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중일전쟁에 대하여 1

나다 2005.09.14 03:30:37
조회 827 추천 0 댓글 1


사진 : 방탄복 대신에 철판을 입은 일본군 지휘관들 남경점령과 대학살 *저작권은 조선협객님에게 있습니다* 트라우트만중개 중국 각지에서 일본이 전선을 확대하고 있을 때 일본정부는 일단 이 시점에서 시국을 수습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 스기야마육상은 "중국은 3개월이면 격파할 수 있으며 그 다음에는 그들이 평화를 애걸하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중국군은 예상 이상의 전투능력을 보여주었고 3개월의 약속시한은 이미 지난지 오래였다. 매일같이 중국 각지의 요지 점령소식이 들려왔지만 그것은 광활한 중국대륙의 점과 선에 불과한 것이었고 인명과 물자의 소모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만 갔다. 더구나 그 선 또한 튼튼한 것은 아니었고 중국군의 게릴라공격으로 끊어지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출병하여 이미 점령한 지역을 다시 재점령해야만했다. 이후 베트남에서 미군이 겪은 일이 이때의 일본군에게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육군 수뇌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일본의 인력과 자원은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이 무렵에 진행된 소련 극동군의 갑작스런 증강을 보고 소련의 만주침공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일본정부는 독일로 하여금 조정역에 나서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히로히또와 고노에라면 영국에 그 역할을 의뢰했겠지만 결국 육군측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이때 일본정부가 제시한 교섭안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①내몽고에 자치정부를 수립한다. ②화북과 상해의 비무장지대를 대폭 확장한다. 국민정부는 화북 전역에 대해 행정권을 가질 것이며     그 행정관은 친일적 인물로서 임명한다. ③배일운동을 중지하도록 한다. ④중일 양국이 공동으로 공산당에 대처한다. ⑤일본 엔에 대한 관세율을 인하한다. ⑥중국에 있어서의 외국의 권리를 인정한다. 표변한 일본의 태도 이 교섭조건은 11월 5일 주중 독일대사 트라우트만을 통해 중국행정원장 공상희에게 전달되었다. 이 무렵의 독일은 중일 양측으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었다. 일본측으로서는 방공조약의 맹방이었으며 중국측으로서는 군사원조국의 하나였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중국이 일본군의 전차에 대응할 수 있었던 것도 독일에서 지원한 37㎜대전차포가 그 큰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국공내전당시 국민당군의 군사고문의 상당수가 독일인이었다. 중국정부는 이 조정역을 성의로서 받아들였다. 트라우트만은 공상희와 왕총혜 외교부장을 만난 후 장개석과의 회견을 요청했다. 이때 행정부는 한구로 옮겨가 있었지만 장개석은 아직 남경에 머무르고 있었다. 2월 2일, 트라우트만은 장총통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장개석이 일본측 화평교섭안을 수락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석상에서는 장개석의 최고막료인 백숭희, 고축동, 당생지, 서영창등이 동석하고 있었고 이들은 장개석의 뜻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막료들은 일본이 또다른 조건을 제시하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표시했다. 서막외교부장이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백숭희장군은 "만일 일본이 요구하는 조건이 이것뿐이라면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여태까지 싸웠단 말인가?"하고 웃어보였다. 이것은 이 자리에 동석한 모든 사람의 심중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트라우트만은 12월 6일 이 회담결과를 주일 독일대사를 통헤 일본정부에 전달했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태도는 그동안에 이미 변해있었다. 때마침 남경함락이 목전에 다다랐다고 판단한 일본정부는 이에 대한 회답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남경공방전 트라우트만회담의 바로 전날인 12월 1일, 일본대본영은 미리 마련된 계획에 따라 현지 마쓰이사령관에게 남경공략을 명했다. 이 무렵 현지군은 이미 그 주력을 호주 서쪽 40㎞까지 진출시켜 남경공략의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이 공격명령을 받자마자 이들은 쾌속도로 돌진했다. 더구나 상해파견군과 현지군의 주력인 제 10군은 서로 진격속도를 경쟁하여 남경침입은 예정보다 한달이나 빠른 날짜로 이뤄졌다. 일본군은 남경성의 동쪽과 동북쪽에 2개 사단, 남쪽과 서쪽에 3개 사단을 구축하고 포위망을 압축하면 한편으로 그중의 1개 사단이 양자강 북안을 건너 진포선을 차단하고 다른 1개 사단은 무호를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12월 4일, 현지 일본군은 상해파견군과 제 10군의 합세 아래 곧 남경외곽 진지를 돌파했다. 9일 정오, 일본군의 일부가 광화문의 앞에 다다랐고 10일에는 높이 20m의 성벽 일부를 점령했다. 시가전 개시 10일, 일본군 제 16사단은 중국군의 가장 견고한 방어진지로 알려진 자금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만 2일동안 유례없는 치열한 혈투를 벌인 끝에 12일에 이를 점령함으로써 중국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리하여 13일 아침에는 남경이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에 앞서 국민정부의 요로는 이미 한구로 옮겨가 있었다. 그러나 남경 시내에는 미처 후퇴하지 못한 중국군 패잔병들이 남아있었다. 포위되어 탈출할 가망성도 없어진 이들은 시내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드넓은 남경시내의 시가지와 산간에 잠복하여 일본군에 대해 저격전을 벌인 것이다. 무작정 남경에 돌입하는 일본군에 대해 중국군의 사격이 집중되었고 일본군의 응사가 뒤따랐다. 총성과 화염 사이로 수많은 병사들이 쓰러져갔다. 태평문 밖의 호는 시체로 메워졌고 거리에는 불타는 자동차와 전사자들이 널려 있었다. 세기의 분노 남경대학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남경대학살이다. 이 남경대학살은 일본군의 잔인성과 약탈본능을 여지없이 드러낸 사건으로서 사건 후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의 비난이 집중되었다. *중략...삭제했습니다.* 이들은 중국인들이 말하는대로 살인귀의 집단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이 대학살은 일본 내에서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켰을까? 소위 황군이라는 이 범죄집단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처벌이 있어야 할 것이었지만 일본 내에서는 오로지 침묵만이 있었다. 전후 극동전범재판에 회부된 전쟁책임자들은 모두 자신들은 이 사건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허구였다. 그 당시 일본신문에 실린 기사는 중국인 포로 연속 참수기록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우승자가 중국인 포로의 목을 들고 웃고 있는 사진도 실려 있다. 이 참수의 대상은 포로만이 아닌 일반 시민도 포함되어 있었고 전후 이 사건에 대해 남경시민에게 사죄한 일본군인은 단지 일반 사병 몇 명뿐 장교나 지휘관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들은 오히려 게릴라활동을 도와준 시민과 포로들을 처형했을 뿐이라며 당당한 태도마저 보였던 것이다. 일본국내의 환호성 남경점령의 소식이 일본 전국에 보도되자 일본국민들은 열광했다. 각 신문은 제 1면에 남경함락기사를 실었고 거리는 깃발 행렬과 초롱행렬로 축제분위기에 휩싸였다. 모든 직장에 남경함락을 축하한다는 의미의 일왕이 내린다고 하는 정종이 배급되었다. 서민들은 이 정종잔을 높이 들며 전승분위기에 들떴고 이 남경함락이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성급한 의견조차 나올 정도였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일본 남경이 함락되자 트라우트만화의를 제의할 정도였던 일본정부의 태도가 경화되었다. 13일 하오, 스기야마육상은 중국이 만주국을 사실상 승인하고 화북과 화중 양 지역에 특별행정구역을 설정한 후 전비의 배상을 하지 않는 한 화평교섭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새 조건을 제시했다. 이것은 트라우트만화의 제시때보다 훨씬 더 강경해진 조건이었고 트라우트만화의제시 당시 중국측이 우려했던 것이 사실로 나타나는 것이기도 했다. 12월 12일, 새 조건은 각의를 통과했고 히로다외상은 독일대사를 통해 이튿날 이 조건을 중국측에 전달했다. 이 새로운 조건에 대한 중국측의 태도는 냉담했다. 화평을 제시해 놓고 남경를 공격하여 대학살을 벌이고 남경 점령 이후 강경한 조건을 내걸고 화평을 강요하는 일본에 분노하고 있었고 일본에 대한 불신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화평교섭을 진행하는 사이에도 일본은 한구를 점령하기 위한 새로운 증원부대를 파견하고 있었다. 트라우트만은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을 보고 중국측에 더 이상 화평을 거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권고했다. 이 권고를 받은 중국은 1월 13일에 일본측에 회답을 보냈다. "일본이 제출한 조건은 너무나 막연하다.새로 제시된 조건의 본질과 내용에 대해 좀더 자세한 설명을 바란다." 이에 대해 히로다외상은 이것은 중국측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며 이를 수락할 것을 요구했다. 1월 15일 정부와 통수부의 연석회의에서 고노에수상과 히로다외상, 스기야마육상은 화평교섭을 중단하고 무력에 의존할 것을 강경히 요구했지만 육군참모차장 다다는 교섭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모본부로서는 소련에 대한 경계심과 함께 일본의 국력이 한계에 달하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육군성과 대립한 다다는 육군성의 강경한 태도에 끝내 굴복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38년 1월 16일, 일본정부는 국민당정부를 상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외에 발표하고 화평교섭을 중단했다. 그리고 주중 일본대사 가와고시에게 소환명령을 내렸고 중국측도 주일대사 허세영을 귀국토록 했으므로 양국간의 외교관계는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이것은 일본정부 자신이 화평을 통한 길을 스스로 막아버린 셈이며 이후 태평양전쟁으로 이르는 절망적 일방도로를 달리게 된 것이다.

추천 비추천

0

고정닉 0

0

원본 첨부파일 1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모태 솔로도 구제해 줄 것 같은 연애 고수 스타는? 운영자 25/07/21 - -
72513 동부전선에서 소련군 포로되긔 vs 고자되긔 [3] ㅁㄴㅇ(115.21) 10.08.13 62 0
72512 2차대전은 독일vs소련 전쟁이라고들 하는데 [22] 킬콩(222.239) 10.08.12 125 0
72509 조선군 vs 이탈리아군 [6] ㅇㅇ(115.21) 10.08.12 152 0
72508 말을 너무 과장해서 하네;;; 전멸이 뭐가 어째? [8] grrrrr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12 62 0
72507 식민지였던 국가에 남아있는 정치문제는 솔까말 서양인들이 싸고 간 똥이죠. 기렌자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12 19 0
72506 독일 히틀러 암살성공후 항복,일본항복 수용했으면 지금쯤 모습은 어떨까요? [4] (58.231) 10.08.12 83 0
72503 7월의 세계대전사 지워져있는데 괜찮나 ㅇㅅㅇ?? 4노블비바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12 19 0
72502 유럽 우익의 대장 일본 [2] ㅁㄴㅇㄹ(124.48) 10.08.12 31 0
72500 텐노가 전쟁범죄자??? ㄴㄴㄴ(211.41) 10.08.12 23 0
72499 오늘하루만 200플 넘는 게시물이 2개나 되네 [2] 서탈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12 35 0
72495 일본군을 '자위대'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려드립니다 [5] 졸리(218.144) 10.08.12 80 0
72491 역사를 사죄하지 않고 진정으로 반성하지 않는 나라는 절대로 용서할수 없다 [22] 50바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12 607 0
72489 난 대체 일빠들 이해가 안되네... [13] 음?(122.153) 10.08.12 48 0
72487 영국 찌질이새끼들은 어떻게 독일한테 빌빌 긴거냐? 식민지도 많앗자나 ㅋㅋ [17] 졸리(218.144) 10.08.12 93 0
72486 일본자위대가 일본군으로 승격되고 모든제재가 해제된다면 [5] 일본해병대(222.239) 10.08.12 47 0
72484 world at war victory song ㅇㅇㅇ(125.141) 10.08.12 35 0
72483 구 일본 해군은 대단합니다.(2차 세계대전 이야기임) [26] 분필한다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12 630 0
72482 이대갤 눈팅하면서 생각해낸게 krusk(125.141) 10.08.12 15 0
72480 대통령 찬가 and 성조기여 영원하라 上杉謙信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12 117 0
72479 북대서양_최북단에서_마주한_후드와_비스마르크.txt [7] (121.55) 10.08.12 79 0
72478 일본애들이 사과를 해도 찜찜한 이유? [4] 막장워리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12 38 0
72477 북칸군사정이 전근대적 군대와 같다고 한다. [4] 제너럴모터스(210.103) 10.08.12 48 0
72476 전쟁낫으면 좋겟다 [7] 일본해병대(222.239) 10.08.12 36 0
72474 2차대전 노르망디 전선의 영국 지상군 운용에 대한 고찰 [13] cerberus(222.121) 10.08.12 203 0
72472 기갑갤에서 인기 전차 투표 예선 중입니다, 이대갤러들의 참여 부탁드립니다 [2] 스팀안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12 27 0
72471 만약에말이야 이세상에모든 전쟁이 없어진다면?? [15] 대전차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12 63 0
72468 사실 대전중 이탈리아는 [2] 루거P08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12 44 0
72467 혹시 웹2차세계대전 하셨던 분들. 8월 16일 오픈이랍니다. [4] 지크지온(211.211) 10.08.12 41 0
72465 hoi2에서 바다건너서 상륙하는건 우찌함 ?? [7] 2대갤싣(121.130) 10.08.12 240 0
72462 [개념글] qwer의 인생철학강의 [3] [qwer](59.12) 10.08.12 42 0
72461 일본의 사죄를 받고 찝찝한게 있는데 [249] 오뚜기(59.22) 10.08.12 355 0
72460 왜 이탈리아는 제2차 대전 패전후 영토 상실이 조금밖에 안된거야?? [12] 시그마X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12 746 0
72459 일본의 과거사 사죄가 미흡한 이유? [2] 大元帥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12 30 0
72458 크레타 크레타 크레타아 [7] 피라모닉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12 51 0
72456 보다 나은 미래 [6] 두정갑(222.239) 10.08.12 42 0
72455 진짜 프랑스놈들은 미움받는 듯 [3] ㅅㅇ(59.5) 10.08.12 77 0
72454 독소전 있잖냐 [4] 소련시민(116.122) 10.08.12 40 0
72453 내가 서프라이즈라는 tv프로그램에서 봤는데 [7] 1(220.93) 10.08.12 49 0
72451 형들아 대전중에 담배를 사병에게 제일 많이 보급해주던 나라가 어디였음? [11] ㅇㅇㅇ(118.35) 10.08.12 122 0
72450 혹시 웹2차대전인가 그거 하는햏 잇음? [3] 탈영병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11 27 0
72448 언제 날 잡아서 단체 채팅이나 하죠. [1] 라팔안다무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11 45 0
72447 일본의 사죄가 미흡한건 주변국들이 미개한 병신들이었기때문 [2] ㄱㅎ(115.21) 10.08.11 38 0
72446 이탈리아 중부어딘지 모르겠는데. [1] 탈영병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0.08.11 24 0
72445 독일 메서슈미트사와 메서슈미트박사는 전쟁후 어떻게 됬나요? [2] (58.231) 10.08.11 158 0
72444 이탈리아군이 ㅂㅅ 이었던이유는뭐임? [15] sadfasd(125.184) 10.08.11 126 0
72441 보다 나은 미래 [1] ㅇㅈㄷ(115.21) 10.08.11 31 0
72439 윤민혁은 본좌가 아니다 [5] 잇힝(211.186) 10.08.11 82 0
72438 대한제국군 중장 김일성? [6] ㅁㅁㅁ(116.38) 10.08.11 49 0
72435 전후 동유럽의 1300만 독일인이 서독으로 추방됐는데 애내 슬라브족아닌가 [6] 뻥축구(220.117) 10.08.11 181 0
72434 이대영화중에 [1] ㅇㅇ(112.185) 10.08.11 35 0
뉴스 [조선의 사랑꾼] ‘늦깎이 아빠’ 최성국, 자연임신 둘째 성별 ‘딸’ 공개! 김국진 ‘촉’ 적중…“흐름이란 게 있어!” 디시트렌드 07.22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