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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산업 발전 주도와 무쇠 같은 스탈린주의 - 카가노비치

카이텔(58.76) 2007.04.22 21: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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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르 카가노비치 (1893. 11. 22. - 1991. 7. 25)

 

 

1893년 11월 22일 카가노비치는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 작은 유대인 개척촌 카바니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가축상이었으며 가족이 많고 매우 가난했다.
이런 환경은 카가노비치에게 큰 부담이었으며, 결국 한번도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다. 대신 책을 읽으며 스스로 독학한다.
아버지가 공장에서 다치자 생계를 이어가기위해 구두공으로 구둣방이나 구두공장에서 14년에 세월을 일하며 살았다. 그러나 가난을 벗어나진 못했으며,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천대와 국가로부터의 권리 제한을 당하며 살아왔다.
이런 비참한 생활은 그를 무신론자에다가 공산주의자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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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 시기에 카가노비치

 

1911년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의 당원이었던 형 미하일을 따라 자신도 입당한다. 카가노비치는 당원으로서 적극적으로 투쟁에 참가했고, 파업을 성공적으로 주도하는 모습에서 고위 당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1914년에 카가노비치는 키예프의 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나 1915년에 제정러시아 정부에게 적발되어 고향 카바니로 추방된다.

그러나 2월 혁명후 다시 돌아와 당의 일을 이어나가며, 1917년 3월에서 4월까지 피혁공 조합장, 유조프카(현 도네츠크) 위원회 부의장을 맡았다. 또한 붉은 군대의 전신인 적위대에 입대하여 사마라에 적위대 대장을 맡기도 한다.

1917 5월에는 사라토프 위원회 위원이 되며, 사라토프 적위대에 제42보병연대 훈련대장을 맡기도 한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볼셰비키 탄압이 이어지자 고멜로 피신한다.

1917년 6월, 페트로그라드(상트 페테르부르크)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1936년까지 이어나가며, 8월에는 벨로루시 볼셰비키 폴레스키군(현 칼리닌그라드주) 위원회 의장 겸 구두공 조합장에 오른다.

 

1917년, 10월 혁명 때에는 고멜 위원회 의장으로 고멜에서의 혁명을 주도한다.

1918년 1월, 적위대가 발전하여 붉은 군대가 되자 카가노비치는 붉은 군대 선전부 인민위원이 된다.

1918년 5월에서 1919년 8월 시기에 니주니-노보고로트에 집행위원회 의장을 맡는데, 이 때 몰로토프를 처음 만났다.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는 서로 닮은 면이 있다는 점과 사상적 경향이 비슷하여 쉽게 친구가 되었고, 몰로토프를 통해서 카가노비치는 스탈린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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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노비치와 몰로토프

 

1919년에서 1920년에는 보로네슈 위원회 의장으로 활동하며, 1920년이 되자 투르크메니스탄으로 발령받는다.

1920년, 투르크메니스탄에 도착한 카가노비치는 투르크메니스탄 중앙위원회 위원과 투르크메니스탄 혁명 군사 위원회 위원을 겸직한다. 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에서 공산화와 러시아의 통치에 저항하는 바스마치 운동 탄압에 참가하여 원정단을 이끌고 적극적으로 투르크메니스탄의 무슬림 주민들을 탄압한다.

 

1922년 4월, 당 제1서기가 된 스탈린은 자신을 도울 인재를 찾게 되는데, 몰로토프는 스탈린에게 카가노비치를 소개한다. 이미 카가노비치는 투르크메니스탄에서의 활동으로 알려져 있었고, 스탈린은 그를 중용하기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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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과 카가노비치


5월,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중앙으로 소환된 카가노비치와 직속 조직원들은 당 제1서기실 조직부 소속이 되며, 카가노비치는 부장이 되었다.
이 기구는 제1서기를 도와 다른 공산당 부서에 직무를 할당하고, 조직 인원과 활동을 조정하는 곳으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카가노비치는 스탈린에게 충성을 다하며, 그의 사상에 충실한 후원자로 공산당의 관료주의적 체계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학력이 부족한 카가노비치에게 이 자리는 어울리지 않았다. 즉 카가노비치는 조직부장으로서 무능했다.


그래서 스탈린에게 절대적 충성을 다하며, 오직 스탈린에 명령을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했고, 자기 의사 표현을 하지 않았다.

1923년에는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지명됐고, 1924년에 중앙위원회 정식 위원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1925년 12월, 중앙위원회 제1서기직에서 물러나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산당 제1서기가 된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지방 구역 중에서 가장 강한 곳이었으며, 이곳의 당 제1서기가 되는 것은 지방 통치자로서 막강한 권한을 가지는 것을 의미했다.

우크라이나로 오게 된 카가노비치는 자신에게 감춰진 재능을 발휘하는데 그것은 건설과 산업 개발이었다. 우크라이나를 통치하던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의 기간 시설 발전에 주력하여 도시화와 기반시설화를 이룬다. 특히 가장 큰 업적은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 발전소를 건설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지지자였던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쿨라크(부농과 지주)에 대한 대대적 경제 억압과 사회적 탄압 정책을 펼친다.
또한 공산당 우파가 추진하던 우크라이나의 지방 자치화 정책을 폐기하고, 많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을 처형한다.

 

1926년에는 정치국 후보위원에도 선출됐다.

 

그의 행위는 부하린을 주축으로 당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우파로부터 거센 비난과 항의를 받았고, 결국 1928년에 사임하여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1928년 7월에 모스크바로 돌아온 카가노비치는 바로 조직국 위원에 선출되어 1946년까지 지속하며, 또한 두 번째로 중앙위원회 제1서기에 뽑힌다.

그의 두 번째 제1서기직은 1임 시절과는 달랐는데 그의 임무는 스탈린의 반대파와 대항하며 그를 당에 확고한 1인자로 만드는 일을 했다. 그래서 처음 제1서기를 맡았을 때보다는 격렬한 활동을 치렀다.

1930년에는 모스크바 당 위원회 제1서기로 1935년까지 맡으며, 정치국 정식 위원, 최고회의 간부회 위원으로도 선출됐다. 특히 그가 정치국 위원까지 오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알다시피 그는 정식 교육을 한 번도 받지 못하고 노동자로서 살아왔다. 그런 그가 당에 핵심 기관인 정치국 위원까지 오른 것은 크나큰 성공이었다. 또한 그는 유일하게 역대 정치국 위원 중에서 학력 없이 선출된 위원이었다.

 

 

 

모스크바 위원회 제1서기를 맡은 카가노비치는 스탈린의 경제 정책에 따라 모스크바와 그 주변 지역에 집단 농장화와 산업화를 총감독한다.
그의 활동으로 모스크바는 점차 서방에 선진 국가들의 발달된 도시처럼 발전하며, 도시 전역에 전선, 전기, 수도 등을 비롯한 기반시설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이룬 업적은 러시아 최초의 지하철 공사였다.

 

1863년에 영국에서 최초로 선보인 지하철은 20세기 초까지 많은 국가들로 퍼져 나갔다. 1930년대에 러시아도 이름 있는 유럽 국가로서  늦게나마 지하철을 개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카가노비치의 감독 아래 공사가 진행되었고, 많은 비용과 인력이 투입되었다.
마침내 1935년 5월, 모스크바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었다. 개통된 지하철은 카가노비치의 이름이 붙여져 1955년까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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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공사장에서
 
 


모스크바 지하철 개통은 소련에게 있어서 큰 의의였다. 소련도 얼마든지 서방 국가들처럼 발전할 수 있으며, 소련도 서방 국가만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지하철 개통은 소련의 산업화와 근대화 그리고 20세기의 성공했던 나라 중에 하나가 되는 그 신호탄인 셈이다.

그러나 공사가 결코 좋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공사 과정에서 길을 막는 건축물들을 모두 파괴한 것이다.


그 속에는 동방 정교회 교회 중에서 가장 높고 넓다는 Christ the Saviour 성당과 농민 반란을 일으킨 푸가초프가 마지막 말을 남기거나, 톨스토이, 부닌, 츠베타예바 같은 러시아의 대문호들이 머물며 작업했던 Iberian 문과 그 위에 예배당(Iberian Gate and Chapel), 모스크바를 상징했던 Sukharev 탑, 모스크바 방어 성벽인 키타이고로드 성벽 같은 역사적 건축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외에 공사를 막는 민가나 건물은 말할 것도 없다.

 

집단농장과 산업화에 대해서도 카가노비치는 관여하여 몰로토프를 도와 집단 농장화와 산업화에 앞장서며, 1933년에는 국영 집단 종장 소프호스에 대하여 대경영 방식과 트랙터 스테이션(MTS)방식을 창안해 농장 운영 효율과 생산량 증대를 높였다.

 

더불어서 몰로토프와 함께 스탈린의 정책에 따라 집단 농장화와 강제 곡물 징수를 하여 1932년에서 1933년에 우크라이나에서 있던 인위적 기근인 홀로도모르의 원인 제공자이기도 했다.
또한 산업화 과정에서도 노동자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했으며, 그것 때문에 일어난 파업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1933년에서 1934년에는 당원 심사회 의장을 맡게 되는데, 카가노비치는 이 직책을 이용하여 개인적으로 당원들을 만나 스탈린의 반대파들과 접촉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당에 계속 남도록 보증해주겠다고 한다.

 

1934년에 제17차 공산당 전당 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카가노비치는 당 개표 위원회 의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다.
제17차 공산당 전당 대회는 새로운 공산당 제1서기에 대한 선출이 목적이었다. 공산당에 여러 핵심 인물들이 후보로 나왔다.
스탈린도 재선을 위해 후보 입찰에 참가하나 당의 지도층 대다수가 반대파로 전향한지라 상황이 불리했다.
이때 스탈린을 도운 것이 카가노비치였다. 카가노비치는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스탈린의 제1서기 후보 출마에 반대하는 290명에 표를 몰래 처분했으며, 다시 개표 결과를 조작했다. 그리하여 스탈린은 제1서기 후보자로 등록된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제1서기 투표가 본격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역시 이번에도 카가노비치가 관여하여 스탈린의 292개의 반대표를 처리한 후 스탈린이 단 2장의 반대표만 받고 제1서기의 재선되었다는 공식 결과를 내보낸다.

 

1934년에서 1935년에는 당 중앙위원회 의장직을 맡았다.

1935년부터 장관급으로 승진하는데 그가 처음 맡은 직책은 철도 인민위원회 위원직이였다. 그는 소련의 핵심 교통수단인 철도를 총괄하며, 산업화를 위한 철도 증설을 하였다.

 

그때 1936년부터 스탈린이 2년 전에 암살된 키로프를 빌미로 당에 있는 반동분자들을 처단한다는 명분 하에 대숙청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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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가운데가 카가노비치, 왼쪽에는 보로실로프다.
앞 줄에는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있다. 앞 줄 맨 왼쪽이 키로프다.

 

카가노비치는 이미 대숙청이 시작하기 얼마 전에 자기 부서에 일하는 철도 공무원과 간부들에게 사보타주 혐의를 씌워 많은 사람들을 감옥에 보냈다.

 

후에 1939년 제18차 전당 대회에서 간첩들과 사보타주들을 찾아 처단해야한다는 연설을 할 만큼 스탈린의 대숙청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으며 반대파 탄압과 체포에 공을 세우고, 수많은 숙청 대상자 처형에 동의를 했다.
철저하게 스탈린의 명에 따라 무자비하게 행동하는 그의 모습 때문에 많은 이들은 그를 “아이언 라자르”, “무쇠 장관”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외에도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스탈린의 유대인 학대에서 카가노비치는 자신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탄압 정책에 관여했다.

 

1930년대 시기에는 대숙청 이외에 일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스탈린의 후계자 후보였던 흐루시초프의 스승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그의 과격하고, 무식하며 스탈린에게 열정적 충성을 다하는 자라고 느꼈고, 회고록에 “겁 없는 인간”이라 평했다.

 

1937년에는 최고 회의(소비에트) 부의장이 되며 철도 인민위원회직에서 물러나 스탈린의 산업 발달에 가장 중요한 자리인 중공업 인민위원회 위원을 맡는다.
때마침 이 시기에는 스탈린의 측근인 경제학자 보즈네센스키가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었다. 


둘은 함께 전면적인 산업 발전을 주도한다. 1937년에 제2차 5개년 계획이 끝나고 1938년부터 제3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됐다. 보즈네센스키는 경제 계획과 이론을 짰고, 카가노비치는 직접적인 건설과 생산을 맡았다.
그러나 이 둘이 합심한 제3차 5개년 계획은 1941년에 독일 침공으로 중도 하차했으며, 수치상으로는 1차, 2차 계획 보다 낮은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허나 이때까지 소련의 산업이 커졌다는 점과 중도 하차하여 5개년이 아닌 3년으로 끝났다는 것을 본다면 전혀 실패가 아니었으며, 이미 1937년에 소련 경제 성장 속도는 저하되고 있었다. 오히려 악조건에서도 상당한 성장률을 보였으며, 전쟁이 끝나고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소련 경제는 엄청난 수준으로 발전한다.

 

1938년에는 철도 인민위원회 위원직을 다시 맡아 중공업 위원직과 겸직하며, 부수상에도 오른다. 거기에다가 최고회의 간부회 위원에도 선출된다.

1939년 1월에는 연료산업 위원회 위원직도 겸직한다.

그의 권력이 절정을 이루었으나 얼마안가 카가노비치는 위기에 놓이고 만다.

 

1939년, 독일과 소련 간에 불가침 조약이 체결됐는데 스탈린은 때를 맞추어 다시 한번 유대인들을 처리하기 위해 대대적 인사 개편을 단행하여 당 내에 있는 유대계 인사들의 직책을 박탈하거나 해임한다.

 

카가노비치도 여기에 휘말려 1939년에 중앙위원회 제1서기직과 중공업 인민위원, 연료 산업 인민위원직을 잃는다. 물론 그는 여전히 정치국, 조직국, 중앙 위원회, 최고회의 간부회 위원이었으며 최고 회의 부의장, 부수상과 철도 인민위원직도 유지하고 있었다. 스탈린 또한 그의 충성심을 잘 알기에 그를 쫓아낼 생각도 없었다. 심지어 연료 산업 인민위원회가 확장된 석유산업 인민위원회 위원에 임명했다.

 

그러나 카가노비치는 혼자 불안했다. 그리고 권력이 줄어든 느낌이었다. 거기다가 석유산업 인민위원회 위원직도 1940년에 다시 잃었다.

견디지 못한 카가노비치는 스탈린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다시 다지고, 다시금 권력을 가지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카가노비치는 즉시 당시에 비행기 산업 인민위원회 위원을 희생물로 삼았다. 카가노비치는 스탈린에게 그가 불만이 많으며, 반동분자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모함한다.
스탈린은 카가노비치의 말을 들어 소련의 비행기 산업을 발전시키는데 그 기반을 만든 그 위원을 1940년에 카잔에 비행장 감독관으로 강등한다.
카가노비치는 그것도 모자라 그에게 비행장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당에서 추방시키겠다고 경고하며, 1941년 6월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그가 간첩행위를 한 것 같다고 스탈린과 논할 정도였다.
결국 이유 없이 모함을 당한 그 위원은 억울함과 배신감에 사로잡혀 1941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카가노비치에게 있어서 이 일은 천륜을 저버리는 행위였다. 그 위원은 바로 카가노비치의 형인 미하일이었다. 카가노비치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형을 버린 것이다.

 

이외에도 1940년에 카틴숲 학살 사건에 동의 서명하면서 스탈린에 대한 충성을 다시 확고히 다졌다.

 

1942년, 카가노비치는 철도 인민위원회 위원직에서 물러나 바로 소련 전시 체제를 총괄하는 국방위원회의 위원으로 뽑힌다.
그는 바로 1943년까지 북 카프카스 와 카프카스 정치위원으로 소련군을 감찰하며, 후방 생산 감독과 특히 물자 수송에 공을 세운다.

1943년에 다시 철도 인민위원회 위원이 되며 사회주의 노동의 영웅으로 올려진다.
 
1944년에 철도 인민위원회 위원직과 부수상직에서 물러나지만, 부수상은 얼마안가 재임하여 1947년까지 지속한다.

 

전쟁이 끝난 1946년에 모든 인민위원회 위원직은 장관직으로 개명했고, 그 구조도 장관직 체재로 바뀌었다. 카가노비치가 처음 맡은 장관이라는 명칭의 직책은 전후 재건을 책임지는 건축자재 장관이었다.

 

카가노비치는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인 흐루시초프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처단과 공산 전권 체제를 확립하는데 애를 먹자, 1947년에 잠시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맡았다.

1947년에 건축자재 장관에서 물러난 후 다시 부수상에 재임하며 1948년에서 1952년까지  재료 및 기술 공급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는다.

 

1953 3월, 카가노비치가 충성을 다하여 섬기던 스탈린이 세상을 떠났다. 스탈린이 죽자 말렌코프, 몰로토프 등과 함께 베리야를 처단하며, 자신의 제자 흐루시초프를 다음 후계자로 오르도록 후원해준다. 그러나 스탈린의 죽음은 카가노비치의 몰락의 시작이었다.

 

1953년, 말렌코프와 흐루시초프의 권력 경쟁 구도 아래서 양측에게 친분이 있는 카가노비치는 다시 부수상에 재임하며 1955년에 소련 노동을 책임지는 노동과 임금 장관을 맡는다.

1956년에는 산업 건축자재 장관에 임명되나 1년 후에 카가노비치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터진다.

 

1956년 2월, 스탈린의 측근이었던 미코얀과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을 비판한 것이다. 물론 비판 연설에서 스탈린의 측근들에 대한 책임론을 묻지는 않았지만, 카가노비치를 비롯한 스탈린의 오랜 부하들은 분노했다.

이미 흐루시초프를 비롯한 새로운 세력과 말렌코프를 주축으로 한 스탈린 측근 출신의 구세력 간에 대립이 지속 된지 오래였고, 구세력은 이를 자신들이 섬기던 스탈린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다.

 

1957년, 몰로토프와 말렌코프는 카가노비치와 비밀리 만나 흐루시초프 축출을 논의한다. 이 3명은 즉각 흐루시초프 반대파와 스탈린지지자들을 결합하여 과거 스탈린의 핵심 측근인 보로실로프, 불가닌과 이외에 핵심은 아니었던 스탈린의 부하나 지지자인 인물들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보로실로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배신을 했고, 참여하지 않은 핵심 측근인 안드레에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체 망설였으며 미코얀은 처음부터 흐루시초프 편에 붙어있었다. 

그리고 6월 말에 흐루시초프는 이들을 반당 그룹으로 지명하고, 재임에 대한 당 투표나 해임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이들을 몰아냈다. 결국 흐루시초프를 몰아내려던 이들 세력은 모두 몰락한다.

 

흐루시초프의 스승이었던 카가노비치도 중앙위원회, 정치국, 최고회의 간부회 위원직을 박탈당하고, 최고 회의 부의장직과 부수상, 산업 건축자재 장관직에서 해임되어 우랄에 칼륨공장의 공장장으로 좌천된다.

 

1951년에는 완전히 당에서 추방되어 연금생활자로 전락한다.

 

이후 카가노비치는 모스크바에서 여생을 보내며, 어떠한 인터뷰도 거절하며 오직 자신과 친한 소수의 사람들과만 교류하며 살았다.

그는 여생을 조용히 보냈는데, 스탈린의 핵심 부하들 중에서는 그가 가장 오래 살았다.


1969년에 보로실로프, 1970년에는 안드레에프가, 1971년에는 자신을 몰아낸 제자 흐루시초프도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카가노비치는 별 탈 없이 계속 살았고, 1975년에는 불가닌, 1978년에는 미코얀도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카가노비치는 계속 살며 70년대를 보냈다.

1986년에 가장 친한 친구였던 몰로토프가, 1988년에는 말렌코프가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카가노비치는 별 탈 없이 지냈고, 80년대를 지나 90년대를 맞이할 정도였다.

그는 스탈린의 핵심 측근으로서 가장 오래 산 셈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오래 산 것은 복이 아닌 저주에 가까웠다.

 

오래 살수록 냉전시대의 대립과 변화 그리고 소련의 몰락을 보았기 때문이다.


1961년에 쿠바사태를 보았으며, 1966년에는 중국 문화대혁명을, 1972년에는 미국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1973년에는 베트남 전쟁의 종결이 있었다.

1979년에서 1989년까지 일어난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패배가 있었으며, 1982년에는 스탈린의 정신을 계승하여 소련을 다시 부흥하려던 5대 공산당 서기장 브레주네프의 죽었다.

이후 1984년에 6대 서기장 안드로포프와 1985년 7대 서기장 체르넨코가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이 두 서기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소련의 불길한 미래를 보여주고 있었다.

 

마침내 카가노비치는 스탈린의 부하로서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1985년에 8대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주도하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1990년에는 고르바초프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올랐다.
이제 소련의 변화가 다가온 것이다. 스탈린을 섬기며 만든 소련이 새로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결국 1991년 7월 25일, 카가노비치는 9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날짜는 소련의 마지막 발악인 8월 19일 쿠데타가 일어나기 25일 전이었으며, 1991년 12월 21일에 소련이 해체되기 약 5개월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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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카가노비치, 안드레에프,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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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로토프, 칼리닌, 스탈린, 보로실로프, 카가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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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코얀, 에조프, 카가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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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노비치, 칼리닌,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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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닌, 베리야, 미코얀, 주다노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보로실로프,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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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코얀, 코시오르,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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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끝부터 스탈린, 카가노비치, 보로실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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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노비치, 말렌코프, 스탈린, 주다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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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 모태 솔로도 구제해 줄 것 같은 연애 고수 스타는? 운영자 25/07/21 - -
107459 북한을 일본에게 20년간 신탁통치하면 어떻게될거같냐 ?? 노다 준코(210.107) 13.06.11 78 0
107458 국사시간에 쳐졸았지? VenAtt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27 0
107456 일본군 위안부 할망구들은 날뛰고 있는데 노나카 아이(210.107) 13.06.11 75 0
107455 적어도 박정희는 경제라도 어느정도 살렸지 VenAtt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20 0
107453 근데 박정희 시대 옹호하는 애국좀비가 왜 일제시대는 욕함?? 노가와사쿠라(210.107) 13.06.11 38 0
107452 일본이 가장 잘만드는건 VenAtt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19 0
107450 헉 일본이 국호 였나요 ㅇㅅㅇ 진리의 HK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19 0
107449 배은망덕이랰ㅋㅋㅋㅋㅋㅋㅋㅋㅋ VenAtt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13 0
107447 반닼횽 VenAtt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65 0
107446 北조선과 下조선을 보면, 조선인들은 배은망덕이 종특이다 네야 미치코(210.107) 13.06.11 49 0
107445 독도 탈환 가능하다고? VenAtt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19 0
107444 Jabo 진리의 HK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27 0
107442 필리핀은 일본에 침략을 받은 나라인데도 난죠 요시노(210.107) 13.06.11 43 0
107441 밥은 먹고 갤질하냐? VenAtt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29 0
107440 일본은 다케시마를 오늘,내일이라도 탈환할 실력이 있지만 난바케이이치(210.107) 13.06.11 15 0
107439 도쿄핫이나 감상하라고 VenAtt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37 0
107438 1등국민이 되기 위해 일제에 협력하는 조선인들.avi 난리 유카(210.107) 13.06.11 137 0
107436 저새끼 현피까면 또 안나오겠지 대양의 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14 0
107435 돈지랄 10식 VenAtt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21 0
107434 일본은 탈아시아에 성공해가고 있지만 한국은 반대다. 나카하라마이(210.107) 13.06.11 49 0
107433 90식은 처음에는 좋았지 VenAtt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32 0
107431 야보 야보 진리의 HK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23 0
107429 74식 투척 VenAtt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36 0
107428 61식이라고 들어는 봤냐 VenAtt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30 0
107427 선다우너즈 VenAtt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58 0
107426 ANG? VenAtt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20 0
107424 병신들 VenAtt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21 0
107423 강희대제님이 전화하니까 질질 빈게 누구? 대양의 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21 0
107422 히익 밀린다 VenAtt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17 0
107421 솔직히 나 고딩때 [1] rakurima(113.198) 13.06.11 34 0
107420 6.25 한국전쟁에 위안부가 있었다는것은 일본 하시모토의 날조 nida 나카하라마이(210.107) 13.06.11 103 1
107419 下조선인들이 울부짖는 '일제잔재 청산'이 유치한 반일 쑈에 불과한 이유 나카타 죠지(210.107) 13.06.11 153 2
107418 [●]한국이 반일 역사 교육을 하는이유 [●] 나카츠마리코(210.107) 13.06.11 47 0
107417 3.1 운동은 폭동이여~~ 나카지마사키(210.107) 13.06.11 90 0
107414 일본인이 되고싶다. 나카지메구미(210.107) 13.06.11 41 0
107412 구를링하면 신상 금방 나오긴 함 대양의 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21 0
107411 한국인 : 일본에게 사죄와 배상을 원한다. 나카이카즈야(210.107) 13.06.11 32 0
107410 와 ㅅㅂ 고딩 때 아싸던새끼 제주햏자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16 0
107409 위안부에 대한 학술적 접근은 소용없다. 필요가 없달까 나카에 신지(210.107) 13.06.11 25 0
107408 여기 저반동포를 쓰는 신형전차가 있는 나라가 있다면서요? [1] 대양의 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55 0
107407 일본인이 되고싶다. [2] rakurima__(113.198) 13.06.11 27 0
107406 흔한 WW2배경게임 1 택티컬파우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26 1
107405 황국에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식민지인에게 국가대표를 시킬까? 지옥고양이(59.15) 13.06.11 18 0
107404 한국과 비교하는 하와이의 식민지화 과정.txt 나카오 에리(210.107) 13.06.11 258 0
107400 야스쿠니도 한국사람이 모르는 거 같은데 나카오류세이(210.107) 13.06.11 39 0
107399 위안부 강제연행이 없었다는 건 국뽕들도 다 아는 사실임 [9] 나카야마사라(210.107) 13.06.11 691 1
107398 조선반도 출신 조선인에게 국가대표를 시켜준 일본... 나카세아스카(210.107) 13.06.11 39 0
107397 반도의 흔한 WW2배경게임11 택티컬파우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06.11 32 0
107396 손기정이야말로 친일파중의 친일파넘 아닌가? [1] 나카무라토뫀(210.107) 13.06.11 625 0
107394 저런 자식을 아들이라고 키운것도 여러사람에게 죄짓는 거지만 그만하련다. 지옥고양이(59.15) 13.06.11 22 0
뉴스 스티브 잡스 딸 ‘92억’ 초호화 결혼…남편 ‘이 사람’ 깜짝 디시트렌드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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