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거 믿으면 김전X이오....
이번에는 이것저것 2차대전에 관련된 내용을 되는대로 말하고자 하오.
우선 영친왕의 이야기를 하겠소.
영친왕은 육사 29기로 졸업하였소. 병과는 보병과구랴.
비공식적으로 애칭 삼아서 [창덕궁 若宮]라 불렸다 하오.
중위시절 육군대학교는 26기로, 당시 교장은 무려 우가키 가즈시게 나중 조선 총독이고,
동기로는 유일한 한국 평민 출신인 홍사익 장군이 있소.
참모와 고급지휘관을 양성하기 위한 육군대학교인 만큼 졸업시 참모연습 여행으로
현지 전술연습을 한다 하오. 각 학생들에게 각급 지휘관, 참모직을 할당하여 대항군 작전을 하는 것이오.
이때 홍사익은 영친왕이 당시 군사령관을 맡았는데 잘 수행해 내서 존내 감동먹었다더구랴.
영친왕은 영관시절은 일단 신분상 실병 지휘보다는 본부 근무나 교육관계 업무가 많았고,
38년 이후 별을 달고 나서는 실병 지휘경력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편이오.
1939년 근위2여단을 맡았고, 40년에는 전설의 당나라 군대인 소햏 올린 오사카 4사단장,
41년에는 51사단장(51사단은 이후 뉴기니에서 공중분해 되오. 참 천운이었소),
그런데 42년부터 그 동안의 경력과 주특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제1항공군으로 가더니만
43년 일본의 중추부의 방공을 담당하는 제1항공군 사령관이 되오.
45년에는 군사참의관이 되다가 이후 해방을 맞소.
영친왕이 이후 한국 출신 육사생도들의 일요하숙 계림회 장소도 주선 하는 등
사실상 한국 출신 생도들의 대부 역할을 했다 하오.
49기인 이종찬 장군 말이, 가끔 찾아뵈었는데 그때는 늘 일본어를 써서 실상 되게 싫어했다 하오.
그런데 해방이 되어서 찾아가니 능통한 한국어로 말을 해서 크게 놀랐다 하오.
어쨋든 해방이 되었는데, 이 해방이 되니 정작 황족이니, 국적이니 다 날아가고,
세상물정 잘 모르는 왕자님 공주님들이라 이것저것 사기다 뭐다 해서 결국 재산을 다 날리고 말았소.
말 그대로 그냥 무국적 외국인으로 휙 던져저 버린 것이오.(이는 다른 황족들도 마찬가지오)
오죽 고구마 장사가 힘들던지 중령으로 육군대학교 교관하던 의친왕의 장남인 이건 공은
시부야 역 앞에 팥죽집을 열고 스스로 팥죽 장사에 나섰다 하오.
알겠지만 당시 무국적인이던 재일동포들 이야기 직접 들으면 눈에 피눈물이 나오.
그 무국적인 중 하나가 된 이건 공도 견디다 못해 결국 귀화를 했는데, 나중에는 부인과도 이혼을 하오.
뭐 그건 영친왕도 마찬가지라, 무지 고생했다 하오.
그 이후 이야기는 말 안해도 잘 알 것이고.
나중, 이방자 여사가 우리나라 와서 장애아를 돌보는 데 여러 고생한 이야기를 보면 눈에서 짠물이 나오.
(공주에, 포니테일에, 리본에, 후리소데에, 부채에, 결정적으로 미소녀이니) 이것은 좋은 사진이다!!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와 영친왕과의 약혼을 알리는 1916년 8월 3일자 동경 아사히 신문 기사오.
.......사실 당사자인 둘 다 전혀 모르고 있었소.
홍사익 장군은 어딜 가나 평판이 좋았다 하오.
26기로, 당시 조선 무관학교 위탁생이었소. 유명한 이응준 장군, 이청천 장군 등이 동기오.
졸업 성적은 471명 중 22등으로 위탁생 중 수석이고, 차석은 32등 이응준 장군이오.
동기로는 이오지마의 그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중장이 있소. 나중에 대장으로 추서되었소.
뭐 이 육사시절부터 사서삼경을 줄줄 외워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오.
소령이 되던 1930년, 1사단 3연대 3대대장을 맡던 시절, 같은 연대 중위인 천황의 동생 치치부노미야는
홍사익 장군을 보고 "조선을 대표하는 傑物"이라 하고, 나중에 김정렬 햏은 "제갈공명"이라 했다 하오.
아, 당시 좀 있다 들어온 연대장이 야마시타 토모유키 장군이오.
야마시타 장군이 우리나라 근무 경력이 있구랴.
홍사익 장군은 참모수업 경력이 있는데도 주로 교육 계통이나 혹은 만주국 연락 무관, 흥아원 무관 등
특수 임무를 많이 했소. 만주국 시절에는 교민들과 접촉하면서 이것저것 뒷바라지를 해,
나중에 만주 교민 사회에서 송별회를 두번 열어 줄 정도였다 하오.
한편 43년 다시 만주로 와 공주령학교 부교장을 맡았는데, 교민들과 만주군 소속 한국 장교들과 많이 만났다 하오.
만주군 군관학교에도 공적이던 사적이던 많이 갔는데, 한국 장교들을 만나면 이런 저런 격려했다더구랴.
새해에 사람들이 새배올리러 오면 늘 한복을 입고 맞이하고, 부대 가져다 주라고 이것저것 줘서 보냈다 하오.
41년에는 108여단을 맡아 북중국에 전개하오. 중국 제1전구에 해당하는데,
41년은 일본 육사 21기인 장개석 훃아가 "승리반공의 해"로 선포하고 공세를 펼쳤다 하오.
이후 44년 홍사익 장군은 포로수용소장으로, 야마시타 장군이 14방면군 사령관으로 와서 다시 손발을 맞추게 되오.
이때 1944년 12월 31일 병참감으로 기용하는데,
알겠지만 전선 중 식인이 가장 많이 일어난 지역 중 하나가 필리핀이오. 실로 아햏햏이오.
45년 7월 8일 마지막 포탄을 발사할 때 본부 간부 전원이 나와 대포를 둘러싸고 거수 경례를 하면서 포를 쐈다 하오.
가끔 그래도 시찰을 나가는데, 그 때 "상반신은 장군인데 하반신은 사병의 차림"이라고 인상적이라 기억들 하오.
일찌기 가토 다테오 중령이 한국 근무 경력이 있소, 평양 6연대 근무 경력이 있더구랴.
그리고 육사 52기인 최명하 중위가 이 가토 하야부사 전투대, 즉 64전대에 배치 받았소.
가토 중령 자신이 한국 경력이 있어서 한국 사람 스타일을 잘 알 뿐더러,
더구나 유능한 최명하 중위라서 깊이 신뢰하고 요기, 즉 윙맨으로 활동했다 하오.
최명하 중위는 이후 1942년 1월 17일 팔렘방을 공습할 때, 불시착하고,
이후 부하와 함께 민가로 숨어있다가 네덜란드 군이 몰려오자 권총으로 총격전을 벌이다
마지막 한 발로 자결했다 하오.
그리고 항공사관학교 3기로, 동기로는 "일본의 더글라스 베이더"(부상으로 한쪽 다리를 잃고 싸웠소)
12기 격추의 에이스 히노키 료헤이 소령이 있소. 그가 그의 최후를 잘 알고 있다 하더구랴.
아, 그리고 244전투비행단의 최연소 비행단장이 된 고바야시 테루히코 대위는 육사 53기인데,
원래 주특기는 포병이고, 원래는 99식 습격기를 몰고 다녔소. 43년 11월에 전투기 기종 변경 훈련을 받았다더구랴.
격추 기록은 말이 많은데, 보통 5기 정도로 알려져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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