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게시물의 연속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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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역사청산의 계기와 과정 (역사청산 3)
(지난 글의 연속입니다.)
1차대전 이후에 전쟁 도발국이자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막강했던 산업시설을 승전국에게 빼앗기고 과중한 전쟁보상금을 치르느라 극심한 경제난과 좌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때 히틀러의 출현은 독일국민에게 심리적으로 마른 땅에 단비처럼 반가운 사건이었다.
'민족사회당'이라는 뜻을 가진 나치당은 독일의 혈통이 무조건 우월하다는 단순 무지한 사상으로 독일인들의 찌부러진 자부심을 감성적으로 어루만져주고, 살기 고단한 자국민들에게 유태인을 화풀이감으로 제공함으로써 민중의 지지기반을 넓혀 권력을 키워나갔다. (나라에 재난이 있을 때마다 유태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국민들의 관심을 호도하는 방식은 유럽역사상 여러 나라에서 항시 있어온 일이다.)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히틀러는 독일에게 불리한 조약들을 마음대로 파기하고 마치 깡패처럼 굴었으므로 독일인들은 오랜만에 자존심이 회복되는 시원한 감정을 맛보았다.
황폐한 마음에 한줄기 위로와 희망을 주는 감성적인 방법으로 국민에게 접근한 히틀러는 그의 장기인 선동을 통해서 민중이 하나의 이념으로 똘똘 뭉치는 전체주의로 몰아갔다. 유태인의 학대를 통해서 새디즘적 본능을 충족시킨 국민들은, 전체와 함께 울고 웃으며 전체에 복종하고 목숨을 맡기는 달콤한 마조키즘의 본능마저 즐기게 되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감성적 정치의 노예가 되어버린 독일국민은 자신들의 자유가 박탈당하는 줄도 모르고 뜨거운 전우애와 애국의 열정에 휩싸였다.
개인이 자신의 양심을 국가이념과 맞바꾼 사회에서는 개인들이 자신들이 타고 있는 기차가 어느 방향으로 질주하는지 생각해 볼 능력을 상실한다. 감성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분위기에서 이성을 가진 자는 굳이 공권력을 빌 필요도 없이 자체적으로 매장되고 도태된다.
독일에서 그 시대를 살았던 보통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때의 실상을 좀 더 실감있게 묘사하기 위하여 내가 책에서 읽은 실화와 지인에게서 들은 실화를 다음과 같이 꼴라쥬해 보았다.
나치당이 선전하는 위대한 조국의 미래에 희망을 걸었지만 살기는 여전히 힘들고, 큰 아이가 히틀러소년단에서 강철같은 독일인으로 단련되는 것이 흐뭇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은 아이가 옆집에 사는 유태인 자녀와 노는 것에도 거부감을 못 느끼고,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카톨릭이나 유태교의 종교적 명절이면 서로 음식접시를 주고받던 옆집의 남자가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문틈으로 목격하고, 그날 밤에 어둠을 타서 그 집의 남은 식구들에게 빵 한 덩어리를 슬그머니 들이밀어주고는 행여 누가 볼세라 삐걱이는 층계를 살살 밟으며 되돌아 나오고, 며칠 후에 그 남자의 부인이 찾아와 은수저 세트를 내밀며 헐값에라도 좋으니 제발 좀 사달라고 하는 부탁을 들어주고 (이때 돈이 없어서 정말로 헐값에 사주고).
어느 날 시장에 가는 길에 기차역으로 끌려가는 유태인의 행렬 속에서 자신의 이웃이었던 그 남자를 발견하고, 끌려가는 유태인들의 좌우로 동네사람들이 죽 늘어서서 돌을 던지고 우산대로 마구 때리면서 집단광기에 빠지는 모습을 목격하고 치를 떨지만, 그냥 돌아서는 모습을 보였다간 감시하는 나치 끄나풀에게 해코지라도 당할까 걱정이 되어 같이 때리는 시늉이라도 하고, 그리고는 끄나풀을 비롯한 동네 남자들에게 휩쓸려 맥주를 마시면서 유태인이 조국에 끼친 해악에 대해서 상세히 듣게 되고, 아까 느꼈던 죄의식이 단숨에 덜어짐을 느끼고.
연일 라디오와 신문을 통해 전파되는 후끈 달아오른 애국의 열기에 서서히 감화되어 조국이라는 단어를 듣기만 눈물이 핑 돌게 되고, 점차로 정치의식이 깨이는 기쁨과 흥분을 느끼고, 애국심 반 그리고 왕따에 대한 불안감 반의 심정으로 나치당에 입당원서를 쓰고, 조카딸의 결혼잔치에 갔다가 유태인 부잣집에서 가정부 노릇을 하던 큰누나가 주인이 수용소로 끌려가는 와중에 재빨리 챙겨놓았던 이불보와 그릇으로 조카딸의 혼숫감을 마련했다는 소리를 듣고 부러운 마음 한편으론 어딘지 민망한 마음이 들고.
그러다가 영장을 받고 전선으로...전장에서 겪은 일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만의 비밀이고...전쟁이 끝나고 포로수용소를 거쳐 구사일생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들은 소식은 외아들이 소년병으로 전사했다는 것...그리고 이어지는 전후의 굶주림과 빈곤... 달리는 화물차에서 석탄을 훔치려다 기차바퀴에 깔려 손목이 잘린 하나 남은 딸...솜씨 좋은 아내가 감자나 석탄을 담는 포대를 풀어 뜨개질 해준 옷 속으로 사정없이 스며들던 추위.
전쟁이 끝나자 독일(서독)은 남녀노소 힘을 합쳐 복구작업에 사력을 다해 매달렸다. 역사청산은 당연히 뒷전이었다. 특별히 죄질이 나쁜 나치거물들은 승전국의 연합군이 주도한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기도 하고 남미로 달아나기도 하였다. 독일정부는 자체적으로 나치의 색출을 벌이긴 했지만 수박 겉핥기 식으로 넘어갔다. 행정, 기업, 학교 등 도처에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므로, 몇 남지 않은 전문인력의 성분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걸러낼 여력도 없었고 또 그렇게 했다면 아마 남아날 인력도 없었을 것이다.
유태인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문제는 1950년대 초반부터 연합군에 의해서 추진되기 시작하여 곧 이어 독일 국회에서 보상법이 정식으로 통과되고 보상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사죄와 보상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미미했다. 그저 패전국으로서 묵묵히 치뤄야할, 전쟁보상금같은 의무로 생각했다. 독일국민들은 차마 드러내놓고 말은 못했지만 자신들 역시 히틀러의 희생자들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모두모두 과거를 잊고 힘을 합쳐 앞만 보고 전진하며 라인강의 기적을 실현하고 있던 1961년, 전쟁 종료 후 16년이 흐른 시점에 육백만 유태인학살의 주범인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에게 납치되어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인들은 이 재판의 과정을 지켜보며 그들이 앞만 바라보느라고 애써 외면했던, 과거에 독일이 지은 죄가 어떤 것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히만같은 나치의 거물들이 아직도 독일의 사회곳곳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들 중 몇 명이 독일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을 통해서 독일인들은 소문만 무성하던 과거의 실상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법정에서 방탄유리의 보호를 받으며 재판을 받는 아이히만
이렇게 과거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하는 분위기에서 맞은, 전쟁종료 20주년은 독일형법상 살인범에 대한 법정시효기간이 만기되는 해였다. 아직 전범을 제대로 가려내지도 않았는데, 모든 전범들이 자동적으로 사면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국회에선 역사청산을 원하는 세력과 이를 원하지 않는 세력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고, 국민들도 관심을 가지고 이를 주시하고 서로 토론하는 가운데 역사의식이 조금씩 익어갔다고 보겠다.
국회에서는 어떻게든 합의점을 찾아보려고 별의별 편법들이 다 제안되었지만 끝내는 해결을 보지 못하고 이 숙제는 결국 차기정권으로 넘어갔다. 그리하여 빌리 브란트가 이끄는, 나치의 과거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민주당이 집권하는 1969년에야 인종학살범에 대해서는 법정시효기간을 완전히 없앤다는 법이 통과되었다. 즉, 인종학살범들은 목숨이 붙어있는 한 언제라도 체포되어 벌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마침 이 시점을 기하여 독일의 젊은이들이 거리로 쏟아져왔다. 반전을 외치는 미국 젊은이들의 영향으로 번지기 시작한 유럽학생운동의 일환이었다. 1968년에 시작되었다하여 독일에선 '68운동'으로 불리우는 대학생들의 사회운동은 억압되었던 성의 자유, 기성세대의 소시민적 가치관의 타파를 외쳤다. 이때 독일에서 과녁이 된 것이 과거청산이었다. 종전을 전후하여 태어난, 최초로 나치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자유로운 세대였던 당시의 대학생들은, 독일사회의 경직성이 바로 그들의 부모세대가 나치의 그늘을 벗지 못하고 있는 것에 원인이 있다며 적극적인 역사청산을 요구하였다. (그 당시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던 학생들이 이제는 장년이 되어 사회를 이끌어가고 또 정치를 하고 있다. 이들이 기득권층이 되면서 초심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다른 건 몰라도 역사청산의 의지는 맥을 이어왔다고 하겠다.)
공산치하의 동독에선 전쟁의 종료와 함께 나치의 색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었지만, 자유진영인 서독에선 초반에 시기를 놓쳐서 나치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아직도 일고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지극히 인간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한다. 동독처럼 이념이 인간성을 지배하는 사회가 아닌 서독에서, 한 세대가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역사청산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을 나무랄 자신이 나에게는 없다.
현장에 있던 자들이 기억하는 역사와 그 자식세대가 상상하는 역사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자기 아버지는 사회가 지은 총체적인 범죄의 한 부속품이라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식들은, 자신이 죽인 인간의 마지막 눈빛을 보아버린 아버지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지난 일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세대와 잘잘못을 가리고 싶어하는 세대의 차이가 바로 여기서 난다.
독일에서 젊은이들이 역사청산을 주장한 사회적인 현상의 뒷면에는 무수한 개인적인 갈등이 존재했었다. 자식들은 스스로의 사고를 시도하려는 사춘기적 오만함으로 아버지들에게 따져물었다. '당신은 나치시절에 무엇을 했는가? 전쟁 때 독일군인으로서 어디서, 누구를 죽였는가? 당신은 인종학살에 어떤 형태로 참여했는가? 인종학살을 저지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어떤 노력을 했는가?' 또한 아버지가 무서운 기억의 상처로 인해서 직접 물어볼 수도 없을 정도로 망가졌던 가정의 자녀들은 침묵 속에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더 큰 갈등을 겪었다.
독일에선 나치라는 말이 아직도 무척 예민한 단어이다. 외국인인 내가 미운 독일인을 만나면 가장 쉽게 떠오르는 단어가 나치이지만 절대로 함부로 내뱉으면 안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나치소리를 들으면 감정적인 독일인들은 자기네의 원죄적 약점을 건드리는 비열한 짓이라고 불같이 화를 내고, 이성적인 독일인들은 그렇게 함부로 비교하는 것은 나치의 무거운 죄과를 희석시키는 짓이라고 정색을 하고 나무란다.
또한 많은 이들이 아직도 나치시대에 받은 세뇌교육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내가 잘 아는, 행동하는 양심이란 별명을 가진 어떤 독일인은 '한번 나치면 평생 나치'라는 말로서 나에게 자신의 이중성을 고백한 적이 있다. 그는 어려서 여느 또래와 마찬가지로 히틀러소년단원으로서 세뇌교육을 받았는데 그때 그의 어린 감성 속에 새겨진 나치사상은 그가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가 평생동안 꾸준히 실천하고 있는 나치청산에의 의지는 그야말로 자신의 감성과는 완전히 분리된, 온전히 이성 하나에만 의지한 것임을 알았을 때, 나는 그의 한평생이 자신 속에 웅크리고 있는 내면의 적과 싸우는 투쟁의 역사였었다는 것을 비로소 상상할 수 있었다.
내가 잘 아는 독일인 할머니의 집에는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귀티나는 미소년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할머니의 오빠인데 2차 대전 때 17세의 나이로 전사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적군의 총에 맞아 죽은 게 아니었다. 명민해서 히틀러소년단의 자랑거리였던 그는 어린 나이에 엘리트 훈련원으로 뽑혀갔는데 사격훈련 중에 사고로 총상을 입었던 것이다.
마음 속으로 평생 자기 오빠와 살고 있는 이 할머니는 내 아들이 하는 짓이 자기 오빠와 닮았다며 "오빠가 아직 살아있다면 이 아이와 죽이 잘 맞을 텐데..."하며 한숨을 쉬곤 한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솔직히 마음이 이상해진다. 투철한 나치교육을 받은 그 오빠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외국인인 내 아들을 좋게 봤을지도 의문이고, 살아있었다면 나중에 SS친위대가 되었을 그 오빠의 인명과 바꾸었을 유태인의 인명이 도대체 몇이나 될까하는 발칙한 생각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치는 나와 그 독일할머니 사이에 존재하는 비극이다. 많은 독일인들의 어린시절을 향한 향수가 곧 나치와 직결이 되는 점은 아직도 독일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비극이다.
(감사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비극의 불씨를 안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독일사회의 어디에서 진정한 역사청산을 실행하는 힘이 나오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다음 글로서 독일의 역사청산에 대한 연재를 마치려던 계획을 변경해서 한 편 더 쓰기로 했습니다.)
(역사청산 시리즈가 연재되는 동안에는 제가 꼬리글의 답변을 일일이 따로 드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미리 답을 드리면 내용이 중복이 되어서 그러니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시고 싶은 말이나 질문이 있으시면 얼마든지 올려주시되 답변은 제가 계속되는 칼럼을 통해서 해드린다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게 꼬리글 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게시일 : 2004-07-23 오전 12:4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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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주류와 지성인 (역사청산 4)
(지난 글에서 계속됩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나치의 범죄가 겹쳐지는 정신분열, 그리고 아직도 소진되지 않고 하늘거리는 민족주의의 불씨를 가슴속에 나란히 간직하고 있는 독일인들. 이렇게 불안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독일은 어떻게 하여 그렇게 성숙한 역사청산을 이룰 수가 있었을까?
나의 오랜 이 의문은 불과 몇 년 전에 풀렸다. 통일 이후로 동독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기 시작한지 10년이 넘어가며 독일경제가 한창 바닥을 헤매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 당시 독일은 역사상 최고의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었고, 기업이고 정부고 적자재정을 면치 못해서 허덕이는 상태였다.
이때 미국의 법정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왔다. 나치 치하에서 강제노동을 당한 생존자들에 대한 배상이 미흡했다며 독일은 오십 억 달러를 배상하라는 것이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유태인이 주를 이루는 생존자들이 미국의 법원에 독일기업들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그 당시 가장 시급했던 탁아시설을 보충하는 데에 몇 천만 달러나 든다며 이 돈을 어디서 충당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고 있던 독일정부는 이 소식을 듣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 많은 돈이 지금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독일국민들은 국민들대로 “우리도 이제는 할 만큼 했다, 우리만큼 철저하게 보상한 나라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일본을 봐라, 피해보상도 끝이 있어야지 우리가 봉이냐, 언제까지 우리를 우려먹을 것이냐” 하며 우우거리기 시작하였다. 손해보상비에 대한 협상이 시간을 끌기 시작하자 미국에서는 독일제품의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때 마침 독일에선 오랜 기독민주당의 집권이 막을 내리고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진보적인 연립정부가 출범하였다. 새 정부는 그때까지 종래의 법적근거가 희박함을 핑계로 외국인노동자를 포함한 강제노동자의 보상이 미흡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참에 독일의 역사적 숙제를 벗자며 강제노동자 보상을 위한 재단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정부와 기업계에서 함께 보상비로 책정된 오십억 달러를 모으자고 제의했다.
정부의 간곡한 호소에도 기업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미진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불경기에 시달리고 있던 독일의 기업들은 각각 먼 산만 바라보며 딴청을 하였다. '우리는 패전 이후에 새로 설립된 회사'라는 둥, '우리는 보상을 이미 다 했다'는 둥 각자 발뺌하기에 바빴다.
이때 독일에서는 조용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강제노동의 생존자인 누구누구가 지금 러시아 어디어디에서 매월 얼마의 연금으로 얼마나 어렵게 연명하고 있는지, 그가 독일 무슨무슨 공장에서 강제노역을 치뤘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 어떤 지병을 앓고 있는지를 알리는 기사들이 연일 조용히 매스컴을 통해 퍼져나갔다. 그런 기사의 말미에는 항상 생존자들의 나이가 적혀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90세가 넘은 노인들이었다. 생존자들의 고령의 나이를 언급하는 것, 그것은 사죄행위도 시간을 놓치면 기회를 잃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그리고 시민단체들은 기업들의 배경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각 기업의 역사를 조사하여 전쟁 이후에 새로 설립된 회사라도 옛날 나치시대에 존재하던 기업의 장비나 노하우를 전수받은 기업이면 수혜자로 분류하여, 보상비 조달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종용하였다. 기업들이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며 시간을 끌자 시민단체들은 정확한 자료에 의거한 수혜자기업의 명단을 인터넷에 공개하겠다고 정식으로 협박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목표한 보상금액이 다 모아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기업의 명단이 공개되기 직전의 일이었다.
이로써 독일은 손해배상 집단소송을 받은지 3년만인 2001년에 생존자에 대한 보상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상을 시작하기 전에 독일은 미국의 재판소로부터 앞으로 같은 문제로 더 이상 소송이 제기되지 않는다는 보장을 먼저 다짐받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와 같은 강제노동자의 손해보상비 해결을 두고, 한편에선 독일이 대외적인 이미지 실추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막기 위하여 미국계 유태인들의 압력에 항복했다고 보는 관점도 있고, 또 한편에선 기업을 상대로 적극적인 설득 또는 협박작업을 벌인 진보성향의 독일정부와 시민단체의 승리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아마 둘 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덧붙여 '기업의 자발적인 참여의지도 있었다'라는 말을 감히 하고자 한다. 보상에 소극적인 기업주에 대한 압력이 기업 내부에서도 존재했다는 것을 남편의 회사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한 일화를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남편의 회사에서는 1년에 두 번 전체회의를 열어서 모든 사원들과 임원진이 한 자리에 모여서 회사의 재정상황도 듣고 건의도 하는 행사를 한다. 몇 년 전, 전체 회의 때 일어난 일이었다. 그 시기는 독일의 시민단체들이 기업측으로부터 어떻게든 보상비를 받아내려고 한참 애쓰고 있었을 무렵이었다. 국민경제가 안 좋으니 회사의 사정도 좋을 리는 없어서 적자와 직원감축에 대한 암울한 얘기가 오고간 뒤끝이었다.
젊은 평사원 하나가 일어서더니 현재 독일에서 벌이고 있는 손해보상 모금운동에 자기 회사도 일조를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회사의 최고책임자는 마치 이 질문을 기다렸었던 듯 대답하기를, 나치정권 때 회사의 사주가 유태인이어서 회사가 정부의 노동지원을 받기는커녕 많은 박해와 핍박을 받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전쟁이 끝난 후에 범국가적 연대책임의 차원에서 나치의 희생자들에게 항상 큰 금액으로 보상금을 대곤 하였으므로 이번만큼은 참여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대답했단다.
저녁을 먹으며 남편과 나는 대화를 계속하였다. 우리는 '그 회사가 아무리 나치의 박해를 받았다 할지라도 명색이 기계를 만드는 회사인데 자국의 침략전쟁에서 수익을 올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치의 피해자가 한 사람이라도 살아있는 한 어떤 이유에서도 연대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독일인인 있을까?'등 남편이 아까 회사에서 했었다면 좋았을 말을 찾았다. 순발력의 부족으로, 또는 용기가 없어서 말할 기회를 놓치고 나면 우리는 항상 지나간 일에 대해서 대화를 한다. 다음 번에 비슷한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이다.
전체회의에서 사장에게 “우리 회사도 손해배상금을 내느냐”고 용기 있는 질문을 한 평사원은 지성인이다. 그런 지성인들이 독일의 각 회사마다 하나쯤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지성인들이 나서서, 손해배상금을 낼까말까 저울질을 해보며 망설이는 기업임원진의 양심을 불편하게 함으로써 저울대의 칸 하나쯤은 기울게 하는 역할을 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우리도 언젠가 기회가 오면 저울대를 실낱만큼이라도 더 기울일 수 있도록 무게를 보태고자 미리미리 사고하고 연습하는 것이다.
나는 모든 사회에는 주류가 있고 지성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주류는 ‘주된 흐름’이란 말 그대로 전통을 이어가며 어제와 다름없이, 이웃과 다름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다수이다. 그리고 지성인은 주류의 방향을 잡아주는 소수이다. 지성인은 개인의 양식에 따라 판단하고 이를 용기있게 표현함으로써 주류에게 방향을 제시한다. 정치권은 주류의 시녀일 따름이고, 주류의 물길을 조정하는 것은 지성인들이다.
좀 더 은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주류는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고 지성인은 물가에 박혀서 물이 흐르는 방향에 영향을 끼치는 돌멩이라고 하겠다. 강물의 흐름이 너무 거세면 물가에 박혀있는 돌멩이가 물의 방향을 바꾸지 못할 수도 있고, 도리어 깨지거나 뽑혀지거나 물살에 쓸려 내려갈 수도 있다. 그러나 비슷한 돌멩이들이 계속해서 촘촘히 박혀있는 경우에는 뽑혀진 돌멩이들이 쌓여 돌산을 이룸으로써 언젠가는 물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유월항쟁이 좋은 예이다.)
근래에 인상깊었던 지성인의 활약으로 나는 '독일 국방군 전시회'(Wehrmachtausstellung)를 꼽는다. 2차대전시 대규모 인종학살이 꼭 히틀러의 엘리트부대에 의해서만 행해진 게 아니라 평범하게 징집된 국민들로 형성되었던 독일군대에 의해서도 일부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대형 사진전시회였다. 시종일관 '나는 몰랐었다'라고 주장해왔던 독일의 보통사람들은 이런 전시회의 내용에 크게 반발하였고, 국민의 신성한 의무였던 국방군의 명예를 욕보인다하여 보수적인 정당이 집권한 도시에서는 이 전시회가 금지되기도 하였다.
거기에 전시된 사진들 중에 몇 점이 가짜시비에 휘말리는 등 많은 잡음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이 전시회는 9년에 걸쳐 독일의 전역을 돌면서 예상을 초과하는 관람자수를 기록하며 독일인들에게 '평범한 다수가 저질렀던, 방관하고 동조했던 죄'의 결과가 어떤 것이었는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동물적 본능'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하였다.
꼭 학식이 높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야만 지성인이 되는 건 아니다. 독일에서 한동안 머리를 빡빡 밀고 낙하산부대의 장화를 신고 설치던, 신 나치주의 청년들의 폭력이 심심찮게 일어났을 적에, 많은 가게들의 출입문에는 엽서크기의 노란 카드가 붙어있었다. 그 카드에는 자기네 가게는 외국인을 위한 폭력의 피난처라고, 위험에 처한 외국인은 언제든지 자기 가게로 뛰어들어오라고 쓰여있었다. 생면부지의 외국인을 자기네들이 나서서 깡패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선언하는 도자기가게, 유리가게, 꽃집의 주인들은 바로 독일의 지성인들이다. (그 당시 사회의 분위기가 그래야만 할 정도로 무법천지였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많은 독일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신 나치들을 심리적으로 고립시키고 외국인들에게 동료의식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에 반해서 선거철에 감상적인 표를 건지기 위하여 외국인 비하발언을 하는 거대정당의 당수는, 다른 데서는 몰라도 사회의식 부문에선 둥둥 떠내려가는 주류에 속할 따름이다. 폭력적인 신 나치주의 추종자들은, 주류에 기생하고 또 주류에 의해 생성되는 거품 쯤 될 것이다. 주류의 성분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거품의 양과 형태와 질이 결정되는 점에서도 그렇다.
주류로 사는 인생과 지성인으로 사는 인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주류로 살면서 각기 한 부분에서 지성인의 역할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유난히 많은 분야에서, 어쩌면 인생 자체를 지성인으로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아무런 생각 없이 남이 하는 대로 휩쓸려 흘러가는 강의 역할밖에는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지성인의 목소리에 의해서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느 사회에나 지성인은 항상 존재하고 있지만, 방향을 제시하기는 커녕 주류의 파도 속에 파묻히는 일도 적지 않다. 예를 들면 나치시대의 주류는 나이 어린 대학생 오누이(백장미의 소피 숄, 한스 숄)가 독재를 반대하는 삐라를 뿌렸다고 고발하고, 체포된 지 하루만에 단두대에서 처형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오늘날 독일의 주류는 지성인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고 외면은 할지언정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위협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남편 회사의 평사원이 그런 질문을 했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끊임없는 보상요구에 욱하는 억울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보통의 독일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평사원의 질문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그를 야유하거나 위협하지 않았다. 직책이나 나이를 들먹이며 무시하지도 않았다.
오늘의 독일의 주류는 옳고 그른 게 뭔지는 알아서 공식석상에서 해도 되는 말과 하면 안되는 말의 구별을 대체로 잘하고 있다. 주류의 바로 그런 점이 지성인으로 하여금 소신있는 발언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어쩌면 이들 주류의 대부분은 어딘가 한 분야에서 지성인의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류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서 아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주류를 나치시대의 주류와 비교해 보면, 독일인이 혼을 바꾼 게 아니라 사회의 분위기가 변한 것 뿐이다. 지성인의 목소리가 힘을 받는 구조로 변한 것이다. 지성인들에 의해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풍토가 형성되었기에, 소수의 지성인들이 압도적인 다수인 주류를 움직여 아직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역사청산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의 영향으로 그 사회구조가 파괴되는 일이 생기게 되면 야만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리라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런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독일의 지성인들은 교육을 통해서 지성인의 수를 늘림으로써 그 구조를 한치라도 더 튼튼하게 만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결국엔 모든 것이 주류에게 달려있다. 물살이 너무 거칠면 조약돌들은 넘어져서 휩쓸려 떠내려갈 뿐이다. 조약돌이 외치는 소리가 들릴 만큼 잔잔한 물살이라야 강물이 마구잡이로 흘러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많은 이들이 각성해서 물에서 나와서 조약돌로 튼튼히 서기를 자청할 때, 그래서 눈감고 흘러가는 물의 양은 줄고 굳건히 서 있는 조약돌의 수가 많아질 때에야 강의 물결이 잔잔해진다. 그리고는 인류가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 깨우친 '생존으로 가는 법칙'을 따라 흐르는 강이 된다.
(연재되는 긴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독일의 역사청산을 지켜보면서 우리 모두 일본의 역사청산을 떠올렸으리라 믿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일본의 자발적인 역사청산을 이루어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독일 역사청산의 경험에 비추어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글로서 독일의 역사청산에 대한 연재를 마칩니다. 제게 꼬리글 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연재가 끝난 후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곧 한국에 간답니다. 다음 글은 계획대로 올리고, 10월에 다시 뵙겠습니다. 더운 여름에 건강 조심하세요.)
▒ 게시일 : 2004-08-06 오전 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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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지성인과 연대하자 (역사청산 5)
내가 이렇게 남의 나라인 독일의 역사청산에 관심을 가질 때마다 목에 가시처럼 걸리는 것은 내 나라의 문제가 걸린, 일본의 역사청산이다. 몇 년 전 러시아의 노령의 강제노동 피해자가 독일로부터 보상을 받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순간 내 마음 한 편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독일과 같은시기에 전쟁이 끝났으니 우리나라의 전쟁피해자들의 나이도 그 정도로 아슬아슬할 텐데, 이들이 일본으로부터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제대로 된 사죄를 받고 명예를 회복할 날이 아직도 요원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역사청산을 미루고 있는 것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매우 걱정스러운 현상이다. 단단히 뭉쳐서 조용히 힘을 불려가는 유럽연합을 보아하니 어쩌면 앞으로의 세계정세는 서로 뭉치지 않고는 힘겨루기 시합과 돈벌기 시합에서 살아남는 게 불가능해질 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일본은 어쩌면 우리와 같은 배를 타야할지도 모르는 이웃인데, 우리는 일본과의 과거에 대한 청산이 없이는 진정한 화해를 이룰 수 없고, 진정한 화해 없이는 굳건한 협력체제를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일차적으로는 일본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들의 야만적 과거에 대해 사죄하고 보상해야 한다. 일본은 경제적, 정치적 씨름판이라는 국제사회 속에서 생존하고 힘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즉, 지극히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이유에서라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인접 피해국들에게 진정으로 사죄하고 보상해야만 한다.
일본 내에서의 솔직한 역사청산이 없는 한 고깃배를 타고 독도를 점령하겠다고 덤벼드는 우익의 돌발은 꾸준히 계속될 것이고, 이는 양국 간의 공정한 교류를 저해할 것이다. 뭉치지 않으면 다같이 당하고 다같이 망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차일피일 미루어둔 과거청산의 숙제가 언젠가는 우리 모두의 발목을 낚아채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본 스스로가 각성하지 않는 한, 피해자 측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나는 항상 무력감을 느꼈었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최근에 있었다.
일본에 사는 독자 한 분이 나에게 독일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역사청산에 관해서 질문했던 일이 있었다. 독일의 아프리카에 대한 죄상은 독일 내에서 별로 유행을 타는 테마가 아니어서 나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독일은 자신들이 주범이었던 나치의 범죄와는 달리, 이웃이자 라이벌이었던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서 식민지가 빈약했었기에 그들의 옛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에 대한 죄의식이 상대적으로 적다.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핍박은 거의 한 세기 전에, 인간의 약육강식이 지구상에 전반적으로 만연했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거니와, 식민지로 더 큰 재미를 보았던 프랑스나 영국도 딴청을 피우고 있는 마당에 누가 독일만 보고 나무라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이 테마가 거론되기가 무섭게 프랑스와 영국에게 먼저 물어보라는 말로 토론이 쉽게 마무리되곤 한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그때까지 독일의 아프리카에 대한 핍박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듣지 못하고 살았었다.
그러나 독자의 질문을 받고나서 알려고 들자 나는 독일군대에 의한 백만 명 아프리카인의 대학살과 인체실험등의 만행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내가 놀란 것은 그런 엄청난 역사적 사실에 독일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과, 그렇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테마이지만 이를 꾸준히 고발하고 있는 지성인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독일의 역사학자로서 그저 묵묵히 그 사실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발표를 함으로써 국민이 알고자 하는 시점에 자료를 제공한다.
작년에 독일의 외무부 장관이 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때 나미비아의 대통령이 독일의 아프리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함으로써 독일의 과거가 잠시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도대체 그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던 독일국민들이 금방 납득할 수 있는 학술적인 자료가 이미 소수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준비가 되어 있었던 일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학자들은 독일의 공식적인 자료집에 고의로 누락된 사건까지도 친절하게 '누락되었다'는 정보까지 첨부해서, 준비해 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지성인들이 지금 침묵하고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이들의 목소리가, 보상이라면 이제는 지긋지긋하다고 노이로제 증세마저 보이고 있는 독일의 주류들의 파도소리에 묻혀 전혀 들리지 않고 있는 것뿐이다.
이러한 독일의 지성인들이 힘을 받는 순간은, 바로 아프리카의 지성인들이 자국의 정치권을 움직여 독일정부에 대한 정당한 보상요구에 박차를 가할 때일 것이다. 부정부패한 아프리카의 치정자가 독일정부와 밀실에서 협상하여, 희생자 개인에 대한 보상금 대신 국가에 대한 원조금을 받기로 함으로써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게 아니라, 피해자의 자손들에게 직접 돌아가는 정당하고 합법적인 보상금을 요구할 때에, 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독일의 지성인들이 손을 뻗쳐 맞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독일의 지성인들에게는 주류를 설득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길 것이다. 지성인들은 독일의 주류가 갖고 있는 불안감 - 독일이 과거를 볼모로 아프리카 독재자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일에 이용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 을 불식시키고, 독일이 피해를 입힌 당사자들의 자손들에게 죄 갚음하는 일은 정당하고도 당연한 일이라는 사고를 주류의 의식 속에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소수의 지성인들은 그런 날을 기다리며 언젠가는 필히 있어야할 사죄와 보상에 대한 준비작업을 묵묵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지성인들은 현재 아프리카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종족 간의 대학살은 근세기에 서방국들이 아프리카의 역사를 뒤흔들어놓은 여파라고 주장하며, 서방 선진국들이 앞장서서 아프리카의 문제에 책임을 질 것을 촉구하고 있다.
나는 일본의 경우도 독일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본에게서 진정한 사과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일본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일본의 지성인들에게서 나온다. 일본에는 주류의 파도에 파묻히면서도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어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고 있는 일본인 지성인들이 적지 않다.
우리는 일본주류의 파도 위에 기생하는 거품이 부글거리는 소리만 듣고 짜증을 낼 일이 아니라, 그 틈새에서 외로이 투쟁하는 일본지성인들의 목소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들 일본지성인과 손을 잡고 그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릴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일 양국의 진정한 화해와 화합을 위해서, 그리고 양국의 번영을 위해서, 또 그럼으로써 오게 될 아시아의 번영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일본의 지성인들이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지 않도록 우리가 지원해주어야 한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일본의 지성인을 도와주는 것일까?
첫째, 보상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다. 우선 우리부터라도 위안부할머니들의 '나눔의 집'에 꾸준한 관심을 보이고, 매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도 썰렁하게 방치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사죄와 보상에 대한 한국민들의 의지가 꾸준히 끓는 용광로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제풀에 금방 식어버리는 냄비 대하듯 기다리며 시간만 끄는 전술이, 다른 데서는 몰라도 이 사안에서만은 먹혀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일본의 지성인들이 자국의 여론을 움직이려할 때 뭔가 보여줄 것이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국민의 개개인의 자발적인 참여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불과 3년 전에, 종전 55년만에 이루어진 독일의 강제노동자 손해배상을 보라.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독일의 지성인들의 목소리는 영원히 주류의 파도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둘째, 역사 자료의 꼼꼼한 수집과 정리, 보존이다. 독일에서 강제노동자 보상을 준비할 때 무척 애먹었던 부분이 바로 실무적인 자료의 부재였다. 세계각국에 흩어져있는 보상 대상자들을 조사하여 확보하는 일이 기술적으로 힘들어서 시간을 많이 끌었었다. 한국 쪽에서는 이런 문제들을 미리 준비하여 해결해 둠으로써, 너희만 손을 내밀면 우리는 당장에 일을 추진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제스처를 보인다면, 일본의 지성인들이 여론을 움직이는 데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넘어야 할 커다란 산 하나를 앞에 두고 엄두가 나지 않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망설이고 있을 때, 누가 확실한 지도를 하나 갖다준다면 의외로 경쾌하게 길을 떠날 마음이 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세째, 합법적인 방법의 투쟁을 늘였으면 좋겠다. 또한 유태인이 독일에 대해서 한 것처럼, 미국으로 이주한 한국인들이 미국의 법원에 일본정부나 군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싶다. 뜨거운 감성만이 아닌 차가운 이성을 동원하여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접근한다면 일본의 지성인들과의 연대가 좀 더 쉬우리라 믿어진다. 일본의 언론은 일본을 상대로 한 미국에서의 집단소송에 대해서 대단히 인색하다고 들었다. 우리의 언론들은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비중을 두어 보도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한일 양국의 국민들이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될 것이다. 현지에 사는 교포들이 그런 문제에 자기 일처럼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가 신속하게 제보를 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독도표기의 경우에도 국민 개개인의 적극성이 요구된다. 타게시마라는 표기법이 세계적으로 보편화되는 현상을 우리가 막아야 한다. 독도를 타게시마라고 표기하는 외국의 기관들을 찾아서 꾸준히 편지하고 항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의 단체와 기관들은 솔직히 독도가 정말로 어느 나라 땅인지 별 관심이 없고, 단지 자신들이 옳은 표기법을 쓴다는 명분을 가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논리적인 방법으로 학술적인 증거를 제시하며 그들에게 명분을 제공한다면 오히려 고마워할 것이다. 전문가들이 나서서 자료를 제공하며 정부를 재촉하고, 정부를 감시하고 독려해야 한다. 정부가 제 할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면 국민이라도 나서서 해야 한다.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은 전문지식을 제공하고 어학실력이 있는 사람들은 어학실력을 제공하여, 외국기관에 부지런히 수정을 건의하는 수밖에 없다. 세계가 돌아가는 것은 복잡한 일이나, 이 세상에는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의외로 많다.
우리나라가 국민의 힘으로 독재를 종식한 점을 보아도 그렇고, 또 지금 현재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국내의 진상규명의 진행상황을 보건데, 다른 건 몰라도 이 역사청산 면에서는 한국이 일본보다, 또 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 한발 앞서있다고 본다. 우리가 이미 시작한 역사청산의 바퀴는 관성으로 계속 굴러가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차근차근 역사의 관뚜껑을 열어나갈 것이다. 이편 저편 가르지 않고, 공정하고 진지하게 인권에 관한 모든 진실을 파헤치게 될 것이고, 우리에게 부끄러운 진실도 백일하에 밝혀내서 재발을 방지할 것이고, 독일보다 세 배나 길게 일제의 지배를 받았기에 아마도 독일보다 아홉배나 어려울 친일에 관한 청산도 우리는 언젠가는 이룩할 것이 틀림없다.
이때 우리는 역사청산이 주는 이익 즉, 진실을 밝힌 후에 오는 진정한 화합과 도약의 이익이 무엇인가를 보여줌으로써 이웃나라들에게 모범이 될 것이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진정한 청산이 없으면 사회의 정의의식을 제대로 세울 수 없고, 정의에 대한 의식이 제대로 서지 않은 사회에서는 건전한 경쟁이 불가능하게 되므로 경제적으로 지속해서 발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본을 비롯한 많은 이웃나라들이 하루속히 깨달았으면 좋겠다. 역사청산이라는 것은, 문명국으로 가는 길에 피할 수 없는 관문이라는 사실을 그들도 하루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어느나라를 막론하고 치정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존재는 이웃나라나 경쟁국가의 대통령이 아니라, 자신의 정책을 비판하는 자국의 지성인들이다. 그들이 바로 자신이 가진 권력의 근원인 주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한국에 직접선거도 없이 독재자의 일방통행이었던 시절에도, 독재자들이 가장 혈안이 되어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 민심을 동요시키는 지성인들이었다. 미국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은 미국의 지성인들이다. 이라크에서의 포로학대 사건을 폭로한 소수의 미군병사들이 바로 미국의 지성인들이고, 그들 서너 명이 저버리지 않은 개인의 양심은 마치 폭탄과 같은 위력으로 미국의 주류를 흔들어대었다. 이들 서너 개의 조약돌이 어쩌면 앞으로 미국이라는 대하의 흐름을 바꿀지도 모른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일본의 지성인들 -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개인의 양심을 지키는 보통사람들 - 을 믿는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가 힘을 받을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들과 연대하여 그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일은 우리나라의 지성인들 -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개인의 양심을 지키는 보통사람들 - 의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하다.
에필로그
위의 글을 독일에서 써놓은 후 나는 한국으로 왔다. 나와 나의 가족은 매주 수요일 12시에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 한 번 참여하였다.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통해서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연로하신 생존 위안부 할머니들의 곁에는 젊은이들이 나란히 도열해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지성인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리며, 나도 그리고 나의 자식들도 언젠가 힘을 보탤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원하였다.
(이것으로 5회에 걸친 역사청산 시리즈를 마칩니다. 그간 애독해주시고 함께 생각해주신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독일로 돌아가서 다시 인사드릴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그럼 건강하시고, 가내 두루 평안하시고, 가을에 다시 뵈어요.)
▒ 게시일 : 2004-08-20 오전 11:3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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