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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 사업 현장 집행과 청렴 그리고 평등, 권리에 투쟁 - 이키스

카이텔(59.187) 2007.05.06 16:49:37
조회 731 추천 0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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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이키스 (1874년. 3월. 15일 - 1952년. 2월. 3일)


1874년 3월 15일, 이키스는 펜실베이니아주 홀리데이스버그 프랭크스타운에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인물로 항상 술에 빠졌으며, 자주 집을 비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신앙적이고 성실과 정직, 절약을 믿고 사는 사람이었다.


이런 집안 배경은 그에게 어릴 적부터 힘든 고난과 거칠고 직설적인 성격을 줌과 동시에 사회 정의와 시민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투사로 만들었다.


1890년, 그의 어머니가 자신의 신조를 유언으로 남긴 후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는 여동생과 그를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숙부집으로 보냈다.
그의 숙부는 매우 엄한사람으로 이키스는 숙부의 가게에서 학교 외에 모든 시간을 일했다. 그러면서 학교 공부를 열심히 했고, 매번 학급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앵글우드 고등학교 시절에는 좋은 선생님들로부터 감명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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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우드 고등학교 시절 - 맨 왼쪽이 이키스


앵글우드 고등학교 졸업 후 시카고 대학에 미술학과에 들어간 이키스는 학생들에 과외를 해주거나, 여러 가지 일을 하며 학교비를 마련했다. 그러다 자신에 인생에 있어서 큰 영향을 준 존 알트겔드를 보게 된다.


이키스가 대학생이던 1890년대 중반은 미국에 새로운 격동기로 엄청난 규모의 인구와 산업화로 쌓인 그 힘을 국내에서만이 아닌 해외로 뻗쳐 나가려던 시기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대규모의 노동쟁의가 이어졌고, 그에 따른 비인권적 탄압이 지속되던 시기였다.


그때 1894년에 일리노이주에서 미국 역사상 대표적 노동 쟁의인 풀먼 파업이 터졌다. 당시 일리노이주의 주지사였던 알트겔드는 전부터 노동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을 지지하며 그들을 위한 노동법 개선, 사회 진보 운동을 이끌던 사람이었다.
그는 파업이 확산됨에도 주방위군을 이용한 진압을 거부했고, 연방군이 투입되어 무자비한 탄압을 한 것에 대하여 항의할 정도였다.
알트겔드의 주장과 행동을 본 이키스는 그로부터 크나큰 인상을 받았다.


1897년에 이키스는 시카고 대학교를 고학으로 졸업한 후 여러 신문사를 다니며 일했고, 처음에는 스포츠면 기자로 활동하며 경력을 쌓다가 마침내 시카고 최상의 위치에 있는 시카고트리뷴사의 취재 기자로 취직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사람을 보게 된다. 그녀는 제인 애덤스로 1890년대에 사회개혁 운동을 추진한 사람이다. 그녀는 사회복지와 시민권리, 여성의 인권 향상을 주장하였으며, 미국 최초에 사회 복지관인 헐 하우스를 건립했고, 1931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키스에게있어 애덤스의 행동은 또 다른 감명을 주었으며 실제로 그녀의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1903년이 되자 이키스는 공화당에 입당하며 1905년부터 선거 운동원으로 열렬하게 활동했다.


1907년, 이키스는 시카고 대학교 법학 대학원(로스쿨)을 박사 과정으로 졸업하며, 바로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나 법률가보다는 사회 개혁 운동가로서의 삶에 헌신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시카고 정치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으며, 시민의 자유와 권리 확대에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미국 자유 인권 협회에도 가입했다.


1911년에는 부유한 집안의 여자와 결혼하나, 그녀의 허위허식적인 삶은 이키스와 맞지를 않았고, 1935년에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불화는 지속됐다.
첫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이키스는 새로운 여자와 재혼했는데, 이전의 결혼 생활을 교훈 삼아 지방에 농장을 사고 소박한 생활을 하여 두 번째 아내와는 행복하게 지냈다.


1912년에 대통령이었던 테오도어 루스벨트가 점차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공화당을 탈퇴하여 새로이 진보당을 결성한다. 진보적 경향으로 공화당에서 주류가 못된 이키스도 테오도어 루스벨트를 따라 진보당에 입당하여 선거 운동원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1912년에 테오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 선거에서 패한 후 진보당이 흐지부지해져 결국 1916년에 해산되자 이키스도 공화당으로 돌아간 진보당 인사들을 따라 공화당에 돌아간다.


공화당에 복귀한 이키스는 진보적인 공화당원인 찰스 휴스의 1916년 대통령 출마, 하이럼 존슨의 1920년, 1924년 상원의원 출마에 대한 선거 운동원으로 활동한다.


세계 제 1차 대전 때는 전쟁에 참전하려 했지만, 청력에 대한 신체 조건이 부족하여 입대하지 못한다. 대신 1918년에 YMCA에 들어가 전방 병사들에 대한 물자 원조와 위문 공연 활동으로 1919년까지 군역을 대신했다.


1919년, 귀국한 이키스는 일리노이주 윗네카에서 발명가이자 사업가 사무엘 인설 싸우게 된다. 사무엘 인설은 에디슨의 동료로 함께 발명에 동참했으며, 다른 에디슨의 동료들과 함께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현 제너럴 일렉트릭, GE)을 설립한 사람이었다.
이시기에 인설은 엄청난 거물로 많은 수의 전력회사와 철도회사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뛰어난 사업 수완과 설비 현대화로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그가 장악한 회사 중에는 시카고 에디슨(현 커먼웰스 에디슨), 북부 인디애나 공공 서비스사(현 나이소스) 같은 회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객들에 대한 악행과 장부 위조, 독점, 주가 조작 등으로 악명을 떨쳤으며, 이키스는 인설의 기업 횡포에 맞서 싸웠다. 둘의 악연은 이후로도 계속되었고 결국 인설은 1933년에 내무부 장관이 된 이키스에 의해 응징당하고 만다.


이후에도 진보를 막고, 뉴딜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해서라도 기사를 내보내던 시카고트리뷴의 사장 로버트 맥코이와 뉴딜정책에 반대하며 루스벨트와 대통령 자리를 놓고 싸운 보수적 공화당원 토마스 듀이하고도 대결하기도 했다.


특히 대결에서 뛰어난 언변 솜씨와 신랄한 위트, 유머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철저히 노골적인 말과 독설, 비난을 퍼붓는 것은 그의 상징이 되었다.


이런 그의 언변에 대해 작가 출신의 여성 하원의원 클레어 부스 루스는 “마음은 정치위원이고 영혼은 강철도끼”라고 평할 정도였으며, 공화당에 대통령 후보였던 토마스 듀이는 당선되면 이키스를 해임하겠다고 주장하자 대통령이 새로 선출되면 장관들이 자동적으로 교체되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안다며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은 언론에서 유명하게 뜬 조롱이었다.
그럼에도 누가 뭐라 해도 이키스는 언변에 대하여 자신의 방식대로 살았고, 이는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신념을 주장할 때도, 부당하다고 여기는 것에 반대할 때도 항상 자신의 방법을 지켜왔다.


1920년대에 걸쳐서 이키스는 보수주의화 되어가는 공화당에 남은 진보적인 세력을 주도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시카고 내에서만 국한되어 전국적으로 알려지지는 못했다.
대신 시카고를 비롯한 일리노이주 안에서는 이름난 정치인으로 인맥을 쌓고, 계속 운동을 벌이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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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서 연설하는 이키스


권리와 평등에 대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유색인종에 대해서도 차별을 금하고 평등 주장하여 1923년에 전미 유색인종 지위향상 협회 시카고 구역 회장을 할 정도였다.


1932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새로이 각료들을 명하던 시기에 그의 자문관들은 지지자들을 더 모으기 위해 공화당 내에 진보적 세력들도 동참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그래서 처음 생각한 것이 테오도어 루스벨트의 측근으로 한때 부통령 후보로도 나왔던 진보적 공화당 정치인 하이럼 존슨이었다.
루스벨트는 그를 내무부 장관에 명하려 했지만, 존슨은 여러 이유를 들며 거절했다. 대신 자신을 오랫동안 도와준 동료를 추천한다.


1933년 3월 4일, 이키스는 루스벨트 정부로부터 내무부 장관에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키스는 매우 놀랐다. 비록 자신이 공화당 내에서 독립적으로 루스벨트를 지지하는 진보 세력을 이끌기는 했지만, 엄연히 당이 다르기에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키스는 시카고를 떠나 워싱턴D.C로 향했고, 루스벨트 정부의 첫 번째에 공화당 장관이 됨과 동시에 제32대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39년까지 공공토목사업위원회 위원장도 겸직하게 된다.


내무부 장관 겸 공공토목사업위원회 위원장 이키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그는 국가 행정과 정책 시행과 더불어서 뉴딜정책에 공공사업 등을 총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인디언 내무국을 시작으로 내무부와 산하 기관에 무능하고 부패한 인사들을 정리했으며, 공무원들의 부정, 부패를 막았다. 그리고 공공토목사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정확하고 필요한 예산만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키스를 “적징한 해럴드”라고 별명 지었다.


6년에 오랜 기간 동안 그는 50억 달러의 비용으로 2만 건 이상의 뉴딜정책 사업을 총괄했다.


1936년 건설된 후버댐과 1938년 처음 개통된 플로리다 키웨스트 국도와 1937년에 뉴욕시 링컨 터널도 그의 주도아래 완공되었으며 그 외에 뉴딜정책 동안에 지어진 다리, 도로, 병원, 학교, 하수 시설 등도 수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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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버댐 건설 현장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환경을 소중히 하고, 꽃과 정원을 좋아한 이키스는 환경 보존과 실업구제를 위한 공공사업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국립공원을 적극적으로 조성하여 1933년에 있던 미국의 국립공원의 규모를 8백20만 에이커에서 2천만 에이커로 넓힌 성과를 이루었다.


1930년대 중반에 그의 환경에 대한 열망은 더욱 달아올라서 농무부의 생물 조사국(현 어류야생동물 보호국)과 산림청을 내무부 산하 기관으로 만들기를 원하였다. 물론 농무부에게는 내무부의 방목청을 준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그러나 농무부 장관 헨리 월리스는 거절했으며, 아예 자연 보호부를 새로 만들자고 주장할 정도였다. 거기다가 산림청은 나무를 심으면 토양 재생성에 도움을 준다는 이유로 나무도 작물로 볼 수 있다며 농무부에 남기를 원했다.


이키스는 1936년에 처음으로 의원들을 설득하여 부서 개정안을 제출하였으나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굴하지 않고 루스벨트 대통령과 의회를 설득하며 1937년, 1938년, 1939년에도 계속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결국 1939년에 이키스의 뜻에 응하여 부서 개편이 되었지만, 농무부로부터 얻은 것은 생물 조사국이 전부였으며, 의외로 상무부에서 수산국이 왔다.
결국 산림청은 뜻을 굽히지 않은 것이다. 이키스는 수산국과 생물 조사국을 어류야생동물 보호국으로 통합한 후 산림청마저 다시 가져오기 위해 다시금 투쟁을 지속했고, 농무부와 산림청은 끝까지 이키스의 뜻을 거부했다.


1940년에 시도가 실패하여 뜻을 계속 이루지 못한 이키스는 루스벨트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나 그를 아직도 필요로 하는 루스벨트는 사직을 막고 계속 직무를 다하기를 명한다.
이후 이키스의 행동은 어느 정도 잠잠해졌지만, 그의 고집은 일생에 오점으로 남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키스는 자연과 관련된 투쟁을 지속했고, 비록 1960년대에서야 실현되기는 했지만, 야생보호법 제정과 국립해안공원 조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또한 뉴딜정책에 모든 사업에 계획을 구상하고 공사가 좋은 결과가 나올지 항상 검토하고 확인했으며, 완료된 것에 대해서는 운영이 잘되고 있는 검사했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지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람들을 설득하여 뉴딜정책을 구상한 해리 홉킨스와 함께 뉴딜정책에 가장 핵심적인 인물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뉴딜정책 이외에도 자신이 항상 주장하던 권리와 평등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뜻을 알렸으며 이는 유색인종도 포함되어 있다.


그에 유색인종에 대한 평등에 면모는 전미 유색인종 지위향상 협회 시카고 구역 회장을 맡았던 경력과 1939년에 희대의 성악가로 평가 받는 흑인 성악가 마리안 앤더슨에 대한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1939년에 그녀는 미국 애국 여성회 콘스티튜션 홀에서 공연을 개최할 예정이었는데, 홀에 주관 단체인 미국 애국 여성회가 그녀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공연을 막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영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를 1천명의 미국 애국 여성회 회원들이 부당한 짓이라며 탈퇴할 정도였으며, 이키스도 앤더슨을 지지하며 미국 애국 여성회의 주장을 비판했다. 그럼에도 미국 애국 여성회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이키스와 루스벨트 부인, 전미 유색인종 지위향상 협회에 사무총장이자 흑인에 대변자인 월터 화이트는 뜻을 모아 앤더슨을 도왔고, 마침내 링컨 기념관 앞에서 야외 공연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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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앤더슨과 이키스


그 외에도 공공사업에 유색인종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뉴딜정책에 혜택을 유색인종들에게도 주었다. 심지어 자신의 내무부 부서에 식당에 직원들을 거의 흑인들로 고용할 정도였다. 전시 기간에 미국계 일본인들을 수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평상시 하던 성격대로 대놓고 항의할 정도였다.


이키스가 맡은 다른 직책으로는 자원에 조정관이었는데, 그는 석탄, 어업, 석유에 대한 조정관을 맡았다.
특히 석유에 대해서는 대공황 시기에는 석유 할당제를 도입하여 하락하던 유가를 올렸고, 세계 제 2차 대전 시기에는 배급제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석유 조정관으로 활동하면서 어느새 석유로 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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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 부인과 이키스
존스 부인은 일본군이 알류샨 열도를 침공했을 때 애투섬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 
이키스는 포로 생활로 고생한 그녀에게 7천 달러 가까이 되는 비용으로 보상하고 있다.

 

세계 제 2차 대전 시기에는 공원 관리와 야생동물 보호에 힘썼으며, 전시 체제를 위한 보안, 치안 부서 증설과 경찰력 강화에 대해 반대했으며, 누구보다 파시즘과 나치즘의 공포와 억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서슴없이 내뱉었다.
특히 1941년 5월 18일에 센트럴 파크 몰에서 10만 명에 군중을 앞에 두고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소중함과 파시즘에 대한 적대심에 관하여 했던 연설은 지금까지도 미국 역사상에 남는 훌륭한 연설 중에 하나로 남고 있다.


1941년 5월 18일 연설
http://www.historyplace.com/speeches/ickes.htm


1946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세상을 떠나고, 새로이 대통령에 오른 해리 트루먼은 석유 조정관직을 해군부 차관 에드윈 폴리에게 맡겼으며, 폴리는 이키스와는 달리 석유 가격을 엄청나게 인상하고 석유 산업을 조여 막대한 석유 거물이 되었다. 그래서 이키스는 트루먼에게 항의한 끝에 2월 15일에 사임한다.


은퇴 후 워싱턴D.C와 메릴랜드주 사이에 마련한 자신의 노장에서 여생을 보내며, 1946년에서 1952년까지 잡지사 The New Republic에 칼럼니스트로 계속해서 사회 개혁을 주장하고 정치적 부정, 부패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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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2월 3일, 이키스는 마침내 워싱턴 D.C에서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1934년에 논픽션 New Democracy와 1943년에 회고록 The Autobiography of a Cumudgeon, 그리고 1953년에서 1954년에 기간에 걸쳐 두꺼운 3권 분량에 회고록인 Secret Diary를 저술했다.


그의 아들 해럴드 맥윈 이키스는 클린턴의 정치 참모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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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루스벨트 대통령도 스탈린, 히틀러 못지않게 오랫동안 집권했는데, 정작 루스벨트의 측근들이 알려지지 않아 올렸습니다.

오늘 올린 3명과 올리지 못한 노동부 장관까지 합하여 루스벨트 집권부터 루스벨트 사후가까이 까지 장관 자리를 지킨 사람들입니다. 루스벨트에게 핵심 측근인 인물들이며 각자 맡은 부서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자리를 오래 지킨 장관들입니다.

이 3명에 대한 자료를 끝으로 잠시 오랫동안 잠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달은 좀 일정이 바쁠 것 같아서요... 다음 달에도 가능한지 확인한 후 힘들다 싶으면 먼 훗날에 다시 오겠습니다.

다만 어쩌다가 간단한 자료를 남기러 왔다가 갈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올린 3명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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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945 일본은 한국이 반성하고, 반일을 멈출때까지 절대 한국을 도와주면 안된다 야마데라코치(210.107) 13.06.14 23 0
108944 이번에는 하마마쓰에 가봅시다 mk(110.76) 13.06.14 25 0
108942 반일국뽕이 풀린다면(대사만 바꿈).swf 야마다신이치(210.107) 13.06.14 40 0
108941 이번에는 센다이에 가봅시다 mk(110.76) 13.06.14 1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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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템페스트, 오늘(23일) 日 싱글 'My Way' 발매 디시트렌드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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