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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군의 실질적 지도자이자 참모총장, 국방장관

카이텔 2006.01.04 20:50:32
조회 1356 추천 0 댓글 5

 

허잉친 [하응흠] (1890-1987)

 

1890년, 구이저우 출신으로 어릴 적에는 건강하고 책을 좋아하였다 한다. 1907년, 17세로 구이양의 초보 사관학교에 들어가며, 다음 해에 유명한 우창 3군 중등사관학교로 보내졌다.
1917년, 허잉친은 청나라가 일본으로 보내는 유학 장교단에 뽑혔고,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로 파견되었다. 이때 유학생의 일원인 장제스를 만났고, 둘은 함께 공부하였으며, 일본으로 망명한 쑨원이 이끄는 동맹회를 다니며 반 청나라의식에 영향을 받았다.
얼마안가 동맹회에 가입하였고, 1911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동맹회를 따라 본국으로 온 후 쑨원의 부하 파벌 중 혁명 후 상하이(상해) 도독으로 임명된 장제스의 크나큰 후원자 천치메이(진기미) 휘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위안스카이에 반대한 동맹회의 투쟁 운동에 함께 하나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온 허잉친은 일본 하사관학교에서 군사 교육과 훈련을 더 배웠다.
1916년, 졸업한 허잉친은 고향 땅으로 오며, 그곳의 도독이며 위안스카이에 반대하여 "반원 선언"(반 위안스카이 선언)을 한 리우 시안시(유현세)의 휘하로 들어오는데, 당시 리우 시안시는 자력으로 사관학교를 세우려했고, 리우 도독은 아들에게 아는 장교 친구가 있는지 물었고, 함께 유학했던 허잉친을 구이저우 군사령관 왕원화(왕문화)와 함께 추천한 것이다. 구이저우군 제4연대 대령으로 허잉친은 자리를 얻으며, 군사령관 왕원화의 신임을 얻어 그의 여동생과 결혼하였다.
고향에서 지내면서 허잉친은 왕원화를 지지하여 1920년에 리우 도독을 몰락시켰고, 왕원화로부터 사관학교 교장, 경찰 서장, 구이저우 제5여단 여단장 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얼마안가 왕원화가 1921년에 암살되었고, 휘하 군대는 혼란에 빠졌으며, 결국 허잉친은 상관들에 의해 고향에서 추방되었다. 추방된 그는 위난의 군벌 밑에서 일하였다.
1924년, 장제스는 쑨원의 후원으로 황푸 군관학교를 설립을 준비하며, 함께 유학하던 허잉친을 쑨원에게 추천하였다. 쑨원은 곧장 수소문하여 허잉친의 소재를 알아내며 그에게 광저우의 사관학교 일자리를 알려주며 권하였다. 허잉친은 바로 그 청을 받아 광저우로 온 후 1923년에 사관학교 교무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장제스의 신임을 받았고 군관학교에서 교육받아 편성된 두 연대 중 한 곳의 대령으로 1922년에 쑨원 휘하에서 배신한 군벌 천중밍(진형명)과 싸웠다. 이 때 천중밍의 군벌군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용기와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몇몇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장제스와 중국 군사고문으로 온 소련 원수 바실리 블류헤르(당시 갈렌이라는 가명을 쓴)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한다. 그 결과 장제스에게는 더 깊은 신임을, 블류헤르로부터는 검을 하나 선물 받았다. 그리고 그 해 중엽에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창설을 완료하였다.
군관학교 출신들로 제1군단을 조직했고, 군단장으로는 장제스를, 허잉친은 휘하 사단 중 한 곳의 사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군단의 당 대표위원으로 저우언라이가 명해졌다. 몇 개월 후 천중밍은 다시 반란을 시도하나 장제스가 이끄는 부대에게 패하며, 또다시 허잉친은 공을 세워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1926년, 장제스는 제1차 북벌을 시작하며, 제1군단장으로 허잉친을 명하였다. 허잉친의 부대는 광동을 지나 푸젠, 져장 지구를 정벌한다. 이때 장제스가 공산당과의 대립에 직면하여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자 허잉친은 장제스를 지지하여 1927년에 져장 지구 지구장으로 상하이에서 벌어진 공산주의자 숙청과 해산에 따른 학살을 보충시(백숭희) 장군과 함께 이끌었다. 그리고 져장 지구 지구장을 1928년까지 하며 북벌을 계속하여 중국 남부의 많은 군벌들을 소탕하였다.
1928년 후 군사훈련의 감독 겸 일반참모 활동하다, 1930년부터 군무부장(군정부장, 국방부 장관)으로 명해졌다. 그는 이 직책을 1944년까지 지속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중화민국이 가지던 부패함과 부정함 속에 심지어 중화민국의 공군총사령관과 참모장, 아래 대다수 야전 사령관들이 가졌던 부패함을 허잉친은 이 직무 동안 가지지 않은 것으로 이름이 알려지며, 중화민국군의 군 발전과 군사시설 건설에 많은 공헌을 했다. 허나 본질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며, 부패함과 더불어서 중화민국 지도층이 가진 무능함을 그는 감추지 못하였다.
1931년, 장제스의 제2차 북벌이 시작되며, 북벌 사령관으로 허영친이 명해졌다. 허영친은 부대를 이끌고 중공군을 정벌하러 가며 전세는 수적으로 우세했다. 허나 그의 휘하 부대로 명해진 군사들은 대다수가 군벌 출신이었고, 그들은 행군하면서 약탈을 일삼았고 허영친 자신도 중공군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의 무능함이 전개되었다.
그 해에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중국과의 대립을 시작하며 허잉친은 중공군 정벌을 우선하여 일본과의 문제는 타협으로 끝내려 했다. 우선 북부 중국지역으로 일본과의 교전을 피하라 명하나, 1933년, 일본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러허(현 청더)지방을 침공했다. 결국 북부 중국 최고 군기관인 베이징 군사회의의 지역의장을 장쉐량(장학량)에서 자신으로 교체했고, 1937년까지 이 자리에 앉아 직접 일본과의 분쟁을 막으며 관동군 부 참모장 오카무라 야스지와 함께 탕구 합의를 맺어 급한 불을 껐고, 북부 중국의 군벌 지도자 펑위샹(풍옥상)의 반일 투쟁을 저지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는 일본은 몇 개의 사건을 조작했고, 특히 북부 중국의 주둔한 일본군 사령관 우메즈 요시지로는 장제스의 권력 첩보 기관이자 특수 공작기관인 남의사가 일본군을 공격하려 했다고 주장했고, 결국 1935년, 허잉친-우메즈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 내용에서 헌병과 남의사 조직원이 포함된 제2사단, 제25사단을 철수시키라는 내용이 있었고, 남의사는 수모를 참으며 베이징에서 물러났다. 몇 년 후 허잉친은 난징으로 돌아와 잠시 부재했던 군무부장직을 하다가 시안 사건이 터져 버렸다.
1936년, 시안을 방문한 장제스는 서북군 총사령관 양후청(양호성)과 북동군 총사령관 장쉐량(장학량)의 중공군 정벌을 칭찬하려 했으나, 오히려 그들에게 감금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은 이미 공산당 인물들과 만남을 가졌고, 그들과 다시 합작할 협정 준비가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장제스는 이것에 대해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중화민국 정부는 혼란에 빠졌고, 장제스의 아내 쑹메이링(송미령)을 중심으로 한 교섭을 하자는 온건파와 시안을 폭격하고 새 지도자를 뽑자는 무력파로 나뉘었는데 놀랍게도 무력파의 지도자는 허잉친이었다. 허잉친은 무력 해결을 주장하며 은근슬쩍 장제스를 비판했고, 남편을 구하려는 쑹메이링에게 아녀자가 정치에 낄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몰래 연락을 취했던 쑨원 아래 시기 장제스와 2인자를 다투다가 쿠데타로 쫓겨간 왕징웨이(왕정위)를 다시 중화민국 지도자로 선출하자고 말하였다.
논란 속에서 쑹메이링은 몰래 자신의 오빠이며 전임 재무부장, 중앙은행 총재였던 쑹쯔원(송자문)을 시안으로 보내 장제스와 장쉐량간의 중재를 하게 했고, 곧바로 쑹메이링도 직접 시안으로 가서 장제스를 설득한 후 제2차 국공합작을 체결하게 하였다. 그리고 정부에서 일어난 정치적 논쟁의 진행도 설명해주었다. 돌아온 장제스는 허잉친에 대한 불신이 커져버렸으나 어떠한 요직에서 퇴출당하지는 않았다.
1937년에 루거우차오사건(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터지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겸 육군 참모총장, 국가 군사회의 참모장을 1945년까지 하게되었고 장제스의 군사 작전을 따라 전쟁을 하였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중화민국은 일본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겼으나 충칭으로 정부를 이전한 후 그 주변 전선을 철저하게 방어하며, 2차 대전이 터지자 연합국으로 참가하여 일본과 싸우며 영토를 수복해간다.
1944년, 허잉친의 군무부장 경력은 끝나며, 그의 자리는 장제스에게 오랫동안 충성했고 시안사건 때도 함께 갇혔던 천청(진성)이 후임으로 올랐다. 대신 허잉친은 육군 총사령부 부장이 되나 1945년까지만 하며 위난에서 훈련받은 중국원정군을 보내어 미얀마 전선에서 싸우는 미국의 조셉 스틸웰 장군을 돕게 하였다. 허나 실제로 이 부대는 베트남에 가서 약탈과 만행을 부린 것으로 유명하다.
1945년, 마침내 2차 대전과 중일전쟁이 끝났고, 허잉친은 동남아 연합군과 중국군을 대표로 중국에서 싸우던 일본군의 항복 서명 대표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군의 중국 원정군 사령관에게 항복을 받는데 그 일본 장군은 바로 그 옛날 탕구 합의로 중국과 자신에게 수모를 준 오카무라 야스지였다. 항복 서명 후 그는 여러 나라에서 온 기자들에게 사진 찍히며 항복식의 기사에 실렸고, 이 때가 그에게는 인생 최고로 좋은 시기의 정상이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허잉친은 육군총사령관을 하게되었고 1946년부터 공산당과 국민당의 마지막 대결인 국공내전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허잉친은 1946년, 유엔 주재 군사 참모단 중국 군사대표단장을 하게되었다
점차 승세가 중공군에게 허잉친은 이미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완고한 반공파의 중심인물로 지목되어 공격의 대상이 되어 그에겐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1948년, 다시 군무부장을 맡게되었지만, 상하이 함락으로 사임하며, 1949년에 장제스도 자리에서 물러나 총통 대리에게 직책을 넘겼다.
총통 대리에 오른 자는 장제스의 부하이자, 중화민국에서 잔혹하고, 독재적이며, 군벌 장군이었던 리쭝런(이종인)이었다. 장제스는 허잉친은 리쭝런 밑에서 일하라고 권했고 허잉친은 승낙했으며 즉각 공산당과의 휴전과 교섭을 제안했다. 허나 승리를 앞에 두고 이제 와서 교섭할 만큼 공산당 지도자들은 멍청이들이 아니었다. 결국 중화민국의 정부 소재지인 난징이 함락되었다. 그리고 허잉친을 비롯한 내각인물들은 광저우에서 사임하였다.
1949년, 장제스와 측근들 그리고 중화민국의 주역들 대다수가 타이완으로 피난했다. 타이완에 온 허잉친은 본토에서의 실패 때문에 정치를 관두려하였고 1950년, 허잉친은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선출에서 패하였다. 대신 상급 고문 자리와 국방장관 자리를 건졌다.
이후 허잉친은 조용히 중화민국의 몇몇 클럽에나 참여하며 스포츠, 교양, 농사로 세월을 보냈다. 물론 1958년까지 국방장관직을 하였다. 1971년에 국가안전회의 전략고문위원회 주임위원으로 명해지나, 1986년 졸증으로 고생하여 입원하였고, 몇 개월의 투병 끝에 1987년,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일생의 별명은 "행운의 장군"이었다한다.

 

 

 
 
중국에서 싸운 일본군의 항복식
 
저택에서 찍은 사진, 안경 양복이 허영친이며 뒤에 여자는 아내이다.
 


노년의 허잉친과 아내
 
지금하는 이탈리아인 끝나고, 영국 원수 올린 다음 중국인물들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물파는 저 인데 2차 대전 주요 참전국 중에서 중국만 한 명이라도 자료가 없으면 섭섭하기에 미리 올립니다. (나중에 중국인물 시작하면 그대로 복사하기할 속셈이군, 이전에 서든2 사이트에서 한 카발레로 원수 자료처럼 - 쳇~ 들켰군)
 
저는 중화민국군이 그렇게 무력한 이유가 궁금해서 중화민국 인물들을 약간 파 보았습니다. 그리고 군무부장 그러니까 국방장관으로 허잉친이 이었다라는 점을 알게되었죠, 그래서 중화민국군이 그렇게 무능하고 부패한 원인을 그에 책임으로 추정했죠 (원래 원인은 최고 지도자에게 있지만 실무 책임은 그 분야를 맡는 책임자이지 않습니까? 마치 히틀러-카이텔, 스탈린-보로실로프, 같이...) 그런데 반은 아니더군요... 이 양반은 부패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점차 가면서 직책이 과분해진 것이지...
 
그래서 누가 중화민국군의 부패의 주동자인지를  찾아보니 여기 자료 끝 부분에 리쭝런이 책임자이더군요.
 
어째든 후에 올리는 일이고, 다시 이탈리아인에 전념하도록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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