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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에 대하여

나다 2005.09.12 0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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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국민당군의 독일제 1호전차 노구교 사건의 범인은? 1937년 7월 7일 밤. 북평 교외에 있는 노구교(서양에는 마르코폴로다리로 알려져 있다)에 울린 총소리는 마침내 중일전쟁을 촉발시켰다. 이날 밤의 총격이 단순히 우발적인 것인지 어떤 측의 음모에 의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나돌고 있다. 그중에서 중요한 것을 열거하면 ①일본측이었다는 견해 가. 중국 주재 일본군 참모 또는 특무기관측의 음모에 의한 것이었다는 견해 나. 이날 밤의 연습부대가 어둠을 틈타 총격을 가하고 모른체 했다는 견해 ②중국측이었다는 견해 가. 일본군의 야간연습을 눈 앞에 본 제 29군 기찰군의 병사가 공포감 때문에 총을 쏘았다는 설 나. 당시 실의속에 빠져있던 풍옥상이 화북의 긴박한 정세를 이용하여 이 지방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책략이었다는 설이다. 7월 13일 중일양군이 대치하고 있던 중간지점에서 폭죽을 울리는 등 사건확대를 부채질한 청년 가운데 중공의 밀명을 받았다는 청화대학 학생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중국 공산당이 조종했다는 설 그러나 이 사건의 최초의 총격을 누가 가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규모의 충돌은 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시 중일전쟁의 직접적인 발단은 이날밤의 사건에 있다. 여기서 당시 노구교의 일본군 일선 중대장으로서 사건 전모를 목격한 시미즈의 수기를 중심으로 현장상황을 살펴보자. 최초의 총격 -1937년 7월 7일 하오, 내가 인솔하는 제 8중대는 야간연습을 위해 풍대의 병영을 출발하여 노구교 서북 약 1㎞지점에 있는 용왕묘로 향했다. 하오 4시쯤 연습 장소에 와 보니 그곳 둑 위에는 200여명의 중국군이 흰 셔츠 차림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들의 작업이 끝날 때를 기다리기 위해 둑 앞 1㎞지점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중대원들에게 저녁식사를 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연습개시의 예정시각인 하오 6시가 되어도 중국병의 작업이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부하들을 모아놓고 중국병에 대해 유의해야 할 점등을 다시 한번 타이르고는 예정을 변경하여 둑 이쪽 100m 부근에서 연습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날 밤은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였지만 달은 솟아있지 않았다. 별빛은 희미한 저 멀리에 노구교의 성벽이 보이고 있었다. 하오 10시경, 전반부의 훈련이 끝났으므로 내일 아침 새벽까지 야영하기 위해 나는 각 소대장과 가설적사령에게  연락병을 보내어 연습중지와 동시에 집합명령을 내렸다. 이 집합명령에 따라 각 소대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경기관총 소리가 들렸다. 가설적(일본군이 연습 편의상 설정해 놓은 가상 적)이 발사한 것이다. 연습중지명령을 받지 못한 가설적사령이 내가 보낸 연락병을 보고 발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돌연 뒤쪽으로부터 몇발의 총소리가 나더니 실탄이 공기를 뚫고 지나가는 음향이 들렸다. 그러나 아군의 가설 적은 아직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듯 여전히 공포탄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나는 곧 곁에 있는 나팔수에게 명하여 나팔을 불게 했다. 그때 또다시 후방 철교부근의 둑쪽에서 십여발의 소총소리가 났다. 나는 모여든 부하들을 소대별로 구분하여 배치하여 응전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 병사 1명이 행방불명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동시에 이 사실을 즉시 풍대에 있는 대대장(이찌기소좌-후일 과달카날에서 자살)에 보고하고 그의 지시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 수기에 의하면 최초의 총성은 공포이든 실탄이든 일본군측이 설정한 가상 적이 발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뒤에 난 소총소리는 경기관총 소리를 듣고 놀란 중국병이 발사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애당초 중국군이 부근에 있는데도 공포탄을 사격하는 훈련을 강행한 일본측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행방불명의 병사는 그로부터 20분 후에 발견되었으므로 나는 다시 연락병으로 대대장에 보고하도록 한 다음(그러나 이 보고는 훨씬 뒤에 전달되었다) 금후 나의 중대가 취할 행동에 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으나 좀체로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럴 즈음 동북쪽 고랑밭에서 수상한 불빛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곧 서오리점으로 이동키로 결심하고 새벽 1시경 그곳에 도착했다. 이윽고 대대부관인 가메중위가 서오리점에 도착하여 대대 주력이 출동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이찌기대대장은 북경에 있는 무다구찌연대장에게 사건을 보고하여 "전투준비를 갖춘 후 노구교의 중국군 대대장을 불러내어 교섭에 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어 나는 대대장으로부터 일문자산을 점령하기 위해 정찰장교를 잠입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그것을 곧 실천에 옮겼다. 8일 상오 2시 반, 우리 부대가 일문자산을 점령했을 무렵 또다시 용왕묘 방향에서 3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이것을 들은 대대장은 즉시 제 8중대에 용왕묘 북측 제방을 점령하라는 명을 내렸다. 상오 4시 20분, 대대장은 무다구찌연대장에게 또다시 총성이 들려왔다는 보고를 하자 연대장은 곧 "단호한 태도로 전투를 개시해도 무방하다"고 말했으므로 드디어 대대장도 공격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 수기에도 밝혀진 바와 같이 총성 몇 발이 들려왔다고 해서 무다구찌연대장은 "단호히 전투를 개시해도 좋다"고 명령하고 있다. 무다구찌의 독단 무다구찌의 이 독단적 명령이 사실이었다는 것은 후일 이찌기대대장이 일본의 신문사가 주최한 좌담회에서도 증명해 주고 있다. 이때의 이찌기의 발언에 의하면 -그가 무다구찌에게 보고를 끝내자 무다구찌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좋아, 해 버려도 좋다." 라고 말했으므로 처음에는 이찌기 자신도 얼떨떨했다는 것이다. 정말 전투를 시작해도 좋은지 어떤지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므로 이찌기가 "정말 해 버려도 좋습니까?" 라고 묻자 무다구찌는 "좋고 말구. 지금 시각은 4시 20분. 정말 해 버려도 좋단 말야." 하고 발령시각까지 분명히 말하기에 "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한 후 이찌기는 전화를 끊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다구찌는 이날 밤 2가지의 명령을 동시에 내린 셈이다. 즉 행방불명된 1명의 병사를 찾기 위해 중국군 대대장과 협상하여 조사해보라고 하는 한편으로 얼마 후에는 대대장 보고를 받고 전투 개시의 명령을 내린 것이다. 실종의 원인 또한 희극적인 것은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다시 나타난 문제의 병사는 대변을 보기 위해 일시적으로 대열에서 떠났다는 것이다. 병사 행방불명의 보고가 연대장에게 모종의 쇼크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 병사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늦어진 때문에 이날 밤의 정세는 상당히 험악한 분위기가 되었으며 분쟁 확대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시미즈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용변 중이었기 때문에 그가 한때 대열에서 이탈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중대장의 허가없이 대변을 보러 갔지만 연습중지와 집합나팔이 들려오니까 천천히 볼일을 보느라 늦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떻게 사실 그대로 밝힐 수 있겠는가? 전투기록과 같은 후일에 남을 서류에 그대로 기록되는 그는 평생토록 부끄러움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병사는 그 이튿날 전투에서도 잘 싸웠으므로 별다른 처분은 내리지 않은 채 흐지부지 수습해 버렸다.- 한편 이날밤 행방불명 병사의 조사 의뢰를 받은 중국측에서는 원평(노구교 소재지) 현장인 왕냉제가 부하를 시켜 성 안팎을 샅샅이 조사해보았으나 그런 병사가 나타날 리가 없었다. 왕냉제는 곧 북평으로 달려가 제 29군 부군장인 진덕순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보고를 받은 진덕순은 일본군측에 연락하여 이날밤 새벽 2시부터 기찰보안대 본부에서 중일 쌍방 대표가 모여 사태를 협의하게 되었다. 왕냉제의 수기 이때의 광경을 왕냉제는 그의 수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태를 협의하기 위해 우리 기찰정부측에서는 나와 위종조(외교위원회 주석), 임경우(외교위원)이 출석했고 일본측에서는 특무기관의 마쓰이대좌와 사꾸라이고문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마쓰이는 "마침 행방불명이던 병사가 돌아왔다는 보고를 이제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왜 실종되었는지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어떻게 실종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장본인인 병사에게 물어보면 알 것이다. 그러나 더욱 자세한 것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면 쌍방에서 조사원을 파견하면 될 것이 아닌가?"라고 응수했다.- 계속되는 전투 그후의 전투경과에 대해서 다시 시미즈의 수기를 살펴보자. -8일 상오 5시가 되었다. 이찌기대대장은 노구교 북쪽의 철도선으로부터 성 밖의 중국군을 공격할 생각으로 일제히 전진할 것을 명령했다. 동시에 일문자산 부근의 포병에게 사격을 명했으나 웬일인지 응해주지 않는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것은 연대장이 새로운 정세에 따라 사격을 중지시켰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대대는 전진을 중지하고 곧 아침식사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때 용왕묘 방면에서 중국군이 또 사격을 개시했다. 이보다 앞서 용왕묘 북쪽을 점령,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 8중대는 차츰 밝아오는 새벽 빛과 고랑밭의 은폐물을 이용하여 용왕묘 동북 300m의 수수밭까지 진출했다. 여기에서 둑까지의 사이에는 약 100m가량의 논이 이어져 있는데 이제부터의 전진은 중국군에게 측면을 드러내 보이면서 통과해야 할 형세이다.‥‥‥‥ 나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 제 1선 소대와 함께 둑 위에 올라가 보았다. 며칠 전부터 냏린 비로 인해 영정하엔 탁류가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살며시 용왕묘를 살펴보니 아직도 중국군의 공사는 완성되지 않은 듯 별다른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다. 견고한 방어시설이 완성되어 있었다면 이후의 공격에 상당한 장애물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이때 대대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대대 주력은 이미 중국군 전면 진지의 300m까지 진출했다는 것이다. 나는 곧 제 1소대장과 함께 부대의 선두에 서서 전진을 개시했다. 이때 그곳 참호 밖에 서서 이쪽을 감시하고 있던 중국군이 재빨리 호 속으로 뛰어들더니 일제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나의 중대가 곧 응전한 것은 물론이다. 기관총의 원호사격 아래 참호 속으로 돌입한 후 후퇴하는 중국군을 추격하면서 단숨에 용왕묘 남쪽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때는 5시 30분, 동쪽 하늘에서 아침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한편 일시 전진을 중지하고 있던 대대 주력부대도 공격으로 들어가 치열한 사격전 끝에 둑의 선까지 진출함으로써 노구교 이북의 중국군 진지를 일단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 제 1선의 2개 중대는 영정하 양쪽과 성벽 위로부터 퍼붓는 중국군의 맹렬한 사격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특히 측면으로부터 작렬하는 수많은 기관총의 맹사격은 아군으로 하여금 영정하를 건너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사상자를 속출하도록 만들었다.- 이상의 수기는 극히 단편적이고 일방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 당시의 치열한 전투상황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현지군의 교섭 당시 노구교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은 풍지안이 이끄는 제 37사 예하의 2개 중대로서 김진중 대대장이 이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 풍지안은 제 29군의 사장 가운데 가장 젊은 실력자로서 알려지고 있었으며 또한 일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사격전으로 하룻밤을 세운 양군은 8일 아침이 되어도 대치상태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날이 새기에 앞서 일본군측에서 사꾸라이소좌가 성 안으로 김진중 대대장을 찾았다. 진상규명과 사태수습을 협의하자는 것이었다. 전투중에 일본군인이 중국측 성안으로 찾아들어간다는 것은 기이한 느낌이 들지만 사꾸라이는 기찰정부의 군사고문이었던 만큼 있을 법한 일이기도 하다. 김진중을 만나자 사꾸라이는 먼저 성 밖에 있는 중국군을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동시에 성의 동문에 있는 중국군을 서문까지 후퇴시키고 그 대신 일본군을 그 자리에 진출시킨 후 조사와 교섭을 진행하자고 요구했다. 김진중을 즉석에서 그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 자리에 있던 왕냉제 역시 단호히 거절했다. 때마침 이찌기대대의 선봉에 성 밖으로 육박하여 공격을 개시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사꾸라이는 곧 백기를 들고 성벽 위로 올라가 사격을 정지해 달라고 요구했으므로 성 안팎은 잠시 평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대장 무다구찌는 이날 상오 9시 25분, 모리다중좌에게 노구교 점령을 명령하더니 하오 1시가 되자 북평을 출발하여 자기가 직접 일선 지휘를 담당하는등 극도로 호전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일본의 위협 이동안에도 성 안에서는 사꾸라이가 김진중, 왕냉제를 상대로 담판을 거듭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알게 된 무다구찌는 하오 5시에 성 안으로 위협적인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후일 왕냉제의 수기가 밝히고 있는 바에 의하면 이때 무다구찌가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①하오 8시까지 중국군은 영정하의 서쪽으로 철수토록 하라. 만일 이 요구에 응하지 않을 때엔 야포로 성 안을 공격할 것이다. ②그때를 생각하여 성 안에 있는 주민들을 성 밖으로 이동시켜라. ③성 안에 있는 일본인 고문 사꾸라이와 일인 통역관을 성 밖으로 내보내도록 하라. 이에 대하여 왕냉제는 곧 회답을 보냈다. ①본관은 군인이 아니므로 철병에 관한 일은 회답할 수 없다. ②성 안의 주민에 대해서는 이쪽에서도 방법이 있으니 그쪽에서 염려해 주지 않아도 좋다. ③사꾸라이는 이미 성 밖으로 나갈 것을 권고했으나 본인의 희망으로 아직 남아있다. 이 무렵엔 이미 현성 안과 북평 사이의 통신은 두절되어 있었고 김진중대대장은 용왕묘로부터 패퇴해 온 병사를 단칼에 목을 자르는 등 흥분상태에 빠져 있었다. 북평의 평화교섭 8일 낮, 북평 시내는 엄중한 경계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날 저녁부터 중국측의 진덕순, 풍치안과 일본측의 특무기관장 마쓰이와 그의 부관 이마이 사이에 정전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다. 한편 이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천진에서도 천진군 참모장 하시모도와 장자충 간에 회담이 열렸는데 그 결과 9일 상오 3시를 기하여 가까스로 다음과 같은 3개 항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①쌍방은 즉시 사격을 중지한다. ②중국군은 영정하의 우안으로, 일본군은 풍대로 철수한다. ③원평현 성의 수비는 일본에 대한 적의가 농후한 제 37사를 전배하고 그 대신 기찰보안대가 이를 담당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 정전협정은 불과 24시간도 못 되어 그 효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잇따른 충돌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에 대한 중요원인은 일본측의 태도에 있었던 것이다. 양 정부의 태도 이 노구교사건에 대해 일본정부는 처음에는 그다지 중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사태가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일단 불확대방침을 결정하고 이것을 현지군에게 훈령했다. 이는 일본정부가 평화적 입장을 취하자는 것이 아니었고 단지 대소전에 대비해야 할 시기에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 군비가 모자라다는 이유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 가지 못하고 만다. 처음에는 불확대방침에 의해 병력증원을 거부하던 참모본부였지만 사태가 악화되자 현지주둔군의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파병을 결정하게 된다. 이리하여 관동군에서 2개 여단, 조선군에게 1개 사단, 그리고 본국에서 3개 사단을 증원하기로 결정하고 다음날인 11일 내각의 승인을 얻기에 이른다.   일본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중국에서 반일감정을 더욱 확산시켰다. 17일 장개석은 노산에서 담화를 발표하여 "만일 현재의 사태가 최후의 관두에 다다르면 민족의 역량을 걸고 항전할 결심이다" 라고 태도를 밝혔다. 또한 화북의 송철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기찰정부도 처음에는 사태의 국지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남경의 국민정부가 항전결의를 밝히자 이에 동조하여 움직일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끝없는 전쟁의 시작 일본이 북경 지역에 실제로 군대를 증강배치한 것은 7월 26일의 일이었다. 증강된 일본주둔군 사령관 가즈끼는 이날 중국군을 북경과 천진으로부터 철수시킬 것을 요구했으나 송철원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드디어 일본군은 공격을 개시했다. 가즈끼는 28일 아침 일제공격 명령을 내려 이날 북경 교외의 남원과 서원에 있는 송철원군을 포위했다. 여기에는 관동군과 조선군에서 동원된 증원부대도 참가해 있었으므로 송철원군은 부득이 이날밤 보정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불과 하루만의 전투였으므로 수백년동안 전해져 내려온 고도 북경의 문화재는 파손을 면할 수 있었으나 일본군의 이러한 태도는 곧 중국민중의 격렬한 반일감정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이는 곧이어 일어난 28일의 통주사건으로 이어졌다. 통주사건은 송철원군이 철수하자 평진지방의 보안대가 일제히 봉기한 사건으로 천진, 통주, 타쿠, 탕쿠등의 보안대가 궐기하여 일본인을 습격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통주의 일본군 특무대가 전멸했으며 민간인 또한 수없이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중일정세의 악화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으며 이를 구실로 일본군은 북경에 이어 천진을 공략하여 29일에 이를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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