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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봉 사건 (일본어 번역기로 돌림)

Orca(220.121) 2007.07.13 22:27:53
조회 1620 추천 0 댓글 26

※ 일본사이트 이긴한데 참조하실분 참조하세요...번역기로 돌렸지만 읽을만 하실겁니다.....^^;;
   원 사이트 => http://yokohama.cool.ne.jp/esearch/kindai/kindai-kokkyo12.html

만소 국경 분쟁 1/건차네지마 사건, 장고봉 사건등 개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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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차네지마 사건/당시의 배경 =====

쇼와 12년 6월 만주의 북쪽 정면으로 건차자(칸챠즈) 섬사건이 일어났다.
그 당시 소련은 제2차5개년 계획이 성공가운데 개료 해, 그 중공업 건설에 근거하는 국력, 군사력이 급속히 상승하고 있던 반면, 스탈린의 숙청 공작의 피크로 여겨진 트하체후스키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한편 나치스 독일의 발흥은 눈이 휘둥그레 지게 하는 것이 있어, 소련을 돌아 다니는 내외의 정세는 다사 다난을 다한 것처럼 보여졌다.또 시나에 대하고는 코민테른의 획책이 순서대로 공을 세워, 쇼와 11년 12월의 서안 사건을 계기로 국공 합작의 기운은 때를 쫓아 익고 있었다.격이라고 시나 전반의 대일 감정은 급속히 악화의 일로를 걸어, 일지양국간의 긴장은 높아져, 동아의 정세도 예측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당시 우리 육군은 간신히 이시하라 간지 대령의 구상에 근거해, 국력, 군사력의 강화에 구체적인 제일보를 내디디기 시작했던 바로 직후에서 만났다.
건차네지마 사건은 이러한 정세가운데 발생한 것에서 만나며, 국경 분쟁 중(안)에서도 국경 하천인 대하의 나카스의 귀속을 둘러싸고 일어난 특이의 사건이었다.

=====사건 경위 =====

건차네지마는, 애휘 동남방약 100킬로 부근, 흑타츠에(아무르하) 상에 있는 나카스의 하나이다.이전부터 만소 양국의 선박은 동섬의 키타가와 수로 즉 소련 하안 가까이를 이전부터 항행하고 있었다.만주국은 국제법 우에노하라칙 「국경은 항로 중앙선」이다고 해, 동섬을 자국령으로 간주하고 있었다.이것에 대해 소련측은, 불평등 조약인 아이군 조약을 방패에, 흑타츠에에 대해서는 항로 (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주된 섬, 나카스는 전부 소련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하는 기왕의 러시아·청나라간의 결정을 주장하고 있었다.

쇼와 12년 6월 19일 조조 소련 국경 경비대 약 20명이 건차네지마에 상륙, 만주국 직원이나 채금 노무자등을 강제적으로 퇴거시켰다.관동군 사령관은, 참모본부의 지시에 근거해 제1 사단의 일부를 하안 부근에 전개시켜, 무력행사의 준비를 진행시켰다.대안의 소련군은 저격 3개 사단이라고 추측해졌다.6월 29일 참모본부는 무력행사를 중지해, 외교교섭에 의한 사태 수습에 방침을 바꾸었다.그 날 소련 정부는 일본 정부의 신청에 따라 동섬의 원상회복, 사건지 부근의 집결 병력의 돌아와에 동의 했다.6월 30일 3척의 소련 포함이, 남쪽 수로에 고속도로 침입, 하안의 날만군부대에게 사격을 퍼부었다.일만군은 즉시 속사포에서 응 비쳐 포함 1척을 격침, 1척에 손상을 주었다.시게미츠 마모루 주소 대사가 엄중한 항의를 실시한 결과, 7월 2 일소련외무 당국도 일본측의 현상 복귀 요구에 따라 모스크바에서의 외교교섭의 결과, 5일까지 철병을 완료했다.

일본의 주장대로 해결한 것을 받아 일본 육군 특히 관동군내에서는, 국경 분쟁은 외교교섭보다 무력 처리가 즉효적이다는 사상이 대두해, 소련은 당분간, 대외 간섭의 여지 없음이라고 판단되게 되었다.그 때문에 관동군을 시작해 이른바 노구교 사건 확대파가 강경론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또한 소련의 이 저자세는, 당시 소련내에서 진행되고 있던 대규모 고급 간부 숙청 공작에 관계가 있던 것은 아닌지, 로 되어 있다.

=====장고봉 사건 (소련 호칭 하산호수 사건)/당시의 배경 =====

장고봉은 만주국 동남단의 혼춘현이 조선 토호쿠부에, 정확히 혀와 같이 길게 늘어난, 소련령 포시엣트만과 두만강의 사이의 구릉지대이다.표고는 불과 150미터미만이었지만, 이 정상에서는 조선의 국경 철도가 명확하게 조망되어 또 북조선의 요항·나진도 일망가운데 거둘 수 있는 것이 가능한 전술적 중요지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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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근의 국경선도 또 불명확이었다.1886년의 혼춘조약의 중국문에서는 장고봉은 청나라령 즉 만주국령이며, 일본측은 장고봉의 정상은 당연히 만주령이다고 해석하고 있었다.한편 소련측의 주장에 의하면, 국경은 하산호수의 서방, 장고봉의 정상을 지나고 있으면 좋은, 게다가 실제로는 계표는 없고, 문제는 악화되고 있었다.원래 변경의 땅에서, 부근의 만주인이 목초를 요구해 걷고 있던 곳에서 만났지만, 만주 사변 나중이 되어 이 지방에도 일소 양군의 국경 경비대가 배치되어 일본군은 제19 사단의 보병 제 76 연대의 1 소대가 고성에 주둔 하고 있었다.당시 양군의 주력은, 일본의 재만병력 6 사단에 대해, 극동 소련군은 20 몇 개 사단에 증강되어 극동 군사령관 방어 윷 헬 원수는, 일찌기 제1차국공 합작 시대, 고문으로서 광동으로 향해 간 갤런 장군이었다.

=====사건의 원인·동기 =====

그럼 왜 소련군은 이 시기에 장고봉에 군사를 진행시켰는가.

① 대일 위기를 부추겨, 반스탈린 기분을 대외적으로 돌려 국내의 통제 강화를 요구하려고 했다.
② 방어 윷 헬 원수가, 적군의 숙청 사건에의 불안으로부터 보신이기 때문에 국경 분쟁을 역이용 했다.
③ 리 대장 망명 사건(아래와 같은 참조)의 극동 적군의 위신 회복을 위한 데모.
④ 일본군의 무한공략전 준비의 진전했던 것에 귀감 봐, 장고봉으로 일을 자세 시나를 간접적으로 지원하려고 했다.

한편 일본 측에와는 보면, 분명히 장고봉은 전술적 요지였지만, 전반의 위치로부터 생각하면 그것은 전만주의 최남동단의 일점에 지나지 않고, 게다가 그 주변의 지역은 거기인 체하는 협소로 대군력의 사용에는 부적격인 지형이며, 소련군의 일부가 이것을 점거했다고 해도 대국에는 영향은 없었다.또 전년여름부터의 중일전쟁의 전개상으로부터도, 소련과의 사이의 별로 의미가 없는 지점을 둘러싸고 분쟁을 일으키는 일은, 본래라면 절대로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사건 경위 =====

쇼와 13년 6월 13 일소련인민위원부 극동 부장관(GPU 장관) 류시코후 정치 대장이, 만주국혼춘현에 망명했다.이것이 동기였다고는 명언할 수 없지만 7월 9일 10수명의 소련병이 장고봉정상에 나타나 그 병력은 점차 증가했다.만주국은 장고봉부근은 전술의 조약에 의해 자국령으로 하고 있었지만, 이 방면의 방위를 담임하는 조선군은 「국경 불명확 지구에는 배병 하지 않는다」방침에 의해 일병도 배치하지 않았다.
소련병 증강의 확인을 고성 수비대보다 받은 조선군(군사령관 코이소국 아키라 대장 12)은, 제19 사단의 일부 파견을 준비했다.7월 13일 제 19 사단으로부터 소련병 약 40명이 장고봉을 점령중에서, 착착 진지 구축중인 취지 보고를 받은 조선군은, 타다 참모본부 차장, 토조 육군 차관, 이소야 관동군 참모장에게 발전했다.
7월 16일 대륙령 제 154호를 가지고 조선 군사령관에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장고봉부근 에 있어서 소군의 불법 월경에 대해, 소요에 응해 재선의 예하 부대를 국경 근처 집중하는 것을 이득.단 실력의 행사는 명령에 의.」이와 같이 집중하는지 아닌지는, 조선 군사령관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으로 되었지만 참모본부 작전과의 생각은, 장고봉상의 소련병을 기민하게 격퇴하고, 게다가로 외교 절충을 진행시킨다고 하는 일격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조선 군사령관은 제19 사단장에게 응급 파병(평시 편성)의 준비를 명해 17 일출동준비 부대의 진출을 명했다.

7월 20일 사친왕가의 하나 참모총장이 무력행사에 대해 상주 재가를 바라보려고 했다.그 때 폐하로부터, 「현재의 정세에 있어서 마마1에도 성실한 대소전이 일어났을 경우, 어떻게 처치를 붙일 생각인가」라는 하문, 특히 중일전쟁 확대중의 우리 국력·경제력에 대해 진 생각의 정도를 배찰 되는 말씀이 있어, 재가를 바라보는 것을 자발적으로 취소해 조선군에 대해 대륙지 제 204호에서 사실상의 무력행사 중지를 명했다.7월 26일에는 대륙지 제 210호로 원주둔지에의 귀환을 지시, 당분간 보병 1개대대, 포병, 공병 각 1 개중대로 경흥의 수비대를 증강해, 주력은 철퇴를 결정했다.이것으로 장고봉 사건은 불확대 방침을 가지고 중지할 수 있을까로 보였다.

=====사쿠사미네 사건에의 확대 =====

제19 사단장·오다카귀장중장(16)은, 군대 교육의 권위인 것과 동시에 적극 감행인 장군으로서 알려져 있었다.또 예하 부대장도 호기스런 사람이 대부분, 소련의 불법 월경에 대해 실력을 행사한다고 하는 일격 사상은 사단 장병에 이르러, 열심히 그 탈환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명령에 의해 순서대로 주력은 철퇴하고 있었다.

7월 29 일소련군이 새롭게 장고봉북방 2킬로의 사쿠사미네 남방의 국경을 넘어 진지의 구축을 개시한 것을 확인한 제19 사단은, 소련의 새로운 진공이라고 봐 2개 소대를 가지고 독단 이것을 공격 구축한 후, 분쟁을 피하기 위해 후방에 물러났다.그러자(면) 소련 증원 부대가 사쿠사미네 일대를 점령, 한층 더 방어 윷 헬 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제40 저격 사단 주력이 전진, 제39 저격 군단과 연해 집단 비행대가 전투 태세에 놓여졌다.오다카 사단장이 사쿠사미네 방면에의 소련군의 월경을 새로운 사건으로서 독단 공격을 더한 것에 의해, 사태는 급격하게 발전한다.
7월 30일 제 19 사단은 2개대대여를 가지고 사쿠사미네 및 사쿠사미네 방면의 소련군에 야습을 감행, 일대의 능선을 점령했다.이것에 대해 소련군은, 제40 저격 사단 주력을 가지고 전면 공격을 더해 왔지만, 일본군은 이것을 모두 격퇴했다.소련 국방 인민위원 보로시로후는 슈테룬 대장을 군단장으로 임명, 3개 저격 사단과 1개 기계화 여단을 가지고 일본군의 격멸과 국경 회복을 명했다.

당시 제 19 사단은 국군내의 일류 사단이라고 주목받고 있었다.그러나 우세한 빈터 양면의 병력을 전개한 소련군에 비해, 현저하고 열약했다.왜냐하면 우리 분은 절대 불확대 방침 때문에, 1기의 비행기, 1량의 전차, 1문의 장거리포도 없고, 축성의 시간도 불충분하고, 전투는 순서대로 곤란을 더하게 되어, 전수 방어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이다.비교적 사정이 큰 90식 야포 및 장거리포인 15센치 카농포가 출현한 것은 정전전의 하루 이틀에 지나지 않고 한편 전투는 고지를 포함한 국지에 있어 행해졌다.
소련군은 8월 6일부터 군단 주력을 가지고 총공격을 개시, 이후 5일간 격전이 계속 되었다.압도적인 전력차이 중(안)에서 제19 사단은 전수 방어에 철저해, 강렬한 포격, 집요한 전차 공격 등에 참아 진지를 고수해 분전, 장고봉·사쿠사미네 료타카지를 사수하고는 있었지만, 손해 증가에 의해 전력의 한계가 의심되어지고 있었다.

중앙부에 있어도, 어쨌든 한 번 당면의 소련군을 격퇴하고 면목도 달했으니까, 언제까지나 괴로운 방어 전투를 계속할 필요도 없는 것은 아닌지, 군은 자주적으로, 어느 시기를 보고 군사를 철수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은지, 라고 하는 의견이 유력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중에서 모스크바에서의 정전 협의가 성립한 것은 8월 11일의 일로이다.

=====정전 협의 =====

압도적 전력차이를 가지고 전면 공세를 실시한 소련에서 만났지만, 자기가 주장하는 국경선을 완전하게 확보한 다음 정전에 응한 것은 아니었다.불충분한 그대로 현상 정전에 응했던 것이다.또 일본 정부는 당초 강경한 현상 회복 요구를 실시했지만, 전황의 추이에 따라 급속히 연화했다.전술과 같이 전수 방어의 일본군은 고전을 강요당해 장고봉정상의 북부 능선 그 외를 가까스로 부분적 으로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철퇴를 요구하고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았던 소련이지만, 시게미츠 대사가 일본군은 자주적으로 1킬로 후퇴해, 소련군은 현재지에 머무는 것에 양보, 8월 11일 정오 정전의 합의가 성립했다.게다가 그 후 리트바노후 외무 인민위원은, 공정의 관념보다 일본군만의 후퇴를 필요로 하지 않고로서 일소 양군 모두 10일 1200 현재의 선에 그치는 것을 제의 해, 그 대로 모스크바 정전협정이 성립했다.
소련군은 대군력을 투입해 힘공에 노력했지만, 성과 불충분한 그대로 큰 손해를 위해 공격의 한계에 가까워져, 일본측의 견제 조치등에 의한 태세상의 불리와도 더불어 정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또 아래와 같이 소련군의 사상율은 높고, 정전 협의가 순조롭게 진척 한 원인도 그 점에 있었다.

=====전과와 손실 =====

 일본군소련군
전투 병력6814명15000명
동원 병력8862명32000명
대포37문237문
전차 -285량
항공 지원 -250기
전사526명792명
전상914명2752명
전병 -527명
사상율21.1%27.1%
전차 파괴96량 
포〃16문 
기관총〃3정 
비행기 격추3기 
로 잡아 소총105정 
〃자동소총3정 
〃기관총22정 

소련군의 손해는, 1993해에 비밀 지정 해제에 의해서 공표된 통계조사에 의한다.

자주 말해지고 있는,‘무적과 칭한 관동군은, 소련 기계화 부대의 전에 무력하고 완패를 기했다'로 하는 비평은 실수이다.후의 노몬한 사건도 그렇지만, 호각 이상으로 싸웠던 것이다.작전 제일밤에 감행 된 보병 제 75 연대 제 1대대 주력에 의한 야습은, 일본 육군이 창설 이래, 전통으로서 자랑한 백병을 가지고 승리를 거둔 미츠테루 있는 전 례이며, 쇼와 20년 여름의 종전에 이르기까지 , 대소 지상 전투에 대하고 수중에 넣은 유례의 적은 혁혁한 승리였다.

=====말씀 =====

8월 15일 1400 사친왕가의 하나 참모총장은, 장고봉 사건 종결에 관계되어 자세한 사정 상주 말씀드렸는데, 「이번 장고봉 사건에 대하고, 우리 장병이 곤란한 상황아래에 적은 병력 이것에 맞아, 자중 은인 이기는 그 임무를 완 없어지고는 만족하게 생각한다.상사상자에 대해액긍의 정에 승그림.이 취지 장병에게 말씀드려 전해서.」라는 우악 되는 칙어를 받았다.
이 말씀은 참군 제 502호에 의해서 조선군에 전보 되어 군으로부터 관계제대에게 전달되었다.

=====장고봉 사건의 교훈 =====

당시 육군은, 한구 작전을 준비중이었기 때문에, 대소 정면으로 병력이 구속되지 않게 전차나 항공기를 사용하지 않았다.게다가 정전 직후에는 2주간에 걸쳐서 사수한 전선으로부터 철퇴해, 두만강 좌안에는 배병 하지 않았다.그것을 본 소련군은 상당한 병력을 남겨, 일본군철퇴 후에 자기가 주장하는 국경 부근에 야전 진지를 역들구축, 다음 해에는 토치카 진지의 구축에조차 착수했다.일본군은 국경선에 관한 주장을 일방적으로 방폐했던 것이다.
국지에 끝났다고는 해도 전투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 제19 사단장 오다카 중장의 독단 공격은 불문에 첨부 되어 정전 후, 국경선을 아주 간단하게 방폐해 우리 장병의 사투를 무의미하게 한 책임도 전혀 추궁받지 않았다.후자의 점에 가장 불만인 것은 관동군이며(본사건은 조선군의 장관), 참모본부 주도에 의한 이 장고봉 사건 처리는 실패라고 보고, 후에 제일선 부대에의 강경적인 「만소 국경 분쟁 처리 요강」을 명시하게 되었다.

이 전투는 본격적이지 않았다고는 운네, 일본군으로서 시작해 경험한 근대 무력전인 것과 동시에 대소련군전투였다.당시 아직 미지수인 「화력의 실체」와「우세한 보전 포격전력 통합의 요령」의 2점에 대해 귀중한 교훈이 남겨졌을 것이다.다음 해의 노몬한의 전황은, 이미 이 사건에 대해 그 실상의 일단이 여실에 전개되고 있었다.따라서 대소 작전 카미노마에위적 임무와 국경 방위를 양어깨에 담당하고 있던 관동군으로서는, 특히 진지하게 이러한 전 훈을 검토해야 했다.

그리고 장고봉 사건으로부터 약 10개월 후의 쇼와 14년 5월 11일(12일) 이번은 서방 국경에서 노몬한 사건이 발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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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612 곰늑대야 카더라야 부탁하나만 할께. [2] 한스 요하임 마르세이유(121.154) 14.12.06 164 0
117611 2차대전 때 북해도는 소련에 넘어가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9] 淸皇叔輔政王.. ■x■x(220.118) 14.12.05 302 0
117610 궁금한게 하나 있는데 [5] zzzzzz(115.137) 14.12.05 176 0
117608 이치로 모기닮음. [6] 卐NTT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4.12.04 224 2
117604 역갤의 광파리 닮은 류 [3] 卐NTT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4.12.04 163 4
117603 2대갤러 들은 프라모델하나씩 갖고있겠지? [6] 부엉이 우흥(1.233) 14.12.03 162 0
117602 2차대전 후 소련이 어째서 동프러시아 전체를 차지하지 않았는지 의문 [2] 淸皇叔輔政王.. ■x■x(220.118) 14.12.03 331 0
117601 광파리는 이런거나 퍼오지. [2] 卐NTT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4.12.03 635 2
117600 2차세계대전당시 젊은이들의 사망비율이 궁금함 [1] 커레히(164.125) 14.12.03 189 1
뉴스 ‘방판뮤직 : 어디든 가요’, 김현정 성량에 스피커 터졌다! 명불허전 원조 디바 가창력 ‘그녀와의 이별’ 디시트렌드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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