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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북아프리카 전투 2.

김유식 2005.07.21 18:4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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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롬멜 생포작전   롬멜의 부하들은 그를 불사신으로 믿고 있었다.   『우리 두목에게 맞는 탄환은 없단 말이야.』   그들은 한결같이 경탄하면서 이상하다는듯이 이렇게 말했다.사실 그는 언제나 위험지를 육감으로 알아내어 적의 포탄이 날아와도 바로 그 탄착점에 장갑차를 몰고 와 탄도를 바꾸는 일을 잘했다. 가령 사막 속에서 적의 기관총탄으로 꼼짝을 못하고 있는 병사가 있다고 하자, 바위 그늘에서 머리를 내밀기만 하면 머리가 박살이 나는 그런 상황 속에― 이렇게 공격이 도저히 불가능할 때, 롬멜은 불쑥 나타난다. 그리고 참호 속에 유유히 서서 손을 이마로 가져가 전방을 바라본 후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뭘 하고 있는가?저쪽에서 쏘아댄다고 해서 이런데 틀어박혀 있을 것까진 없는 거야.』   그가 있을동안에는 이래서 언제나 마음이 든든했다. 그러나 그가 떠나기만 하면 말썽이 났고 손실을 입게 되었다.   그의 불사조설을 거창하게 늘어놓는 사람은 모두가 전쟁과 죽음을 무수히 겪은 고참병들이었다. 분명 그들의 체험담 그대로, 롬멜을 맞추는 탄환은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다.   물론 이 전설은 전선을 넘어갔다. 포로들이 퍼뜨린 것이다. 얼마 후 롬멜은 영국군인들에게도 불사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 장교들은 이런 롬멜의 전설에 대해 심리적으로 불안을 느끼면서 후방에 보고를 했다.   「롬멜이라는 이름과 그 전설만 해도 영국군에게는 심리적 위험 부담을 줄런지 모른다.」   1941년 6월 18일, 패잔병을 싣고 달아나는 트럭 위에는 앞서 나온 노비와 더스티 즉, 클라크 중위와 프렛 밀러 소위도 있었다. 15일,용약 마크Ⅱ를 몰고 출진했는데 이젠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그들은 롬멜의 대 포위진을 간신히 살아서 탈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견딜 수 없이 괴로운 후퇴였다.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이 쌍놈의 캬베쓰만 먹는 놈들은 정말 무적이란 말인가? 우리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는 건가?〕   실망한 처칠은 총사령관 웨벨 장군을 이 사막으로부터 인도 방면으로 옮겨버렸다. 그 후임에는 불굴의 활동력을 가진 서어클로드 오킨렉크를 보냈다. 하나 그는 과연 롬멜과 맞씨름할 수 있는 인물인지?   〔괘씸한 롬멜 놈, 죽여버려야지〕 노비가 눈꼬리를 쳐들고 부르르 떨었다. 두 친구는 한동안 머리를 모아 롬멜을 없애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공상도 잠시동안, 독일군 급강하 폭격기 편대가 습격해 왔다.   대담한 생각이라는 것은 대체로 몇 군데 비슷비슷한 상황아래서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패주중인 제7기갑사단 외부에서도 없지않았다.   『죽이거나 사로잡거나!…』   이런 말이 카이로에서도 오갔다. 그리고 런던에서도…….   하나 장본인인 롬멜은 그런 사실과는 동떨어진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아프리카 작전에 대해서였다. 그는 독일이 소련과 개전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차와 비행기, 병력등의 충분한 공급을 못받게 될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불사조는 극히 평범한 인간다운 고민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아프리카 전선에 대해서 히틀러는 웅대한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참모총장 하르더도 북아프리카에서의 승리가 영국을 굴복시킬 수 없으며 이 전선은 결국 시간을 벌기 위한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견이었다.   흔히 말하기를 롬멜은 뛰어난 전술가이며 천재적인 지휘관이라고는 하나 시야가 넓은 전략가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전략계획은 결코 공상적인 것이 아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롬멜은 어떤 대담한 구상을 히틀러와 최고 사령부 앞으로 제안했다. 즉, 토부룩을 점령하고 수에즈 운하를 진격한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 목표는 아니다. 페르시아만의 바스라로 진출해서 시리아를 점령하여 보급근거지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코카사스 산맥을 넘어 바쿠 유전지대를 공략하겠다는 히틀러의 계획은 어떤가?   히틀러는 실패했다. 그러나 롬멜의 계획은 훨씬 현실적인 기반 위에 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계획성 있는 전략을 적장인 오킨렉크가 두려워하고 있었던 사실도 그의 보고서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오킨렉크는 독일 지도부가 롬멜의 건의를 받아 들이지 않기를 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41년 여름을 맞은 롬멜이 당면하고 있던 문제는 큰 전략문제뿐만 아니었다. 전술상의 염려가 더 심각했던 것이다. 영국군이 재차 공세로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이 아프리카에서 결전적 도전을 해오리라는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풍부한 보급으로 날로 증강되어 가고 있었다. 〔토부룩를 뺏아야지!〕   히틀러와 최고 사령부가 어떻게 생각하건, 그는 이 문제만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 무렵,롬멜로서는 뜻밖의 지원이 나타났다. 정보부장 카나리스 제독이었다. 그는 히틀러에 대한 저항과 의무 사이를 오가면서도 독일 전쟁 수행에 큰 공훈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는 영국의 재공세를 사전에 알고 롬멜의 토부룩 공략계획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주어 끝내 최고사령부의 승인을 얻도록 해주었다. 롬멜은 즉시 공격준비에 들어갔다. 가능하면 10월말에 공격을 개시할 셈이었다.   한편 영국군은 착착 재공세 준비를 하면서 롬멜 제거 공작을 추진시켰다. 그를 죽이든가, 포로로 하든가 해서 독일군의 두뇌를 무력하게 만들 셈이었던 것이다.   영국군은 당시 시바 오아시스에 본부를 두고 파괴 공작과 첩보 공작을 맡고 있는 사막 레인저(Long­Range Desert Group)부대가 그 집행 책임 부대로 지정되었다.   이들은 몇백킬로미터나 떨어진 적지에도 예사로 들어가 파괴활동을 전개하기도 하는 패들이었다.   〔이 패들을 시켜 롬멜을…어쩌먼 그 사령부에서 사살하거나 잘하면 생 포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최소한 그의 생활 습관이라도 알아내야지.〕   이윽고 11월 17일,며칠 전부터 베다 리트리아 부근은 날씨가 사납더니 호우를 동반하는 폭풍우가 불어닥쳤다.   이곳은 롬멜 전차병단 슈로이제너 보좌관의 숙소였다. 그러나 그는 없었다. 그는 이질로, 부관 오토는 폐렴으로 아폴로니아 야전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보급부가 들어 있는 옛날 지사관사는 장교들을 비롯해서,전령,운전사 기타 요원 20여명이 무료하게 앉아서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밤중이 되자, 이들은 서로 인사를 주고 받으며 각각 자기 침실의 야전 침대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위병은 없었다.   야전부대 헌병 한 사람이 현관에 앉아 있었다. 가진 무기라곤 권총밖에 없었다. 키레나이카의 베다 리트리아 마을은 잠들어가고 있는 평화스런 마을 이었다.   그러나 이날밤 뒷쪽 언덕 위 풀덤풀 속에는 유령 같은 자들이 숨어 있었다. 얼굴을 시커멓게 칠하고 영국군 전투복을 입고 살금살금 기어 가는 패들이 가끔 비치는 번갯불에 의해 비치었다.   이윽고 베다 리트리아에서 마지막 등불이 꺼졌다. 열두시 10분전이었다.   베다 리트리아의 사이프러스 숲 속에 기어든 유령들은 아주 멀리서 온 자들이었다. 두 척의 영국 잠수함 「토베이」 와 「타리스만」 이 11월 15일 밤에 키레나이카 해안에 이들을 내려놓았다. 바로 이들이 영국군 최대의 적 롬멜을 공격해서 12시간 안에 죽이든가 사로잡든가 해야할 임무를 가진 패들 이었다.   이것은 드라마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처칠의 회상록 제3권을 보자.   「중대한 시기에 적군의 뇌와 신경중추를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레이콕크 대령을 지휘자로 삼는 스코틀란드인 50명으로 편성된 특수부대를 적전선 후방 300킬로미터 지점에 상륙시켰다. 거치른 파도를 이겨내고 상륙할 수 있었던 이들을 두 반으로 나누어 한 반은 전화통신을 차단하고 한 반은 키이즈 해군대장의 아들 키이즈 중령의 지휘로 롬멜의 본거지를 기습할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서어 로저 키이즈 대장의 집무실에서 세워졌다. 그는 영국군의 모든 특수부대, 특수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바로 그가 1918년 봄에 영국 해군 돌격대를 지휘해서 오스탄드 독일 잠수함 기지를 바다로부터 기습해 낸 인물이었다. 시멘트 배로 항구 어구를 봉쇄하여 독일 해군의 작전수행에 대타격을 준 그 사람이었다. 1941년 그는 더욱 효과적인 작전을 계획했던 것이다.   롬멜을 해치운다면 승리는 확실하다는 것이 처칠의 의견이었다. 처칠과 키이즈는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서어 로저는 무엇보다 소중한 그의 아들을 참여시켰다.   런던에서 몇 주간에 걸친 맹훈련을 받은 백 명의 장병 중에서 테스트에 합격한 사람은 53명이었다. 당시 소령이었던 죠프리 키이즈는 굳건한 청년들을 골라 냈다. 부관은 캠벨 대위로 독일어와 아랍어에 능통했다.   11월 15일,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야밤에 이들은 키레나이카 해안에 상륙했다. 사나운 파도가 토베이 호 갑판 위로 넘실거리고 함정은 성냥갑 까불어대듯 흔들렸다. 이런 위험을 이기고 키이즈 중령은 대원을 이끌고 상륙한 것이다.   잠수함 타리스만 호에 탔던 레이콕크 반은 더 어려운 고역을 치루었다. 두 사람이 익사하고 대원 대부분은 물결을 이기지 못해 되돌아와 버렸다. 간난신고 끝에 바닷가에 도달한 사람은 7명뿐이었다. 대원이 반으로 줄어들자 키이즈는 롬멜에 대한 작전만을 전념하기로 했다.   뭍에서는 이상한 아랍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변장한 사막 레인저 부대의 간부인 죠 헤일즈덴 중령이었다. 그는 아랍인 안내자 세 사람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그는 소상한 지리 안내를 끝내고 사라졌다.   1941년 11월 17일 밤,키이즈 부대는 베다 리트리아 마을을 굽어볼 수 있는 모래 언덕 위에 있었다. 바로 롬멜의 사령부가 있는 마을, 사이프라스 숲이었다. 그 한복판에 위치한 큰 석조건물에 롬멜이 거처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여기까지 판단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터무니 없는 현실 앞에 당황했다. 기실 사령부는 외견상 여기 있는 것이지, 그것은 빈 명찰만의 집이었다. 롬멜의 사령부는 벌써 두달 전에 이 키레나이카를 떠나 토부룩 서방 60킬로 지점인 칸트니엘라아인 엘 가잘라로, 다시 토부룩과 발디아 중간에 있는 칸트니엘라 감부트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는 이미 없었다. 그대신 이 자리에는 그대로 보급부대본부가 들어온 것이다.   이 사실을 영국 정보부는 새카맣게 모르고 있었다. 결사적으로 이곳까지 찾아온 키이즈 중령이 가련하게 돼버렸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다.그뿐 아니라 안성맞춤으로 간혹 번뜩이는 번갯불과 뇌성이 이들이 기도하고 있는 대모험의 반주나 하듯이 도와주었다.   자정 1분전, 키이즈 중령은 계획대로 부하를 배치했다. 그리고 헤리 중사를 비롯한 7명의 사병은 정문으로, 나머지는 뒷문으로 몸을 날렸다.   현관문은 열려 있고 위병이 서 있었다. 헤리 중사가 단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위병이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칼이 빗나가 결투가 벌어졌다.   독일 병사는 비명을 질렸으나 그 소리는 빗소리와 함께 뇌성 속으로 묻혀버린다. 발전실이 폭파되었다. 그 소리도 다행히 멀리까지 들리지 않았다.   등불이 꺼진다.   어둠 속의 결투에서 키이즈 중령은 권총을 사용할 수 없어 곤란했다. 독일군의 저항은 대단했던 것이다. 하나 영국군은 방방을 습격했다. 이때 키이즈 중령은 어느 한 방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활동광경은 훗날 여러가지로 표현되었으나 그 정확한 기록이 어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공격이 끝나고 사구로 돌아온 헤리는 키이즈가 치명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렸고 캠벨도 다리를 다쳤기 때문에 코크 소위에게 명령권을 주어 후퇴를 지휘시켰다고 했다. 대원들의 그 후의 운명에 대해서는 소상한 기록이 없고 다만 독일군의 최고 사령부의 대령 4명을 확실히 사살했다고 했으나 롬멜은 끝내 놓치고 말았다.   왜? 이미 옮기고 없었으니까―.   그리고 또 한가지 밝혀둘 것은 독일군 측의 사건 관찰은 이와는 또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던건 기습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보급본부 근처는 큰 소란이 벌어졌다.   순찰대가 급거 출동,소동이 난 건물 주변을 둘러싸고 포위망을 조여 들었다.   맨먼저 발견한 것이 독일군 예거 중위의 시체였다. 다시 한 번 기관단총이 옥내에서 울려오고 누군가의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왔다. 수색은 계속되어 네 번째의 독일군 시체가 발견되었다. 보급본부로 있는 오토바이 저격병 복스 하사였다. 그는 바이에른주 마링고 출신으로 20세였다. 밤늦게 돌아오는 오토바이 전령을 맞아 발비아 가도 옆에 있는 천막 숙사를 알려주기 위해 깨어있던 그는, 자기의 소형천막안에 있다가 이 소란을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달려 나오다가 도망치는 헤리 중사 일행과 정면 충돌을 하여 하반신에 관단총을 맞았던 것이다.   그의 전사통지서에는, 「긴급한 전우의 위기를 구출하기 위해 가는 도중 적의 포화로 쓰러졌다」 고 되어 있는데 사실 그러했다.   일은 끝났다.거액의 자금을 들여 준비된 모험은 실패하고 말았다. 약간의 우연으로 또 몇 사람의 개입 때문에 말이다.   만일 영국군이 공격 몇 시간 전에 보급본부를 파괴했던가 전차병단의 명령 계통을 몇 시간이라도 교란할 수 있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끝으로 인간적인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해 본다면 자연 외과 의사 베르너 융게 박사가 전해 준 이야기이다. 캠벨 대위는 기관단총을 가까이서 맞아 경골 중앙부가 상당히 상해 있었다. 다른 상처는 없었다. 그러나 다리는 절단해야 했다. 본래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는 것이었고 또 곪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본인의 희망으로 융게 박사는 절단수술을 하지 않고 치료해 보려고 애를 썼다. 영어에 능통한 융게는 캠벨 심문을 명령받았다. 캠벨은 독일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었다. 융게는 아무런 사실도 캐낼 수가 없었다.   융게 박사는 10여일동안 캠벨을 야전병원에 보호해서 기브스를 해두었는데 갑자기 헤르나를 포기하게 되어 캠벨은 수송기편으로 이탈리아군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융게는 캠벨이 신고 있었던 군화를 간직해서 이로써 목숨을 구출한 적이 있었다. 이 밖의 대원들은 대부분 아랍인 마을에 숨어 들었다.하지만 다음날 아침부터 독일 이탈리아군의 합동으로 대대적인 수색작업이 벌어졌다. 인근 마을은 며칠동안 계속 뒤져졌고 아랍인 사람들의 움막집도 철저히 조사되었다.   아랍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눈만 끔벅거렸다. 무관심과 방관의 항거였다.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영국군의 군복 조각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 이탈리아 헌병이 자원해서 나타났다. 그는 오랫동안 이 부근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원주민 생활에 대해서는 손바닥 들여보듯이 알고 있는 터였다   『가르쳐 드리지요.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는 자랑스럽게 뽐내면서 마을에서 아랍인 소녀를 데리고 와 손짓을 섞어가며 한참 연설을 했다. 그 내용은 간단했다.   『영국군인을 한 사람만 내놓으면 너희들에게 밀가루 80파운드,설탕20파 운드를 준다.』   밀가루와 설탕!   아랍인 생활로서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욕심에 낚여오는 것이었다. 소녀는 마을로 돌아가고…이윽고 최초의 영국군이 연행되어 나왔다. 물론 독일 헌병이 철저히 수색한 바로 그 집 안에서―   그는 아랍인의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코만도 팀은 차례로 잡혔다. 겨우 약빠른 헤리 중사만이 두 명의 부하와 함께 탈출에 성공하여 영국군 전선까지 찾아갔다. 포로가 된 영국군은 히틀러의 훈령에 따라 총살형에 처해야 했으나 롬멜은 그들을 전시 포로 취급하기로 했다.   전사한 영국군 지휘관은 4명의 독일인 사망자와 함께 군대 예절에 따라 베다 리트리아 묘지에 묻혔다.   (5) 누설된 공격계획   배신자없는 전쟁이 있었을까?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전쟁이란수학문제 같은 것이어서 가장 뛰어난 전략가,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진 가장 용감한 병사가 이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배신이란,군신 마르스에 붙어다니는 망령 같은 것이어서 언제나 그가 하는 일에 참견하고 방해한다. 어느 시대에도 그러했다.   그러나 배신의 역사에서 그나마 위안거리를 얻는다면 배신을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결실을 얻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이다.   터어키 주재 영국 대사관의 알메니아인 하인 키케로는 기실 독일의 우수한 스파이였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연합군의 작전계획을 팔았으나 독일 수뇌부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히틀러는 그것을 영국 비밀정보부의 교묘한 트릭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정보가 사실인것을 알았으나 이미 때는 늦었던 것이다. 배신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1940년 독일군의 연락 비행기가 프랑스 침입 계획서를 실은 채로 고장이 나서 벨기에 땅에 불시착한 일이 있었다. 타고 있던 장교들은 미처 중요서류를 태워버릴 사이도 없이 붙들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 서류를 본 연합군 총사령부는 히틀러가 자기들을 속이려는 술책이라고 코웃음을 치고 넘겨버렸다. 덕분에 히틀러는 서부 전선에서 초기의 대승을 거두었다.   사막 전쟁에서도 배신자가 있었다.   특히 한 가지 사건이 아직까지 토부룩 요새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사 그늘에서 풀려지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교묘하게 요새화되었던 이 도시는 1941년 가을까지도 포위한 롬멜의 맹공을 견디고 있었다. 처칠은 몸소 엄명을 내렸던 것이다.   「최후의 한명까지 사수하라!」   〈토부룩의 쥐〉들은 악마처럼 싸워 이 명령을 지켜냈다.   롬멜은 알렉산드리아, 카이로, 그리고 수에즈 운하로 진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일강가까지 진출하려면 토부룩을 빼앗아야 했다. 그러나 용이주도 하게 거듭한 공세도 허사였다.   1941년 11월, 드디어 대규모 공격준비가 갖추어졌다. 롬멜은 장갑 지휘차를 타고 전선을 시찰했다. 밤에도 장갑차 속에서 자면서 자신이 짠 작전계획을 면밀히 검토했다.   예하부대의 행동개시 시간을 적은 그의 메모는 이번에 시작할 공격의 지보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제15기갑사단에서는 백전불굴의 사단장 노이만 질코우 장군이 부별부대를 편성하고 있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공격명령뿐, 언제 공격을 시작할 것인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어떤 서류에도 공격일자만은 적어 놓지 않았다. 롬멜 자신이 적은 메모에도 공격일자는 없었다.   공격일자가 11월 23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롬멜 자신과 몇몇 참모들뿐이었다.   영국군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의 공격에 대해 암호까지 정해 놓았다. 보통 규모의 공격은 「큰비」, 대공세는 「홍수」 였다. 이렇게 암호를 정했을 때 정말 큰비가 오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11월 17일, 느닷없이 비가 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공격 아닌 정말 큰비가―.   『비다!』   『비가 온다!』   병사들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할파야 고개와 제벨 지구에는 60년만에 처음 오는 비였다. 하나 병사들의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이 일어났다. 사막 평지에 고였던 물이 분류처럼 흘러 내려온 것이다. 여러 갈래의 범류가 되어 제벨 사면에 쇄도해 왔다. 몇분 후에는 천막이 밀려가고 세워두었던 트럭들도 밀려 내려가 바위에 부딛쳐 부수어 지기도 했다. 물 속에 빠진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떠내려갔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긴하나 정말 사막 한복판에서 익사한 것이다. 묻혀버린 자들도 많았다. 무서운 밤이었다. 자기 손이 안보일 정도로 어두웠다.   할파야 고개도 감부트와 다름 없었다.번개가 이런 참경을 지옥화처럼 비추어 줄 때마다 「마탄의 사수같다.」고 통신병인 융그가 전우 테겐에게 말했다. 그러나 오페라 감상평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천막, 트럭, 탄약, 대포가 이곳에서도 미친듯이 물에 떠내려 갔다.   융그와 테겐은 홍수를 피해 바위산으로 기어올라갔다.      무슨 소릴까, 저 포성은? 아아, 알았다. 지뢰원의 T형 지뢰가 터지는 소리, 진흙더미의 압력을 받은 독일군이 매설한 지뢰가 터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와 섬광이 뇌우와 번개에 뒤섞여 번쩍거렸다.   〔하나 천만다행으로, 영국군의 공격은 아니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융그와 테겐은 언덕에 있는 대대본부로 걸어 나갔다. 이들을 본 대대본부에서는 깜짝 놀랐다.   『아니,벌써 영국군이 제1중대에 쳐들어 왔단 말인가?』   『네,영국군요?』   처량한 몰골로 변한 두 병사가 놀라며 반문했다.   『큰비였습니다. 영국군은 없습니다.』   장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당황했다. 미리 정해 두었던 암호 「큰비」 라는 말이 병사의 입에서 새어 나온 것이었다. 「큰비」라니 자연의 위험에 대한 경보인가? 아니면 영국군의 공격에 대한 진짜 경보란 말인가.   지금까지의 전사는 1941년 11월 18일―즉, 롬멜 자신의 공격 예정일을 5일 앞지른 영국군의 공격은 드물게 보는 우연에 의해 군신 마르스는 오킨렉크 원수에게 미소를 던져 그에게 승리를 안겨준 것으로 되어 있다.   하나 그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우연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 우연의 이름은 「배신」이란 것이었다.   물론 영국군 정보부는 독일군의 공격계획을 알고 있었고 좀더 상세한 것을 알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영국 스파이는 특히 로마에 많이 있었다. 영국 비밀정보부는 로마에서 얼마간의 중요한 정보원을 개발했다. 이탈리아 해군의 마우겔리 제독이 영국과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롬멜에게 가는 보급물자 4분의 3이 배에 실린 채로 가라앉은 것도 당연한 노릇이었다. 베를린의 독일군 수뇌부에서도 로마 경유로 중요한 정보가 미국과 영국의 스파이들에게 흘러 갔다. 바로 이런 측면에 규명하기 어려운 전사의 한마디가 숨어 있는 것이다.   군사정보라는 것은 히틀러에 대한 정치적 저항과 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독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대한 이 정치적 투쟁은 대개의 경우,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의 교묘한 조작에 의해 군사적 배신과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에 나가 있는 영국 정보기관이 개발에 성공했던 정보원의 하나는 아프리카에 있어서의 롬멜의 성공에 대한 이탈리아 고급장교들의 불만과 질투였다. 롬멜의 승리는 이탈리아군의 패배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영국의 스파이망을 이탈리아 최고사령부에 침투 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오킨렉크는 대단히 기뻐했다. 그러면서도 테이블 위에 놓인 쪽지를 의심스러운듯이 바라다 보았다. 선임 정보장교의 얼굴도 기쁨에 넘치고 있었다.   『틀림없이 롬멜의 글씨란 말이지?』   오킨렉크는 말했다.   『네,틀림없이 롬멜의 친필입니다.』   선임 정보장교의 대답이었다.   『하나 그럴 리가 있겠는가, 설마―?』   『하지만 사실입니다.』   『허,이런 대통운이 어디 있단 말인가.』   오킨렉크의 말은 흥분으로 떨렸다.   『이제 롬멜은 끝장 난 거나 마찬가지다. 그의 병단도 함께.』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흥분하게 만들었을까? 두 사람 앞에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롬멜 자신이 쓴 토부룩 공격계획의 메모 사진이었다. 모든 것이 적혀 있었다. 어디를 공격할 것인가, 어느 부대가 공격할 것인가, 예비부대는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 등, 모든 것이 적혀 있었다. 단지 한 가지 빠진것은 공격일자였다. 그 날짜만은 X일로 적혀 있었다. 하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적의 공격계획을 입수한 것이다. 모든 장군들이 바라고 있었던 것을…   한참동안 이것이 진짜일까,가짜일까하는 토론이 계속되었다. 하나 약아빠진 「사막의 여우」, 롬멜이고 보면 이만한 장난도 할 법했다. 그러나 오킨렉크의 참모부는 이 공격계획을 믿기로 했다. 드디어 여우가 덫에 걸린 것이다. 여우 자신이 만든 덫에―.   그러나 오킨렉크 자신은 아직 몇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첫째는 공격일자였다. 언제 공격을 받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은 이 엄청난 행운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계획에 의하면 롬멜은 남쪽과 동쪽으로 토부룩을 공격할 것이다. 내일 공격할지도 모르고 모레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재빨리 반격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반격해야 좋을 것인가?   포위된 영국군을 재편성해서 공격해 오는 롬멜을 멋있게 때려부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오킨렉크는 결단을 내렸다.   『그러기에는 너무 아깝다!』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는 작전으로는 이론적으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방법이 있다. 지금 준비중인 영국군의 대공격 계획을 롬멜의 계획에 맞추어 변경시키자, 롬멜로 하여금 공격해 오도록 해놓고 그 틈을 타서 그의 방비 없는 측면을 찔러서 독일 아프리카 탱크 병단의 숨통을 끊어야 할 기회가 아니겠는가. 오킨렉크는 바로 이것이 엄청난 행운의 기회를 올바로 이용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러자면 토부룩에 배치중인 병력을 이동시켜서는 안된다. 롬멜의 정찰기가 의심할 것이다. 토부룩 방위선따위가 터진다고 무슨 상관이랴. 문제는 한 개의 도시가 아니고 아프리카 전쟁의 승리에 있다.   이 밖에도 할 일이 많았다. 이집트 지역의 영국군 병력을 급속히 이동시키는 일이었다. 특히 어떤 일이 있어도 독일의 정찰기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신속히. 오킨렉크의 참모들은 멋있게 해치웠다. 그리하여 부대 이동은 낙타의 대상을 가장하여 행해졌고 진지는 훌륭하게 위장되었다. 독일 및 이탈리아 정찰기들은 감쪽같이 속아넘어가 롬멜의 사령부에는 의혹을 살만한 보고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만반의 준비를 끝낸 영국군은 롬멜의 공격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롬멜이 택한 공격일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롬멜이 공격이 임박한 것은 알았으나 그러나 알 수 없는 X일이었다.   11월 14일이 지났다.그리고 16일.   16일 저녁 무렵이 되자, 런던쪽은 견딜 수가 없었다. 공격부대는 벌써 사흘째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일부분은 지루하게도 사막 한 가운데서. 날이 갈수록 발견될 확률이 커갔다.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다시 17일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이제 런던은 더 참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오킨렉크는 그래도 견디어 볼 셈이었다.   하나 처칠과 군수뇌부가 듣지 않았다.   11월 17일 처칠은 사막부대에 훈전을 보내면서 오킨렉크의 공격을 11월 18일 새벽으로 강요했다.   오킨렉크는 공격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때 그가 공격을 시작했을 무렵 6년래의 비바람이 사막을 휩쓸었던 것이다.   영국군도 물론 폭풍우로 고생했다.   이때문에 오킨렉크는 공격 벽두에 실시하려고 했던 영국 공군의 대폭격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벼락같이 습격해 들어가서 연락호와 보급기지, 항만, 사령부 등을 때려 부술 작정이었으나 17일가 18일에는 비행기를 띄울 수가 없었다. 자연 현상인 폭풍우의 결과는 양군에게 같은 것이었다. 싸움은 시작됐다. 배신자가 던진 주사위가 반상에 떨어진 것이다. 누가 배신했단 말인가. 도대체 누가 롬멜의 계획을 영국군에게 팔아 넘겼을까?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신문에 이 사실을 처음 공포했던 오킨렉크 원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 국방성은 한동안 발표할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필자〈파울 카렐〉가 영국에 있는 사람을 통해서 오킨렉크 원수에게 이 일을 물어보았으나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할 뿐이었다.   『약속한대로 1941년 롬멜의 토부룩 공격계획에 대해서 쓰려고 펜을 들었던 것이나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크리스마스를 지난 다음 곧 출장가게 되었기 때문에 약속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에 있었던 남방군 최고사령관 셀링 원수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출항하는 아군 호송선단의 위치,시간,코스를 연합군 측이 알고 있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있었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우리가 항해 계획을 변경했던 선단은 발견되는 일도 없었고 공격도 받지 않았습니다. 독일 고속선을 썼을 경우에도 같은 결과가 생겼습니다. 전쟁 후 일부 사실은 판명되었습니다. 미국인인 에리스 M 자카리아스는 연합군 해군 비밀정보부의 지휘관으로 있었는데 그의 저서인 〈비밀의 사령〉안에서 이탈리아 해군사령부의 계획은 보안이 유지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롬멜의 측근자였던 프리츠 바이엘라인 중장은 필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1941년 겨울 영국군 공격 때 독일 아프리카군단의 참모장이었습니다. 우리 부대는 독일군 1개사단, 이탈리아군 3개사단으로 편성되었던 군단이었지요. 싸움이 시작됐을 때 참모부는 할파야 고개에 있었고 그후 사방으로 전전했습니다. 공격을 받는 동안에 롬멜의 토부룩 공격계획이 영국군에게 새어 나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배신자가 누구였는지 그것만은 종내 알 수 없었습니다. 공격전, 아프리카군 참모부에서 몇 차례의 회의가 있었는데 이 자리에는 이탈리아군 고급 장교도 참석했었습니다. 하나 이 사건에 대해서 이탈리아군인을 함부로 의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1941년 11월 중령으로서 롬멜의 탱크병단 부관으로 있었던 퇴역 기병장군인 지그프리트 베스트팔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롬멜은 1941년 9월말부터 토부룩에 대규모의 공격을 가할 작전을 짜고 있었습니다. 영국군의 새로운 공격도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오킨렉크가 사령관이 된 다음에는 영국군의 공격을 오직 시간문제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롬멜은 오킨렉크를 앞지를 생각이었습니다. 즉, 그로서는 시간과의 경쟁이었습니다만 보급이 늦어졌기 때문에 몇 번이나 토부룩 공격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국군의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9월 14일 제 21기갑사단의 일부가 빌 하바다에 정찰공격을 시도해봤습니다만 영국군의 공격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후 수 주일에 걸쳐서 영국군은 훌륭한 위장과 대공포화로 독일 공군이 자기들의 등 뒤를 넘겨다 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스파이의 보고도 없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11월 18일의 영국군의 갑작스런 공격은, 작전면은 몰라도 전술면에 있어서는 롬멜의 허술한 곳을 찌른 셈이 됩니다. 그러나 그때 롬멜의 작전계획이 영국군의 오킨렉크 원수에게 새어나갔다는 일은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베스트팔 장군이 말하기를 토부룩의 영국군 방위병력의 편성으로 미루어 본다면 동쪽으로부터의 롬멜의 공격계획이 영국군에 누설되었다고는 추론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때의 탱크병단 정보부장 폰 멜렌딘 중령도 같은 의견이었다.   필자는 오랫동안 롬멜의 비서역으로 있던 사람을 찾았다. 베트하 상사가 그 사람이었는데 1941년 여름부터 1944년 10월까지 롬멜 원수 곁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사용과 공용의 모든 문서를 읽었고 서류를 관리해 왔었다.   알베르 베트하는 다음과 같이 써보내왔다.   『롬멜원수 주변에는 비밀이 극단하다고 하리만큼 엄격하게 취급되어 왔었습니다. 명령과 계획의 중요성은 〈초극비〉, 〈극비〉, 〈비〉로 구분되어서, 〈초극비〉사항은 참모본부의 장교만이 다룰 수 있었고, 특수 연락 장교가 날랐습니다. 〈극비〉는 일반연락병의 손으로 내왕되었고, 기타 문서는 오토바이 전령이 날랐습니다. 원수는 항상 전선으로 뛰어 다니며 작전을 지도하셨고 참모부까지 전선에 끌고 다녔기 때문에 문서가 적의 손에 들어갈 기회가 많았다고 하겠지요. 롬멜 원수는 자기가 만든 스케치를 참모부가 쓰고 나면 자기의 문서 상자에 넣어두곤 했습니다. 종요 사항을 텔레타이프로 보내는 경우에는 암호기법이 사용되었습니다. 북부아프리카 배후 지역의 첩보활동은 이탈리아군의 책임이었습니다. 롬멜의 사령부는 언제나 전선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폭격과 기총소사를 당하는 경우가 많아 일을 중단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서류를 작성한다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밤중에는 전기가 꺼져서 천막과 트럭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일하는 경우에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들의 경우 이 말에는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롬멜 사령부의 전문가의 보고에 의하면 적의 교묘한 정보기관에는 롬멜에 대한 중요한 일들을 알아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기술적인 예방조치를 취한다 해도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의 의무감, 성격, 신, 불신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롬멜의 계획을 전달하는 길목에 배신자 아니면 적측의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누구였을가?」문제의 최후의 한 가지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6) 오킨렉크의 공격   요새를 지키고 있었던 오스트레일리아 병사들은 자기들을 〈토부룩의 쥐〉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1941년 11월 17일 밤에는 한잠도 자지 못했다.   큰 비 때문이었다. 폐허에 몸을 숨긴 채 밤새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불타던 사막조차 미처 빨아들이지 못할만큼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지난 여름부터 영국 수비대는 이 해변가의 요새 속에 갇혀 있었다. 물론 바다는 그들의 것이었다. 손해도 많은 편이었으나 그래도 영국 배들은 매일밤 숨어 들어와서 필요했던 물건들을 보급해 주었으며 때로는 증원부대까지 실어다 주었다.   롬멜이 공격해 오리라는 소문이 퍼지자, 병사들은 참호 속에서 히죽히죽 웃었다. 토부룩의 쥐들은 18일 밤 런던에서 들려오는 처칠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사막 군단은 역사에 새로운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며 프레님, 워털루와 도 비교될 것이다.』   『하고말고. 여부가 있나.』   그들은 떠들면서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들리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알고 있었다. 영국군의 탱크, 트럭, 대포의 행렬이 비오는 사막을 강행군하고 있다는 것을. 수 마일에 걸치는 길고긴 긴 대열이 토부룩의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롬멜을 공격하기 위해서.   그것은 1천대가 넘는 탱크와 장갑차로 이루어진 크나 큰 사막의 무적함대였다.   롬멜에게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을 합쳐보았댔자 5백대의 탱크밖에 없었다.   영국 본국의 제7기갑사단, 제22기갑여단, 남아프리카에 있었던 제1사단 등으로 편성된 영국군은 맛다레나 부근의 기지를 떠나 토부룩을 향했다.   한편 인도 제4사단, 뉴질란드 제2사단 및 영국 본국 제1야전 기갑여단은 동쪽으로부터 소르므 전선의 공격에 나섰고, 영국 쾌속 오아시스 부대는 자라브브로부터 롬멜의 배후 깊숙이 파고 들어가서 보급선을 봉쇄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토록 요란한 영국군의 전투 준비를 독일군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공중정찰도 소용이 없었다. 사막의 서쪽에 영국군의 거대한 보급기지가 생겼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스파이의 보고도 없었다. 오킨렉크가 엄중한 무선관제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도청조차 할 수 없었다.   이렇게해서 무서운 폭풍우의 11월 18일 밤, 수많은 탱크가 서쪽을 향했다. 토부룩의 포위를 풀기 위해서. 독일군을 격멸하기 위해서. 카이로의 오킨렉크의 책상 위에 있는 롬멜의 작전지도를 따라 1개사단씩 쳐부수기 위해서였다.   11월 18일부터 23일의 전사자위령일에 이르자 그 절정에 달했던 사건에 대한 독일 측의 전황보고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할파야 고개의 독일군은 18일 아침에도 호우의 뒷처리에 바빴다. 제104저격병 연대의 제1중대장 겔리히 중위는 급류에 빠져 간신히 구출되었으며 중대의 살림을 맡고 있는 티글러 상사는 이날 아침에 떠내려간 무기를 찾는 일로 바빴다. 그가 자랑으로 여기는 부하가 브라이델트 상병이 있었는데, 그는 자기의 기관총을 언덕 위에 올려 놓고 자신을 비를 맞아 덜덜 떨면서도 기관총에 천막을 씌웠다. 여기 와서 비를 피하라고 전우들이 권해도 그는 듣지 않았다.   『내 기관총을 혼자 두고 갈 수 없어.』   이 싸움 가운데 여러가지 보고 가운데서 오직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북아프리카의 피비린내나는 여러 전투 가운데서도 전례를 찾을 수 없는 격렬한 전투였다는 점이다.   탱크끼리의 처참한 전투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취사병들도 미국의 공장에서 막 도착한 허니 경전차 캐타필라에 수류탄을 던졌다. 제361아프리카 연대 제2중대의 병사들은 경박격포의 엄호를 받아가면서 영국군 탱크위로 뛰어올라가 해치를 폭파하고 타고 있던 영국 병사를 삽으로 찍어 죽이고 그 탱크를 빼앗아 타고 영국군을 공격했다.   밤이 되면 독일군의 특별반이 모포를 들고 전장의 구석구석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 부상병을 찾아내서는 춥지 않도록 담요를 덮어 주었다.   대규모의 기습공격을 받아 절망상태에 빠질 경우에도 독일군은 끝까지 싸우자고 했다. 롬멜의 병사들은 초인적인 용기를 보였다. 이 용기와 인간 관계가 탱크전의 전설로 승화한 저항력이 공격에 나선 오킨렉크의 코피를 터트려 놓은 것이다.   롬멜은 이 싸움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그가 탔던 장갑정찰차는 전선의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11월 18일 정오, 독일의 어떤 장갑정찰부대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인도 제4사단본부의 차를 습격해서 상사 한 명을 포함한 승무원들을 붙들었다.   바이엘라인이 이 상사를 할파야에서 심문한 결과, 그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사단본부에 소속해 있었던 인도군 상사가 가지고 있던 지도는 오킨렉크의 공격계획도였다. 더구나 그는 영국군 사령부가 롬멜의 공격계획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바이엘라인은 지체없이 이것을 감부트의 롬멜 사령부에 전화로 보고했다.   전화를 받은 측은 너무 뜻밖의 사실이라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상사의 지도는 함정일 것이라고 의심했다.   이 경우, 전투 초기에 오킨렉크의 공격계획을 알았다는 것은 롬멜의 토부룩 공격계획을 영국군 비밀정보부가 입수했던 것과 동등한 행운이었다.   즉, 토부룩의 배신에는 영국군 측에도 흡사한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단지 닮지 않았던 사실은 롬멜은 이 행운의 정보를 나중에 가서야 믿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이 대전투의 경과를 당시의 DAK 참모장 프릿츠 바이엘라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영국군 제6기갑사단의 일부는 유명한 제11경기병여단을 선봉으로 세우고 11월 20일 독일, 이탈리아군의 방위선을 돌파, 토부룩 전면에 있는 시디 레젝그까지 진출했다. 독일군은 효과적인 작전으로 영국군의 탱크를 다수 파괴하고 깊숙히 진출한 영국군의 배후를 찌르기 위해서 유리한 공격 지점을 점령했다.   롬멜은 병력의 열세 때문에 부득히 병력을 집중해서 영국군을 각개 격파하려 했다. 그러나 카닝감 장군이 롬멜의 주문대로 탱크여단을 나누어 투입해 줄 것 인가?   그러나 영국군은 롬멜의 주문대로 움직였다. 카닝감 장군은 영국군의 집중에 힘쓰지 않았다. DAK는 11월 21일 시디 오말 서쪽으로부터 영국군의 제7기갑여단의 배후를 찔렀다. 영국군은 이 최초의 전투에 탱크 200대를 비롯한 수많은 대전차포와 우세한 포병을 투입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영국군을 때려부수고 트리그 카프초의 구릉지대를 점거했다.   분통이 터졌던 토부룩의 영국군이 11월 20일부터 21일에 걸쳐 야습했으나 격퇴되고 말았다. 그러나 50대의 보병 엄호탱크를 앞세운 두 번째 공격은 유효했다. 영국군 제70사단은 이탈리아의 보로니아 사단의 방위선을 돌파하고 포병대를 유린하여 35문의 대포를 가졌던 2개대대를 전멸시켰다. 이탈리아 제3정찰대대가 그 돌파구를 막았으나 이 전투구역은 그 후에도 독일군을 불안하게 했다.   11월 22일이 되자, 롬멜은 기동전투를 명령했다. 밤이 되자, 클류벨 장군은 제15기갑사단을 감쪽같이 동쪽의 영국군 측면에 옮겨놓았다. 제21기갑사단은 시디 레제그의 비행장을 공격―영국군을 남쪽으로 후퇴시켰다. 노이만 지르 코우 소장은 제15기갑사단을 이끌고 공격하여 영국군의 측면과 배후를 찌르면서 포위했다. 그리고 독일 제8기갑연대는 공세를 펴 영국군의 중앙에 위치한 영국 본국군 제4기갑여단을 괴멸시켰던 것이다.』   영국의 전사(戰史)에는 제4기갑여단의 괴멸이 전기를 잃게 한 원인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와같이 토부룩으로부터 출격한 영국군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동쪽의 13군은 약간의 성과를 올렸다. 할파야 고개를 습격했던 뉴질란드군은 퍼드 카프초를 점령했던 것이다.   롬멜의 계획은 이러했다. 토부룩에서 작전중인 영국군 주력을 전병력을 동원해서 격멸시킨 다음 재빨리 동쪽으로 진격해서 소르므 전선의 적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롬멜의 휘하 장군들은 민첩했고 병사들은 용감했다.   참모부를 잃어버린 장군들…, 아프리카의 격전에는 이런 장군들도 많았다. 전문가, 지도, 통신시설등― 모든 것을 잃고 말았으나 그래도 클류벨은 DAK의 각 사단을 계속 지휘했다.   11월 23일 새벽, 독일, 이탈리아군은 남쪽에서 전투준비를 끝냈다. 시디 레제그 지구에서는 제21기갑사단이 견진을 폈다. 이탈리아의 아리에스테 기갑사단은 빌 엘 고비 지역에 집결했다. 클류벨 장군의 의도는 적의 배후를 찌르는 것으로서, 이에 앞서 빌 엘 고비에서 이동중인 아리에테 사단과 합류한 다음 손아귀에 있는 모든 탱크를 집중적으로 투입할 생각이었다. 7시 반쯤, 제15기갑사단이 이에 가세해서 남서쪽으로 진출했다. 모든 중대는 「적군을 철저히 격멸시킬 것」이라는 무선 연락을 받고 있었다.   영국군의 큰 탱크부대가 곧 발견되었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 밖에도 강대한 치중차량과 수없이 많은 전차와 포병부대가 발견되었다. 때문에 클류벨 장군은 전열을 확대했다.   독일 제21기갑사단은 레제그로 진격하고 있는 영국군 제7기갑사단을 요격하여 괴로운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한 낮이 되자, 토부룩의 영국군 수비대는 60대의 전차와 강력한 포병을 가지고 자기편 전차대와 합류하려고 탈출을 꾀했으나 이탈리아군은 사력을 다 해서 봉쇄선을 지켜냈고 파비야 사단은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영국군은 포위망의 거점을 많이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클류벨 장군은 전투를 계속하면서 저녁도 되기 전에 영국군 배후에 이르렀다. 아리에테의 선봉 부대도 전차 120대를 가지고 도착했기 때문에 그는 이 병력을 단번에 영국군 배후에 투입할 수 있었다.   제8기갑연대가 중앙에 있었고 우익은 제5기갑연대, 좌익은 이탈리아군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영국군 포열에 부딛치고 말았다. 영국군 남아프리카 부대가 놀라운 속도로 구축한 포진지이었다. 각종 각구경의 대포가 밀려드는 독일군 전차에 무서운 포화를 퍼부었다. 이 불의 벽을 뚫고 나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차가 한대 한대 차례로 파괴되었다.   제8기갑연대 8중대의 손해가 특히 컸다. 중대장 웨드 중위는 강행군을 결심하고 자기가 지휘하는 전차를 몰고 용감하게 영국군 진지로 쳐들어갔으나 머리에 총알을 맞았다.   독일군으로서는 영국군 포병을 때리기 위해 강력한 포병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몇군데의 돌파구를 뚫는 일에 성공한 것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였다. 돌파구를 뚫은 독일군 전차부대는 다시금 공격을 시작했다. 탱크는 기동 전술로서 영국군을 좁은 곳에 포위할 수 있었다.   영국군이 이렇게 포위된 이상 토부룩으로부터의 출격도 소용 없는 일이었다. 영국군은 항복 아니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포로는 천명을 넘었다.   시디 레제그 남쪽의 광대한 지역은 사진과 초연의 바다로 변했다. 시계가 나빴기 때문에 영국군 전차와 대포는 포위망을 뚫고 교묘하게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국군은 포위된 채로 있었다. 저물도록 전투는 계속되었다. 수백대의 차량, 전차, 대포가 이글이글 타면서 전사자위령일의 전장을 비추고 있었다. 자세한 전투 상황이 밝혀진 것은 밤중이었다. 부대가 정비되고 손해와 전과가 확인되고 전체의 상황이 검토되었다. 전과는 토부룩을 포위하고 있는 독일군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배제되었다는 것, 영국군 탱크부대의 태반을 때려부수었다는 것, 또한 영국군의 사기를 꺾은 것 등이었다. 좌우간 클류벨 장군은 영국군의 면밀한 계획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11월 24일 아침, 클류벨 장군은 롬멜을 만나 시디 레제그 지역의 영국군을 때려부수었고 탈출한 적은 적은 수에 불과하다고 보고했다. 독일군은 이겼던 것이다. 영국군의 커다란 전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이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토록 큰 승리를 얻은 기회에 대담무쌍한 작전을 구상하지 않는 장군이 있다면 롬멜은 가만있지 않았으리라―.   재빨리 동쪽의 영국군을 공격해서 뉴질란드군과 인도군의 주력이 잔여세력과 합류하기 전에 섬멸할 것, 이것이 롬멜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대담한 작전의 전제는 영국군 주력이 토부룩 전면에서 괴멸되어 패주했다는 사실이었다. 영국군의 지도부는 이미 싸움을 단념했던 것일까?   카닝감 장군은 피곤한 기색으로 참모들을 바라다 보았다.   『여기 있는 독일군을 이기는 재주는 없다.』   이 말 속에는 큰 계획이 꺾인 영국군의 절망이 담겨져 있었다.   『전선을 포기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이집트로 후퇴해서 구할 수 있는 부대는 구하자. 최후 방어선을 나일 전면에 쌓는 거다.』   『도망 가서 방위선을 구축하자는 말씀입니까?』   카닝감의 참모장이 씁쓸히 입맛을 다시면서 물었다. 옆에 있던 참모들도 커닝감 장군의 표정을 의심적게 살폈다.   젊은 참모들은 퍽 오래 전부터 지도부를 비판하고 있었다. 이런 말도 있었다.   『우리 전차들은 독일군의 2배, 대포도 2배, 장갑정찰차는 7배나 되고 공군은 지금 승세에 있다. 연안에는 함대가 있고 병력도 우세하다. 그런데도 못이기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가 부분으로 싸우기 때문이다. 모험을 안하기 때문이다. 롬멜은 항상 모험을 하고 있다. 제7기갑사단과 남아프리카군이 공격을 받고 있을 때, 근위사단과 뉴질란드군은 구원에 나서지 않았다. 뉴질란드군이 싸울 때는 인도군이 가지 않았다. 언제나 이런 꼴이다.』   이것은 사실상 카닝감 장군에 대한 반항이었다. 영국군 장교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절망감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카닝감이 후퇴할 의향을 표명한지 몇 시간 후, 카이로에서 오킨렉크 총사령관을 태운 비행기가 날아왔다.   두 장군 사이에 격론이 오고 갔다. 오킨렉크는 카닝감의 반대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이 싸움에서 지면 안돼. 이번에도 지면 북아프리카는 마지막이야. 영국이 나일에서 패하게 된다.』   언제나 냉철하던 오킨렉크였으나 이날따라 불을 뿜는 것 같았다. 영국의 역사상 위험에 직면했을 때마다 몇 번이나 붙었던 불이었다. 오킨렉크는 신중한 태도를 벗어버렸다. 그의 마음에는 고대 영국의 모험가 정신, 해적 정신이 부활했다.   『그때 나는 결심했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마지막 한 병사를 희생해서라도 패배를 막자고. 제8군은 적을 돌파하던가 아니면 죽는 길을 선택해야 했다.』   작전은 결정되었다. 장교들은 오킨렉크의 낮빛을 살폈다. 카닝감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오킨렉크는 카닝감을 파면했다. 전장에서, 말하자면 적을 앞에 둔 곳에서 이례적인 조치였다. 카닝감의 자리에는 릿지 장군이 앉았다. 그 역시 영국적인 신중한 전략이 몸에 배인 인물이었으나 오킨렉크의 엄명을 받고 나서는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제7기갑사단의 혼란을 수습하려했다. 도망하는 장교를 권총으로 가로막았다. 부대에 전투정신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영국군을 재조직할 때까지는 독일군의 맹공을 막지 않으면 안되었다.   릿지와 오킨렉크는 목적을 위해 모든 수단을 다 했다. 예를 들면 족크 전열이라는 것이었다. 족크 캠벨 여단장의 부대였다. 알렌 무어헷드는 이 특수부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휘자의 명령은 간단하고 명료한 것이었다. 앞으로! 적의 등뒤에 서라! 보이는 것은 모두 부수어버려라! ……이렇게 해서 사막의 빨치산이 탄생했다. 오킨렉크는 급히 이 부대를 증강 투입했다. 2,3일 사이에 20개 이상의 빨치산 부대를 독일군 전선 배후에 배칠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방화하고 약탈하고 사살하고 사구에 숨었다가 독일의 전차를 엉뚱한 곳으로 유도하고 전선을 끊고 엉뚱한 길 안내판을 달아서 수송부대를 혼란시키고, 비행장을 습격하고 정보를 모았다. 그것은 재기하려는 제8군의 긴급 수단이기는 했으나 곧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는 동안에도 토부룩을 웨워싼 싸움은 계속되었다. 롬멜은 영국군에 승리한 여세를 몰아 대담무쌍한 작전을 시도했다.   11월 24일 아침, 클류벨 장군으로부터 전사자 위령일의 전과를 보고받자, 장갑차에 뛰어 오른 롬멜은 부관인 베스티팔 중령에게 외쳤다.   『나는 시디 오말로 간다. 제21기갑사단을 할파야 고개로 보내라!』   부관은 반대하려고 했다. 그가 처음 받은 정찰기의 보고에 의하면 영국군은 빈 엘 고비 부근에서 진용을 정비하고 있었다. 하나 롬멜은 듣지 않았다. 참모장인 가우제 소장을 지휘차에 끌어 넣자, 달리기 시작했다.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하는 영국군 속을 뚫고 남동쪽으로 달렸다. 이집트 국경을 향해서.   소르므 지역에서 작전하고 있는 적 뉴질란드 제2사단과 인도 제4사단이 영국 본국군과 합류하기 전에 쳐부술 계획이었다. 또한 이집트 국경지대를 넘어서 하바다와 말타레나를 찔러서 영국군 본부와 그 보급기지를 괴멸시켜 영국군의 보급을 중단시킴으로써 확실한 승리를 얻고 싶었다.   롬멜은 시디 오말을 향해서 제15,제21기갑사단을 앞지르며 아귀같이 달렸다. 눈앞에는 이집트라는 신기루가 있었다. 수에즈 운하가, 나일강이, 그리고 위대한 승리가 있었다.   오킨렉크가 토부룩 전면에서 파닉크를 가로 막아선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롬멜은 80대의 전차를 이끌고 질주했다. 처음에는 통신부대도 따라왔으나 곧 뒤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롬멜은 달렸다. 그러나 사태는 롬멜의 뜻대로만 되어 주지 않았다.   인도군 제4사단은 롬멜의 공격직전에 증강되어 시디 오말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롬멜의 병력은 너무 적었으며 또한 그의 계획은 지나치게 무리했다. 독일군의 공격은 실패했고 제5기갑연대는 큰 손해를 입었다.   이러는 동안에 쓰러졌던 영국군은 재기하여 다시금 공격을 시작했다.   이들과 합세해서 토부룩 요새의 수비부대도 공격해 나왔다. 토부룩을 포위했던 독일군은 촌단되었고 베트하 지대는 살인적인 포화의 세례를 받았다.   베스티팔은 롬멜에게 사태를 보고하려 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다섯대의 연락기가 격추되었다. 계속해서 무전을 발신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그는 자기 차를 집어타자, 부대와 부대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늘어나는 곤란을 극복하려 했다. 영국군의 전선을 넘고 영국군이 점령한 비행장을 가로 질러다니기도 했다. 추격을 받은 일까지 있었다.   전사자 위령일의 승리가 패배로 끝났다는 사실을 롬멜은 여전히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DAK가 토부룩 전선에서 전출했기 때문에 오킨렉크에게 뜻밖의 전기를 주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쌍방이 모두 사력을 다 해서 싸웠다. 이제 전선이라는 것이 없어졌으니만큼 쌍방의 군대는 엉켜서 싸웠다.   롬멜은 소르므 전선에 보냈던 전병력을, 그리고 지금 그는 자신까지도 토부룩 전투를 위해서 불러냈다. 할파야 고개의 바하 대대는 고립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싸웠다.   한편 후레이 버크 장군이 인솔하는 뉴질란드군은 다시금 총검을 겨누며 토부룩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전차, 포병 등에 의한 두 번의 맹공을 견디고 나서 공격하여 왔던 것이다.   그때 그들은 귀중한 것을 얻었다. 제21기갑사단장 폰 라벤슈타인 장군을 붙든 것이다.   처칠에 의하면 폰 라벤슈타인 소장은 후퇴명령을 받았을 때, 영국군 보급기지의 바로 코 앞에 있었던 것 같다. 15분만 더 전진했더라면 그는 영국군의 가장 중요한 보급기지를 파괴함으로써 오킨렉크를 궁지에 몰아 넣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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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방시혁도 웃었다! 의정부고 졸업사진, LA 화제의 투샷 100% 재현 디시트렌드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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