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에서의
국제여단, International Brigade.
뭐 인간이 하는 일에 결함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부대였던 것 같다.
밑에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쟁 번역한 류한수님이 쓴 국제여단 관련 글.
NO PASSARAN! : 스페인 내전과 국제여단(International Brigades)
류한수
들어가는 말
1936년 늦여름과 가을 무렵 일단의 젊은이들이 칠흑 같은 밤에 험준한 피레네 산맥을 기어올라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잠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위조한 여권을 들고 국경을 통과하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미국과 멕시코의 젊은이들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에 도착하기도 했다.
이렇듯 유럽과 미주의 젊은이들이 속속 스페인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들은 군부의 쿠데타로 위기에 처한 스페인의 공화정부를 수호하기 위해서 총을 들고 전선으로 나갔다. 누가 이들에게 스페인으로 가라고 강요했는가? 아무도 이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이들은 말 그대로 자원해서 자기 나라도 아닌 스페인으로 건너가 단 하나 뿐인 소중한 목숨을 걸고 싸웠다.
모두 50여개 나라에서 온 32,000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자원해서 전투에 임했으며, 이들 중 살아서 스페인을 떠난 자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젊은이들을 지금 세계는 국제여단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림 1> 유럽에서 온 첫 국제여단원들이 인터내셔날가를 부르면서 행진하고 있다. 1936년 10월.
스페인 내전의 발발과 전개
한 때 세계제국이었던 스페인은 다른 서유럽 국가들이 근대화의 길을 성큼성큼 걸어 나가고 있을 때 봉건적인 상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대지주, 가톨릭 교회, 군부가 스페인 사회에서 권력을 독식하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는 사회 전반에서 막강한 힘을 휘둘렀고, 교회 자체가 최대 지주였다. 오로지 유산계급만이 교회에 다녔고, 가난한 자들은 교회에서 소외당했다.
군부는 왕정 체제와 식민팽창 정책을 옹호하는 수구세력으로서 정치에 깊숙이 관여했다. 농민들은 거의 대부분 토지를 가지지 못해 가혹한 지주의 수탈에 신음하고 있었다. 도시에서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노동계급이 성장하고 있었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의 지지기반이 되었다. 1931년 총선거에서 왕당파가 참패하고 공화파가 승리함으로써 공화정이 성립하였다. 공화정부는 토지개혁, 정교분리, 군대개혁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려 했으나, 수구세력의 반발에 부딪혀 개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의회에서는 극우세력이 계속 힘을 늘려갔다.
이런 상황에서 1936년 2월에 총선이 치러졌다. 우익전선, 중도세력, 인민전선의 3파전이 벌어진 결과 인민전선이 승리했다. 인민전선 정부가 성립하자 곧바로 정치범이 석방되고 해고당한 노동자가 복직되었다. 또한 당시 유럽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되어 출세가도를 달리던 군부의 실권자 프랑코가 해외의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그동안 억눌려 왔던 민중의 힘이 인민전선 정부 하에서 분출했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통해 세력을 과시하고 농촌에서는 지주의 오랜 수탈에 신음해온 농민들이 지주의 토지를 점거했다. 가톨릭 교회, 대지주, 군부, 자본가에게 이러한 사태진전은 곧 국가의 기틀 자체가 무너지는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드디어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 주둔하고 있던 스페인 군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고, 다음날 프랑코는 쿠데타 선언을 스페인 전역에 방송했다.
이에 호응해서 스페인 전역에 있던 군 지휘관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고, 수구세력은 당연히 반란군을 지지했다. 쿠데타 세력은 인민전선 공화정부의 타도를 목표로 삼았으며, 공화정부가 약체인데다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이의 반목이 존재하고 민중이 조직화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단기간에 쿠데타가 성공하리라고 낙관했다.
<그림 2> 국제여단이 맞서 싸운 자들. 왕정 시대의 독재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Jose Antonio Primo de Rivera)의 장례식에서 파시스트식 경례를 하는
프랑코와 교계 인사.
그러나 쿠데타 세력은 노동자들의 저항에 부딪혀 마드리드를 비롯한 주요 도시를 점령하지 못함으로써 스페인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돌입했다. 사실 공화정부에게 쿠데타 세력을 초기에 제압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각 도시에서 노동자들은 곧바로 민병대를 조직했고 정부에게 무기를 달라고 요청했으며, 노동자 민병대가 무장을 한 지역에서는 쿠데타가 곧바로 진압되었다.
그러나 여러 도시에서 정부기관은 무기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내주기를 거부했다. 무장한 노동자는 곧 혁명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노동자 정당을 표방하는 공산당까지도 스페인은 노동자 혁명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부르주아지와 연대해야 한다는 코민테른의 지령에 얽매여 오히려 노동자들의 투쟁의지를 잠재우려는 기회주의적 노선을 택했다.
반란군의 주력은 모로코에 있었으나, 해군 사병들이 공화정부를 지지했기 때문에 스페인 본토로 이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란군은 파시즘 국가인 이태리의 지원을 받아 본토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으며, 10월에 부르고스(Burgos)에 프랑코를 수반으로 하는 국민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태리와 독일은 물자를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병력까지 투입해 프랑코를 도왔다.
스페인 내전을 통해 두 파시즘 국가가 협조관계를 강화하고 결국은 로마-베를린 추축이 탄생했다. 위기감을 느낀 유럽의 좌익 세력은 어떻게든 스페인 공화정부를 지원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히틀러를 자극하기를 두려워한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불간섭 정책을 고수했고, 오직 소련만이 스페인의 합헌 공화정부에게 물자원조를 제공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스페인의 내전은 바야흐로 국제전으로 비화하고 있었다.
반란군은 스페인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마드리드를 점령하기 위해 정예부대를 앞세워 파상적인 공격을 가했으나, 마드리드 시민들과 국제여단의 완강한 저항에 밀린 나머지 결국 점령에 실패했다. 프랑코는 마드리드 공략을 포기하고 다른 지역을 점령하는 데 치중하는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내전은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그림 3>1937년 2월 스페인의 상황
그들은 왜 스페인에 갔을까?
그들은 인류의 자유와 평등을 지키기 위해 스페인으로 갔다.
스페인의 청년 노동자로서 공화국군의 일원이 된 폰스 프라데스(Pons Prades)는 1937년 여름에 라 만차(La Mancha) 지방에서 공화국이 징집한 농부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폰스 프라데스에 따르면, 징집된 농부들은 "모두 키가 작고 구부정한 중년으로 얼굴은 햇볕과 바람에 검게 그을려 주름져 있었다." 농부들은 왜 싸워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고 \'평생 동안 (지주에게/ 류한수) 착취당한 끝에 이제는 도살장으로 내몰리고 있구나\'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연 훈련을 받는 데 열의가 있을 수가 없었다. 폰스 프라데스는 농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이 이 전쟁에서 이기면 땅이 전체 마을사람 것이 됩니다. 가난하다면 다 같이 가난하고 잘 산다면 다 같이 잘 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싸우고 죽는 이유입니다." 이튿날 농부들은 180도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열심히 군사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스페인 내전은 수백 년 간 특권을 누려온 지배계급과 깨어나기 시작한 민중 사이에 벌어진 한판 대결이었다.
자연 유럽의 좌익 세력은 스페인의 민중에게 호의를 가졌다. 사회주의가 내거는 가장 중요한 모토의 하나가 국제주의였던 만큼, 좌파 성향을 띤 유럽과 미주의 젊은이들이 지배계급에 맞선 스페인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을 돕겠다고 나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국제여단은 전투력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공화국 수호자들의 사기 진작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한 목격자는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러 온다는 생각에 (스페인/ 류한수) 주민들의 사기가 올라갔다"고 증언한다.
<그림 4> 프랑스의 문필가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가 스페인의 파시즘과
싸우라고 프랑스의 젊은이들을 고무하고 있다.
국제여단의 정수는 자발성이었다. 유럽 각국의 공산당은 당원들에게 스페인 내전에 참여해서 공화정부를 수호하라고 호소했다. 호소였지 결코 명령이 아니었다. 당시의 국제 정세에서 스페인 내전은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한 나라에 국한된 분쟁이 아니라 유럽 전체, 더 나아가서 전 세계의 앞날에 깊은 의의를 지닌 전쟁이었다.
반란군의 핵심세력은 파시즘을 표방하는 팔랑헤(Falange)당이었으며,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스페인 내전에 깊숙이 개입해 프랑코를 도와 스페인의 민주세력을 옥죄고 있었다. 反파시즘 투쟁 전선에 나선 젊은이들에게 스페인 내전은 한 나라의 내전이 아니라 민주세력과 파시즘 세력 사이에 벌어지는 유럽의 내전이었다. 스페인 공화정부의 승리는 곧 유럽의 反파시즘 전선의 승리와 동일시되었으며, 스페인에서 파시즘을 막으면 유럽을 뒤덮고 있던 세계대전이라는 먹구름을 흩날려버릴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나갔다. 이런 신념을 지니고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은 스페인으로 들어가 국제여단원이 되었던 것이다.
더더군다나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선 독일과 이태리 출신의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국제여단원이 되어 스페인에서 벌이는 투쟁은 곧 자기 조국을 파시즘의 마수에서 해방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독일출신 공산주의자 구스타프 레글러(Gustav Regler)는 "이것은 그들(스페인인/ 류한수)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 전쟁이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태리 출신 국제여단원 란돌포 빠시아르디(Randolfo Pacciardi)는 "마드리드를 거쳐 로마로 간다!"가 그들의 구호였다고 증언한다. 실제로 국제여단의 이태리인 연대는 구아달라하라(Guadalajara) 전투에서 프랑코군의 편에 선 조국의 파시스트 부대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주기도 했다.
<그림 5> 이 사진의 주인공은 후안 모데스토(Juan Modesto)로 그의 멋진 모습은 선전자료로 스페인과 해외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이 극적인 이미지는 국제여단원들에게 하나의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국제여단원 개개인의 내면세계에 들여다보면, 그들의 선택을 오로지 지고한 이념에 대한 헌신성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무리임이 자명해진다. 국제여단에는 지식인들도 많이 있었지만, 대개는 밑바닥 인생들이었다. 영국인 국제여단원 에스몬드 로밀리(Esmond Romilly)는 "내가 스페인인들의 대의에 아무리 강하게 동조했더라도, 런던에서 내가 처한 상황이 아주 만족스러웠다면 동정심 이상을 가지진 않았으리라"고 회고한다.
당시 서구는 대공황의 터널에서 아직도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켄 로치(Ken Loach) 감독이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땅과 자유(Land and Freedom)"에서 프랑코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 데이비드(Ian Hart분)도 일자리를 잃어버린 영국의 노동자였다.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발붙이지 못한 자들이 탈출의 방편으로 스페인 행을 택했을 지도 모른다. 미국인 국제여단원 알바 베씨(Alvah Bessie)는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스페인에 갔다.
그러나 내가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고독하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제여단원 모두를 따돌림 받는 현실을 회피하려 한 주변인으로만 볼 수는 없다. 설사 그들이 주변인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표방한 숭고한 정신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서 선택한 대안이 死地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라면 그 선택은 이미 비겁한 자의 현실회피가 아닐 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그들은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이었다.
국제여단에 관한 기록들은 엄청나게 많지만, 정작 국제여단원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말해주는 자료는 매우 드물다. 회고록을 남긴 국제여단원들은 주로 지식인 출신 문필가들이었다. 또한 지식인 국제여단원들은 여론의 각광을 받았다. 자신이 스스로 국제여단원이기도 한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대표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주인공 로버트 죠단(Robert Jordan)의 모델이라고 운위되는 국제여단원 로버트 메리만(Robert Merriman)은 캘리포니아 대학 경제학과의 조교였다. 이런 이유에서 때때로 지식인들이 국제여단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그림 6> 1937년 1월초 아라곤(Aragon) 전선으로 막 떠나려는 POUM 소속 민병대. 줄 뒤쪽에 머리 하나가 더 큰 키다리가 바로 영국의 저명한 문필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다.
그러나 국제여단원의 대다수는 노동계급 출신의 젊은이들이었다. 노동자들이 국제여단원의 과반수를 차지했던 것이다. 국제여단원들의 정치적 성향을 보여주는 자료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활용가능한 자료로 판단해 보자면 공산주의자의 비율이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화 "땅과 자유"에서 스페인의 합헌 공화정부가 군부의 쿠데타로 위기에 처했다는 선전을 듣고 스페인 공화국을 위해 참전하기로 결심하는 리버풀(Liverpool)의 스무 살 청년 데이비드도 영국의 공산당원이었다.
특히 독일이나 이태리 출신 국제여단원 사이에서 공산주의자의 비율이 극히 높았다. 이런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파시즘에 대한 적개심을 가장 드높이 불태우는 집단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코민테른(Comintern)이 국제여단 운동의 조직자였다. 국제여단에는 유태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고, 비록 백 명에 못 미치는 수였지만 흑인들도 엄연히 국제여단에 참여했다. 어느 정도는 선전의 측면을 고려하여 미국인으로 구성된 부대에서는 흑인을 지휘관에 임명하여 백인 국제여단원들이 흑인 지휘관의 명령을 받기도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스페인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싸웠는가?
그들은 용감히 싸웠다.
국제여단원은 이상주의자이기에 앞서서 총을 들고 싸우는 병사여야만 했다. 사기는 높았을지 몰라도 그들은 근본적으로 아마추어였고, 지휘관들 역시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국제여단원은 본부가 설치된 알바세테(Albacete)에서 대기하면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았지만, 전선의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훈련을 거의 받지 않은 채 전투에 투입되는 일이 잦아졌다.
많은 국제여단원들이 알바세테에서 기다리다 트럭에 실려 전장으로 향했고, 거기서 난생 처음으로 소총을 만져보았다고 회고한다. 벨기에 출신 국제여단원 한 사람은 "잿빛 바다와 구름낀 하늘을 보는 1936년의 비 오는 가을에 가진 모험심과 권태감 탓"에 스페인에 갔다고 회고했다. 일부 국제여단원이 품었을 지도 모르는 약간은 낭만적인 모험심이 산산조각 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카탈루냐 찬가」에서 조지 오웰은 "정의의 편에 섰다는 의식은 사기를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이 반혁명군보다 혁명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았다"고 쓰고 있다. 국제여단이 실제로 전투를 치르면서 입은 피해는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전투에 투입된 지 단 석달 만에 영국인 국제여단원 600명 중 400명이 전사했다. 국제여단이 맞서 싸운 상대방은 직업군인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과 이태리 정부로부터 받은 강력한 최신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 미국인 연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공격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말 그대로 명령을 수행하다가 단일 전투에서만 400명 중 298명이 전사하는 격심한 피해를 입었다. 1937년 1월에 제11 국제여단이 재정비를 위해 후방으로 물러났을 때, 원래 2,000명이던 여단병력이 600여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군사학에서 보통 전력의 30%가 사상해도 "괴멸"되었다고 보는 것을 감안한다면, 국제여단이 당한 피해가 얼마나 심한 것이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림 7> 영국인 국제여단원들. 2,000명 중 500명이 전사하고 1,200명이
부상을 입었다.
국제여단원은 늘 앞장서서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반란군의 손아귀에서 공화국의 핵인 마드리드를 지켜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마드리드 공방전에서 국제여단원들의 구호는 "No Passaran!", 즉 "그들은 통과하지 못 한다!"였다. 만약 마드리드를 반란군에게 빼앗겼다면 공화국의 투쟁의지가 순식간에 소멸되어 프랑코는 손쉽게 곧바로 스페인 전역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여단의 활약으로 마드리드를 사수함으로써 내전은 프랑코의 예상과는 달리 장기소모전이 되고 말았다.
국제여단원들을 괴롭히는 것은 전장의 총알뿐만이 아니었다. 혹독한 자연에서 오는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물집, 상처, 공포, 물자부족은 일상사였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젊은이들로 구성된 부대인 만큼 국제여단에서 언어장벽은 늘 문제가 되었다. 1936년 말 제14 국제여단 소속 연대 750명은 아홉 개 언어를 사용하는 형편이었다. 부대원 사이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전투에서 치명적인 상황을 맞이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게다가 트로츠키주의자를 색출한다는 명목 아래 모스크바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는 독립적 성향을 가진 사회주의자를 찾느라 눈을 번뜩이는 소련 비밀경찰은 항상 국제여단원을 노리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의 종식과 국제여단의 해체
내전 초기에 스페인 북서부를 장악한 프랑코군은 공화국군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면서 차츰차츰 세력을 넓혀 나갔다. "때 이른" 혁명을 억제하려는 공산주의 세력과 전쟁을 통해 혁명을 성취하려는 무정부주의 세력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스페인 공화정부는 사분오열된 상태였다. 더군다나 영국과 프랑스가 불개입 정책으로 뒷짐을 지고 있는 사이에 독일과 이태리의 파시즘 세력은 마음대로 스페인을 유린했다. 여기서 스페인 내전의 명암이 엇갈렸다.
독일의 콘도르(Kondor) 군단이 바스크 지방에 있는 조그만 도시 게르니카(Guernica)에 무차별 폭격을 퍼부어 무수한 민간인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일어났다. 스페인 출신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격분에 차서 그린 "게르니카"는 이 사건을 주제로 한 그림이다. 1938년 공화국이 테루엘(Teruel)을 상실하면서, 프랑코군이 내민 쐐기에 정부가 차지한 지역이 두 쪽으로 동강나는 형국을 맞이했다. 가장 투철한 혁명세력인 무정부주의자들의 아성이었던 카탈루냐마저 프랑코군에게 빼앗기면서 공화국군의 패색이 짙어갔다.
스페인은 게릴라전의 선구격인 나라이다. 19세기 초 스페인 민중은 당시 유럽 대륙을 제패하고 있던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게릴라전으로 괴롭혀 프랑스군이 스페인에서 엄청난 힘의 소모를 겪어야만 했다. 파르티잔(partisan)이란 낱말 자체가 파르티도스(partidos)라는 스페인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런데도 공화국군은 반란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광범위한 스페인 대중이 공화국을 지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게릴라전이 성공했을 가능성이 낮지 않았다. 대중은 물이요, 게릴라는 물고기가 아니던가! 공화정부가 게릴라전을 수행하지 않은 것은 빨치산 투쟁이 현대전에서 더 이상 효율적이지 못 하다고 판단해서 인 듯하다. 그러나 베트남전의 경험은 이를 반증해 준다.
내전 막바지에 공화국의 수상이 된 네그린(Negrin)은 1938년 9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스페인 정부는 정부 편에 서서 전투를 벌이는 非스페인인 전투부대를 즉시 완전 철수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이후로 국제여단원은 차례차례 스페인을 떠났다. 1938년 10월 28일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국제여단의 마지막 열병식이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뉴욕 타임스 통신원은 국제여단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들은 열병을 배우기에 앞서서 싸우는 법을 배웠다. 이들은 산뜻한 군복을 입지도 않았고… 무기도 없었으며, 보조도 줄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을 본 모든 사람들 -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과 함께 싸운 사람들 - 은 이들이 진정한 군인임을 알고 있었다." 국제여단이 완전히 스페인에서 철수한 날은 이듬해 2월 9일이었다.
1939년 2월말에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프랑코 정권을 정식으로 승인했고, 3월 28일에는 결국 마드리드가 항복을 했다. 다음날 프랑코는 의기양양하게 스페인 내전이 종식되었음을 선언했다. 스페인 전역을 장악한 프랑코의 손아귀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합헌 정부를 반란으로 뒤엎고 독재정부를 세운 뒤 1975년에 숨을 거둘 때까지 장장 36년 동안 스페인을 독재로 옭아맨 프랑코가 임종 전에 적을 용서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내게는 적이 없다. 모두 사살했다"고 답했다는 일화는 내전 종결 뒤에 스페인의 민주세력과 민중이 당한 피해가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국제여단원의 비극
영국인 국제여단원 로리 리(Laurie Lee)는 후일 러스트(W. Rust)를 방문했을 때 카드상자에 든 영국인 지원자 목록을 보고 "틀림없이 오륙백 명이었을 것이다. 많은 카드 - 절반 이상 - 에… \'전사\' 또는 \'행방불명\'이라고 적혀있었다"고 회고한다. 리는 생각했다. "죽은 영웅들의 이름이 여기 작은 카드상자 속에 쌓여있다. 官에서 만든 명예의 전당에 새겨지지도 않았다. 인정받지 못한 채, 때로 비웃음을 사면서…" 리는 "스페인에서 싸우다 죽은 자들은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라고 덧붙인다.
무슨 뜻인가? 죽은 자가 더 낫다니…! 스페인을 떠난 많은 국제여단원들을 맞이한 것은 따듯한 환영만은 아니었다. 독일이나 이태리 출신 국제여단원들은 여전히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 했고, 동포들에게서 조국의 배신자 취급을 받았다.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 에드가 후버(J. Edgar Hoover)는 국제여단에 참가한 미국인을 일컬어 공산주의자들의 "봉"이라고 멸시했다. 프랑스로 간 국제여단원들은 곧바로 터진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피하지 못 하고 비시(Vichy) 정권 하에서 독일의 비밀경찰 게시타포(Gestapo)의 추격을 받아야 했다.
고국으로 돌아간 소련인 군사고문관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숙청이었다. 숙청 대상자 수가 할당되는 상황 속에서 외국에 갔다 온 경험이 있는 소련인은 가장 손쉬운 숙청의 먹잇감이었다. 동구권 국가 출신 국제여단원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점령군 독일의 추격을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소련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맺음말
이상과 대의에 헌신한 국제여단원들의 투쟁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국제여단을 연구한 학자 존스턴(V. B. Johnston)은 국제여단에게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평가를 내린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불행히도 그들의 이상주의와 자기희생은 싸움을 연장하는 데 일조했을 뿐이다.
파리와 런던에서 취한 \'불간섭\' 정책을 고려하면, 스페인을 위한 최선의 결과는 초기에 내전을 끝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국제여단은 무엇보다도 전투부대였고, 그런 점에서 그들은 패배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패배로 말미암아 그들이 견지한 지고한 이념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그들의 투쟁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국제여단원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파시스트 세력과 싸웠다. 그러나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공산주의자 국제여단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경멸했으며, 프랑코군에서 진정한 파시스트라 할 수 있는 자들은 팔랑헤(Falange)주의자 뿐이었다. 국제여단원들은 사해동포주의자였다.
그러나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에 제국주의자들의 침탈을 받고 있던 에티오피아나 중국에는 왜 가지 않았는가? 국제여단원들은 용맹했다. 그러나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반란군에서도 용감한 군인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한 가지 남는다. 국제여단원들은 격동의 세기에서 가치판단을 내렸고 그 가치판단에 따라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따른 행동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그 사실이다.
그들은 신념에 어울리게 총을 들고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더 가까워진 동료들과 함께 내달렸으며, 때로 그 동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고 또 스스로가 전장에서 스러져갔다. 시대는 선택을 요구하기 마련이고, 선택하기를 회피하지 않는 자들이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 국제여단은 이 같은 사실을 보여주며,
또 역사는 국제여단을 기억하고 있다.
<참고 문헌>
◎ Vincent Brome, The International Brigades: Spain 1936-1939 (London: Heinemann, 1965).
◎ George Esenwein & Adrian Shubert, Spain at War: The Spanish Civil War in Context, 1931-1939 (London: Longman, 1995).
◎ Michael Jackson, Fallen Sparrows: The International Brigades: Spain in the Spanish Civil War (Philadelphia: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994).
◎ Verle B. Johnston, Legions of Babel: The International in the Spanish Civil War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67).
◎ David Mitchell, The Spanish Civil War (London: Granada Publishing,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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