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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혈전 노몽한전투

ㅓㅓㅓ 2006.08.12 04: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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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혈전 노몽한전투 노몽한 히라누마내각이 독일과의 동맹문제로 한창 시끄러울 때인 1939년 5월 중순 노몽한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은 전에 언급한 장고봉분쟁과 마찬가지로 일본과 소련간의 국경분쟁이었으나 장고봉사건보다는 중대성을 띠고 있다. 처음에 이 사건은 내몽고와 외몽고의 주민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과 소련간의 분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일만의정서`에 의해 만주국의 국방을 담당하고 있었고 소련은 외몽고와 상호원조조약으로 똑같은 책임을 분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노몽한이란 곳은 만주 북부의 하이라르 남쪽 60㎞지점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1939년 5월 12일, 초원지대인 이 마을에서 소규모의 외몽고군이 하르하강을 건너 만주경비대와 충돌을 일으킨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원래 이 지방은 청나라때부터 몽고의 유목민이 서로 목초를 구하기 위해 가끔씩 싸우던 곳으로 뚜렷한 분계선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만주사변 이후 괴뢰정부는 호론바일몽고족의 주장을 근거로 하여 일방적으로 근처의 하르하강을 국경선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을 배경으로 하는 외몽고군은 하르하강의 훨씬 동쪽에 경계선을 긋고 이것이 종래의 국경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 주민들은 목초를 따라 때때로 하르하강을 건너곤 했던 것이다. 외몽고군이 진출해 왔다는 소식을 들은 하이라르주둔 일본군은 13일 아침 아즈마가 지휘하는 기병대를 현지에 파견했다. 그러자 외몽고군은 곧 하르하강을 건너 후퇴했으므로 아즈마기병대는 만주군 일부를 현지에 남겨두고 16일 그 주력을 철수시켰다. 이튿날 외몽고군이 또다시 하르하 동쪽에 나타나자 현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 23사단장 고바스바라는 아즈마기병대 외에 약 1,000명의 병력을 증파하여 피아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그 결과 일본군은 그곳 도하점 부근에서 외몽고군의 전차와 포병대에 포위되어 참담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아즈마중좌와 그의 기병대가 거의 전멸된 것이다. 사건의 확대 이리하여 사건은 확대되었다. 소련군과 외몽고군은 6월 18일부터 병력을 증강하여 하르하 부근의 만주군을 쫓아내 버린 후 항공기를 동원하여 일본군 후방지역은 하론아류산등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관동군은 이에 바로 대응했다. 종래의 제 23사단 이외에도 보병 1개 연대와 전차 2개 연대, 포병 1개 연대를 중심으로 하는 야스오까지대를 증파하는 한편 항공병력 1개 집단을 동원했다. 이리하여 보병 13개 대대, 대전차포 112문, 전차 70대, 자동차 400대, 항공기 70대등 도합 15,000명의 병력으로 반격준비를 갖추었다. 관동군의 이러한 움직임을 본 육군 중앙부는 곧 맹렬하게 반대론을 폈다. 당면한 중일전쟁만 해도 힘에 겨운 마당에 이러한 소련과의 분쟁은 중대위협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의 장고봉사건때 소련군의 전투력이 생각보다 뛰어났다는 것도 그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다가끼육상은 육군 내부의 반대론을 물리치고 관동군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초원의 공중전 하르하강변에서 양군이 처음으로 충돌했을때만 하더라도 제공권은 일본군에게 있었다. 그런데 6월 22일 하루 동안에 소련공군은 연 150대를 동원하여 폭격을 가했다. 이날을 계기로 소련은 신예기를 등장시켰다. 이리하여 양군 전투기는 거의 매일같이 초원상공에서 공중전을 전개했고 일본군은 소련공군의 근거지인 담스크비행장을 폭격할 준비를 진행하였다. 이것을 알게 된 일본 대본영은 이러한 군사행동은 사태를 더욱 확대할 것이라 하여 제지명령을 내렸으나 관동군은 이를 무시하고 6월 27일 아침 130여대의 대편대로 담스크를 공습하여 소련기 110대를 격파했다. 대본영은 이러한 관동군의 독단행위를 일왕에게 보고하고 그 결과 관동군은 일왕으로부터 엄중문책을 받게 되었다. 한편 관동군의 지상작전은 예정대로 7월 1일에 개시되었다. 지상병력은 항공대의 엄호 아래 하르하강에 다리를 가설하고 건너편의 소련군 진지 후방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다. 그런데 주력부대가 하르하강 서쪽에 도달했을 무렵 소련군의 압도적인 전차부대가 나타났다. 일본군은 대전차포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으로는 소련군 전차의 전면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고 전차의 수에 비해 대전차포의 수도 너무 적었다. 결국 일본군은 화염병에 의한 격파를 시도했다. 그 결과 약 100대의 소련전차를 파괴했으나 3일 하오부터 거의 전멸적인 피해를 입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하르하강의 혈전 한편 하르하강과 홀스텐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소련군과 격전을 벌이던 야스오까지대도 40대의 전차를 잃고 후퇴하여 다시 제 23사단과 함께 5일에 공격을 재개했으나 소련 전차와 중포의 위력 앞에 패퇴하고 말았다. 관동군은 이러한 참패의 원인이 소련의 병력이 당초 예상했던 일본군의 1.5~2배 정도가 아닌 그 이상이었던 것과 포병의 부족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새로운 중포부대를 투입하여 23일에 또다시 공격을 시도했으나 이것 역시 소련의 압도적 포병력 앞에 제압당하자 그제야 노몽한전투가 승산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7월 16일에 그동안 노몽한 상공까지만 날아오던 소련기가 갑자기 만주의 치치하르 근교에 대해 앞서 담스크비행장을 폭격당한 보복폭격을 가했다. 사태가 차츰 확장되자 관동군은 8월 10일 노몽한부대를 통일 지휘하기 위해 제 6군을 신설하고 소련군 지상부대에 대응했다. 그러나 20일부터 시작된 소련의 대공세에 부딪쳐 제 23사단과 제 7사단이 전멸에 가까운 손해를 입고 말았다. 포위되어 퇴로가 차단당한 제 64연대장과 제 71연대장은 자살해버렸고 드넓은 노몽한의 초원은 일본군의 시체로 뒤덮였다. 고마쓰바라사단장도 포위당한 상태에서 가까스로 탈출구를 발견하고 약간의 잔존병력을 이끌고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여 겨우 핏길을 뚫을 수 있었다. 소련군은 이 무렵부터 중전차대를 등장시켰다. 또한 여태까지 일본군이 우세했던 공중전도 갑자기 증강된 소련군의 항공병력에 의해 제공권이 소련군에 넘어가고 말았다. 27일에 이르러 소련군 병력은 제 1선에 저격병 3개 사단, 보병 5개 연대, 전차 4개 여단, 항공기 150대가 동원되었고 제 2선에는 외몽고 기병 2개 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모든 전력을 총 지휘하는 사람은 후일 대독전에서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주코프였다. 노몽한 지옥전선의 참상 이 전투가 얼마나 처절한 것이었는지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오가와의 회고담을 인용해 보자. 그는 이 전투에서 오른팔을 잃고 귀국하여 삽화가로 생계를 이어간 상이군인이다. -나는 그때 10㎝가농포 중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우리 진지의 후방 200m 상공에 풍선 한 개가 떠오른 것은 1939년 7월 초순의 일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대륙의 여름 하늘에 흔들거리며 떠 있는 풍선은 소련군의 포진지를 관측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풍선 아래에는 등나무로 짠 둥우리 한 개가 달려 있었는데 여기에 몇 명의 관측장교가 타고 있었다. “소련군 포병 발견!” 쌍안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관측장교가 둥우리 위에서 신호를 보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날카로운 금속성 음향이 들려왔다. 일순 긴장된 분위기의 정적을 깨뜨리고 우측의 펑퍼짐한 구릉 저쪽으로부터 3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지상을 기어오다시피 하는 소련기의 급습이었다. 그러나 그 소련기는 내가 있는 포진지가 아니라 풍선을 향해 급상승하면서 맹렬한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퓌잇!” 하고 둔중한 음향과 함께 풍선이 불타기 시작, 탑승원을 태운 둥우리는 마치 땅에 빨려들기라도 하듯 떨어져내렸다. 그것은 시간으로 따지자면 불과 2, 3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구릉과 구릉 사이를 누비면서 놀라운 솜씨를 발휘하는 소련기를 우리는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탑승원 장교는 전원 전사하고 예비기구를 가지고 오지 않았던 기구대는 그날 저녁 후방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소문에 들으니 그들은 그 길로 곧장 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계속되는 포격전 8월 말부터는 매일같이 “유탄포 발사”의 명령이 떨어졌다. 양군 사이에 격렬한 포격전이 계속된 것이다. 소련측의 압도적 포화를 받으며 우리측도 정신없이 포탄을 퍼부었다. 그야말로 미친 듯이 퍼붓고 또 퍼부었다. 상오에 200발, 하오에 300발을 발사하자 포신에 손을 대면 화상을 입을 만큼 달아올랐다. 포격을 시작한 지 3일 되던 무렵부터 3번 포수가 발사후 곧 폐쇄기가 열리면서 탄피가 튀어나오도록 되어 있는 장치가 기능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내가 배속되어 있는 포만이 아니라 모든 가농포가 마찬가지였다. 한 포병이 철사 끝에 못을 매어 그것을 뇌관의 조그만 구멍에 걸어 탄피를 끄집어 내는 방법을 창안해 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끄집어내기까지는 10분 내지 15분이 걸렸으므로 연속사격은 고사하고 한 시간에 4 ,5발 밖에 발사할 수 없다. 일본육군이 자랑하는 근대무기인 가농포도 이쯤되면 박물관감이랄 수 밖에 없다. 그 다음에 생각해 낸 것이 굵은 소나무막대기로 끄집어 내는 방법이었다. 1발을 발사하고 나면 서너명의 병사가 그 막대기를 포구로 집어넣어 기합에 맞추어 탄피를 튀겨내는 것이다. 어떤 날은 이 막대기 작업반이 소련측 포화에 맞아 전원이 쓰러져버린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은 원시적 작업에 의해 가까스로 1시간에 10발 내지 15발의 발사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양쪽 포각이 과열 때문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포신 4.5m의 날씬한 가농포도 이젠 무용지물이 되어 후방의 야전수리장으로 하나둘씩 끌고 가기 시작했다. 포위 7일의 비극 8월 하순부터 9월 초순으로 걸쳐 소련군의 전차가 새까맣게 떼를 지어 하르하강을 건너와 일본군 각 부대를 포위하고 말았다. 내가 소속되어 있던 대대는 큰 항아리꼴의 분지로 쫓겨 포위당했는데 이때는 이미 식량, 음료수, 포탄등이 바닥이 드러난 때였다. 겨우 1문의 포와 몇 대의 자동차가 우리와 함께 포위당해 있었다. 이상한 사이렌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소련전차는 날이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났고 우리는 그들에 의해 세겹이나 포위당해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포위망만 유지할 뿐 조금도 공격해 들어오진 않는다. 식량도 음료수도 없는 일본군은 이젠 1주일도 못가 자멸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무전기도 통신불능상태가 되어 버렸다. 나흘째 되던 날 소련 전투기 3대가 분지를 향해 급강하하더니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그 전투기가 사라지고 있을 때 공중에서 종이조각이 수없이 떨어져내렸다. 나는 그 중의 한 장을 주워보았다. “나는 ○○부대의 ○○1등병이다. 소련군에 투항하여 포로가 되었다. 너희들도 한시바삐 총을 버리고 투항하라.” 일본활자로 인쇄된 삐라였다. 투항이고 뭐고 우선 목이 말라 견딜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발광하는 병사가 나타났으므로 탈출방지를 위해 보초를 세우곤 했다. 그리고 생각해 낸 것이 자동차의 라디에이터에 있는 물을 방출하기로 한 것이다. 가솔린 냄새가 나긴 했지만 그 물은 우리들의 목을 다소나마 축여주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이젠 자동차에 의한 탈출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저항도 할 수 없고 탈출도 할 수 없게 된 우리들에게 드디어 소련군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포위된 지 7일 후의 일이었다. 포격과 폭격으로 인해 자동차가 날아올라가고 산산조각이 난 육체가 날아올랐다. 일제사격이라고는 하지만 이처럼 맹렬한 것은 처음 보았다. 피하려 해도 피할 곳없이 우리들에게 포화는 점점 더 격렬하게 날아온다. 지옥도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나의 오른팔도 이때 날아가버렸다. 피로 물든 노몽한의 어느 구석에 날아가버린 것이다.- 정전 관동군은 새로이 제 2, 4, 7사단을 투입하여 대공세를 취하려 했으나 그것을 알게 된 대본영은 공격중지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육군참모차장 나까지마를 현지에 급파하였지만 관동군은 소련군에게 대타격을 가한 후에 철수할 것을 주장하는 등 좀체로 굽히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관동군 사령관 우에다와 참모장 이소다니는 파면되어 예비역에 편입되고 그 후임에 우메즈와 이이무라가 임명되었다. 그 밖에 육군 중앙부에서도 참모차장과 작전부장이 파면되고 참모급 몇 명이 좌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본정부는 처음부터 노몽한 사태의 확대를 바라지 않는 입장이었지만 현지군의 독주에 끌려다닌 끝에 9월 8일부터 외교교섭을 시작했다. 소련 역시 노몽한사건의 해결을 바라고 있었으므로 양국은 국경이 확정될 때까지 정전 당시의 제 1선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하고 15일 밤 정전협정에 조인하여 4개월에 걸친 노몽한 사건은 종결되었다. 소련은 이 정전교섭을 시사한 직후에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고 정전협정에 체결된 이틀후엔 폴란드에 진주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일본의 외교는 소련에 끌려다니는 꼴이 되었다. 이 노몽한 사건으로 인해 일본군은 전사자 8,440명, 부상 8,700명에 달했으며 소련 및 외몽고군의 손해는 전사상자 9,000명으로 발표되었는데 그후 외몽고는 이 노몽한전투를 국가적 전승기념일로 삼았다. -------출처 :디펜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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