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일본군 선전 포스터(어어억~ 퉤퉤퉤!)
화북의 혼란
1930년대 초기의 중국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혼란에 빠져있었다. 만주침략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화북과 화남에는 지방군벌들이 할거하고 있었고 국민당정부의 권력이 미치는 곳은 화중의 몇몇 성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그 화중에서마저 중국 공산당이 강서성의 서금을 점거하고 국민당정부와 맞서고 있었고 또한 국민당 내부에서도 지도권을 둘러싼 파벌싸움이 그치지 않는 형편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장개석은 일본군의 침략에 손을 쓸 겨를이 없었으므로 대일관계의 일은 왕조명에게 일임하고 자신을 북벌과 내부태세정비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먼저 국내를 정비한 후 외적을 격퇴한다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그동안에도 일본군의 무력행동은 그칠 줄을 몰랐다.
호롬바일작전(1931년 7월)으로 북만주 서부지역을 점령하고 열하작전(1933년 봄)으로 만리장성 이북의 만주 서남부를 점령한 일본군은 다시 화북지방으로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특히 열하작전때 관동군은 만리장성을 돌파하고 남하를 계속하여 북경 인근 수십㎞지점까지 접근했고 이에 놀란 중국측은 일본군과의 사이에 이른바 `탕쿠협정`을 체결하고 말았다. 그 결과 관동군은 일단 장성선 밖으로 후퇴하게 되었으나 이 협정은 그후 일본군이 화북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몇 가지 구실을 만들어주게 되었다.
탕쿠협정
이 탕쿠협정은 그때까지 중국군의 작전구역으로 되어 있던 지방을 비무장지대로 만들어버린 협정이다. 즉, 연경, 창평, 고려영, 순의, 통주, 향하, 영하, 노대를 연결하는 선의 북쪽과 동쪽지구에는 중국군이 주둔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만주국 접경의 하북성 북부가 비무장완충지대로 된 것이다.
이 협정에서 중국군은 어떠한 군사행동도 취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 탓으로 만일 그것의 이행이 불충분하다고 여겨질 때는 일본군의 무력발동을 경계해야만 했다. 게다가 이 협정은 원래 잠정적인 요소가 많아 정치정세가 복잡한 화북지방을 실제로 안정시킬 수 있는 정치적 내용을 가지지는 못한 것이었다.
특히 화북지방을 통일할 수 있는 실력자가 없이 일본군이 말하는 치안유지를 완전히 실행할 수 없었고 이것을 구실삼아 관동군이 침입해 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개석은 무력에 의한 동북지방의 실지회복이 어려워지자 일시적인 방편으로 이러한 협정을 체결하게 했을 뿐 결코 그 실지회복을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일본의 약점인 경제면에 대해 관세인상과 국화제창등으로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려 했다. 이것을 소위 `일면저항 일면외교`라 일컬었다.
이때 화북의 정치문제 처리는 왕조명파인 황부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북평정무 정리위원회`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위원회는 탕쿠협정에 의한 세목을 일본과의 사이에 서서 처리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그 권한의 한계가 명확하지 않은데다가 황부 자신의 발언권도 약한 탓으로 거의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이것을 기화로 일본군은 노골적인 협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1934년 4월 북평주재 육군무관인 시바야마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위협성명을 발표하도록 하여 그 속셈을 드러냈다.
"중국측은 과거 10개월간 정전협정의 정신에 입각한 각종 문제에 있어 조금도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들은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다는 것을 중국측에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머지않아 모종의 무력행동을 개시할지도 모른다는 협박이었다. 심상치 않은 일본군의 태도를 본 황부는 이해 7월에 관동군 수뇌부와 회담하고 교통통신의 재개와 통관업무를 개시하는데 동의했다. 이에 따라 여태까지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던 만주로부터의 기차가 북평을 드나들게 되었고 편지 왕래와 세관을 통한 무역이 재개되게 되었다.
일본의 히로다외교
`일면저항, 일면외교`라는 중국의 장기저항책에 대해 일본에서는 1933년 9월 히로다가 외상에 취임하면서 소위 `히로다외교`라는 것을 폈다. 이 히로다외교란 종전의 무력 외교에 비해 정상적인 외교수단에 의해 중일간의 긴장을 완화해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①만주 이외의 중국 본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적극행동을 하지 않고 미국이 중요시하는 문호개방주장 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②구미 각국은 중국에 경제원조를 행함으로써 중일간의 분쟁을 격화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③중일 양국은 공산당의 공동위협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일본 외무성이 이런 정책을 구상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중국이 탕쿠협정의 결과 사실상 만주국의 존재를 묵인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이상 일본으로는 당분간 만주의 기반을 굳히는데 전념하는 것이 득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며 또 만주사변으로 인해 중국 상대의 무역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으므로 그것을 회복하여 경제적 이득을 취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히로다 3개 원칙에 대해 중국측의 일부에서는 그 내용이 애매하다 하여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중국측에 대해 호평을 받고 있었다.
1935년 1월, 히로다외상이 의회에서 중일친선을 강조하는 연설을 발표하자 2월엔 중국 외교계의 원로인 왕총혜가 일본을 방문하는가하면 귀국 후엔 중국의 배일언론을 단속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러한 반응에 힘을 얻은 일본 외무성은 육군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주중 일본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당시 대중국외교에 있어 사실상 결정적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외무상이 아니라 육군이었다. 그리고 국민당정부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육군측은 이 히로다외교에 대해 사사건건 방해하고 나섰다.
외무성과 육군이 이토록 대립하게 된 것은 만주국이 장성선(만리장성의 선)을 넘어 남하하느냐에 대한 의견대립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먼저 외무성의 주장은 일본은 장성선 이북에 머물러 오직 만주국 건설에만 열중함으로써 중국과 열강의 묵인을 얻을 뿐 아니라 이것을 바탕으로 평화적인 중국에의 경제진출을 가능케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육군측은 국민당정부의 친일적 태도는 일시적인 위장정책이며 언젠가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미영의 협력을 얻어 반격해 올 것이므로 일체의 타협책을 배격하고 강경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육군의 일부는 국민당의 중국통일을 방해하기 위해 화북에 친일괴뢰정권을 수립하여 중국의 분열을 꾀하고자 그 음모에 착수했는데 그 배후에는 소위 대륙로닝이라 불리는 야쿠자 집단과 악질상인 및 자본가의 후원이 있었다.
히로다 외교를 무시한 채 일본육군, 특히 관동군의 화북에 대한 야욕은 차츰 실행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소련이 만주에서 철수했다는 점과 화북의 정치정세가 불안정하다는 점이 그들의 야욕에 기름을 끼얹은 셈이 되었다. 더구나 잇따른 일본군의 강압에 버티다 못한 황부가 1934년 봄에 북경으로 떠나가버려 화북은 일시적으로 무정부상태에 빠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관동군과 천진군(화북 주둔 일본군)은 화북지방의 반장학량 계열의 군벌들 중 특히 송철원(차하르성 주석)을 회유하여 화북에 진출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본 국민당정부는 곧 하응흠(국민정부 화북 군사위원회 주석)을 진출시킴으로써 양자간의 공작이 정면충돌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양국 기관과 군사력의 배치
화북사건을 다루기 전에 이 무렵의 중일 양국의 화북 배치 기관들과 그 군사력을 살펴보는 것이 앞서야 할 것이다.
중국측
①북평정무정리위원회=화북의 최고 정치기관으로 일본측과의 정치교섭의 일을 맡고 있었으나 황부가 퇴진한 후엔 한동안 공백상태에 있었다.
②군사위원회 북평분회=군사위원회의 위원장은 장개석이며 북평분회 주임엔 하응흠이었다. 이 위원회는 중국군을 통수하는 기관으로서 북평 분회는 화북지방 각군의 통제와 일본군과의 군사문제 절충을 담당.
③헌병 제 3단, 남의사 지부, 정치훈련소=화북에 있어서의 국민당 세력 확장의 근거지이며 정치공작과 정보수집, 교화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④군대배치=북평 부근에 중앙군 직계인 제 2, 제 25사가 있고 화북성 북부에는 우학충군과 상진군이 차하르성에는 송철원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⑤기동지구 보안대=기동지구란 탕쿠협정에 의해 설정된 비무장지대를 말하며 그곳 행정은 북평정무정리위원회에서 파견된 행정 독찰원에 통주와 당산에 주둔하여 담당. 그 관할 하에 특별보안대를 배치하여 치안유지를 담당하고 있었다.
일본측
①대사관=상해에 대사관을 두고 대사 아리요시가 상주하는 한편으로 참사관 아까스기를 북평에 주재시키고 있었다.
②대사관부 육군무관=화북공장의 일선에 나선 것은 이들 육군무관이었다.상해 주재 무관은 육군 소장 이소다니, 북평 주재에는 그의 보좌관인 육군 소좌 다까하시.
③대사관부 해군무관=상해에 해군대좌 사또오가 주재. 북평 주재엔 그의 보좌관인 해군소좌 오끼노.
④총영사관=총영사로서 천진엔 가와고시, 상해엔 이시이, 남경에 스마등이 주재하고 있었다.
⑤천진군=일본은 북지파견군이라 부르고 있었지만 사령부를 천진에 두고 있는 탓으로 흔히 천진군이라 불렀다. 군사령관은 육군소장 우메즈, 참모장엔 대좌 사까이, 천진군의 병력은 보병 10개 중대, 산포 1개 중대, 기타 합계 약 2,000명으로서 주로 천진, 북평, 산해관, 진황도등 철도 연선 요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⑥관동군=사령부를 장춘에 두고 그동안의 인사이동으로 사령관은 육군대장 미나미, 참모장엔 중장 니시오, 참모부장엔 소장 이다가끼였다. 병력은 4개 사단, 약 16만명에 이르고 모두 만주에 주둔해 있었다. 그 외에 항공기 18개 중대를 보유.
⑦관동군 특무기관=봉천에 본부를 두고 기관장엔 육군소장 도히하라가 수많은 모략정보원과 하수인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⑧참모본부 파견무관=정치모략공작을 목적으로 파견된 중좌급 무관들로서 상해에 가게사, 남경에 아마미야, 제남에 하나야, 광동에 우스다가 있었다.
⑨해군 제 3함대=사령관 모모다께가 지휘하는 이 함대는 순양함 2척과 구축함들을 이끌고 상해에 주둔해 있었다.
⑩해군군령부 파견무관=역시 좌관급으로서 남경에 기다우라, 청도에 히고등이 있고 이밖에 상해에 해군특무기관을 두고 있었다.
2가지 사건
화북을 두고 중일 양국군이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는 동안 1935년 4월과 5월에 잇따라 2개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것을 구실삼아 일본군은 드디어 화북 5성 가운데 먼저 화북성으로부터 중국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 2개의 사건이란
①손영근이란 항일 게릴라부대가 일본군 점령 하의 열하성에 출몰하다가 이해 5월 일본군의 공격에 마주치자 하북성으로 탈출해 버린 사건
②천진에 있는 친일파 중국인 신문기자가 일본 조계 안에서 암살당한 사건이다.
일본측은 ①의 손영근의 게릴라부대가 하북성에 도피했을 때 우학충 관하의 보안대는 그것을 진압하지 않고 도리어 무기와 식량등을 원조해 주었다는 것이며 ②의 친일 신문기자의 암살은 국민당 특무기관인 남의사에 의해 실행되었고 여기에는 화북 정권의 양해와 후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군은 이 두 사건을 탕쿠협정의 명백한 위반이으므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5월 29일에는 천진군 참모장 사까이가 북평에 있는 하응흠을 찾아가 전례없이 격렬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통고를 전했다.
①이 두 사건에 대해 앞으로 일어날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은 중국측이 져야 한다.
②앞으로 이러한 사건을 근절케 하기 위해 중국은
가. 헌병 제 3단과 군사위원회 분회, 정치훈련소, 국민당지부 남의사등 기관을 화북에서 철수시켜야 하며
나. 이러한 기관의 배경인 제 2사, 제 25사등 중앙군을 전면철수시켜야 한다.
다. 이번사건의 직접, 간접의 관계자는 물론 그 책임자인 우학충의 파면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발구르는 사까이
이상의 내용을 통고하는 사까이는 이때 책상을 두드리고 발을 구르는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위협적인 태도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하응흠은 어이가 없었지만 당면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관계자의 파면문제는 내 권한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조치를 취할 것이며 그밖의 문제는 좀더 조사한 후에 어떤 조치를 강구할 수 밖에 없다."
그러자 사까이가 다시 눈을 번뜩이며 외쳤다.
"나는 오늘 당신과 의논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오. 우리 일본군의 단호한 결의를 통고하기 위해 왔단 말이오."
그런데 문제의 친일기자 살해는 바로 사까이의 지시에 의해 그의 하수인이 저지른 범행이었다. 그것은 당시 천진군 참모였던 이시이가 대전 후에 증언한 것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사건 직후인 5월 31일, 국민정부의 공상의 재정부장은 미국대사 존슨에게 친일기자 살해는 일본이 구실을 만들기 위해 저지른 범행이라고 언급한 바 있었는데 이렇듯 이미 중국은 일본의 자작극임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난폭한 통고를 받은 중국측은 그 적반하장의 태도에 울분을 금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온건한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는 먼저 장학량과 황부, 하응흠등과 내부 교섭을 가진 후 일본측과도 각 방면으로 교섭을 진행했다.
국민정부 외교부 차장인 당유임으로 하여금 상해와 남경에 주재하는 일본무관과 회담을 가지게 하는 한편으로 하응흠에게도 화북에 있는 일본측과 교섭을 진행하게 했다.
하응흠은 장개석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몸으로서 일본육군 사관학교 출신이었으므로 일본군벌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지극히 신중하게 회담을 진행했으나 그 진도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했다. 그의 교섭을 어렵게 만든 장애물의 하나는 당시 화북에서 날뛰고 있던 친일모략분자들의 행동도 들 수 있다. 특히 진각생과 원량은 은밀히 일본 무관을 찾아다니며 하응흠의 활동을 방해하고 기밀 정보를 팔아넘겨 교섭은 갈수록 어려움에 처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무력시위
이렇다 할 결정을 보지 못한 채 6월 9일이 되었다. 이날 사까이는 다시 다까하시를 대동하고 하응흠과 회견하여 일본군측 요구의 승낙 여부를 따지고 들었다. 하응흠은 자기 권한 범위에 속하는 것은 전부 승낙할 수 있지만 그 외의 것은 중앙의 훈령을 기다려 12일까지 회답하겠다고 말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일본군의 무력시위였다. 천진군과 공모한 관동군은 이 회담 시기에 맞춰 보병 1개 대대와 기병여단(약 500명)을 산해관에, 다시 1개 여단을 고북구에, 그리고 비행대 2개 중대를 금주에 집결시킴으로써 사태 여하에 따라서는 정전지구 안에 침입해 올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어 천진군도 2개 대대병력에 출동준비를 명하고 언제든지 북평에 침입할 듯한 자세를 취했다. 이것은 그들이 그토록 엄수하길 주장하던 탕쿠협정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현지 일본군은 이것으로 중국측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때마침 상해에서 북상한 육군무관 이소다니는 병력배치가 끝났다는 소식을 듣자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그렇지! 우리들의 20년간의 숙원이 이제야 달성될 단계에 이르렀군, 하북성은 정전지구 안에 설치된 자치령이 되어야 한다."
하고 그 속셈을 드러내보였다.
하응흠-우메즈협정
화북의 공기가 이토록 험악해지자 남경정부 당국은 유혈사태를 막아보고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문을 하응흠에게 타전하여 일본군에 굴복하고 말았다.
①6월 10일을 기해 하북성내 국민당정부의 즉시 철퇴를 개시한다.
②제 51군은 11일부터 철도수송을 개시, 25일 이전까지 하북성 밖으로 철수한다.
③제 2사, 제 25사는 하북성 밖으로 이동한다.
④국민정부는 조속한 시일 내에 전국에 배일운동의 금지명령을 내린다.
6월 10일 하오 6시, 하응흠은 이 회답을 다까하시무관에게 전달했다. 자기측의 요구가 전면수락되자 천진군은 6월 28일 사령관 우메즈의 이름으로 이것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을 이른바 하응흠-우메즈협정이라 한다.
진덕순-도히하라협정
하응흠-우메즈협정으로 국민당세력은 일단 하북성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이 성의 서북부에 있는 차하르성에서 국민당을 철퇴시키기 위해 강요된 것이 진덕순-도히하라협정이다. 이 협정의 계기가 된 것은 소위 장북사건이라는 것으로 이것 역시 관동군의 억지에 의한 것이었다.
원래 차하르성 주석 송철원은 화북 군벌의 한 사람으로서 열하성에 일본군이 침입했을 때 관동군에 대항하여 싸운 일도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국민당의 통제력이 강화되는 것 또한 경계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국민당과 일본군의 중간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서 북평에 진출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관동군은 송철원의 이런 중간적 위치를 악용하여 만주국의 영토를 차하르성까지 확대함으로써 내몽고 진출의 발판으로 삼는 한편으로 송철원을 하북성에 끌어들여 괴뢰정권을 수립할 속셈이었다. 이때 일본군이 차하르성에서 국민당세력을 물러나게 한 장북사건이라는 것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실로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었다.
일본군측의 주장에 의하면 1934년 5월 31일, 관동군 특무대원 몇 명이 모종의 임무를 띠고 다륜을 출발하여 장가구로 향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일행은 예정일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아 그들의 행방을 의아하게 여기고 있던 중 6월 5일 하오에야 장가구에 이들이 도착했는데 그들이 이토록 늦어진 것은 도중의 장북에서 송철원군에 의해 감금당한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일행이 장북의 남문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송철원군의 위병에게 증명서의 제시를 요구받았으나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탓으로 영내의 감금실에 끌려가 욕설과 구타를 당한 후에 풀려났다고 한다. 이 사건은 그야말로 하찮은 것이었으며 일행의 취급에 있어서도 쌍방의 주장은 서로 엇갈리고 있다.
후일 극동재판에서 진덕순이 진술한 바에 의하면
-당시 중국의 법규에는 일본인이 중국 국내를 여행할 때는 `호조`라는 통행증을 성정부로부터 교부받아야 했는데 이들 일행은 그것을 취득하지 않은 채 입성을 강행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을 연행한 후 식사등을 제공하기 위해 3∼4시간을 보냈을 뿐이며 협박이나 구타를 가한 일은 없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이 일은 송철원측에게 잘못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일본측은 마침 어떤 구실이라도 만들고 싶어하던 때라 이 사건을 들고 나와 국민당의 차하르성 후퇴와 송철원의 장성선 이북 철퇴를 요구했던 것이다.
6월 23일 밤, 관동군 특무기관장 도히하라는 북평에서 신임 차하르성장 진덕순과 회담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약정하기에 이르렀다.
①중일 국교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중국기관을 차하르성에서 철퇴한다.
②송철원군은 이 지역에서 철수하고 철수 후의 치안은 보안대로 하여금 담당하게 한다.
③이상 철수는 2주일 내로 끝내야 한다.
④차하르성에 일본군 비행장과 무선전신시설을 설치할 것을 허용한다.
⑤차하르성에 일본인을 군사, 정치고문으로서 배치하도록 한다.
어둠 속의 하북
잇따른 2개의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일본군은 마침내 중국 본토에의 남하를 개시했다. 만주를 강점한 지 불과 3∼4년만에 이제는 하북이 그와 똑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만주의 광대한 옥토와 풍부한 자원은 당분간 일본의 탐욕을 채워주는데 충분할 것이라 생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화북의 무한정에 가까운 자원이 그들의 탈취의 대상이 되었고 급기야는 무력까지 동원하여 국민당세력을 쫓아내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국민당뿐만 아니라 중국 국민들에게도 큰 상처를 주었다.
이 두 개의 협정은 일시적으로는 중국측의 굴복을 의미했지만 결국엔 도리어 중국민중의 강렬한 민족의식과 배일사상을 불어넣어 주었다.
한편 장개석은 끝까지 유연성을 가지고 사태에 임했으며 관계 각국에 호소하는 전통적 수단도 쓰지 않고 다만 일본측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만 했다. 이 무렵 국민정부의 내부에서는 왕조명, 당유임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파와 송자문, 공상희를 중심으로 하는 구미파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개석은 대일관계의 일은 하응흠에게 일임한 채 자신은 줄곧 사천성에서 중국 공산당군과의 전투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가 이렇듯 일본에 대해 적극적인 저항책을 보여주지 않자 국민당 내부의 일부 강경론자들은 불만을 품었으나 장개석은 그들에 대해 "최후의 관두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말로 무마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민당 내부의 친일파들은 왕조명과 당유임이 항일 행동대원들에 의해 피습당하고 나자 그 세력을 급격히 잃고 있었다. 잇따른 2개의 조약 체결로 하북을 잃게 된 것이 국민당정부와 중국 민중을 결집시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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