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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영원한 3인자 - 몰로토프

카이텔(58.76) 2007.04.25 09: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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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체슬라프 몰로토프 (1890. 3. 9. - 1986. 11. 8)

 

1890년, 몰로토프는 모스크바 동부에 쿠카르카(현 키로프주의 소베츠크)에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비야체슬라프 스크랴빈으로 아버지는 회사원이며, 삼촌은 유명한 작곡가 알렉산드르 스크랴빈이었다.


몰로토프의 어릴 적 취미는 바이올린 연주와 시를 쓰는 것이었다.


카잔에 중학교를 졸업한 후 1905년에 카잔 공업고등학교를 들어가는데, 이 때 사회주의 사상을 아는 친구들에 영향을 받았다.


1906년에 친구들을 따라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에 입당하며, 가명을 써야한다는 당의 원칙을 따라 몰로토프라고 지었으며 망치를 뜻하는 말라톡에서 따왔다.


1908년에 카잔 공고를 졸업한 후 당 활동을 하다가 볼로그다에서 검거되어 2년간 시베리아로 추방당한다.


1911년 돌아온 몰로토프는 페테르스부르크(상트 페테르부르크)에 페테르스부르크 폴리테크닉 대학에 입학한다.


1912년에 당 신문인 Pravda (The Truth)의 편집위원 비서로 임명되며, 1913년에는 편집위원으로 승진하여 1917년까지 지속한다. 당시에 편집장은 스탈린이었는데 몰로토프는 이때부터 스탈린과의 친분을 쌓기 시작한다.


1913년, 또다시 몰로토프는 검거되어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로 추방되나 1915년에 탈출하여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오자마자 다시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송환된다.
그럼에도 몰로토프는 굴하지 않아 1916년에 탈출에 성공하여 안전히 숨는다.


1916년에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이 되며, 1917년 2월 혁명 때는 모스크바에서 파업을 주도했다.


2월 혁명 때 모스크바에서 망명 또는 체포되지 않은 당원인 몰로토프는 스탈린이 망명에서 돌아오자 함께 혁명 달성을 기뻐했다. 그러나 돌아온 레닌은 단순히 혁명이 끝났다고 기뻐하는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주의를 주며, 혁명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


몰로토프는 바로 군사혁명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10월 혁명 계획에 참가한다.


1917년, 10월 혁명이 성공한 후 페트로그라드 집행위원회와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 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1918년에는 페트로그라드 국가 경제 위원회 북부지구 의장이 된다.


러시아 내전이 본격적으로 터졌을 때는 우크라이나로 파견되나 그는 군인이 아니기에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


1919년에는 니주니노보고로트 집행 위원회 의장이 되는데 이 때 전임 집행 위원회 의장인 카가노비치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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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노비치와 몰로토프


1920년에는 우크라이나로 발령받아 우크라이나 볼셰비키당 중앙 위원회 제1서기 겸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위원회 제1서기직을 겸직하며 중앙위원회 후보 위원으로 지명된다.


1921년, 몰로토프는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중앙위원회 위원, 중앙 집행위원회 위원, 조직국의 위원, 정치국 후보 위원에 선출되며 중앙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된다.


1922년, 스탈린이 공산당 제1서기가 되자 몰로토프는 1935년까지 제2서기를 맡는다. 그는 제2서기로서 스탈린의 반대파와 권력 투쟁을 벌여 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니콜라이 부하린을 몰락시키는데 공헌하며 보로실로프, 카가노비치, 키로프, 오르조니키제와 함께 “스탈린주의자에 중심“에 속하는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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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로토프, 스탈린 ,보로실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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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 왼쪽부터 오르조니키게, 스탈린, 몰로토프, 키로프
뒷줄 왼쪽에 보로실로프와 카가노비치, 큐비셰프
 
이 중에서 키로프는 암살, 오르조니키제는 자살 그리고 큐비셰프는 총살 당했다.
죽은 이 3명은 1930년대 중반까지에 스탈린의 핵심 측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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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실로프, 몰로토프, 스탈린
 

이런 몰로토프에 대하여 스탈린 반대파들은 그를 폄하했으며, 특히 트로츠키는 그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몰로토프의 외모를 보면 순하고, 평범하게 보였으며 개인적으로는 채식주의자에다가 금주가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는 누구보다도 검은 계략으로 술수를 꾸미며, 속은 날카로운 성격과 예리한 식견을 갖추었다.
또한 자신이 파벌이 없는 것처럼 연출하기위해 인민복이나 제복을 입고 다니는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거의 대부분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어 자신의 내면을 감추고 다녔다.

대신 일에 대해서는 확실히 처리하며, 냉정한 성격과 스탈린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1926년, 스탈린의 적극적 후원 아래 정치국 정식 위원이 되었다.


1928년에서 1934년까지 코민테른 의장을 맡으며, 잠시 모스크바 위원회 제1서기를 1929년까지 하였다.


1930년 12월, 부하린 파벌인 류코프가 해임되고, 몰로토프가 새로운 수상으로 오른다. 또한 노동과 병역(국방) 위원회 위원을 1937년까지 겸직한다.
더불어서 중앙위원회 제1서기직은 카가노비치에게 인계했으며, 조직국에서도 물러났다.


소련의 행정의 최고 책임자인 수상에 오른 몰로토프는 스탈린의 정책 아래 소련 사회의 새로운 건설을 총괄한다.


스탈린의 새로운 경제 정책에 따라 몰로토프가 이뤄내야 할 목표는 2가지였으며 그 첫 번째는 산업화였다.


이미 제1차 5개년 경제 계획이 1928년부터 시작했으며, 몰로토프는 2년이 지나서야 참가한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산업 발전이 활성화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부터다.


코스플란(국가 계획 위원회)이 계획한 국가 경제계획에 따라 몰로토프는 대대적 공업단지와 광산단지를 조성한다.
대표적으로 우랄산맥 남쪽에 마그니토고르스크에 철광과 쿠즈네츠크 (노보쿠즈네츠크)의 탄전을 결합하여 제철 산업단지를 만들었다.


이외에 모스크바와 고리키(니주니노브고로트)에 기술과 인력, 교통과 전력을 이용한 자동차 산업단지와 우랄과 크라마토르스크에 중공업단지 그리고 하르코프와 스탈린그라드, 첼랴빈스크에 트랙터 산업단지가 건설되었거나 건설 중이었다.


1차 계획은 대성공이었으며 전체 산업이 93.7%나 성장하고, 중공업은 108%나 발전했다.
연료 생산량도 1차 계획이 시작하려던 1928년에 비해서 엄청난 증대를 보였다.
석탄은 3천 550만에서 6천 440만 톤, 석유 110만에서 2천 140만 톤으로 증대했고, 전력량은 50억에서 130억 5천만 KW/H를 공급할 만큼 발전소가 건설됐다.
 

제철업에 대해서도 선철은 330만에서 620만 톤, 강철은 430만에서 590만 톤으로 증대했다.


그리고 제지는 28만 4천에서 47만 1천 톤, 시멘트는 180만에서 350만 톤으로 늘었고, 기계는 2천에서 1만 9천 7백 대, 자동차는 8백에서  대의 생산량을 기록했다.


1933년부터는 제2차 5개년 경제계획이 수립된다.
1차 계획에서 이룬 성과를 바탕으로 석유나 화학 공업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으며, 인민들의 교육과 생활개선이 발전해 갔다.


그 결과 1차 계획이 완료되어 2차 계획이 시작하려 했을 때보다도 더 큰 성과를 보였다.
석탄은 6천 440만에서 1억 2천 8백만 톤, 석유 2천 140만에서 2천 850만 톤으로 증대했고, 전력량은 130억 5천만에서 360억 2천만 KW/H를 공급할 만큼 발전소가 더 건설됐다.


선철은 620만에서 1천 450만 톤, 강철은 590만에서 1천 770만 톤으로 늘었으며, 제지는 47만 1천에서 83만 2천 톤, 시멘트는 350만에서 550만 톤으로, 기계는 1만 9천 7백에서 20십만 대, 자동차는 2만 3천 9백에서 20십만대로 생산량이 늘었다.


그러나 대숙청을 거쳤기에 1차만큼의 크나큰 증대를 이루지는 못했고, 1937년에 2차 계획이 끝났을 때부터 발전도가 감소하기 시작한다.


1차, 2차의 계획 경제를 통하여 소련 사회는 엄청난 사회 번영을 이루는데, 1923년에 3백90만에 불과했던 고용 창출이 1937년에는  7백90만, 1940년에는 8백30만으로 추가 되었다.


고용의 창출과 경제 발전을 생활 개선을 불러왔고, 모스크바와 고리키에서 대대적인 자동차 생산을 시작하여 1931년만 해도 트럭과 자동차는 20만 대에 도달했다.
철도는 더 많이 증설되었고,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최초의 지하철이 개통됐다.


교통과 산업이 발전하면서 인민의 교육과 전문적 인력이 요구됐고, 그 결과 1933년에 16만6천275개의 학교가 증설되고 566개의 학회가 설립되었다.
대학교까지 전공한 세대들이 늘어났으며, 엔지니어들은 해외 연수에 많이 파견되었다.


복지 또한 개선되어 대대적 예방접종이 시작되었으며, 평균 수명이 10년 늘고, 질병 감염자는 감소했다. 거기다가 더 이상 집이 아닌 병원에서 태어난 세대의 아이들로 출현했다.


이런 생활개선은 불만을 가진 인민들을 무마시키기 위한 선전으로도 이용됐다.


이 모든 과정에서 스탈린의 명을 받은 몰로토프는 행정부의 책임자인 수상으로서의 국가 운영을 완수하고, 소련의 크나큰 부흥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 내면 속에는 초과 노동과 강제 노동, 부족한 분배로 고생한 인민들이 있었으며, 실업자를 모두 고용하기 위해 고용인들에 임금을 줄여 이들을 우겨 넣어서라도 고용하는 일이 빈번했다. 1차 계획 때만 해도 희생된 인원이 12만 7천명이나 되었다.


또한 산업 발전에 방향도 군수산업, 중공업, 화학 공업 등 같은 쪽에만 치우쳐 경공업, 식품업 같은 일상 소비재 산업에는 무관심했다.


산업화 방면에서 막대한 희생을 쌓으며 소련은 영광을 일구어 냈지만, 농업면에서는 소련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5개년 경제계획으로 빠른 산업화가 추진됨에 따라 도시가 발전했고, 식량에 공급에 대한 문제도 자연스레 따라왔다. 또한 산업화를 완수하기위해 서방 세계의 기술을 수입해야 했고, 그 비용을 농산물 수출로 대체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농업에 대규모 효율 체재를 만들기 위해 집단 농장화를 구상한다.
1928년부터 집단 농장화가 착수 되나, 농민들은 쉽사리 자기 토지를 포기하고 집단 농장에 일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벌어진 사태가 대대적인 수확물에 강제 징수였다.
스탈린은 농산품을 국가가 관리한다는 명분 하에 대대적인 강제 징수가 벌어져 농민들인 2백만이 넘는 양의 농산물을 빼앗기고 만다. 몰로토프 또한 개인적 지령을 내려 4백 20만 톤의 강제 징수를 했다.
이런 강제 징수로 농산물을 잃은 농민들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국가에서 농산물에 대한 가격 제한하여 결국 집단 농장에서 일하게 된다.


1932년 8월에 몰로토프는 소수법을 통과시킨다. 소수법은 집단농장의 집단성과 재산의 공유화 보장을 표방하고 있는 법으로 그 내용은 집단 농장에서 애들을 포함한 어떠한 농부들이 수확하고 남은 곡식(작은 이삭, 소수)을 거둘 경우 법적으로 체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용 자체는 약소해 보이지만, 이 법은 많은 농민들이 개인 곡식을 아예 거두지 못하도록 이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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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로토프 칼리닌 스탈린
 


결국 강제 징수와 소수법과 그것을 바탕으로 진행된 집단농장화는 1932년에서 1933년간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홀로도모르(대기근)를 야기했다.


집단 농장화는 계속 진행됐고, 4만에서 6만이 되는 농민들이 반항한다는 이유로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 대다수는 쿨라크(부농, 지주)였다.
그리고 집단 농장화에 과정 속에서 4백만에서 1천만 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희생되었다.


1936년에 집단 농장화는 소련 농업 구성에 90%를 차지할 만큼 성공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이전보다 최악이었다.
강제로 터전을 잃고 일하게 된 농민들은 집단 농장화 반대와 태업, 그리고 가축 학살을 통한 항의를 지속했으며, 이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철저한 감시도 지속됐다.
이런 억압 속에서 농민들을 일할 마음이 없었고, 점차 농업 생산량은 저하되어 갔다. 심지어 공문서에서도 집단 농장화는 실패했다는 내용이 자주 거론되었다.
마침내 비옥하고 넓은 농토에서 많은 농산물과 가축을 길러냈던 러시아의 농업 생산량은 해마다 줄어들었고, 결국 소련이 평생 극복하지 못한 부진한 농업사를 만들고 만다.


스탈린에 명에 따라 산업화와 집단 농장화를 이룬 몰로토프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으며, 많은 사람들은 그를 스탈린의 대리인, 또는 후계자로 보았다. 실제로 몰로토프는 위치상으로는 2인자, 권력상으로는 3인자의 자리에 영원히 군림했다.


1936년, 스탈린은 자신의 권력 체계를 확고히 하기 위해 키로프에 암살에 책임을 묻고, 국내에 간첩과 반동분자들, 반역자들을 제거한다는 명분 하에 대숙청을 시작한다.

숙청은 야고다, 에조프, 베리야 순으로 주도되나 몰로토프 또한 깊게 관여하여 예조프, 보로실로프, 카가노비치와 함께 숙청 대상자들을 색출했다.
또한 스탈린이 숙청하려는 사람에 대하여 그 죄목을 뒤집어씌울 때 몰로토프는 군말 없이 스탈린에 뜻에 동조했다.
심지어 대숙청 기간 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감형이나, 온건한 처사, 또는 구명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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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로프의 장례식 - 당시에 스탈린을 비롯한 측근들이 키로프의 관을 들었다.


몰로토프는 1937년에 최고 회의(소비에트) 부의장에 임명된다.


1939년이 되었을 때 스탈린은 독일과의 불가침 조약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비록 히틀러는 믿을 수 없는 반공주의자였지만, 히틀러를 대표하여 온 외무부 장관 리벤트로프가 제시한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스탈린에 생각에 반대하던 외무부 인민 위원 리트비노프를 해임한 후 1939년 5월에 몰로토프를 후임으로 지명했다.


1939년 8월 19일, 독일에 외무부 장관 리벤트로프는 모스크바에서 몰로토프와 7년 기한의 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8월 22일에 다시 모스크바에 모여 10년 기한의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뒤로는 몰래 영토 분할에 대한 비밀 의정서를 교환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리벤트로프와 몰로토프가 각각 섬기는 주군들에 뜻이 맞아서였지 둘이 합의하여 외교적 성과를 달성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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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 불가침 조약 - 아래 사진에서 몰로토프가 서명 중이며, 뒤에는 리벤트로프다.
리벤트로프 왼쪽이 샤포슈니코프 참모총장, 오른쪽이 스탈린이다.

 

1939년 9월 1일, 세계 제 2차 대전이 터진 후 조약에 따라 폴란드와 발트3국 등의 지역을 분할한다.
그리고 9월 28일에 초기 조약에 수록된 영토 분할에 대하여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는 다시 합의했고, 리투아니아도 소련이 마저 갖는 대신에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권리를 더 인정하다는 결론으로 다시 합의를 맺어 몰로토프 라인을 설정한다.


1939년 11월 30일에 몰로토프는 핀란드 간에 국경 분쟁을 빌미로 삼아 1932년에 맺은 불가침 조약을 깨고 핀란드 침공을 한다.
이때 핀란드인들은 1932년부터 맺은 우호를 깨고 쳐들어 온 소련에게 분노했으며, 특히 불가침 조약을 파기한 몰로토프를 모욕하기 위해 전쟁 중에 유용이 쓰인 화염병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1940년 3월에는 카틴 숲 학살 사건에도 서명하여 최소 약 1천8백 명에서 대략 2만1천7백 명 되는 폴란드인들이 처형되었다. 그 대다수는 군인 장교였으며, 이외에 보이 스카우트, 경찰, 교도관 그리고 지식인과 종교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몰로토프는 불가침 조약에 착각 속에서 안정을 보내며, 1940년 9월에는 리벤트로프로부터 3국 동맹 체결 소식을 들을 정도로 독일과의 우호를 지속한다.
그러나 11월부터 이상한 움직임이 돌기 시작했다.


11월 베를린을 방문한 몰로토프는 독일과의 우호를 지속할 것을 부탁하며, 리벤트로프와 히틀러도 몰로토프에게 호의를 다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면담에서 조금씩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몰로토프는 별일 없을 거라는 낙관을 지속하지만, 얼마안가 일이 터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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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로토프의 독일 방문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것이다. 몰로토프는 조약만 믿고 있다가 큰 충격을 먹었다.


스탈린은 전시 체제 운영을 위해 수상직을 겸직한 후 국방위원회를 세워 위원장에 오르며, 몰로토프는 부수상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된다.


몰로토프는 즉시 1941년에 런던, 1942년에 워싱턴 D.C에 급파되어 소련에 연합국 참가에 대한 협정을 체결한다.


이후 몰로토프는 뛰어난 외교관으로 영국과 미국을 다니며 소련을 위한 더 많은 지원에 대한 협상을 지속했고, 스탈린을 따라 1943년에 테헤란 회담, 1945년에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 참가하여 추축국을 향한 공격 전후 처리를 논의했다.
다만 뛰어난 외교관들의 대다수가 타협과 대화에 뛰어난것에 비하여 몰로토프는 타협보다는 자기주장을, 대화 보다는 당장에 닥친 위급한 상황을 먼저 설명하며 치밀하게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따르도록 상황을 유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그와 자주 만났던 영국에 처칠은 그를 완고하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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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로토프와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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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 회담 - 스탈린과 루스벨트 사이에 몰로토프,
루스벨트와 처칠 사이에 있는 것이 이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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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회담 - 맨 왼쪽 멀리에 몰로토프가 있다.
처칠 뒤에는 커닝햄, 포털, 브룩, 루스벨트 뒤에는 리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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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담 회담에서, 왼쪽부터 스탈린, 트루먼, 그로미코, 번스, 몰로토프
그로미코는 2차대전 중반부터 미국 대사였으며, 번스는 트루먼 집권 초기에 국무장관이다.
 


국내에서는 1942년에 부수상직을 연임하며, 1943년에는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후방 무기 생산을 감독하여 사회주의 노동의 영웅에 올려진다.


1946년에 몰로토프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명예 회원에 뽑혔다.


1947년에는 미국에 전임 육군참모총장인 국무장관 마셜이 제안한 마셜 플랜에 맞서 몰로토프 플랜을 창안하며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가 이에 참가한다. 얼마 후 코메콘(경제상호원조회의)으로 발전한다.


1951년 9월 4일에서 9월 8일까지 지속된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에 참석하여 국제 연합에 대한 소련의 공로를 강조한 후 상임이사국으로서의 권한을 부여받게 만들었다.


몰로토프는 종전 후에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는 점차 권력에서 밀리고 있었다. 스탈린의 후계자감인 흐루시초프와 말렌코프, 주다노프가 새로이 부상한 것이다.


스탈린도 전쟁 중에 공을 세운 이들에 대한 해임과 강등을 지속하며, 1948년에는 베리야와 함께 새로운 숙청을 계획하는데, 몰로토프의 지위를 낮춘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1948년에 유대인인 아내가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 둘은 스탈린이 죽은 후에야 베리야의 주선으로 재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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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로토프와 아내


1949년에는 몰로토프는 외무부 장관에서 해임되고, 외무부 차관이던 비신스키가 후임으로 등극할 정도였다.


그러나 1953년에 스탈린이 죽자 베리야 숙청에 동참한 후 말렌코프 밑에 들어가 다시 권력을 되찾기 시작하여 1953년에 외무부 장관직에 재임한다.


이제  몰로토프는 스탈린을 계승하고 말렌코프를 지지하는 파벌로서 권력을 행사하며, 새로이 떠오른 흐루시초프와 권력 대립을 벌였다.


특히 흐루시초프는 자유화와 외교적 해빙 정책을 보이며 1954년에 독자 노선을 택한 유고슬라비아에 미코얀을 파견하여, 비록 독자 노선을 택했어도 관계는 지속하자는 화해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흐루시초프에 태도에 대하여 몰로토프는 강경하게 대처했고, 둘 사이에 대립은 지속됐다.


1955년에는 독일 통일과 무장해제에 관하여 제네바 회의에서도 강경한 태도를 보여 냉전 분위기를 지속했고, 흐루시초프는 그의 외교적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1956년 2월, 흐루시초프는 제20차 전당 대회에서 스탈린 비판을 한다.
스탈린 비판은 과거에 스탈린의 측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결국 몰로토프는 말렌코프, 카가노비치와 함께 파벌을 결성하여 흐루시초프를 축출한다는 명분 하에 동료들을 모은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이들에 대한 견제를 지속하며, 1956년 6월에 몰로토프를 외무부 장관직에서 쫓아낸다.


마침내 1957년 7월, 흐루시초프는 이들을 반당 그룹이라 정하고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이들을 몰아낸다.


몰로토프도 흐루시초프에 의해 중앙위원회 위원, 최고회의 간부회 위원, 정치국 위원직에서 제명됐고, 부수상직도 박탈한 후에 몽골 대사로 좌천시켰다.


1958년에는 최고 소비에트(회의) 부의장에서도 해임됐고,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명예 회원 자리에서도 쫓겨났다.


1960년에는 국제원자력기구 소련 대표로 임명되어 어느 정도 권력에 복직하나 흐루시초프는 다시 1961년 제22차 전당 대회에서 새로운 단계의 반 스탈린 운동을 벌여 결국 1963년 3월에 당에서 추방되어 연금 생활자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스탈린에대한 충성을 잊지 않았고, 여전히 스탈린주의를 고집했다.


중소 분열이 있은 후 중국에 마오쩌둥에게 초대되었고, 함께 흐루시초프의 노선을 비난했다.


그 후 계속해서 복직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고,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에 브레주네프 정권 시절에 어느 정도 복직한다.
1984년에는 신임 서기장 체르넨코에 의해 공산당에 재입당 허가까지 받았다.


1986년 11월 8일, 몰로토프는 마침내 말년 투병 끝에 96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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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코얀, 코시오르,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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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닌, 베리야, 미코얀, 주다노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보로실로프,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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