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스타스 미코얀 (1895. 11. 25. - 1978. 10. 21)
1895년, 미코얀은 아르메니아의 사나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가난했으며 아버지는 목수, 어머니는 융단을 짜는 일로 생계를 이었다.
미코얀에게는 아르템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훗날 구레비치와 함께 미그 제트기를 개발한다.
고향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카프카스 지방에서 가장 뛰어난 교육 기관으로 알려진 구르지야의 트빌리시 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신학 교육이 오히려 그를 무신론자로 만들었고, 학교 내에서 자유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공부한 친구들과 만나면서 좌익적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실제로 트빌리시 신학교에서는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나왔다.
학교를 다니며, 집에서 오는 부족한 돈을 보충하기 위해 상점 점원 일을 했고, 마르크스가 저술한 서적을 읽으며, 사회주의 운동에 참가한다.
1915년, 에쉬미아드진에 노동자 그룹에 참가하며,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SDLP)에 입당한다.
1916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아르메니아의 신학 대학에 들어가나 이미 신학에 관심이 멀어진 미코얀은 학교를 중퇴한다.
1917년, 2월 혁명 시기에는 에쉬미아드진에 붉은 군대 조직에 참가하며, 1917년, 10월 혁명 후에는 바쿠 당 위원회에서 근무하여 아르메니아와 바쿠, 트빌리시 등지에서 활동했다.
더불어서 아제르바이잔 바쿠에 아르메니아어 신문 Social-Democrat와 러시아어 신문 Izvestia Bakeenskogo Soveta에 공동 편집장을 맡기도 한다.
소련 정부를 수립한 레닌은 1917년 12월에 카프카스 지역에 독자적 관리를 위해 바쿠 인민위원회를 창설한다. 그러나 러시아 내전으로 러시아 남부가 점령되어 카프카스 지역과 소련 정부간에 연락이 두절된다.
바쿠 인민위원회는 백군에 공격과 맞서야했고, 공산화에 반대하는 카프카스 지역 국가들과도 싸워야 했다.
1918년 3월에는 러시아 내전의 한 부분인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전쟁도 발발한다.
다행이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은 바쿠 인민위원회의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해주었고, 아직 세계 제 1차 대전이 끝나지 않아서 백군을 돕는 연합국에 대항하여 오스만 제국군이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을 도와주었다.
카프카스의 대립 세력은 복잡한 이해관계로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 오스만 제국, 바쿠 인민위원회가 한 편으로 뭉쳐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 백군, 백군을 도우러온 서방 간섭군과 나고르-카바흐 반군으로 구성된 적과 싸워야 했다.
1918년에 바쿠에 붉은 군대 제3여단 정치위원을 맡아 적들과 전투를 치르나, 8월에 바쿠시 중심부가 백군측 세력에 의해 함락되었다.
미코얀은 점령된 바쿠 지역 볼셰비키 비밀 위원회 위원으로 바쿠 탈환을 위해 노력하며, 백군측 군대와 교전하면서 여러 번의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전장에서 부상을 입고 쓰러진 동료 오르조니키제를 업고 안전히 구출한 것은 유명하다. 이 일로 둘은 땔 수 없는 친구가 된다.
8월 16일에 미코얀은 아스트라한으로 피신하려던 위원회의 뜻에 따라 위원회를 따라 가지만, 백군측 세력에 의해 체포되어 바쿠 감옥에 갇힌다.
미코얀은 비밀리에 탈옥 계획을 꾸몄고, 9월 4일 오스만 제국군의 외곽 저항으로 다시 바쿠가 탈환되자 인민위원회 일원들과 함께 감옥에서 탈옥한다.
9월 20일 인민위원회는 흑해에서 배를 타고 아스트라한으로 향하지만, 백군측 세력과 백군을 지원하러 온 영국군에게 잡히고 만다.
결국 인민위원회의 핵심 위원들인 26명의 바쿠 위원들은 총살된다. 그런데 미코얀만 죽지 않고 살아남았는데, 그 이유는 지금도 의문이라 한다. 아마 그 이유는 미코얀이 직책이 낮고 죽일 이유가 굳이 없어서라고 추정되나 그럼에도 총살된 26명이 전부 인민 위원이 아닌 고용인들과 경호원들도 포함되어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1918년 10월, 무드로스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세계 제 1차 대전에서 항복하여 전쟁에서 빠진다. 카프카스에서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과 백군에게 저항하던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에게 오스만 제국의 철수는 큰 충격이었고, 얼마안가 바쿠가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과 백군에게 함락된다. 그러나 분쟁을 마무리 짓지 못한 오스만 제국과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과의 전투는 카프카스 남쪽에서 계속된다.
1919년 2월 석방된 미코얀은 바로 3월에 바쿠에 잠입하여 붉은 군대를 향한 물자 조달, 백군측 점령지에서의 파업, 사보타주, 지하공작을 감행하는 카프카스 비밀 위원회에 가담하여 10월까지 백군측에 대한 공작을 벌인다. 그리고 바쿠 소비에트의 공통 창립자가 되었다.
1919년 10월, 카프카스 탈환을 논하기 위해 미코얀은 모스크바에 오며, 레닌, 스탈린, 프룬제, 키로프를 만나며 이미 와있던 오르조니키제와도 재회한다. 특히 같은 카프카스 출신인 스탈린은 미코얀은 매우 좋아했다. 여기에 훗날 카프카스의 통치자와 스탈린의 조언자가 되는 오르조니키제도 함께했다. 이 3명은 같이 농담도 즐기며 웃고 지내는 사이가 되어 다른 동료들은 그들을 “카프카스의 파벌”이라고 불렀다.
스탈린, 오르조니키제 그리고 미코얀
마침내 소련의 반격과 간섭군들의 철수로 내전은 종국에 치달았고, 붉은 군대가 남부 러시아를 장악한 백군을 격퇴한다.
1920년 3월, 미코얀은 붉은 군대와 함께 카프카스에 입성하여 소련의 카프카스 통치에 대한 선언을 한다. 그리고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된다.
이후로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은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과 백군측 잔당 세력과 저항 전쟁을 치렀고,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과 터키 공화국 간에도 전쟁이 일어났다. 그 결과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의 힘은 점차 약해졌고, 결국 공산 혁명으로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은 무너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의 일원인 카프카스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 귀속된다. 미코얀은 이때 제11군 훈련 감독과 지역 행정 업무를 하였다.
1920년, 미코얀은 카프카스를 떠나 니주니노브고로트 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되며, 1922년에는 새로이 로스토프 남동부 러시아 조직국 제1서기로 승진했다. 또한 1922년에는 중앙위원회 후보 위원이 된다.
1923년, 레닌이 죽은 후 미코얀은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다.
승진을 거듭한 미코얀은 1924년에 북부 카프카스 위원회 제1서기가 된다.
북부 카프카스를 책임진 이 시기에 미코얀은 코사크족에 대해 유화 정책을 펼치고, 정교회와 이슬람교에 같은 종교에 대한 탄압을 하지 않았다.
그는 코사크족과 협상하여 어느 정도의 자치를 인정하는 대신 무장을 간소히 하고, 소련 정부에 충성을 다하도록 한다.
권리를 빼앗긴 부농과 상인에 대하여 신경제정책에 한도 내에서 권리를 부여하자고 스탈린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재정 절약을 위해 빨치산 대원들의 규모를 축소하여 몇 번의 분쟁을 겪기도 했으며, 광천수를 개발하여 카프카스 지역의 산업 발전을 이루도록 했다.
미코얀의 통치로 카프카스 지방은 소련 정부와 화합하며 충성을 다하자 스탈린은 기뻐했다.
1926년, 미코얀은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지명되며, 보급 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여 이제 지방 정계가 아닌 중앙 정계로 진출하게 된다. 특히 31세로 장관이 된 그는 소련에서 최연소 장관이었다.
인민에 대한 보급과 배분을 총괄하는 보급 인민위원회를 맡은 미코얀은 농촌과 도시 간에 대규모 교역 체계를 계획한다. 그러나 집단농장화로 농촌이 소멸되고, 농촌 사회의 주축인 쿨라크(부농, 지주)가 탄압받자 스탈린에게 항의하며 개선을 요구하나 거절당한다.
그의 행위는 부하린, 류코프 같은 당내 우파처럼 보였지만, 그는 엄연히 스탈린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의사를 펼친 것이라 당내 우파와 같은 취급을 받거나, 숙청당하지 않았다.
1926년 8월에는 수출-수입 인민위원회 위원을 겸직하는데, 부족한 소련 정부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정 러시아 시절의 귀족과 황족의 미술품과 골동품, 가구, 귀중품 등에 고가치품을 여러 서방 국가들에게 팔아 넘겼다. 이것은 스탈린에 지시로 행해진 일이었고, 팔린 물건들은 엄연히 러시아의 문화재라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1930년, 보급 인민위원회 위원과 수출-수입 인민위원회 위원직에서 물러나 정부 조달 인민위원회 위원직으로 임명되며, 인민들을 위한 분배를 총괄했다.
1934년, 미코얀은 정부 조달 인민위원회 위원에서 식품 생산업 인민위원회 위원직을 맡게 된다.
소련의 식품 산업을 총괄하는 이 부서에서 미코얀은 대대적 발전을 이룩한다.
전부터 러시아가 식량 생산량이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현대적 기술이 없어 식품 가공 산업이 전무했으며, 단순히 먹는 의미에서가 아닌 여러 영양소를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미코얀은 우선 스탈린에게 식량 생산 증대가 필요하다고 요구한 후 서방 국가들로부터 식품 가공 기술을 수입한다. 대표적으로 수입된 기술은 통조림 제조 기술이었다.
이외에 통조림, 소시지, 곡식, 파스타, 빵, 설탕 같은 식품과 아이스크림, 담배, 사탕, 초콜릿 같은 기호품에 대한 가공 기술을 수입하거나 서방 기술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개발을 한다.
특히 미코얀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에 대한 가공 기술 발달에 정성을 쏟아 인공 냉동법 발달에 힘썼다.
돼지고기 가공을 위해서도 미국에서 기술자들과 전문가들을 초빙해 모스크바에다가 정육공장을 설립한다.
보드카에 대해서도 노력하여 보드카 생산의 체계화와 기술 발전을 이룬다.
생선에 대해서는 냉각시켜 먼 곳까지 수송하게 만들었다.
미코얀이 식품 산업 발전에 열정적으로 활동한 이유는 개인적으로 음식에 대해서는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미코얀은 요리를 매우 잘했으며 무지 좋아했다. 그것은 미코얀이 동료들을 초대했을 때 더욱 잘 알려져 있었으며, 그가 식품 생산업 인민위원회 위원을 맡은 것도 이런 모습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미코얀에 개인적인 요리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항상 섣달 그믐날에 새해맞이를 기념하는 선물을 동료들에게 해주던 미코얀은 언젠가 초콜릿을 스탈린에게 부츠 모양, 말렌코프에게 탁자 모양, 흐루시초프에게는 병 모양, 베리야에게는 권총 모양으로 만들어 선물해주었다.
그는 요리와 초대로 다른 스탈린의 동료들과 친하게 지냈지만, 베리야에게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미코얀의 식량 생산업 인민위원회 위원직은 1938년까지 지속되며 직물 공장장을 맡고 있던 젊은 코시긴을 만났다. 미코얀은 코시긴이 유능한 인재라는 점을 발견했고, 스탈린에게 그를 천거한다. 그리하여 코시긴은 섬유산업 부문에 대한 고위직을 맡으며, 냉전시기에 소련의 중요한 정치가가 된다.
미코얀은 1935년에 정식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며, 이 해에 미국으로 식량 문제와 식품 기술 발전에 대한 경제 협력 방문을 하기도 한다.
1936년, 대숙청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을 때 미코얀도 동참하여 류코프와 부하린에 대한 반역 혐의 수사를 하기도 했다.
1937년에는 아르메니아로 가서 숙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탈린과 그의 부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코얀은 적극적으로 숙청에 관여하지 않았고, 숙청한 사람도 적었다.
그리고 자신의 친척, 가족, 동료를 대숙청 시기로부터 보호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죄수가 되면 징역수발을 해주었다.
다만 절친한 친구 오르조니키제가 혐의를 의심 받고 있을 때 그를 변호해주었다.
미코얀, 스탈린과의 친분으로 점차 스탈린의 측근으로 오른 오르조니키제는 대숙청 시기에 스탈린이 무부 인민위원회(NKVD)에 지령까지 내려서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1936년부터 갑자기 그의 충성심을 의심한 스탈린은 계속해서 진정으로 내게 충성하느냐는 식에 질문을 계속했고, 그의 가족과 친척들이 반역 혐의가 있다며 체포했다. 결국 오르조니키제는 1937년에 공포와 배신감에 빠져 자살한다.
오르조니키제가 자살하자 스탈린은 미코얀의 입을 막기 위해 이전에 바쿠의 26명의 인민위원들이 죽었을 때 너는 죽지 않았냐는 식으로 협박을 했고, 결국 미코얀은 스탈린에게 따지기도 전에 굴복하고 만다. 이때부터 미코얀에게는 스탈린에 대한 잠재적인 반감이 저 깊은 곳에 싹트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일이 있은 후에 아르메니아로 파견됐다.
1937년에 미코얀은 부수상에 오르며, 최고 회의(소비에트) 부의장직도 겸하였다.
1938년에는 식품 생산업 인민위원회 위원직에서 물러나 수출 인민위원회 위원에 임명된다.
1940년에 카틴숲 학살 사건이 있을 때 그는 스탈린의 부하로서 학살에 동의 서명한다.
독일이 1941년에 침공하자 국방위원회에 위원 중 한 명으로 임명되어 전시 기간 동안 소련군에 식량 보급과 공급망 조직에 공을 세우며, 1943년에 사회주의 노동의 영웅으로 올려진다.
전쟁이 점차 끝에 접어들자, 스탈린은 독일이 북부 카프카스 지방과 남부 러시아 지역을 침공했을 때 체첸인이 독일을 도왔다는 것에 대해 체첸인들을 어찌 처리할지 핵심 측근들과 논의하였다.
몰로토프, 주다노프, 안드레에프, 보즈네센스키는 체첸인들을 숙청하자고 주장했고, 보로실로프, 카가노비치, 흐루시초프, 칼리닌, 베리야는 추방하자고 했다.
스탈린은 추방파에 말을 들어 이구슈-체첸 자치공화국을 해산하고 체첸인들을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 부근으로 추방한다.
오직 미코얀만 체첸인들이 독일의 회유와 협박 때문에 넘어가서 그런 것일 거니 용서하자고 주장했다.

칼리닌, 베리야, 미코얀, 주다노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보로실로프, 스탈린
전쟁이 끝나고 1946년에 부수상에 재임하여 1953년까지 지속하며, 인민위원직이 장관직으로 개명됨에 따라 수출 인민위원회도 수출부로 개명했고, 미코얀은 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종전 후에는 최대한 권력 투쟁과 정치 관여에 자중한다. 스탈린도 그가 정말 충성스러운 부하인지 의심이 들어 예전보다 적게 만남을 가졌다.
1949년에는 수출부 장관직을 사임했다.
1951년, 스탈린이 죽자 흐루시초프를 지원하여 다른 스탈린의 측근들과 함께 베리야를 숙청한다.
1952년, 미코얀은 소련 최고 회의 간부회 위원에 선출되며 1953년 3월에 수출-수입 장관에 임명되나 얼마안가 10월에 사임한다.
1953년 8월에 무역부 장관에 임명되어 1955년까지 자리를 맡는다.
1954년에는 독자 노선을 택한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하여 비록 독자 노선을 택했어도 소련과 관계는 유지하자는 협상을 했다.
1955년, 흐루시초프와 협력하여 부수상에 다시 오르며, 스탈린을 계승하려는 말렌코프의 노선을 따르지 않기 시작한다.
1956년, 미코얀은 흐루시초프와 제20차 전당 대회에서 스탈린 비판을 연설을 하는데, 그 내용의 기본틀을 작성 한 것이 미코얀이었다.
1956년 10월 헝가리에서 공산정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자 미코얀은 중재를 위해 파견된다. 헝가리에 도착한 미코얀은 그들을 설득하고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당과 흐루시초프의 결정에 반대한다. 그러나 대세를 막지 못하여 결국 중재 자리에서 사직하며 헝가리의 혁명 시도는 무참히 진압됐다.
흐루시초프에 축출하고 스탈린의 정신을 계승하기위해 세력을 모은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 말렌코프는 비록 배신을 했지만 헝가리 사태로 흐루시초프에게 실망한 미코얀에게 접근한다. 그들은 미코얀에게 다시금 스탈린의 지지자로서 흐루시초프 축출에 협력하게 설득한다.
그러나 스탈린에게 충성을 다했으면서도, 스탈린의 정책에 이의를 제기했던 그는 다시 스탈린의 체제가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미 미코얀은 흐루시초프의 노선을 지지했고, 그를 몰아내면 다시 대대적 숙청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옛 동료들의 청을 뿌리친 후 자신의 위치 때문이 그들이 접근했다고 여겨 1957년에 부수상직에서 사임한다.
그러나 얼마안가 이들 세력이 흐루시초프에 의해 퇴출되자 1958년에 다시 부수상에 오른다.
1950년대 후반기에 미코얀은 외교적, 경제적 해외 순방을 시작하며, 미국, 일본, 멕시코 등에 나라를 방문한다. 특히 미국을 자주 방문하여 자본주의 세계의 기반을 보고 소련의 기반은 어떠한지에 대한 비교를 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세계에서 온건한 이미지를 가진 소련 정치가로 알려지며 타임지는 그를 “여행하는 세일즈맨”이라고 비유했다.
1959년 1월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이 성공하자 미코얀은 급파되어 소련 석유와 쿠바 설탕을 무역하자는 협상을 타결한다. 그리고 잠시 머물면서 혁명을 위해 투쟁했던 젊은 시절이 생각난다고 쿠바 혁명 지도자들에게 말하며 즐거워했다.
쿠바 순방 중에 카스트로, 체게바라와 만난 미코얀
그리고 바로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상원의원들과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함께 식사를 나누었다. 이는 쿠바에서 일어난 혁명에 대하여 무력 대처를 하지 않게 만들고 흐루시초프의 미국 방문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순방 중에서 디트로이트를 방문하는 사진
미국 순방 중에 미코얀과 당시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부통령이었던 리차드 닉슨
미코얀은 완고한 반공주의자로 알려진 닉슨과도 만남을 가졌다.
1960년에 U-2 미군 정찰기가 소련에서 격추된 것과 1961년에 베를린에 체크포인트 찰리 검문소에서 양국간에 군사적 대치로 인한 대립이 터졌을 때 미코얀은 다시 기지를 발휘하여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공헌하며, 흐루시초프와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1962년 10월, 쿠바에서 미사일 위기 사태가 터지자 쿠바로 다시 가서 사건 당사자인 카스트로와 케네디 대통령을 설득하며, 대치하려던 케네디와 흐루시초프를 중재했다.
미코얀의 노력 끝에 카스트로에게는 핵미사일 관련 시설을 없애고 대신 소련으로부터 폭격기를 지원받는 것으로, 케네디 대통령에게는 핵미사일 시설을 없앨 테니 쿠바를 공격하지 말아달라는 조건으로 협상을 성사시킨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로 세상을 떠나자 미코얀은 소련 대표로 참석하며,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 대통령에게 소련이 암살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보증하기도 했다.
1964년이 되자 미코얀에게 변화가 생긴다. 그가 지지하던 흐루시초프가 쿠바 사태에서 미국에게 밀렸다는 이유로 실각한 것이다. 당은 흐루시초프를 쫓아내기 위해 투표를 했는데, 미코얀이 흐루시초프에 지지자라는 점을 알고 그를 협박하여 강제로 반대표를 던지게 했다.
흐루시초프가 몰락한 후 많은 이들이 그를 외면했지만, 미코얀만은 자주 방문하여 흐루시초프를 돌봤다. 그러나 자신에게 반대표를 던졌다는 것을 흐루시초프는 알고 있기에 미코얀을 차갑게 대했다. 그럼에도 미코얀은 1971년 흐루시초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에 화환을 놓았고, 조사를 읊었다.
미코얀은 이후에도 정계에 남아 직무를 다하며 1960년대 동안에 파키스탄, 인도, 버마, 일본, 인도네시아, 이라크, 여러 아프리카들을 향한 외교 활동을 한다.
1964년 7월에는 브레주네프로부터 최고 회의 간부회 의장에 임명된다.
그러나 12월이 되자 더 이상 정계에 남을 마음이 없어져 최고 회의 간부회, 정치국에서 은퇴하며 부수상직도 사임한다.
대신 외교 업무를 하는 걸로 정계에 남아 여러 나라들에 대한 외교를 지속한다.
1970년에는 회고록을 펴냈으며, 1975년이 되자 최고 회의(소비에트) 부의장직과 중앙위원회 위원에서 사임하고 당 업무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1978년, 미코얀은 모스크바에서 폐렴으로 83세에 세상을 떠났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