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 天保의 개혁 - 막부의 이름으로.
텐포(天保) 연간(1830~1843) 일본의 에도(江戶) 막부는 그동안의 안정기를 지나 각종 재해 등에서 드러난 幕藩체제의 모순과 사회 혼란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에 老中 미즈노 다다쿠니(水野忠邦)는 이런 사회 모순을 해결하고 막번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들을 실행하였는데, 이를 보통 天保의 개혁이라고 부른다. 이 텐포의 개혁은 막부의 마지막 대규모 개혁 정책으로(주19) 막번 체제의 재정비와 사회 혼란의 수습, 그리고 외세와의 접촉과정에서의 경계태세 강화를 주요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이 텐포의 개혁이 실패한 뒤, 페리 제독의 일본 내항으로 인하 일본은 이른바 幕末이라는 큰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를 겪게 된다.
사실 텐포 연간 초기는 큰 혼란이 없는 안정된 시기였다. 허나 수년 후부터 각종 자연재해와 기근, 이로 인한 농촌과 도시의 폭동과 단체 소송, 사회와 경제적 변화, 그리고 힘을 기르기 시작한 지방 雄藩과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위기들은 텐포 개혁 추진의 배경이 되었다.
텐포 4년(1833)부터 이상 기후로(주21) 흉작이 발생, 전국적인 기아 문제가 발생하였고, 텐포 7년에는 대규모 냉해로 인해 3년 전을 능가하는 기근이 발생해, 돗토리(鳥取)번은 40%만을 수확했고, 미토(水戶)번은 쌀 75%, 밀 50%를 잃었으며, 심지어 동북지역은 평년의 28%만을 수확하는데 그쳤다.(주22) 사실상 전국의 농업이 괴멸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텐포 원년~3년간 수입이 평균 150만석이었던 天領(주23)수입은 텐포 7년 103만석으로 급감했다. 이로 인해 텐포 4년부터 10년까지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였고,(주24) 이는 진행되어 가는 사회 변동과 결합하여 더 큰 혼란을 초래하였다. 19세기 초부터 상품 작물 생산과 화폐 경제의 보급 등으로 인해 각 번의 자급자족 체제가 소멸하고 경제혼란과 빈부 격차 등의 사회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 기근으로 인해 더 큰 혼란을 초래하였다. 더욱이 각 번은 自領民의 식량 확보를 위해 곡류의 번외 반출을 금지하는 穀留정책을 취하고 있었기에 각종 농민의 一揆와폭동, 집단 소송이 빈발하게 되었다. 특히 이런 반발들은 번내 자급자족 체제 붕괴와 더불어 타 지역과 연대해 일어나고 있었고, 급기야 은퇴한 오사카의 與力인 오시오 헤이하치로(大鹽平八郞)의 난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는 무사가 가담한 최초의 반란이고 막번 체제의 경제중심지인 오사카 한복판에서 벌어진 반란으로, 흔들리는 막번 체제에 결정타를 날렸다.(주25)
이런 혼란으로 인해 막부 권위는 추락하고 막번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여러 지식인과 무사들은 이런 저런 대책을 제출하게 되었고, 마침내 텐포 12년(1841) 12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요시(德川家慶)의 인가를 받아 노중首席인 미즈노 다다쿠니는 엄격주의와 막번 체제 확립을 목표로 한 각종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원래 미즈노 다다쿠니는 히젠(肥前) 가라쓰(唐津)번의 6만석 번주였다.(주26) 그는 중앙정치에 뜻을 품고 승부를 건 전봉요청으로 인해 도토미(遠江) 하마마쓰(浜松) 6만석으로 전봉되었다. 이후 오사카 城代, 교토所司代를 거쳐 마침내 텐포 5년(1834) 노중수석이 되었다. 그는 전임 장군인 11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齊) 사후 그의 총신과 측근들을 제거하고, 그들과 가까웠던 에도의 奉行들 역시 압도하면서 막부의 실권을 쥐었다. 이 에도의 봉행들과의 경쟁은 이후 그의 정책에 몇 가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의 개혁 슬로건은 간단했다, “享保, 寬政으로의 복귀!” (주27)
막부는 우선 개혁 분위기를 잡기위해 사회 기강 숙정과 쇄신을 개혁 전제로 삼고 11월 16일 市情取締令과 儉約令을 각 町奉行들에게 하달했다. 取締令은 칸세이의 개혁을 참고하여 외설, 매춘, 음주, 복권, 도박 등의 환락을 금지하고 극장과 오락시설의 축소, 단속, 폐지, 이전을 명령했다. 기타 외설물 작가들을 처벌하고 연극 내용도 종교적, 역사적 주제로 하도록 강요했다. 검약령은 무사와 농민, 부호, 町民 등의 사치를 금하고 신분에 맞는 소비를 하도록 했는데, 과도한 의식주와 정원, 장식, 고가의 그림이나 錦繪,(주28) 호화 제례를 금하였고, 미남 배우를 사치로 처벌하였다. 풍속 교정을 위해 여자 이발사와 女淨瑠璃, 무뢰배를 엄금하고 뇌물 수수를 단속했다. 근무 기강도 바로잡고자 각 관료들의 근검 절약과 책임, 봉사를 고취하고 근무 규정도 강화했으며 근무에 태만한 代官들을 대폭 파면, 교체하였다. 사실 이는 슬로건대로 역대 개혁들의 내용이었는데, 지나친 검약과 도덕주의는 일선 奉行들과 시민들의 반발을 샀고,(주29) 기강 교정의 효과도 없었으며 오히려 市情과 상업의 침체만을 초래했다.
이어서 농정에도 손을 댔다. 이미 8월에 농촌에도 검약령과 사치 금지, 풍속 교정의 敎令을 내린 바 있었다. 11월 전국의 代官에게 농정개혁 방침을 하달했는데, 연공의 적정화, 개간과 가코이마이 장려, 농촌 비용의 절감, 대관들의 자숙과 검약, 현지 근무 강화 등 역시 칸세이의 개혁을 답습한 농정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대관들에게 8통의 布令을 내려 성실한 근무를 강조하고 태만한 대관들을 대폭 파면했는데, 이는 대관의 농정의 중요성을 공식적으로 강조한 것이었다. 그리고 농촌 분화와 빈부 격차 확대로 인한 농민들의 에도 유입으로 지방 노동력 감소와 도시 문제를 막기 위해 텐포 14년(1843) 3월 ‘人別改의 令’을 내려 농민의 에도 이주를 금지하고 에도로 흘러들어온 인구는 歸國시키며,(주30) 大工이나 左官같은 出嫁職人은 에도에 올 때 반드시 면허장을 지참케 하고 만기가 되면 반드시 귀촌시키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는 농촌 인구의 안정과 도시 문제의 감수, 행정 기구 정비, 막번제 하의 백성 통제 강화를 시도한 것이었다. 이 역시 칸세이의 歸農令을 답습한 것이지만, 보다 더 철저하게 시행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 곤궁해진 무사와 영주들을 구제하기 위해 막부에 진 빚의 반을 갚은 것으로 처리하고, 잔액은 무이자 年賦 상환하도록 하였다. 단, 5년 미만의 것에는 적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12월 추가조치를 내려, 13년에 이른 것에 한해서 인정하도록 하고, 遠屋町會所 貸付金製를 만들어, 무사들의 藏宿에 대한 借金을 반제시켰다. 이 대부금은 백성들도 이용 가능했으나, 백성들에게는 박하고 무사들에게 유리했다. 즉, 이런 정책 역시 무사들의 경제적 파탄을 막아 막번 체제를 강화시키고 지배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의 경제상황은 최악이었다. 분세이(文政) 연간(1818~1829)이래의 물가 상승과 통화 문제들은 饑饉과 이에 따른 米價 폭등(주31)으로 더 심화되어 사회 혼란의 요인이 되었다. 물가 상승으로 인한 과도한 통화량은 물가 상승을 부채질했다. 이렇게 악화일로인 국가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다다쿠니는 가부나카마(株仲間)을 해산하기로 했다. 가부나카마는 에도시대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상공업자들이 사적으로 조합을 결성하는데, 이걸 막부나 번이 인정한 것이었다. 허가 이유는 우선 통제가 용이하며 그 동안의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허가하거나, 물가조정과 명령전달 등의 편의를 위해서였고, 지나친 경쟁으로 인한 도산방지, 또 막부나 번에 冥加金, 無代納物의 바치는 대신 허락하였다.(주32) 그런데 갈수록 독과점 현상이 나타나고,(주33) 명가금 상납분을 상품에 전가시켜 물가를 올리기 때문에 집단 소송 등의 원인이 되었으므로 이를 해산하기로 하였다.
먼저 텐포 12년 7월에 다다쿠니는 신임 오사카 町奉行 아베 쇼조(阿部正藏)에게 오사카에서의 상품유통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고, 쇼조는 與力 우치야마 히코지로(內山彦次郞)에게 조사를 시켜 이를 막부에 보고하였다. 보고서인 諸色取締方之儀 付奉 伺候書付에는, 최근의 물가 상승은 가부나카마의 부정보다 惡貨, 물자의 오사카 경유 비율 감소 때문이며, 최대 원인은 각 번이 전매제로 매점을 시행하고, 산물이 오사카를 거치지 않고 에도로 직송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해결책으로는 각 번의 전매 금지, 산지 직매와 가격 결정 금지, 가격의 20% 인하, 오사카 행 화물의 중간 매입 금지, 오사카 상인의 前貸制를 통한 산지 생산자 보호라고 제안했으며, 가부나카마의 해산은 상품의 유통을 저해시킬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12월 13일 다다쿠니는 구두로 제1차 株仲間解散令를 발표하고, 다음해 3월 6일에는 제2차 해산령을 내려 모든 가부나카마를 해산시켰다. 우선 분세이 6년(1832) 오사카 三所綿問屋의 독점으로 인한 셋츠(摂津), 가와치(河内), 이즈미(和泉)(주34) 1007촌의 國訴투쟁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가부나카마의 존재를 물가등귀와 민생파탄, 사회불안의 요인으로 파악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이런 인식은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나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경우 이에나리의 총신들을 몰아내면서 정치적 강화를 위해 나리아키에 접근했고, 또 나리아키도 다다쿠니의 개혁에 편지를 보내 격려한 점으로 보아, 다다쿠니의 결정에 상당부분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다쿠니가 그 동안의 승진한 과정과 개혁 정책에서 불거진 에도의 봉행들과의 암투도 있었다. 에도의 남북봉행인 토야마 카게모토(遠山景元)과 야베 사다노리(失部定謙)가 연명으로 가부나카마 해산에 반대했다. 아베 쇼조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물가등귀의 원인은 가부나카마의 부정이 아닌 악화의 남발과 菱垣廻船의 독점화를 인정한 官府에 있다고 하였다. 카케모토는 이후 고의로 가부나카마 해산령을 실행하지 않았다고 연금형을 받았고, 사다노리는 텐포의 기근 시 에도의 구제조치를 할 때 발생한 與力들의 부정사건의 적발로 파면당했다. 그리고 사다노리의 후임으로 심복 도리이 요조(鳥巨耀藏)을 임명했다. 결국 이는 봉행들과의 대립은 정치적 대립이었고, 이 정치적 대립이 보고서를 무시한 해산령 발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여 진다.(주35) 그리고 집단 소송 등으로 가부나카마의 기능이 많이 저하되어 있지만, 유통구조나 가격결정 시 가부나카마의 힘은 결코 무시하지 못했다. 즉, 가부나카마 해산령은 저물가정책과 막번 체제의 확립, 그리고 막부 내 갈등 해소를 위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실제 물가 문제는 쇼조의 보고서대로 자유 상인의 등장과 각 번의 전매제로 인해 오사카 중심의 유통구조가 무너지고 악화의 남발로 인한 화페 유통 변화 등의 총체적 경제구조의 혼란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텐포 13년(1842) 5월에는 지대와 점포세 인하, 이발소, 목욕탕 등의 특정 업소의 요금 인하, 일부 생산품의 가격 인하를 장려했지만, 중소매 가격의 인하와 통제만으로는 물가를 잡기에 역부족이었다. 10월부터 유통 규제로 전환해 번 전매와 번찰 사용 금지, 산지 매점매석 금지, 오사카 외 지역으로의 운송 판매 금지를 명하였지만 한계가 있었고, 오히려 유통을 둘러싼 막부와 번들간의 대립만 일으켰다. 특히 번 전매 금지는 대부분의 번에서 무시했다, 심지어 쵸슈(長州), 사쓰마(薩摩)번은 전매를 강화했고 스오(諏訪)번은 번 가부나카마의 새로운 조합을 허가했다.
결국 코카(弘化) 2년(1845) 에도의 町奉行 토야마 카게모토가 가부나카마의 복거를 건의한 후 비밀리에 준비와 조사가 진행되어 카에이(嘉永) 3년 諸問屋의 再興令을 내렸다. 상납금 폐지와 특권조합이 아닌 단순조합화 등의 차이는 있었지만 결국 마찬가지가 되어 가부나카마 폐지령의 실패를 인정하고 말았다.
가부나카마 해산령으로 어느 정도 민생 안정과 물가 안정의 정책을 취한 후 다다쿠니는 본격적인 막부의 재정난 해소를 위한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天領의 개혁이었다. 당시 막부 직할령은 모여 있는 것이 아닌 각 지역에 복잡하게 분산되어 있어서 비효율적이며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막부 농업고문인 니노미야 손도쿠(二宮尊德)의 제안으로 텐포 14년(1843) 6월 1일 명을 내려 그 위치를 대폭 수정하고 檢知를 대폭 강화한 한편, 태만한 代官들을 대량 교체한 것이었다. 그리고 대관들의 업무를 강화하고 10년 동안 대관직을 떠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허나 이는 대관뿐만 아니라 관련 지역 영주들과 농민들의 반발을 사서 큰 재미를 보지 못하였다.
그 다음은 上知令이었다. 이는 천령의 개혁을 응용한 것으로 텐포 14년(1843) 6월 1일 명을 내려 에도, 오사카 사방 10리 이내의 각 영주와 무사들의 영지를 막부가 몰수해 직할지로 하고 대신 영주들은 자기 거성 근처에, 무사들은 다른 지역에 그 만큼의 영지를 배당하는 것이었다.(주36) 이렇게 해서 에도 주위의 1만 5천석, 오사카 근처의 10만석을 흡수했고, 이어 8월에는 상지령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봉토전환령을 내렸다. 목적은 세 가지로, 우선 척박한 천령과 비옥한 私領의 교환으로 막부 재정을 보강하고, 이 재편성을 통해 막부와 장군의 전국적 지배권을 재확인하며, 에도 주변의 영지를 통일해 에도만을 중심으로 한 海防체제 강화였다. 막부는 그 동안의 각종 개혁 정책과 대부금, 가부나카마 실시로 재정이 궁핍한 상태였으며, 막부가 仁政을 펼쳐 어려우니 도와줘야 한다는 명분과, 그리고 역대 장군들 덕택에 지금의 영지를 가지고 있다는 도리를 내세운 것이다. 또 가까운 영지와 멀리 떨어진 영지에서의 차별대우로 인해(주37) 민정 불안의 요소가 되므로 민정을 안정시키고 치안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상지령은 단 1달도 되지 않아 철회되었다. 이는 지역민의 반발 때문이었다. 노중 도이 도시쓰라는 자진해서 상지할 정도였지만, 지역민을 거센 반발로 인해 반대파의 맹주가 되었다. 즉, 영지의 21개촌 지역민들에게 12年賦 반제로 1305貫이라는 큰 금액을 조달해 빌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역민들은 도시쓰라가 이 영지를 포기하면 돈을 빌려서까지 조달해 준 것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 금액의 반제를 요구했다. 이는 각 영주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아이러니 하게도 지역민들의 반발이 막부의 정책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또 각 영주들도 지대감소를 우려해 미지근한 반응을 보여 결국 상지령은 철회되었으며, 나중에 다다쿠니 실각의 빌미가 되었다. 농민들이 노중수석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것이었다. 다만, 니가타(新潟) 지역의 상지는 텐포 14년(1843) 6월에 이루어졌고, 이는 유신까지 지속되었다. 이 지역은 사카다(酒田)와 더불어 밀무역이 성행하고, 천령미의 수송선이나 홋카이도 행 상선이 기착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당시 일본과 가장 적극적으로 접촉하던 러시아의 남하와 맞물려 해방적, 경제적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이어서 텐포 14년 6월 에도 북동쪽 40마일 떨어진 인바누마(印旛沼) 간척을 추진하였다. 개간 시 10만석 이상을 얻을 수 있었고, 간척 사업 도중의 배수로 정비로 수해를 방지하며, 토네가와(利根川)~인바누마~에도만의 수운 개설도 할 수 있었다.(주38) 하지만 15만냥이라는 막대한 공사비를 호상, 호농, 관료들의 헌금과 百文錢 주조 수익금으로 충당하고 공사에 5개 번을 투입했으나, 예상 이상의 난공사가 되어 비용과 인원을 훨씬 초과하고 결국 막부와 번 모두가 나가떨어지게 하였다. 이 세 가지 정책은 텐포 14년(1843) 6월에 동시에 시행되었는데, 자원과 인력 낭비로 인한 막부와 번의 고갈, 번과 막부간의 갈등을 야기하며 나중에 다다쿠니 실각의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텐포 14년 4월 13일~21일까지 다다쿠니는 그 동안 실추된 막부의 위신을 되살리고 막번 체제 재확인을 위해 日光社參(주39)을 강행하게 된다. 그 동안은 경유지역의 영주들에게 호위와 경비 조달을 담당하게 했다. 이는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 치세인 1776년 마지막으로 실시된 행사였는데 70년만에 부활했다. 이를 통해 막부의 통치 존엄성과 영주들의 장군에 대한 의무를 시행함으로써 막부의 권위 강조를 꾀했다. 하지만 이 행사는 “에도에서 닛코(日光)까지 인마가 끊이지 않는다.”(주40)라고 할 정도의 대규모 행사라 쿄호 시대 이후 중지되었고 칸세이의 개혁기에도 실시되지 못한 것을 지극히 재정상태가 좋지 않은 텐포기 실시한 것은 무리수였다. 오히려 인근 번들에게 경제적 타격을 주어 불만만 일으켜 텐포 위기를 가중시켰고, 근검절약을 내세운 막부가 스스로 대규모 낭비(주41)를 하여 반감만 샀다.
미즈쿠니는 서서히 접근해 오는 외세에 대한 대책도 강구했다. 이미 1700년대 말기부터 홋카이도, 사할린, 쿠릴 열도 일대에서 러시아와 국경분쟁을 일으키고 있었고, 간간히 오는 외국 선박들,(주42) 특히 중국의 아편 전쟁 소식으로 인한 충격과 위기의식은 컸다. 그리하여 텐포 13년(1842) 7월 종래의 異國船打弗令(주43)을 수정해 異國船薪水給與令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국방력 강화로 텐포 12년 에가와 히데타쓰(江川英龍)만의 일자 전수를 조건으로 채용했던 다카시마 포술(高島)을 텐포 13년 6월 9일 해금조치를 취하고 자유 전수를 허락했다. 하지만 곧 이어진 다카시마 슈호의 체포에서 볼 수 있듯이 다다쿠니는 대외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문제에 대처하는 자세는 미온적이었다.(주44) 어디까지나 대외문제의 대처는 막부 중심적이어야 했던 것이다.(주45)
텐포 13년(1842) 12월 중국 선박이 아편전쟁 종결을 알리고, 다음해 6월 네덜란드 선박이 난징조약으로 대변되는 중국의 굴욕적인 패배를 전하였다. 또 6월 21일 입항한 네덜란드 선박이 영국의 대일침공계획이라는 비밀정보를 전해 막부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이리하여 막부는 에도만 방비 강화와 군사개편을 실시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다카시마 포술의 해금과 타불령 철회가 이루어졌고, 텐포 13년 8월 3일 오시(忍), 가와고에(川越) 양 번에 대해 에도만 해안 경비를 지시, 포대 신설 등 방비 강화를 명하고 양 번의 관할구역에 영지를 주었다. 8월 9일 영지가 해안에 접한 모든 번에 대해 방비 강화를 지시하고 해방에 대비하는 인원, 화기의 수를 제출하도록 명했다. 9월 10일에는 에도 근해방어를 위한 동원을 상정해 參勤諸大名에게 외국과의 전투에 대비할 수 있는 군비를 江戶屋敷(주46)에 보유 할 것을 요구했다. 단, 인원은 늘리지 말고 현 인원 내에서 행하라는 제한이 있었다. 결국 다다쿠니는 대외위기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있었으나 막번 체제 확립과 막부의 권위 강조라는 절대 명제에 의해 대처는 미온적이었고, 수도인 에도의 방비를 강화했으나 그조차도 영주들에게 맡긴다는 적극적 의지의 결여를 보여주었다.(주47)
이상으로 텐포의 개혁을 살펴보았다. 미즈노 다다쿠니는 복고적이고 막번 체제 확립을 위주로 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텐포 초기의 대기근으로 인한 민생고와 사회 혼란, 이로 인한 막부 권위의 약화와 외국의 위협에 대비한 정책을 실시했다. 물가 안정과 민생고 해결을 위해 특권조합인 가부나카마를 폐지했고, 이어서 상지령과 간척사업 등으로 막부 재정을 확보하고 막부의 권위를 보여주려 하였다. 그는 막번 체제 확립을 위해 악조건을 무릅쓰고 닛코 참배를 강행하였으며, 사회 정화로 사회 기강을 바로잡는 한편, 다가오는 외세에 대항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 모든 개혁 정책의 목표는 막번 체제의 재확립이었다. 개혁 정책은 칸세이의 개혁을 많이 답습했고, 야심차게 시도한 가부나카마 폐지령, 상지령은 오히려 각 번과 백성들이 막부에서 이탈하게 만들었다. 외세의 위험성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나 역시 막번 체제 하에서 이루어져야 했기에 그의 본심과는 다르게 미온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회 정화 정책 역시 일선 봉행들과 시민들의 반발만 샀을 뿐이었다.
대원군의 개혁과 비교해 볼 때, 둘 다 복고적인 정책이었고, 중앙의 힘을 강화하는 한편 사회 기강을 강조했으나, 경제정책은 실패했으며 둘 다 쓸쓸하게 실각하고 말았다. 후술하겠지만, 대외정책에서 대원군은 일전불사의 자세로 국방력 강화에 국가 재정이 흔들릴 정도로 박차를 가한 한편, 다다쿠니는 대외의 위기보다 국내 안정과 막번 체제 확립을 더 중요시 여겨 미온적인 반응만을 보이고 말았다. 하지만 두 개혁 모두 복고적이고 중앙의 힘을 강조하는 개혁이며, 무엇보다 두 개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개항을 하게 되는 점으로 보아, 충분이 비교해 볼 가치가 있다 하겠다.
(주20) 에도 막부 3대 개혁으로 쿄호(享保)의 개혁(1716~1754), 칸세이(寬政)의 개혁(1787~1793), 텐포의 개혁을 꼽는다.
(주21) 南部藩에서 기록한 饑饉考에 따르면, 모내기 철인 4, 5월에는 가뭄이 계속되어 물이 부족했고, 수확기인 8, 9월에는 서리가 내려 米作이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박봉주,「天保 改革의 展開 과정과 性格」,『서울대 동양사학과 논집』19,서울대학교동양사학과, 1995, p53
(주22) 위의 논문 p53
(주23) 막부의 직할영지.
(주24) 텐포의 기근은 이전 텐메이(天明)의 기근 시의 교훈으로 가코이마이라는 구황용 쌀창고를 설치하고 부농과 役人들의 갹출을 강요해 어느 정도 준비를 했고, 기근 시에는 농촌 연공의 면제와 夫食米, 種貨未 施與 등의 구휼방법을 강구했기에 오히려 텐메이의 기근 보다 피해, 饑死者는 적었다.
위의 논문 p53
(주25) 원래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은퇴 후 양명학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텐포 7년 2월 19일 제자와 동지들 300명을 규합해 난을 일으켜 빈민을 괴롭히는 役人과 매점매석과 사치를 일삼고 미곡을 에도로 반출하던 호상들을 습격해 쌀 등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실 하루아침에 진압되긴 했으나, 오사카시 20%가 불타고 지휘관이 포성에 놀란 말에서 떨어지는 등 막부 권위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오사카 시민들은 “오사카 한복판에서 말에서 거꾸로 떨어지는 형편없는 무사는 처음 본다.”라고 비웃었을 정도였다. 이어 오시오의 격문 등이 전국에 퍼지고, 이를 모방한 난이 이어지면서 두고두고 막부 권위에 큰 상처를 입혔다.
김희영, 『이야기 일본사』, 청아출판사, 1994, p355~356
(주26) 실제로는 20~25만석의 비옥한 영지였고, 미즈노가(家)는 도쿠가와 譜代의 명가였지만, 가라쓰는 나가사키와 가까워 나가사키 방비의 임무가 있기에 막부에는 등용하지 않는다는 관례가 있었다
송한용, 「天保期 幕府改革의 性格」, 전남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1990, p25
(주27) 박봉주,「天保 改革의 展開 과정과 性格」,『서울대 동양사학과 논집』19,서울대학교동양사학과, 1995, p58
(주28) 에도시대 때 유명인을 그린 일종의 브로마이드. 대상은 유명 배우나 영웅들이었으며 메이지 초기까지도 지속되었다.
(주29) 심지어 에도 시민이 즐겨먹던 가다랭이도 금지했다 한다. 나중에 다다쿠니가 실각하자, 에도 시민들은 기쁨의 환성을 지르며 다다쿠니의 저택에 돌을 던졌다고 한다.
김희영, 『이야기 일본사』, 청아출판사, 1994, p357
(주30) 당시 일본은 지방이 國체제로 되어 있었다. 즉, 원 거주 지역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주31) 텐포 7년(1836)에만 쌀 가격은 2배로 뛰었고, 다음해에도 50%가 올랐으며, 이후 3~4년간은 안정적이지만 기타 물가는 1770년대 이래 최고를 기록했다.
박봉주,「天保 改革의 展開 과정과 性格」,『서울대 동양사학과 논집』19,서울대학교동양사학과, 1995, p58
(주32) 에도시대 후기로 갈수록 재정보충을 위해 네 번째 이유에서 인정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송한용, 「天保期 幕府改革의 性格」, 전남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1990, p22
(주33) 텐포 12년 12월 13일 제일차 株仲間解散令에서, “菱垣廻船問屋들로부터 해마다 金일만냥 씩 명가로서 상납금을 납부케 하여 왔던 바, 問屋들의 부정한 것이 들려와......”라면서 해산의 이유로 株仲間의 부정을 들고 있었다.
위의 논문 p22
(주34) 세 지방 다 지금의 오사카부 일대.
(주35) 송한용, 「天保期 幕府改革의 性格」, 전남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1990, p26
(주36) 다다쿠니는 솔선수범으로 시모사(下總) 인바(印旛)郡의 112석의 토지를 상지했고, 15명의 영주가 1만 5척석을 상지했다. 15일에는 오사카 근처의 상지령이 내려져 노중 도이 도시쓰라(土井利位)의 영지 1만 2천석을 상지했다. 이후 16명의 영주가 10수만 석을 상지해 막부 천령에 편입었다.
송한용, 「天保期 幕府改革의 性格」, 전남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1990, p34
(주37) 다다쿠니는 텐포 14년 8월 14일 대소 目付에게 통지하기를, “특히 에도, 오사카 근방만 御料所로 내도록 했기 때문에 諸大名의 飛地에서는 家來의 指置(급료)가 겨우 평상시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밖에 안 되어 심히 박하고, 또 민정도 자연히 소원하게 되어서 모들 일들이 城附와 같이 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飛地之分은 모두 城附領分의 비율로 한꺼번에 취합하도록 한다면, 幕府의 뜻에도 합당하고, 각각의 持高와 같이 取締가 가능하다고 말씀드립니다......”라고 했다.
송한용, 「天保期 幕府改革의 性格」, 전남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1990, p36
(주38) 일설에 의하면 유사시 국내 해운을 담당하기 위해 했다고도 하는 해방의 의미에서 추진했다고도 한다.
박봉주,「天保 改革의 展開 과정과 性格」,『서울대 동양사학과 논집』19,서울대학교동양사학과, 1995, p63
(주39)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일에 닛코(日光) 東朝宮의 그의 묘의 참배 의식.
(주40) 송한용, 「天保期 幕府改革의 性格」, 전남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1990, p37 주 83
(주41) 막부는 이 행사에 10만냥을 썼고, 이는 막부 세출 총액의 7%였다. 이 시기 막부의 해방 비용은 1% 이내였다.
아사오 나오히로(朝尾直弘) 외 4명, 『새로 쓴 일본사』, 이계황 외 4명 옮김, 2004, p352
(주42) 대표적인 것이 모리슨(morrison)호 사건이다. 텐포 8년(1837) 미국의 비무장 상선 모리슨호가 가고시마(鹿兒島) 만, 우라가(浦賀) 만에 나타나자 이국선타불령에 기초, 포격을 가해 격퇴해 버렸다. 하지만 실은 그 때 마카오에 표류한 일본인 어부 7명의 송환과 통상, 포교를 위해 왔던 것을 1년 후에 알고 이국선타불령은 강하게 비판받았다. 후에 막부의 대외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던 학자들이 체포되는 만사(蠻社)의 옥(獄)이 일어났다.
(주43) 분세이 3년(1825) 내려진 외국 선박이 오면 이유 여하를 묻지 말고 즉각 격퇴하라는 명령.
(주44) 그러나 서양 포술을 받아들여 다카시마류 포술을 연 다카시마 슈한(高島秋帆)은 곧이어 보수파 도리이 요죠의 모략으로 체포되어 10여 년간 수감되었다가, 페리 제독의 흑선 도래 이후 석방, 大砲鑄造方御用掛에 임명되었다.
송한용, 「天保期 幕府改革의 性格」, 전남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1990, p41
(주45) 정치적 동지인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수차에 걸쳐 大船제조의 해금을 건백했으나, 다다쿠니는 “西國이나 다른 諸大名들이 여러 가지 시설물을 부착하고, 보통과는 다른 製作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했다. 제번의 강화로 인해 막부에의 도전을 우려하고 역시 막부가 제번보다는 우위에 서야 한다는 권위의식을 중요시 하는 발상이었다.(실제로 막말 시기에는 다다쿠니의 우려대로 되고 말았다.)
송한용, 「天保期 幕府改革의 性格」, 전남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1990, p42
(주46) 에도에 설치한 각 번의 관저. 참근교대 시 영주와 휘하 무사들이 거주하며, 상시에도 각 번에서 파견한 무사들이 근무하는 등의 일종의 공사관. 교토, 오사카에도 있었다.
(주47) 다음해인 텐포 14년 해방 비용은 막부 세출 총액의 1% 이내였다. 그러나 닛코 참배 행사 때 쓴 비용은 막부 세출 총액의 7% 였다.
아사오 나오히로(朝尾直弘) 외 4명, 『새로 쓴 일본사』, 이계황 외 4명 옮김, 2004, p352
다음편 예고. 4. 외세의 도전 - 그들이 왔다!! a. 丙寅, 辛未양요 - 조선은 살아있다.
대원군 등장이래 불도저처럼 진행해 오던 개혁 정책이,
마침내 처음으로 그 실효를 시험받는 무대에 올랐다.
미국, 프랑스가 함대를 이끌고 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과의 대결! 과연 승부사 대원군의 대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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