하는 제 1전선군의 항공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이어 소련군은 호두와 오가자의 일본군 진지에 포격을 퍼붓는 등 동부의 일본군 국경감시대는 각지에서 소련군의 습격을 받았다. 제 1방면군 사령관 기다대장은 즉시 예하 전군에게 소련군을 격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대장도 9일 상오 2시, 소련군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전면개전 준비를 명했다. 소련군의 주력은 우선 일본군 제 5군의 정면에 돌입했다. 9일 새벽, 소련군 기갑 1군단은 수분하 정면에서 국경을 돌파하여 11일에는 목능으로 진출하여 그곳 일본군 진지에 맹공격을 가했다. 이어 11일 정오 목단강을 돌파한 소련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일본군을 격파하고 13일 저녁 무렵에는 목능을 손에 넣었다. 목능을 점령한 소련 기갑부대는 액하 동쪽 지구에서 일본군 제 126사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수십문의 야포로 약 8시간에 걸쳐 선제포격을 가한 후 전차가 돌진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쉴새없이 육탄공격을 가하여 전진은 일단 멈추어졌고 도처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상의 주력부대와는 달리 동부 각지에 산재해 있는 국경수비대도 소련군과 격전을 벌였다. 특히 호두의 국경진지를 지키고 있던 제 15국경수비대는 9일 이후 소련군 2개 보병사단과 1개 기갑사단을 맞아 사투를 벌인 끝에 전멸되고 말았다. 또한 나자구 부근에 있던 제 128사단은 약 2개 사단의 소련군 기계화부대와 교전하여 그곳 서방 고지를 둘러싸고 호각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혼춘 부근에 침입한 1개 사단은 일본군 제 112사단의 남익을 공격하였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전선은 차츰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그 주력은 도문과 회령 사이의 두만강 좌안에서 종전을 맞았다. 한편 그르가에프가 지휘하는 소련군 제 2전선군은 9일 밤 흑룡강 방면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했다. 여기에는 1개 전차사단과 1개 저격사단이 동원되었으며 이와는 달리 치카토방면에서도 전차 1개 여단과 2개 저격병사단이 흑룡강을 건넜다. 전투는 서북부 정면에서도 벌어졌다. 홀름바일평원의 요충인 하이랄에는 일찍부터 일본군의 독립혼성 제 80사단이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다. 9일 상오 3시, 말리노브스키가 지휘하는 소련군 제 3전선군은 이곳 만주리 정면의 각 국경감시초소를 습격하여 강력한 기계화부대를 주력으로 하이랄로 쇄도했다. 각 진지에서 치열한 육탄전이 전개되었으나 우선 화력이 그 차원이 달랐고 열세의 일본군은 도처에서 전멸했다. 서부 정면의 남쪽, 외몽고 국경지대에서는 8일 밤 10시경, 일본군 특무기관 파견소에 소련군과 몽고군이 공격을 가해왔고 10일에는 동우침진에서 기계화부대와 외몽고군이 예천방면으로 그 모습을 나타냈다. 동시에 자동차화사단 1개 사단은 개로 방면에 진출하였고 외몽고 기병사단도 임서와 적봉 방면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당시 북서부 국경의 제 1선인 하이랄진지에서 농성하고 있던 제 80독립혼성여단참모 하라중좌는 그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들은 진지간의 연락이 불가능했으므로 각 진지가 독립해서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낮에는 진지에 숨고 밤이 되면 진지에서 뛰어나와 소련군 사령부나 포병진지에 육탄공격을 가할 작정이었다. 도로 연변에 마련된 개인호에 숨어들었다가 적의 전차가 지나가면 느닷없이 달려들어 수류탄과 함께 자폭하는 것도 생각해냈다.(이 수류탄 중에는 기존의 대전차, 대인수류탄 외에도 독일군의 자기흡착식 지뢰와 흡사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 폭탄에는 독일군과는 달리 자기흡착장치와 시한장치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로지 병사가 자신의 손으로 전차의 표면에 고정시키고 격발장치를 당기는 순간 전차와 같이 폭발해 버리는 방법을 썼다. 또한 긴 막대기 끝에 수류탄을 매달아서 그것을 캐터필러나 전차의 보기륜, 기동륜등에 가깝게 폭발시켜 전차를 주행불능으로 만드는 방법도 썼지만 이것 또한 병사가 살아남기는 어려운 방법이었다.) 8월 9일 밤 12시가 가까워오고 있을 때 갑자기 사단사령부에서 호출명령이 내려왔다. 하이랄의 조그만 언덕 위에 있는 사단사령부로 달려가자 시오자와사단장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 밤 연해주의 동부국경 지대에서 소련군의 텐트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아무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으니 언제라도 비상사태에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라.” 긴장한 나는 즉시 하이랄역 부근의 여단 사령부에 돌어와 일직 장교에게 예하 각 부대에 비상준비를 전달하라고 일렀다. 내 숙사로 돌아온 지 20분도 채 안되는 새벽 3시 30분, 돌연 감시초소로부터 전화보고가 들어왔다. “소련군이 노도처럼 침공해 오고 있습니다. 병력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기 저쪽에서 총성이 울리더니 전화가 끊겨버렸다. 사단사령부에서 비상소집에 내린 것은 새벽 4시 15분. 나는 곧 여단 사령부에서 중요 서류와 무기, 자재등을 정리해 가지고 전투지휘소를 옮겨 놓은 후 자동차화 1개 소대의 정찰병을 만주리에 파견했다. 그러나 이 정찰병은 그후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도중에 소련군과 마주쳐 전멸된 모양이었다. 날이 밝자 하이랄 시가에 공습이 가해졌다. 큰 피해는 없었지만 적의 진격 속도는 의외로 빨라 하오 3시경에는 진지 정면에 도달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러나 3시가 지나고 5시가 되어도 적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해가 졌다. 적정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밤이 되었다. 돌연 바로 목전에서 소련군의 일제 포격이 시작되었다. 어느새 적군은 삼하 방면에서 남하하여 전차를 선두로 하이랄강을 건너 하이랄 시내에 들어와 있었다. 적군이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 육박할 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을 만큼 빈약한 병력과 장비였다. 날이 밝아 10일 아침이 되자 그곳 하북산 진지 정면에 있는 적의 전차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뻔히 보이는 곳에 적 전차가 서 있어도 그것을 공격할 만한 화기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바라만 보고 있는 우리들에겐 아랑곳하지 않고 이날 10시경, 하이랄교를 건너온 전차부대 일부가 철도 선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진격을 계속하여 어느덧 우리 진지의 후방으로 돌아왔다. 이 전차부대의 선두에는 백계 러시아인이 손바닥만한 무전기를 가지고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 진지의 후방에는 무기와 식량을 쌓아놓은 집적소가 있었는데 이것은 만주인을 동원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소련군이 곧바로 이 쪽으로 전진한 것을 보면 만주인이 밀고했음이 틀림없었다. 이날 안으로 소련군은 하북산의 아군에게 포격을 집중하여 그곳 수비대를 전멸시킨 후 다시 인근 진지에 포병진지를 구축했다. 12일 아침부터 소련군은 일제공격을 개시하여 전차 40~50대씩 동원하여 공격해왔다. 이에 대해 우리들은 육탄전으로 맞섰다. 보잘 것 없는 장비였지만 그런대로 일진일퇴의 파상공격이 되풀이되었다. 이튿날 일부의 대전차진지가 돌파당하여 이때부터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소련군이 우리 진지에 뛰어들어 난사를 가하면 이쪽은 총검으로 찌르고 유도 솜씨로 쓰러뜨리곤 하였다. 참호 안에는 쌍방의 시체가 쌓여갔고 그 시체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쌍안경으로 후면의 소련군 진지를 바라보니 캐논포(대전차포로 생각됨)와 유탄포, 중포등이 12문 가량 장치되어 있고 그 주위를 전차가 지키고 있었다. 포를 보자 욕심이 생겼다. 이쪽은 포를 단 1문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쪽에 중화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소련군 포병은 상의를 벗어던진채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것을 본 오까다소좌가 제 1선 중대장 1명과 의논하더니 적이 낮잠을 자고 있는 동안 그 포를 훔쳐오자고 제의했다. 그 계획을 들어보니 먼저 보병을 동원하여 초원에 잠입했다가 낮잠을 자는 소련병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회를 잡아 트럭 3, 4대를 가지고 적 진지에 달려가 그들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포를 싣고 돌아온다는 계획이었다. 나는 그 계획이 너무 황당한 것이어서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고 있었는데 이튿날 오까다소좌가 다시 달려왔다. “참모님, 오늘 결행키로 했습니다. 머지 않아 곧 보병이 수류탄을 던질 것입니다.” 얼마 후 초원쪽에서 섬광이 일더니 동시에 4개의 섬광이 그 뒤를 이었다. `그렇지! 수류탄을 던진 모양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숨을 죽이고 있는데 느닷없이 내 옆으로 포탄이 떨어졌다. 섬광은 이쪽의 수류탄이 아니라 소련군의 일제 포격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소만국경에서 소련군의 일제 공격이 시작되자 관동군 사령부는 이미 마련된 계획에 따라 장춘에서 2, 3㎞떨어진 남령으로 사령부를 옮겼다. 이어 소련군의 남진에 따라 다시 통화에서 사령부를 옮겨 정춘-대련간의 철도와 장춘-도문간의 철도선을 연결하는 삼각형의 방어진에 농성하여 장기 저항전을 벌일 방침을 세웠다. 그런데 10일 도쿄로부터 작전명령이 전달되었다. “관동군 총사령관은 침공하는 소련군을 격파하여 조선을 보위하라.” 만주가 아니라 조선을 보위하라는 명령을 받자 남만주의 삼각지대에서 저항전을 벌이려던 관동군은 수많은 일본 민간인들을 방치한 채 우선 사령부를 통화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부의를 비롯한 괴뢰정부기관에게도 통화로 이동하라고 재촉하여 부의황제를 비롯한 일행은 13일 아침 천둥과 폭풍우가 몰아치는 장춘역을 떠나 통화로 향하고 있었다. 한반도로 옮겨지는 무대 8월 9일,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너 한반도 북부에 진출하여 옹기와 나진에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8일 밤 11시 55분, 나진 시민들은 웅기령 방면으로부터 들려오는 항공기편대의 폭음을 들었다. 이어 나진 일대에 수많은 조명탄이 터지더니 대폭격이 시작되었다. 이 바람에 부두 근처의 관동군 창고가 불타오르고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수많은 일본 선박이 가라앉았다. 제 1파 공격대가 북쪽 하늘로 사라지자 다시 제 2파가 날아들어 주로 부두 근처에 맹폭격을 가했다. 이미 제 1파 공격으로 나진 경찰서와 우체국이 파괴되어 전화도 불통되고 라디오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소련기가 1대 격추되었다. 기체 안에서 반쯤 탄 조종사의 시체를 꺼냈으나 어느 나라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유럽여행 경험이 있는 치과의사에게 그 시체를 보였더니 그는 이 시체는 소련인의 것 같다고 했다. 공격받는 동안에도 공격하는 것이 어느 나라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한심한 일본군의 풍경이었다. 나진의 일본인 시장 기다무라가 헌병대에 달려가 물었더니 헌병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내습한 적기는 소련기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소련의 공격은 미군과 그 밖의 나라에 대한 체면 때문에 참전했을 뿐 정말 일본과 싸울 의사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마치 장고봉사건때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일본군 헌병대에 다시 찾아가 보니 밤새 도망쳐 버리고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평소에는 군도를 휘두르며 민간인들에게 기세를 올리던 그들은 사태가 급박해짐을 깨닫자 바로 도망쳐 버린 것이다. 웅기의 폭격은 9일 상오 5시경부터 시작되었다. 우선 부두 근처에 대한 폭격으로 많은 선원들이 중상을 입었다. 웅기의 하늘을 휘젓고 다니는 소련기에 대항하는 일본군의 저항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놀란 시민들은 식량을 가지고 산으로 피난하기 시작했고 이러는 동안에 일본군은 경찰, 헌병대 병영, 부두 창고에 불을 질렀다. 11일 저녁에는 소련 군함 2척이 육전대를 상륙시키기 시작했다. 한편 장고봉 부근의 소련군도 두만강을 도하하여 경흥으로 쇄도했다. 경흥 대안의 일본군이 저항을 시도했으나 9일 상오 9시에는 소련군에 의해 완전 포위되어 약 1개 중대 병력이 절반 이상의 전사자와 중상자를 내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8월 9일 상오 9시, 함북 경찰부장이 소련군 침입을 발표했다. 이어 군당국은 관할지역 내의 전 재향군인을 동원하여 임시부대를 편성하여 회령의 소집부대는 경흥을, 나진의 소집부대는 나진항을, 청진의 소집부대는 청진만을 경비하도록 했다. 그러나 오합지졸로 된 이 부대는 편성이 끝나기도 전에 도주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뒤를 따라 피난하고 있는 일본 민간인들에게도 소집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 영장은 실효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고 소집된 사람들도 싸울 생각보다는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는 판이었다. 한편 한반도 남부에 배치되어 미군의 상륙을 대비하고 있던 일본군 제 17방면군도 소련군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북쪽으로 돌려졌다. 이 무렵 한반도에 있던 일본군은 일본의 본토결전에 호응하여 그 작전목표를 2가지로 나누고 있었다. 북부의 대소작전과 남부의 대미작전이 그것이다. 미군이 오끼나와를 점령한 다음에 공격해 올 예상지로 일본 군부는 제주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제주도를 제압하면 대한해협을 지배할 수 있고 또한 황해를 누를 수 있다. 이것을 두려워한 일본군은 한라산의 산허리에 토치카를 만들고 비행장도 부랴부랴 건설하기 시작했다. 1945년 4월에는 여기에 제 58군을 배치하여 종전 당시 병력은 3개 사단 반, 약 5만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7월로 접어들자 이 섬에 있는 일본인 부녀자는 뭍으로 소개시키고 나머지 남자들은 미군이 상륙했을 때 산중의 일본군과 운명을 같이 하도록 하였다. 제주도 다음에는 부산 부근과 군산 부근이 미군의 상륙지로 예상되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도 갖가지 방어시설를 구축하고 부대를 주둔시켰다. 이어 함흥에도 제 34군이 신설되기에 이르자 평시에는 서울과 나남의 2개 사단에 지나지 않던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수는 35만으로 대폭 증가했다.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에까지 공격해 들어오자 이 배치는 갑자기 변경되었다. 9일, 대구 부근에서 제주도로 이동준비를 하고 있던 제 120사단은 경성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동시에 남부지역 담당의 제 17방면군을 관동군의 지휘 아래 들어가도록 하는 편제 변경이 있었다. 이어 전주에 있던 제 320사단도 원산으로 이동하였고 제 120사단도 평양 부근에 집결했다. 그러나 최후의 소집명령을 받고 모여든 병사들은 그 60%가 한국인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소집영장을 받고 인솔자의 뒤를 따라 신사참배를 억지로 하게 되었지만 이들이 거기에 기원한 것은 일본의 멸망이었다. 소련군 청진 상륙 청진이 소련군의 공습을 받기 시작한 것은 9일 하오 3시, 그리고 맹렬한 함포사격에 이어 상륙이 개시된 것은 13일 상오 11시가 약간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때 나남-청진간의 별봉진지에 배치되어 있던 요시오까는 그 당시 그가 겪은 상황을 세밀히 기록하고 있었다. -8월 12일 새벽 4시, 소집영장을 받고 12시까지 청진의 일본제철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여기에 모인 것은 무산, 고무산, 부령, 청진, 나남사람들 뿐이었다. 이들로써 1개 대대를 편성했는데 8할 이상이 반도 출신, 일본인들 중에도 전혀 훈련을 받지 못한 자가 많았다. 나는 제 1소대장에 임명되었다. 무기는 소총뿐이었고 군복이 없어 국민복에다 계급장을 붙였다. 13일 아침, 대대장과 중대장이 별봉에 올라 진지가 될 만한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갑자기 한 병사가 달려오더니 “소대장, 바다를 좀 내려다 보시오”라고 외쳤다. 그가 가리키는 대로 해상을 바라보니 길이 14~15m정도의 상륙용 주정 3척이 공중엄호를 받으며 천마산의 부두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전투준비를 지시하고 병사들에게 탄약을 나누어 주었다. 부근의 고사포 진지에서 2, 3발을 쏘았지만 명중하지 않았다. 나는 소총 발사도 할 줄 모르는 병사들에게 부랴부랴 소총사격법을 가르쳐 주었다. 탄창이 없어 호주머니에 총탄을 넣은 병사들이 방아쇠 당기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날밤, 소련기가 미쓰비시와 일본제철 부근을 폭격했다. 이때 여러 가지 소문이 돌았다.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역상륙했다.” “아군이 오끼나와를 탈환했다.” 이런 소문을 주고 받으며 웅성거리고 있는 병사들 사이에서 누군가 외쳤다. “일본 해군이 도착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수평선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푸른 파도를 헤치고 달려오는 군함이 있었다. “아아, 우리 해군이 왔다. 이젠 안심이다. 빨리 나남에 보고해야겠다.” 이렇게 외치면서 다시 한번 그 군함을 살펴보자 그것은 모두가 소련군함이었다.- 소총밖에 가진 것이 없고 사격법조차 모르는 일본군을 상대로 소련군은 거의 무저항 상태에서 청진항에 상륙했다. 이미 일본인의 피난행렬이 줄을 지었다. 국경 부근에서 일본인이 가장 먼저 피난하기 시작한 것은 아오지의 회암에서였다. 여기의 인조석유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가장 먼저 피난길에 올랐다. 9일 하오 2시에 석유공장은 가동을 멈췄고 3시에 적에게 이용될 수 있는 시설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공장 내의 곳곳에 폭음이 울려퍼졌다. 하오 6시, 일본인 부녀자에 대한 피난명령이 내려졌다. 이날 밤, 남자들은 죽창을 들고 공장 부근에 모여 있다가 소련군이 가까이 접근했다는 소식을 들자 모두 가족들과 함께 도망치고 말았다. 이들에게 운송수단은 충분하지 않았다. 노인과 환자, 아이들을 끌고 험한 산길을 걸어 피난을 가고 있는 민간인들 사이를 뚫고 일선에서 후퇴하는 트럭과 기마부대, 우마차등이 남쪽으로 달렸다. 그동안 다른 민족을 그렇게 괴롭혔던 일본인에게도 민족의 유랑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출처 : 디펜스코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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