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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barossa" 작전 - 독일의 소련 침공

하인리히 소위 2005.10.29 01:44:20
조회 1356 추천 0 댓글 4

1941년 6월, 히틀러는 소련 침공에 대해 개전 초기의 폴란드, 노르웨이, 프랑스에 대한 전격전의 승리와 같은 결과를 기대했다. 그러나 독일은 곧 완벽한 패배로 이어지는 전투에 휘말리게 된다."   스탈린그라드 침공은 20세기의 의미있는 전환점이 된다. 불과 몇 달 전 완전히 무너질 것 같던 붉은 군대는 볼가강 기슭의 엄청난 공격에서 독일군을 제압하였다. 그러나 1942년 9월 13일부터 독일군이 최종적으로 패배한 1943년 2월 13일까지 소련군은 베를린 전투처럼 늙은 노병이나 광신적인 어린 소년병과 싸운 것이 아니라, 히틀러의 총애를 받던 장군중의 한 명인 파울루스 장군이 이끄는 30만 명의 정예 6군단과 대결하였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를 재정비하였고 독일군에게 이 도시는 쓰라린 기억으로 남는다. 사실 종전까지는 3년이 더 걸렸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일에게 있어서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패배가 독일 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1943년 2월 이후 많은 장교들은 독일이 기울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히틀러 또한 차츰 사라져가는 동부전선의 승리에 대한 희망을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스스로 확고히 했다. 스탈린그라드의 패배로 인해 히틀러와 군 수뇌부 사이의 믿음은 더욱 예민해졌다. (이들의 관계는 이미 1941년 12월 모스크바 침공 이래로 흔들렸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806년 독일 동부 도시 예나(Jena)에서 나폴레옹 군대에게 대파당한 프로이센군 이래로 가장 참담한 패배였다. 이제 독일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고 잔인하고 비참한 전투를 경험한 후 더욱 강력해진 붉은 군대와의 전투에 사활이 걸렸다 바바롯사의 배경 1941년 6월 22일 03시 15분, 거대한 군사 작전인 "Unternehmen Barbarossa - 바바롯사 작전"이 개시되었다. 병력과 작전의 규모, 전투의 잔혹함을 볼 때 모든 수단과 방법이 동원된 것처럼 보였다. 히틀러는 동부지역의 옥토를 점령하는데 있어서 인종적 이데올로기의 전면전을 시작하였다. 독일은 러시아의 경제적, 농업적인 자원을 이용해야만 했고 이런 러시아의 자원들은 연합군의 경제봉쇄 조치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며, 천년제국의 토대가 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히틀러는 이데올로기적 반대자인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를 전멸시키려 했고, 이를 통해 러시아 내의 유태인을 통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나아가 그는 소비에트 연방을 정복하게 되면, 투쟁주의자인 처칠이 전 유럽 대륙에 대한 독일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강화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패한 전술 - 전격전 "바바롯사 작전"에서 독일군은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소련군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아이러니하게 독일군 동부전선 패배의 원인은 바로 "Blitzkrieg - 전격전" 이였다. 독일 국방군의 전격전은 19세기의 단골 개념인  섬멸전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섬멸전이란 한 곳의 전장에서 전술적인 방법으로 적을 완전히 섬멸하면 그 효과는 자동적으로 정치적인 승리에까지 다다른다는 개념이다. 1940년 5월 10일부터 6월 22일 사이 프랑스 공격에 대한 승리는 이 섬멸전의 효과가 잘 드러난 경우이다. 보병, 전차 그리고 항공기가 하늘과 땅에서 거의 동시에 공격하였고, 이 6주동안 독일은 1차 대전 내내 이루지 못했던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 결과 1940년 6월 이후, 국방군 최고 지휘부는 섬멸전이 공격적인 전술을 통해 현대 공업 시대에도 실현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섬멸전의 효력때문이 아니라 독일군의 이동병력에 대항할 영국, 프랑스군이 병영에 상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잘못된 판단과 더불어, 독일군은 섬멸전의 개념을 확고히 다지는 충분한 훈련을 하지 않았었다. 그로 인해 1941년의 "바바롯사 작전"과 1942년 "블라우 작전"의 실패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격전은 과거의 명성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진보한 전술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1941년 11월, 모스크바 진격 당시 작전회의 중에 그 누구도 히틀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단 한번도 전격전이란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너무나 허무맹랑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독일군 장교들은  전격전을 단지 "고전 방식"이라고만 표현했다. 사실 19세기 이후부터 야전 사령관들은 적군을 포위, 섬멸하는 작전에 대한 정식 명칭을 찾는데 고심했었다. 바로 이런 구식 전술이 2차  대전에 들어서서 "전격전"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바바롯사 작전"에서 독일군은 새로운 전차, 전투기, 기계화 보병을 이용했지만 원칙적인 구식 전술 - 전격전 -에는 변함이 없었다. 전장에서 적을 완전히 포위하고 섬멸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전투력이 필요한지 몰랐던 것일까? 1939년에서 1941년 프랑스, 폴란드 침공에서 독일군은 적을 포위하고 섬멸하는 소위 "Kesselschlacht (섬멸전)"에 대해 흡사 자신들의 트레이드 마크인냥 강한 집착을 보였다. 그러나 이 전술은 심사숙고해서 결정된 계획에 의해 진행되지 않았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적의 심장부까지 섬멸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적군의 시설을 파괴하는 것은 단지 승리의 부수물일 뿐 주 목표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독일군은 공격적인 순발력과 대담함, 그리고 신축성으로 상징되었고 게다가 전차와 전투기, 무선설비의 우수성과 기동력에 대해 실전을 통해 신뢰하고 있었다. 1941년, 독일군은 이러한 섬멸전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한번 더 보여 줄 기회를 만들었다. (바바롯사 작전) 그러나 독일군은 이 작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는 못한다. 붉은 군대는 충분한 예비병력을 보유한 덕택에 "바바롯사 작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후 1941년 11월과 12월에 있었던 모스크바 공세에서 독일군을 진부한 참호전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또다른 적 또한 이 작전에는 지금까지는 발생하지 않았던 세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러시아 대륙의 지형적인 문제, 거리상의 문제, 그리고 시기적인 문제였다. 이 세가지 문제점은 1941년부터 1942년 내내 독일군에게 커다란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크라이나 남부에서부터 우크라이나 내륙까지 뻗어있던 독일군 작전 지역은 서부 러시아 지역인 늪지대이다. 또한 소비에트 공화국의 면적은 효과적인 작전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변수였다. 독일군 전차부대는 이미 짧은 거리의 프랑스 침공에서도 보급품의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었다. 아르덴느에서 대서양까지는 불과 322km이지만, 바샤우에서 모스크바까지는 1609km이고, 레닌그라드에서 로스토우까지는 1931km, 베를린에서 스탈린그라드까지는 무려 3219km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0년 7월 31일, 히틀러는 러시아 진격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고 그 내용은 단 한번의 전투로 소련을 점령한다는 내용이었다. 러시아의 기후는 전차나 자동화 무기들에게 제약이 있었지만 5월에서 11월 사이에는 극복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러시아와 같은 거대한 규모의 국가를 단 한번의 진격으로 점령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국방군의 탁월한 공격적인 능력을 생각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로 인해 허약한 군사시설을 갖춘 소련에 대해 유래없이 강력한 군사작전이 요구되었다. 붉은 군대의 주력을 한 번의 섬멸전으로 격파한다는 계획을 구상한 것이다. 그러나 지루한 소모전을 피해, 독일군이 러시아를 점령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1941년과 1942년까지 그 누구도 갖지 않았었다.     작전의 설립 작전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서 ..."바바롯사 작전"은 1940년 8월 마르크 소장이 초안을 작성했다. 그는 소련 연방의 점령은 두 단계의 적군(赤軍) 섬멸 작전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첫 번째 단계는 유럽지역에 걸쳐있는 러시아(러시아 서부지역)의 적군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의 전투지역으로는 1939년과 1941년의 러시아-폴란드 국경 지역이 선정되었다. 이 지역은 1939년 8월 히틀러와 스탈린이 분할한 지역이다. 붉은 군대는 전술적인 이유로 이 지역의 농업적, 공업적인 의미가 크기때문에 시간을 벌기 위해 이 지역을 사수할 것이라고 마르크 소장은 판단했다. 더불어 더욱 중요한 의미는 소련군의 퇴로를 되나-드네프 라인에서 막는 것이었다. 어떠한 경우에든 독일군은 진지전(참호전)은 피해야만 했다. 그런 후 두 번째 단계로서 소련군을 모스크바에서 섬멸하는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정치적, 정신적, 경제적인 중심을 잃은 소련군을 섬멸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다.   중부 집단군 이런 대략적인 계획은 1940년 12월 18일 총통령 21호로 발표된다. 여기엔 세부적인 작전계획은 없었고 다만 계획의 첫 번째 단계를 실행하기 위한 군사행동만이 명시되어 있었다. 총통령이 발표된 후 소련군을 한 번의 전투에서 무기력하게 만들 다양한 최선의 방법들이 나왔다. 육군 원수 페도 폰 보크가 이끄는 중부 집단군 (Heeresgruppe Mitte)이 선두를 맡았다. 보크는 1898년 황제 군대에 입대했었고 1차 대전에서 연대장으로써 독일 최고 훈장인 푸르 레 메리뜨(Pour le Merite) 훈장을 받았었다. 그는 거만한 프로이센 육군의 상징이었고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북부 집단군 (Heeresgruppe Nord) 사령관이었다. 그리고 1940년 5월과 6월 사이 프랑스 침공의 주역인 B 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그의 지휘 하의 중부 집단군은 육군 제 9군단 (사령관:육군 중장 슈트라우스)과 육군 제 4군단 (사령관:육군 원수 클루게)으로 이루어졌다. 중부 집단군의 화력 지원은 제 9군단의 명령을 받는 제 3 전차 집단군 (사령관:육군 중장 호쓰)과 제 4군단의 명령을 받는 제 2 전차 집단군 (사령관:육군 중장 구데리안)이 맡았다. 제 3전차 집단군은 북쪽을, 제 2 전차 집단군은 남쪽을 공격해 적군을 비얄리스톡과 민스크에서 포위하고, 4군단과 9군단이 포위한 적군을 소탕함으로써 백러시아(현:밸로루시-폴란드와 인접한 옛 소련연방국가)의 적을 섬멸하는 계획이 만들어졌다. 항공지원-사실상 전격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육군 원수 케셀링이 지휘하는 제 2비행 전대가 맡았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다른 육군 사령관들이 지원 요청을 해오면, 자신의 명령과 동일하게 신속한 지원을 해줄 것을 명령하였다. 이러한 계획은 착실히 실행되었고 기대했던 중부 집단군이 백러시아에서 승리한 후 지휘부는 되나와 드네프 사이의 지협을 공략하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였다. 총통령 21호의 두 단계 중 첫 단계 마지막 목표는 러시아 심장부로 가는 관문인 스몰렌스크였고 독일군은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모스크바에 대한 공격 준비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때까지도 두 번째 단계인 모스크바 공략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북부 집단군 북부 집단군 (Heeresgruppe Nord) 사령관인 빌헬름 폰 랩 원수는 능력있는 장군이었고 개성이 강한 인물이었다.  1923년 히틀러의 뮌헨 폭동 때 주변인물로 참가했으나 히틀러에게 총애를 받는 장군은 아니었다. 폴란드 진격에서 랩은 C 집단군 (Heeresgruppe C)를 이끌었고 프랑스와의 국경지대 방어의 임무를 맡았다. 이후 프랑스 진격에서 랩은 큰 전과를 올리게 된다. 그는 마지노 선을 정복하고 1940년 원수로 진급하였다.  북부 집단군의 왼 쪽 측면 (발트해 연안)은 제 18군단 (사령관:육군 중장 큘러)이 주둔하였고 중부 집단군과 인접한 오른 쪽에는 제 16군단 (사령관:육군 중장 북스)이 주둔하였다. 북부 집단군의 화력지원은 육군 중장 회프너가 이끄는 제 4전차 집단군과 제 1비행전대 (사령관:켈러 중장) 가 맡았다.북부 집단군은 또한 15개 핀란드 사단의 지원을 받았는데, 이들의 임무는 1939년 11월부터 1940년 3월 소련과 핀란드의 겨울전투 당시 스탈린에게 빼앗긴 레닌그라드 북부지역의 붉은 군대 잔당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북부 집단군의 임무는 발트해 연안의 소련군을 격퇴하고 해안을 사수한 후 전차 엄호와 더불어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작전에서 중부 집단군이 북부 집단군을 일부 지원하게 되어 있었다. 이 당시 발트 연안 국가와 레닌그라드는 히틀러가 가장 선호하는 목표물이었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 육군 참모총장인 육군 대장 프란츠 할더와 약간의 마찰이 있었다. 폴란드와 프랑스 침공에서와 같이 러시아 침공에서도 첫 번째 단계가 끝난 후 더 이상의 계획은 없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부대를 선정하는데 있어서 참모총장과 히틀러의 의견이 엇갈렸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1941년과 1942년의 두 작전 "바바롯사 작전" 과 "블라우 작전"에 악영향을 끼쳤다.   남부 집단군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국경 지역에 주둔한 남부 집단군 (Heeresgruppe Süd)은 육군 원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지휘했다. 1875년 생인 룬트슈테트는 작센 출신으로 군인으로써 인생모범을 보인 인물이었다. 1차 대전 당시 1914년 엘자스 지방에서 활약하였고 후에 동부전선 참모장이 되었다. 1938년 퇴직하였지만 곧 다시 복직하여 폴란드 침공 때 남부 집단군을 지휘하였고 프랑스 침공 때는 A 집단군을 맡았다. 통찰력이 깊은 룬트슈테트는 한 번의 전투로 러시아를 점령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1941년 3월 남부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굉장히 회의적이었다. 남부 집단군은 제 1전차 집단군 (사령관:육군 중장 클라이스트), 제 6군단 (사령관:육군 원수 라이헤나우), 제 17군단 (사령관:슈툴프나겔 장군) 그리고 제 11군단 (사령관:육군 중장 쇼베르트)으로 이루어 졌다. 제 1전차군단은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후퇴하는 소련군을 차단하기 위해, 키에프 부근 드네프와 그곳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에 대한 공격을 담당했다. 17군단은 동부로 진격하여 제 1전차사단의 효과적인 작전을 위해 지원하였고, 대규모 포위작전으로 소련군을 격파하는 계획을 세웠다. 6군단은 남부 집단군의 북쪽 방면의 늪지대를 따라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임무였다. 11군단은 루마니아 병사들과 함께 흑해로 진격해 오뎃사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 항공지원은 오스트리아 장군 알렉산더 로 중장 휘하의 제 4 비행전대가 맡았다. 공격의 규모 "바바롯사 작전"을 위해 독일군은 3.050.000명의 병력, 3350대의 전차, 600.000대의 장갑차량을 투입했고 특이하게도 보급과 야포의 견인을 위해 625.000필의 말을 투입했다.이러한 규모는 3개 집단군의 규모로서 이 3개의 집단군은 7개 군단과 4개 전차집단군 (17개의 전차사단, 13개의 자동화사단과 3개의 자동화여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집단군의 구성은 이미 설명하였다) 주력부대는 153개의 보병사단으로 이루어졌고 그들의 조상이 그랬듯이 도보로 전진하였다. 1941년 6월 독일군은 자신들이 사용 가능한 모든 부대를 총동원해 러시아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임무를 수행하는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독일군은 반드시 참호전을 피해야만 했고 그들의 병참선을 끊어지지않게 유지해야만 했다. 자료 출처 : http://weltkrieg.com.ne.kr/about%2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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