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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코만도 부대장, 동남아 연합 사령관, 마지막 인도 총독

카이텔 2006.01.13 19:13:09
조회 3595 추천 0 댓글 6

 

루이스 마운트배튼 (1900 - 1979)

 

1900년, 윈저궁에서 루이스 마운트배튼은 태어났는데 본명은 본명 Louis Francis A1bert Victor Nicholas of Battenberg왕자였다. 아버지는 바튼베르크는 독일 왕족이었는데 영국으로 귀화했으며, 어머니는 독일 왕가와 영국 왕가 사이의 공주였다. 그리고 마운트배튼은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자가 되었고 당시의 국왕 조지 5세와는 사촌 지간이 되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증조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종종 그를 안아 주었고 마운트배튼이 1살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
루이스 마운트배튼의 남매로는 큰누나 앨리스 공주로 후에 여왕 엘리자베스2세의 부군인 필립공의 어머니가 되며, 둘째 누나로 스웨덴의 왕비가 되는 루이즈 공주, 형 조지가 있었으며, 루이스 마운트배튼은 막내였다.
1917년까지 마운트배튼은 바튼베르크로 불렸고 독일 왕족에서 이어진 직함을 가졌으나 1차 대전이 터지자 반 독일 운동으로 아버지는 이름을 개명하고 관련 직함을 버렸다 한다. 그러나 당시 해군 본부 제1위원인 아버지는 반 독일 운동가들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나길 강요받아 자리에서 물러났다 한다.
1913년, 마운트배튼은 영국 해군에 입대하는데 왕족인 그는 더 높은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었지만, 어린 마운트배튼은 그것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아래 장교부터 시작하였고, 다트머스 해군 사관학교로 알려진 브리타니아 해군사관학교와 오스본 해군사관학교를 다녔으며 어릴 적부터 남에게는 지지 않으려는 성격을 가졌다.
1916년, 사관학교를 다니던 마운트배튼은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해군생도로 1차 대전에 참전했다. 1차 대전 동안 마운트배튼은 훈련선 HMS Lion (1916), 전함 HMS Queen Elizabeth(1917), HMS Subm K6 (1918), HMS P31 (1918)에 차례로 승선했으며, 1차 대전이 끝났을 때는 18세로 중위가 되었다.
1920년, 대위로 승진한 마운트배튼은 전함 HMS Renown의 장교로 승선하게되었는데 실은 이 배에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여행하려던 당시 황태자이자 1936년에 왕이 되지만 사임하여 조지6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대신 윈저의 공작이 된 에드워드 8세가 타고있었다. 마운트배튼은 에드워드 8세의 보좌관으로 임명되어 여행을 수행했고, 둘은 깊은 우정과 친분을 쌓게 되었으며 마운트배튼 자신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사람들을 보며,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품게되었다.  
여행 임무를 완수한 후 1921년에 전투 순양함 HMS Repulse의 승선하며, 그해에 다시 에드워드 8세의 보좌관으로 HMS Renown에 승선하여 인도, 일본, 동남아 여행을 떠나게되었다. 마운트배튼은 이번에 만난 외국인들과도 이전에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사람들에게 품었던 마음을 다시 느끼며, 특히 인도에 대한 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마운트배튼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은 바로 에드위나 애슐리와의 만남이었다.
애슐리의 아버지는 하원의원이었으며, 일찍이 애슐리와 마운트배튼은 런던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이였고, 인도 여행 중에 다시 만난 것이었다.
둘은 사랑에 빠졌고,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와 세인트 마가렛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결혼식을 가졌다. 결혼 후 미국으로 신혼 여행을 떠났고, 헐리우드에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매리 픽포드, 찰리 채플린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Nice and Easy"라는 영화를 찍기도 했으며 마운트배튼은 점차 시간이 나면 개인적으로 국민들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여러 가지 취미와 스포츠를 즐겼다한다. 또한 마운트배튼은 뛰어난 폴로 선수였고 점차 대중들에게 인기가 늘어났다.
신혼 여행을 마치고 1923년에 전함 HMS Revenge에 승선하며, 1924년에 포츠머스 통신 학교에 들어갔는데 이 해에 첫 아이도 태어났다한다. 1925년에 그리니치의 해군 대학도 들어갔고, 1926년이 되자 통신 장교 자격을 취득하였다.
1927년에서 1928년까지 지중해 함대의 보조 무선 장교로 활동하며, 1928년에 소령으로 승진했고, 1929년까지 제2구축함 함대의 통신과 무선 장교로 활동하였다. 1929년부터는 포츠머스 통신 학교의 선임 무선 교관으로 1931년까지 근무하며, 1931년에서 1933년까지 지중해 함대 무선 장교로 근무하게된다. 
1932년이 되자 중령으로 승진했고, 1년 후에 불어와 독어 통역 자격을 취득했으며, 1934년부터 함장에까지 오르게되었다. 1934년 구축함 HMS Daring의 함장에서 다음 해에 HMS Wishart의 함장이 되었다.
1936년부터는 해군 본부에서 근무하며,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8세의 개인 해군 부관이 되었고, 에드워드 8세가 물러나자 1937년부터 조지 6세의 개인 해군 부관이 되는데, 이 직책을 1952년까지 지속하였다한다. 거기에다 대령까지 승진하였다. 그러나 몇 년 후 크나큰 전쟁에 마운트배튼은 참전하게 된다.
1939년, 2차 대전이 터졌고, 마운트배튼은 구축함 HMS Kelly의 함장으로 제5 구축함 함대의 지휘관을 명해졌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의 첫 전선은 노르웨이로 독일 해군과 용감히 싸웠으며, 특히 영국군이 노르웨이에 상륙하려다 실패한 남소스 작전에서 퇴각하는 영국 함선들을 방어한 걸로 명성을 얻었고 Mountbatten Pink, 또는 Plymouth Pink라는 함선 위장 안료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지중해로 가게된 마운트배튼은 1941년, 크레타섬 전투에서 독일 공군의 폭격을 받았고 그의 배 HMS Kelly는 격침되어 버렸으며 선원의 절반인 130명을 잃게되었다.
구출된 마운트배튼은 항공모함 HMS Illustrious의 함장이 되나 얼마안가 영국으로 소환되었다. 그리고 처칠 수상을 만나게 되었다. 처칠은 일찍이 그의 능력을 살펴보았고 마운트배튼에게 한 가지 직책을 부여하게되었다. 그 직책은 연합작전 사령관, 바로 영국 특수부대 코만도 부대의 대장직이었다.
당시 코만도의 창시자는 1차 대전 때 독일 잠수함 기지를 직접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원수에다 상원의원이 되어 정부의 해군 축소 계획에 반대했으며, 해군의 발전을 주장하였고, 전부터 특수부대를 창설하고 싶어했던 노 제독 로저 케예스였다. 허나 케예스 제독은 강직하고 용감한 성격과 특수부대에 대한 애착 때문에 상부와 마찰을 빚었고 케예스 제독은 결국 자리에서 물러난 상황이었다. 처칠은 이 자리의 적임자를 마운트배튼으로 보았고, 그를 코만도의 부대장으로 앉혔으며, 준장으로 승진시켜 주었다. 마운트배튼은 코만도를 통솔하게 되었고, 그가 왕족이라는 점과 인기가 많다는 점 때문에 상부는 함부로 코만도 부대를 건들지 못하게 되었다. 실제로 코만도의 대원들을 향하여 마운트배튼은 작전 시행시 살아 돌아오라는 마음의 정을 쏟았으며, 대원들도 마운트배튼을 믿고 따랐다.
마운트배튼의 첫 작전은 Operation Archery였다. 목표는 노르웨이의 Vaagso라는 섬 마을을 탈환한 후 독일 주둔병이 위치한 Maaloy 섬과 Hollevik의 적을 제거한 후 아군이 상륙할 수 있게 해안을 정리하는 것. 파견 병력은 570명의 코만도 대원과 1척의 순양함, 4척의 구축함과 영국 공군의 지원까지였다. 반면 적은 해안 방어 요새와 선박 그리고 전투기들과 1부대의 게빅스야거 산악부대를 가지고 있었다. 작전은 계시되었고 22명의 사망, 57명의 부상으로 작전은 성공했으며 적은 120명이 죽고 98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10척의 선박을 잃었다. 이 작전으로 독일은 노르웨이 내륙 방어 강화와 함선 파견, 영국이 노르웨이에 상륙할 지 모르는 불안을 심어주었다.
다음 작전은 1942년, 생 나제르 항구를 공격한 Operation Chariot 작전이었다. 작전 목표는 항구가 공격받을 수 있음을 적에게 인식시켜 노르웨이로 파견한 함선들, 특히 텔피츠가 다시 이곳으로 귀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파견 병력은 611명의 코만도 대원, 1척의 구축함, 16척의 모터보트들이었다. 반면 적은 5000명의 방어 병력과 갖추어진 방어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작전은 계시되었고, 전투는 혼란스러웠으며, 그 와중에 프랑스 시민들이 60명이나 죽을 정도였다 한다. 마침내 적은 400명이 죽었고, 아군은 169명이 죽었으며, 200명이 포로가 되었지만, 원래의 목표인 텔피츠의 귀환을 이루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공훈을 세운 후 1942년, 처칠은 마운트배튼에게 육군, 해군, 공군의 명예 중장직을 수여하나 주변 상급자들은 그가 아직 젊다는 이유로 많이 반대했다. 그리고 가장 크나큰 사태가 마운트배튼에게 오고 말았다.
1942년, 마운트배튼은 디에프 강습을 계획했고 유럽 대륙을 향한 상륙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강습은 실패하고, 상륙을 맡은 캐나다인 부대는 6000 가까이 되는 병사들이 희생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마운트배튼은 비난받게 되었으며, 여기에다 또 다른 실수를 더 저지르게 되었다. 마운트배트은 처칠에게 Habbakuk 계획이라는 것을 제안했는데, 그것은 거대한 얼음으로 만든 항공모함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7천만 달러와 8000명의 인력이 동원되었으나 계획은 처음부터 엉터리였고, 결국 낭비만 하고 말았다. 결국 마운트배튼은 연합작전 사령관에서 해임되었고 대신 1943 참모장 위원회 회원을 잠시 하다가 인도로 파견되어 동남아시아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동남아 연합군 사령관이 된 마운트배튼은 인도 총독 웨벨과 동남아 육군 사령관 슬림 장군과 동남아 방면 미군 총사령관이자 장제스의 참모장 맡은 스틸웰 장군과 친디츠 부대의 윈게이트 장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였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갔다. 또한 오래 전부터 인도를 위한 마음을 가졌던 마운트배튼은 네루, 간디와도 친분을 쌓았다. 1945년, 전투는 승리를 이끌었고, 일본군의 전선은 밀렸고 마침내 전쟁은 종결되었다.
1946년, 소장으로 승진하였으며, 1년 후 버마의 백작이라는 작위에 명해졌고, 인도 총독으로 명해지게 되었다. 총독이 된 마운트배튼은 인도 독립 준비를 추진해갔으며, 전부터 그를 알던 인도인들은 과거를 잊은 체 마운트배튼의 독립 준비에 협조하며, 파키스탄과 인도 분립 문제도 처리하였다. 1948년, 오랜 지배를 받던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다만 마운트배튼은 한 가지 문제를 남기고 독립 시켜 주었는데, 그것은 너무 빠른 독립 준비가 카슈미르 지방에 대한 처분을 확실치 못하게 하여 지금까지의 참상을 이어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도에서의 일이 끝난 후 1948년부터 지중해의 제1순양함 소함대장으로 하게되며, 1949년에 중장으로 승진했고, 1950년에서 1952년까지 영국의 해군 참모본부인 해군본부 위원회의 제4위원으로 근무했고, 1952년에 국왕 조지 6세가 세상을 떠나자 해군 부관 임무도 끝이 났다.
1952년부터는 지중해함대 총사령관으로 1954년까지 하는데 중간에 1953년에 대장까지 승진했으며, 새로운 국왕인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개인 해군 부관으로 다시 부관 임무를 지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5년, 해군본부 위원 제1위원, 즉 영국의 해군 참모총장직에 오르게 되었다. 제1위원에 오른 마운트배튼은 이전에 자신의 아버지를 쫓아낸 반 독일 운동가들을 고소했으며, 1956년에 원수로 명해졌다. 1959년까지 제1위원직을 지속한 후 그 다음부터 1965년까지 국방참모본부 의장을 하게되었는데 1960년에 남편과 함께 인도 독립을 적극적으로 도운 후 인도에서 지내던 그의 아내가 과로로 추정되는 원인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마운트배튼은 사랑하는 그녀를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주었고, 화장한 뼈는 인도 총리 네루의 지원아래 두척의 구축함에 실려 이행되었다한다. 얼마안가 마운트배튼은 여왕의 부관직만 남긴 체 군에서 퇴역하였다.
퇴역 후 조용히 지내던 마운트배튼은 1979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아일랜드의 슬라이고섬으로 휴양을 떠난 마운트배튼은 갑작스런 폭발로 배에서 터진 것이다. 조사 끝에 원인은 아일랜드 해방 운동 단체 IRA의 테러로 밝혀졌고, 단원인 토마스 맥마혼이 피의 일요일에 대한 보복으로 저지른 범행임을 알게되었다.
맥마혼은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98년, 벨파스트 협약으로 석방되었으며, 마운트배튼은 국민들의 애도와 슬픔 속에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아내와의 결혼 후
마운트배튼과 주변 가족들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코만도 대원과 마운트배튼
미 항공대 총사령관 헨리 아놀드 원수와 마운트배튼
맥아더와 마운트배튼
오른쪽부터 월터 숄트, 마운트배튼 그리고 킴멜이다.
웨벨과 마운트배튼

1945년 싱가포르에서, 마운트배튼 왼쪽의 인물이 동남아 전선의 명장 슬림 장군이다.
간디와 마운트배튼
마운트배튼과 간디 그리고 아내
네루와 마운트배튼

 

여왕 엘리자베스2세와 함께, 여왕의 남편 필립공은 마운트배튼의 외조카이다
노년의 마운트배튼
마운트배튼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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