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 제 33 무장척탄병사단 '샤르마뉴'(프랑스 제1)
(33.Waffen-Grenadier-Division der SS "Charlemagne"(franzosische Nr.1))
제638 척탄병연대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 전 전선에 걸쳐 침공을 개시하자, 프랑스 국내에서는 '반공십자군'을 기치로 의용병을 모집하였다. 10월 28일, 제1대대가 편성되어 모스크바 서쪽 비니츠아로 수송되었고, 곧 바로 제2대대도 제1대대와 합류하게 되었다.
이 두 프랑스 의용병대대는 1941년 11월 22일, 모스크바 전면의 제4 전차군 전구에 첫 투입되었고, 다음해 2월 26일 제638 프랑스 보병연대로 개칭되었으며 제3대대가 증강되어 왔다. 하지만 동계전 기간중 프랑스 의용병의 전투능력 저하가 드러나 이들 3개 대대는 전선후방의 대파르티잔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연대는 1942년 5월부터 파르티잔 소탕전을 개시하여 고메리, 오르샤(Orsha), 스몰렌스크(Smolensk) 지구에 투입되었고, 10월에는 제638 척탄병연대로 개칭되었다. 이후 연대는 보리소프(Borisov), 모길료프(Mogilev) 지구에서 보안임무를 맡았고, 1943년 6월말 중앙군집단이 무너지자 그라이펜베르크(폼메른)로 이동하였다.
프랑스 SS 의용돌격여단
제638 척탄병연대가 백러시아(벨로루시)에서 파르티잔 소탕전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인 1942년말, SS 최고사령부는 프랑스 의용병이 모체가 되는 SS 부대 창설을 계획하고 1943년 여름 모병을 개시하였다.
모병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4,000여명이 모였지만 절반 이상이 부적격자로 1,600명 정도만이 SS 연습장 '베멘'에서 부대편성과 훈련을 받았고, 1944년 3월 30일 프랑스 SS 의용돌격여단(Franzosische SS-Freiwilligen-Sturmbrigade)으로 명명되었다. 이 돌격여단은 제1대대(약 900명 : 오토바이 저격병소대를 포함한 본부중대, 4개 척탄병중대, 1개 전차엽병중대, 1개 고사포중대)만 전투력을 보유하였을 뿐, 제2대대는 700명 규모의 교육대대에 머물렀다.
1944년 6월 30일 현재, 병력은 장교 30명, 하사관 44명, 병 1,614명(총 1,688명)으로 약체 1개 연대 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장교 및 하사관 정수는 353명인데 비해 실제로는 74명에 그쳐, 그 전투능력은 지극히 한정된 것이었다.
1944년 7월 28일, 여단은 SS 제7 의용돌격여단으로 개칭되었다. 이와 동시에 제1대대(행군대대)에 긴급출격명령이 내려졌고, SS 제18사단(18.SS-Freiwilligen-Panzergrenadier-Division 'Horst Wessel')의 전투단 '섀퍼'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전투단은 SS 제39연대 제I대대, SS 제40연대 제I, II대대, SS 제18 포병연대 제I대대, SS 제18 전차엽병대대의 일부(돌격포 4량), SS 제18 기갑정찰대대 등으로 구성된 약 3,000명 규모의 전투단으로, 북우크라이나군집단 제24 전차군단 전구에서 방어임무를 맡았다.
1944년 8월 7일, 전투단 '섀퍼'는 제1전차군과 제17군 사이의 돌파구를 막기 위해 자노크 부근에서 반격작전을 실시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다음날 막 도착한 프랑스 SS 의용돌격여단 제1대대(행군대대, 약1,000명)는 전투단 '셰파'에 긴급히 배치되었다. 하지만 8월 15일 전투단과 함께 전선에서 물러나 자르신에서 재편성되었다.
데비카 전투
이무렵 소련군이 라드미셸 부근에서 바이크셀 강 서안에 교두보를 구축하자, 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전투단 '섀퍼'는 재편성 도중 미레크 부근에 투입되었다. 여단 제1대대는 죠호프의 적 교두보에 공격을 가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반대로 교두보에서 적 전차의 공격을 받아 남서쪽으로 패주하는 바람에 전선 붕괴의 시발점이 되었다.
8월 21일, SS 제18 기갑정찰대대와 여단 제1대대는 푸셰와프 탈환작전에 투입되었지만, 여기서 괴멸적인 타격을 받고 격퇴되어 데비카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SS 의용여단 제1대대는 장교 15명 전원이 사망 또는 부상을, 하사관 및 병 900명중 전사 90명, 부상 660명, 포로 40명이라는 피해를 입어 사실상 전멸하였다.
1944년 8월 29일, 새로운 프랑스 SS 의용여단의 편성모체가 되기 위해 프랑스 의용병은 SS부대 연습장인 '베스트프로이센'으로 이동하였다.
SS 무장척탄병여단 '샤르마뉴'
1944년 8월 26일, SS 최고사령부는 1개 프랑스 의용여단과 1개 프랑스 SS 척탄병교육 및 보충대대의 편성을 지시하였다. 제638 척탄병연대의 장비와 병력이 SS로 이관되어 SS 제7 의용돌격여단의 잔여병력과 합쳐져 SS 무장척탄병여단 '샤르마뉴'가 편성되었다.
이후 프랑스 해군, 비시 정부의 국가경찰부대 '밀리츠(Milice)'(약 1,500명), 프랑스인 노동자 등이 차례로 증원되어 11월에는 약 7,000명 정도로 늘어났다. 하지만 '밀리츠' 의용병의 SS부대 편입은 본의가 아니었고, 구 무장 SS 의용병은 SS 제5 또는 제11사단 등의 엘리트 SS 사단으로 전출을 희망하였다. 이 대립과 불화는 점점 뿌리깊게 되었고, 병기 장비상황과 보급도 상당히 나빠 사기는 전혀 오르지 않았다.
SS 무장척탄병여단 '샤르마뉴'
여단장 : 에드가 푸아우트(Edgard Puaud) 대령
-여단본부
o SS 제57 무장척탄병연대(프랑스 제1)
제I대대(구 SS 제7 무장척탄병여단 제1대대(행군대대))
제II대대(구 SS 제7 무장척탄병여단 제2대대(교육대대))
o SS 제58 무장척탄병연대(프팡스 제2)
제I-II대대(구 제638 척탄병연대)
-SS 제57 전차엽병대대
제1 전차엽병중대 : 75mm 대전차포
제2 고사포중대 : 37mm 고사포 9문
제3 돌격포중대 : 돌격포 10량(1945년 3월부터)
-SS 제57 포병대대(4개 중대)
-그외 지원부대
SS 제33 무장척탄병사단 '샤르마뉴'(프랑스 제1)
1945년 2월 10일, 여단은 SS 제33 무장척탄병사단 '샤르마뉴'(프랑스 제1)로 개칭되었고, 바이크셀 군집단(Heeresgruppe Weichsel) 제2군 제18 산악군단에 배치되었다. 2월 23일, 소련군이 함머슈타인(Hammerstein)에서 동쪽으로 20km 떨어진 슈로카우로 접근하자, 제18 산악군단은 SS 제33사단을 함머슈타인 남동쪽에 투입하였고, SS 제57연대를 제32 보병사단에 배치하였다.
SS 제57연대는 2월 24일, SS 제15사단(15.Waffen-Grenadier-Division der SS (lett.Nr.1))과 제32 보병사단의 중간지점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격렬한 전투를 펼친 후 SS 제58연대와 함께 2월 27일 노이슈테틴(Neustettin)까지 후퇴하였다. 이때까지의 전투로 500여명이 전사하고 수백명이 행방불명되어 사단 병력은 약 3,500명으로 감소하였고, 중화기는 75mm 대전차포 4문, 105mm 경유탄포 2문만을 보유하는데 그쳤다.
여기서 사단장이 푸아우트(Edgard Puaud) SS 준장에서 크루켄베르크(Dr. Gustav Krukenberg) SS 소장으로 바뀌었고, 부대는 베르가르트로 후퇴하였다. 잔여병력은 각 1,200명의 행군연대와 예비연대로 재편성되었지만, 중화기는 박격포 4문과 75mm 보병포 2문뿐이었다. 이후 SS 제33 척탄병보충교육대대가 보충되어 병력은 4,00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사단은 제5 엽병사단, 전차사단 '홀슈타인' 등과 함께 방어에 나섰지만 3월 4일 케아린 방면에서 포위되었고, 3개 그룹으로 나누어 베르가르트 방면에서 서쪽으로 돌파를 시도하였다.
사단 본대 약 3,000명은 삼림지대에서 적의 강력한 전차 및 포병 공격에 괴멸하였지만, 페네(Fenet) SS 중위 휘하 1개 대대는 크루켄베르크 SS 소장과 함께 탈출에 성공하여 3월 10일 그라이펜베르크 동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후 이 대대는 작전군단 '폰 테타우'와 호르스트 부근에서 다시 포위되었지만 이 역시 뚫은 후 3월 16일 슈비네뮌데를 거쳐 안클람(Anklam)까지 후퇴하였다.
한편 약 1개 중대 규모의 프랑스 SS 의용병 그룹은 포위되어 버린 콜부르크로 후퇴하여 격렬한 방어전을 펼쳤고, 살아 남은 소수가 3월 18일 밤 슈비네뮌데에 간신히 도착하였다.
3번째 그룹인 초비츠 SS 대위 휘하 약 300명은 서쪽으로의 탈출이 가로막히자 소련군에 포위되어 있던 고텐하펜 지역의 제2군 전선으로 돌아가 SS 제4 경찰기갑척탄병사단에서 SS대대 '마르틴'을 구성해 4월 1일까지 방어전을 펼쳤다. 이 전투단의 생존자들은 해로로 후송되어 사단 재편성시 보충요원이 되었다.
사단의 최후
1945년 3월 21일, 사단의 잔여병력은 아크람에서 노이슈트레리츠(Neustrelitz)로 이동하여 사단을 재편성하였다. 4월초까지 1,100명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는데 아래와 같다.
- SS 제33 무장척탄병사단 '샤르마뉴'(프랑스 제1) 잔여
- SS대대 '페네' 잔여
- SS대대 '마르틴' 잔여
- 그외 잔여대대
- SS 기갑척탄병학교 '네베크라우'의 교관
- SS 제33 전차엽병대대 제3 돌격포중대(차량 없이 병력만)
- 야전병원에서 긁어모은 경상자들
한줌의 병력이 아까운 독일군이었지만 이 패잔병부대를 전선으로 내보낼 용기는 없었고, 2개 건설대대(Baubataillon)로 재편성하여 노이슈트레리츠 부근에서 방어선 구축 임무를 맡겼다. 이 건설대대는 오데르 강 전선의 제9 강하엽병사단 전구에서 건설작업을 행하였고, 4월 20일 시작된 제2 백러시아(벨로루시) 전선군의 공격으로 물러나 바트 크라이넨 부근에서 영국군에 항복하였다.
베를린 공방전
베를린이 포위되어 있던 4월 25일, SS 제11 사단장으로 부임하게 된 크루켄베르크 SS 소장은 무장한 프랑스 SS 의용병을 대동한 채 부임하였다. 이 부대는 SS 돌격대대 '샤르마뉴'로 불렸는데, 실제로는 돌격총과 판처파우스트로 무장한 9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4월 25일 밤, 프랑스 SS 의용병들은 노이쾰른(Neukolln)에서 소련군과 격전을 펼치고 있던 SS 제11사단(11.SS Frw.Panzer-Gren.Division Nordland)의 잔여 약 1,500명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히틀러 유겐트와 함께 노이쾰른 시청에서 농성을 벌이다 포위된 후 헤르만플라츠로 탈출하였고, 이후 안할타 역 부근에서 전투를 벌였다. 4월 28일, 베레아리안세플라츠에서 적 전차와 격렬한 공방전을 펼쳤고, 베를린 방어사령관(Berlin Kampfkommandant) 바이틀링크(Weidling) 대장이 항복을 선언한 5월 2일, 제국 항공성 폐허에서 마지막 전투를 펼쳤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프랑스 SS 의용병에게는 프랑스 본국으로의 강제송환과 가혹한 군사재판, 시베리아 수용소에서의 기나긴 강제노동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빌트플레켄(Wildfleken) 연습장에는 헤르쉐 SS 중위 휘하의 프랑스 SS 척탄병교육 및 보충대대 약 1,200명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바이엘른으로 수송되어 SS 최후사단인 SS 제38사단 '니벨룽겐'(38.SS-Grenadier-Division "Nibelungen")에 합류하였다.
SS 제33 척탄병사단은 장비와 병기가 빈약하였고, 병력도 5,000명을 상회한 적이 없었다. 베를린 최후의 전투에서 90여명의 병사가 분전한 탓에 유명해져 부대 사기가 높은 것으로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베르가르트 전투에서처럼 무기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괴멸한 것이 본 모습으로, 전력으로서의 가치는 없었다고 보여진다.
전사가중 일부는 베를린 시가전의 분전에 대해서도 '독안에 든 쥐처럼 도망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혹평한다.
<출전 : Armor Modelling>
http://forum.panzer.pe.kr/viewtopic.php?t=200&highlight=%C3%D6%BA%F3%BB%E7%B4%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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