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밀갤에 함 올린 기억도 있는듯 하기도 하고 업ㅂ는듯 하기도 해서.. 걍 여기에 함 쌔워볼까하오.. 아래 학생햏이 아프리카군단에 배속되었던 배테랑 독일군들과의 인터뷰 내용도 있고 하니, 그것과 같이 이글을 보면 더더욱 재미있을것 같구료.
예전에 악당햏이라던지 소시민햏, 멋진 중년이신 대양해군햏(밀갤에서 눈팅, 여기서도 눈팅만해서 앞에 중년이란 단어를 붙이기가 참으로 아햏햏 하지만 앞에 '멋쥔'이란 말로 용서를 구하옿.. ), 문제중년좌 등등 포스를 지니신 분들의 글들을 보기 어려워져서 안타깝구랴.. 점점 스겔화 분위기가 되어가서 난감하기도 하고 말이오.. 머.. 사실 디씨니까 이런게 아니겠냐는 식으로 위안은 해보지만..
흠흠.. 서두가 길어졌구랴.. 전에 판져 마이어라 불리던 쿠르트 마이어와 막스 뷘쉐에 관련된 썰을 푼적이 있소.. (닷무지네 쪽 밀러터리 만화가가 주로 이 인물을 빼먹지 않고 다루더구랴.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_-;;) 그 전에 Battle of the Caen 이란 글을 먼저 올렸어야 하는데, 소햏이 밀갤에 한번 올렸던 글이라 (이것은 기억하고 있쏘~!!! ) 패쓰~!! 했소만. 여기 햏자들이 요구하면 다시 정리해서 올리리다.. 어쨌든 이번글은 아프리카군단이 지독한 전장환경에서 어캐 살아갔냐 하는 글인데, 연합국측 자료는 이에 대한 소상한 자료들이 많이 돌아댕기는 반면에 주축국인 경우에는 거의 없는거 같아서 여기에 쌔우도록 하옿. 그럼 잼나게 읽어보시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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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에서의 전쟁은 원래는 이탈리아의 전투였다.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에서 영국군에게 완패를 당했던 것은 이탈리아에 원인이 있었다기 보다는 독일이 이 전역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는 결국에는 패배로 끝난 그리스와 아프리카 양쪽을 공격하도록 히틀러를 괴롭혀, 독일로 하여금 이 상대적으로 약한 군대를 보강하기 위해 지원군을 투입하게 하는 고질적으로 성가시게 하는 근원이었다. 히틀러는 프랑스 전역에서 제 7 기갑 사단 (유령사단)을 지휘해 자신을 입증한 정력적이고 유능한 지휘관인 롬멜의 지휘 하에 1941년 초에 원정군을 파견하기로 동의한다.
"독일 아프리카 군단"으로 알려진 아프리카로 파병된 부대는 제334 보병 사단과 제 5와 제90 경 사단, 제 15와 21 기갑사단을 포함하는 전쟁에서 그 능력을 충분히 입증한 역전의 수 개의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2월 14일에 트리폴리에 최초의 선발대가 도착했으며. 다음 두 주 동안 계속해서 나머지 부대들이 속속 도착했다.
이들 사단의 병사들 중 몇 몇은 이 전의 전역에서 전투를 치른 역전의 용사들이었으나. 수많은 어려움이 도사려있고. 전술과 장비와 병사 개개인의 습관에 있어 많은 변화를 요구하게 될 사막전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전투에 이제 막 발을 들여놓았다. 이 부대들 중 몇몇은 지원자들로 구성되었고 그들이 정말로 아프리카에 가길 원하는 지에 대해 질문 받았고 이로 인해 한 아프리카 군단 고참병은 아프리카에서 군복무를 하기 위해 같은 중대 소속인 다른 25명과 함께 오는 경우도 있었다.. 후에 그의 중대 나머지 병력은 스탈린 그라드에서 전멸했기 때문에 사실상 그는 운 좋게도 탈출했던 것이다 !
이 전역의 초기에 보내진 부대들은 사실상 일반적으로 독일군들이 받는 건강진단과 다를 바 없고 단지 열대지역에서의 군복무 적격자를 가리기 위한 건강진단 심사라는 이름의 건강진단을 통과해야 했다. 이 일반적인 테스트에서 떨어진 지원자들은 콜레라와 티푸스에 대한 예방 접종 주사를 받아야 했다. 워낙 상황이 긴급했기 때문에 이들 대부분은 아무런 문제없이 일 방향으로 계속되는 이런 시험을 통과 할 수 있었다.
그때 군복이 만들어졌고. 열대용 군복은 군화가 그러했던 것처럼 완벽하게 적합해야하는 몇 가지의 이유 때문에 보통의 군복과는 달라지게 되었다. 열대용 코트 또한 겨울철 밤 동안에 심하게 떨어진 온도를 견딜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다른 변화는 열에 덜 민감했기 때문에 인조 가죽( 사막에서 이 또한 사용되었다 )보다 입기가 더 곤란한 캔버스 천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소수의 병사들에게는 열과 겨울철 밤의 급격한 온도변화에 익숙해 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적은 기간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치는 전투가 과열되면서 더 이상 주어지지 않게 되었다. 아프리카 군단의 병사들에게는 인상된 급료와 해외 여행이 허락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앞서 언급했던 열대용 군복과 차양이 달린 헬멧과 견고한 가죽과 캔버스로 만든 끈으로 묶는 군화와 같은 대체로 매우 인기 있었던 장비들이 제작된 것과 같이 많은 다른 새로운 변화들이 이루어 져야 했다. 차량은 주로 암노랑색인 열대용 위장 색과 북아프리카 전투와 동의어가 된 아프리카 군단의 야자수와 갈고리 십자가로 다시 채색해야 했다.
사막에서 독일군이 사용한 차량의 종류는 다른 전역에서 사용되었던 것과 같았지만 소련군과는 달리 영국군 전차는 일반적으로 독일군 것 보다 열세했다. 독일군의 3호와 4호 전차는 영국군의 크루세이더, 발렌타인과 마틸다 전차들을 능가했으며, 사막에서 최초로 사용된 무시무시한 88mm 대공포는 아주 먼 거리에서도 영국군 전차들을 격파시킬 수 있었다. 1호와 2호 전차들 같은 다른 경 전차들 또한 초기에 사용되었다. 이들은 비록 화력은 약하고 장갑은 얇았지만. 속도가 빨라 정찰 차량으로써 아주 유용하였다. 모래와 열이 전차의 유연한 운용과 모래가 연결 부위에 침투하여 연결부 그 자체가 문자 그대로 찢겨 나가는 궤도 피해에 영향을 주었다. .윤활유에 한번 모래가 들어가면 쓸고 없게 되었고 마치 모래가 스스로 그 아주 작은 구멍을 통해 들어가 활동하는 것과 유사하게 되어 각종 총기류와 차량의 운용에 있어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었다.
사막에서 양측의 전차 승무원들의 형편은 전차 내부의 온도가 어떤 때는 섭씨 100도 이상이 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불편한 것이었다. 전차나 전투차량들의 강철 표면은 낮 동안 매우 뜨거웠기 때문에 참전용사들이 "당신은 전차의 표면 위에 계란을 후라이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파리 또한 전차 승무원들 뿐만 아니라 다른 부대 원들에게는 끈임 없는 골칫거리였는데. 이 파리 떼는 움직이는 것이라면 어떠한 것이라도 내려앉아서 파리채의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이들을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다수의 장갑차와 반장궤차들은 정찰과 속도가 매우 중요한 공격( 사막에서는 측면을 보호받는 것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이러한 것은 매우 자주 이루어졌다. )에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 이들은 통신기가 달린 통제 차량으로도 또한 사용 될 수 있었던 4륜의 Sdkfz 222와 231 (8륜 장갑차)을 포함하고 있었다. Sdkfz 250과 251 같은 반장궤차량은 아프리카에서 독일군에 의해 폭넓게 사용되었으며 병력 수송, 지휘 (롬멜이 사용하였던 것과 같은), 정찰 등의 많은 수많은 상이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보다 무거운 반장퀘차는 37mm.와 40mm 대전차포를 견인했으며. Sdkfz 7 18톤 수송차량은 88mm 대공포와 150mm 야포 등의 보다 대형의 대포들을 견인하는데 사용되었다. 1942년 12월에 아프리카에 타이거1이 처음 왔을 때 이들 반장궤차들은 56톤의 티거를 견인할 수 잇는 유일한 차량이었기 때문에 때때로 구난차량으로써 같이 행동했다. 모터사이틀(BMW, Zundapp 둘 다)은 또한 장갑차량과 함께 행동하거나. 보통 MG 34 한정으로 무장한 모터사이클과 같이 사용하는 등 폭넓게 사용되었고. 경호 임무는 물론 이거니와 정찰을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모터사이클의 엔진은 원래부터가 외부에 노출되어있기 때문에 주 위험 요인이 될 정도로 모래가 자주 기계를 못 쓰게 만들었다.
모든 전역에서 연합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은 포획되거나 방기된 차량들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독일군 표시를 한 다음 전투에 투입된 영국군의 전차나 장갑차를 보는 것은 낮선 것이 아니었다. 구급차와 트럭 또한 징발되어 유용하게 사용했다. 1942년 미군이 참전함으로써 많은 수의 미제 장비가 포획되어 독일군에 의해 사용되었다. 이들 체계의 유일한 단점은 적 차량에 대한 예비 부품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 사막에서는 버릴 것이 없다. " 라는 말이 퍼지게 되었다.
새로운 전술들이 창안되어야 했고. 부대 원들이 새로운 지형에 익숙해지는 것을 도와주기 위한 훈련 프로그램들 또한 개발되어야 했다. 개방된 공간에서의 전차와 차량들의 이동은 맑은 날에도 몇 마일 밖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먼지 구름을 발생시켰기 때문에 빨리 발견되어 적의 전투기나 폭격기들을 유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의 병력과 차량의 이동은 낮보다 밤에 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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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식량
전투 식량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논의되어야 한다 이 문제는 단순히 유럽식의 음식을 수송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이것을 열대 지역에 어떻게 적합하게 만드는데 있다 뜨거운 기후는 많은 음식을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에 먹을 수 없게 만들어 버려 감자와 빵과 같은 음식은. 두꺼운 종이 상자에 든 흑빵과 건조시킨 땅콩과 콩으로 대체되었다. 쌀 또한 문제꺼리였지만 주식이 독일군에게는 "Kommisbrot", 이탈리아 군에게는 "Maisbrot "로 불린 사막의 열에 쉽게 상해 버리는 버터를 대신해 올리브유가 첨가된 빵이었는데. 올리브유는 독일군들 사이에서 크게 악평을 받았다. 이탈리아 군은 원두 커피와 식용유, 마멀레이드와 독일군과 이탈리아 양군 모두에서 또한 매우 환영받지 못한 고기 통조림들을 포함하는 식료품을 독일군에게 지급하도록 요구받았다.
통조림 깡통에는 "Administrazione Militare"(국방부)을 나타내는 AM이라는 이니셜이 찍혀있었지만 그 맛이 아주 고약했기 때문에 독일군들은 항상 이를 "Alte Mann" (늙은이) 혹은 몇몇의 이탈리아 군들이 부른 것처럼 Asinus Mussolini" (무솔리니의 엉덩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낳은 표현인 "Arabio Morte" ( 아랍인의 시체 ) 라고 부르게 되었다. 노획한 영국군의 콘 비프 통조림. 흰빵, 쨈, 비스킷과 과일 통조림은 사치품으로 여겨졌고 아프리카 군단 병들에 제공된 밋밋한 맛의 전투 식량 보다 제일 환영받는 보급품이었다. 영국군도 독일군과 같이 사진들의 전투 식량이 최저라고 생각해 노획한 독일군 식량을 환영했다! 신선한 염소와 돼지고기도 때때로 제공되기도 했으나 근처에 가축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은 자주 있지 않았고. 사막에서 신선한 상태로 고기를 보존하는 일은 말하는 것 보다 훨씬 어려웠다.
아마도 사막에서 가장 중요한 필수품은 물이다. 생병을 유지하고 차량을 지속적으로 가동하게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물은 가능한 최상의 상태로 보존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국군이 별명을 붙인 "Jerrycan"(독일 놈들 깡통)은 4.5겔론의 물. 연료 혹은 윤활유를 담을 수 있어서 자주 아주 귀중한 화물인 연료나 물이 세어 많은 양을 잃어 버려야 했던 영국군의 가솔린 통보다 훨씬 선호되었다. 아군이나 심지어는 적 전선에서 수마일 떨어진 사막에 고립돼버리는 아우 심각한 상황은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양측 모두 물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흰 십자가를 자신들의 소중한 물을 운반하는 깡통에다 칠했다. 이것은 이 전에 휘발유를 담았던 깡통에 담긴 물은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논의 된 이 특수 깡통에는 다른 것이 결코 담길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1960년대 콩고에 주둔한 UN군이 깨달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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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로의 여정
아프리카로 파견될 독일군은 배나 비행기로 지중해를 건너 리비아의 트리폴리로 가기 위해 이탈리아의 나폴리로 보내졌다. 이들의 엄호는 독일공군과 상선을 경호하기 위한 소규모 선단과 또한 약간의 상선에 포수들을 제공한 독일 해군도 참여한 이탈리아 해군에 의해 이루어 졌다. 이탈리아 군이 전투에 있어 나쁜 평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90%나 되는 병력과 보급품이 튀니지가 독일군의 주 보급 경로가 된 1942년까지 단 하나의 이용 가능한 보급 경로 이었던 트리폴리 항구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영국 공군가 해군의 공격과 조선소에서 발생한 여러 사고로 인해 이후 연료와 보급품 그리고 신선한 물이 독일군에게 점점 더 귀해지게 됨으로써 북아프리카 전투에 있어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영향력에 있어서는 이탈리아의 하나의 식민지일 뿐인 리비아에 거주하고 있는 이탈리아인들이 보급품들 중 일부를 수령 받은 사실로 인해 더욱더 악화되었으며 이 행위는 롬멜을 격분시켰다.
롬멜을 격노하게 한 또 하나의 것은 일반 병사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해 전투 식량 중 가장 좋은 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그 나머지를 일반 병사들에게 남기는 이탈리아 군 장교들의 태도에 있었다. 이탈리아 군 장교들의 이러한 태도는 다른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이런 불공평한 체계를 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탈리아 군내에 존재하고 있던 계급 체계에 연유한 것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많은 독일 아프리카 군단 참전 용사들이 이탈리아 군들을 아주 훌륭한 군인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과 달리 전투에서는 허약하다는 평판을 이탈리아 군이 얻게된 가장 큰 요인이었다. 앞서 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전쟁은 이탈리아의 전쟁이어서 항상 롬멜은 이탈리아 당국에 간섭을 받았지만. 이탈리아 군 병사들은 말단 병사들에게도 관심을 쏟은 롬멜을 자신들의 지휘관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 군, 독일군 모두에게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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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문제
의료 문제 또한 그 기후 때문에 사막에서 발생했다. 1941-1942년 사이에 리비아와 1943년의 튀니지 전투에서의 인명 손실의 주요 원인은 대규모의 병력이 참전하여 싸워서라기 보다는 병 때문이었다. 1942년 중 한때는 각종 질병 때문에 독일로 돌아간 독일군 수가 보충병의의 수를 상회하기도 했다. 질병이 한창 기승을 부릴 때는 독일군은 공격을 중지했다. 이러한 질병이 심한 때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몸에 있는 이들 때문에 더 심했다. 사막에서 매우 중요한 개인 위생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주로 말단의 이탈리아 병사들의 몸에 이가 득실거렸다 독일군 역시 이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탈리아 군만큼 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가 급속하게 퍼진 또 하나의 요인은 노획한 영국군 담요를 사용하거나 또는 이가 득실거리는 이탈리아군의 개인호를 점유하거나 비누와 씻을 만한 적당한 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랍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몸이 이와 벼룩으로 뒤덮이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들을 피해 다녀야 했다. 이 때문에 장염, 황달, 디프테리아. 이질, 피부염 등과 같은 다른 질병들도 발생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해상으로 수송되어야 하는 의료 물품들이 심각하게 부족하여 이들 질병은 때때로 전염병이 퍼지 듯, 놀라운 속도로 퍼졌다.
영국 해군이 점점 더 많은 수송선을 격침시키면서. 그 상황은 절망적이 되어버렸다. 비록 이탈리아 군이 독일군에게 의료 물품을 제공하고 있었지만.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중상을 입은 병사들 중 대부분은 구급차나 혹은 다른 이용 가능한 수단에 의해 후송되어 후방에 있는 구호소나 야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적십자 소속의 약 100명의 독일인 간호사들이 이 전역에서 아프리카 군단과 함께 복무를 했다. 이들 중 몇 명은 여러 사정에 의해 죽거나 부상당했다. 대부분은 군의 의무 병과에 소속되어 몇 곳에 있는 야전 병원에서 근무하였다. 이탈리아인 간호사들 또한 어떤 환경에서 환자들을 돌보았던 것이 발견된다. 매우 심한 환자는 비행기나 때로는 병원 선으로 그리스로 후송되었고 심한 중상자의 경우는 그곳에서 다시 독일로 후송되었다. 부상병은 자신이 다시 전방에서 군 복무를 다시 할 것인 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권리가 주어졌다.
전투에서 전사한 독일군 장병들에 대해서는 (환경이 허락한다면) 격식을 차린 매장 식을 한 다음 묻었다. 이러한 것은 보통 전투가 소강상태가 된 경우에 이루어 졌다. 다른 사장으로 인해 간단하게 묘지라는 표시만을 한 채 얕게 판 묘에 전사자를 묻게 되는 경우도 있거나 혹은 그들을 적에게 버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전에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영토에 들어온 많은 연합군들은 화려하게 장식되고 손질이 매우 잘되어 있었고 출생일과 전사일과 때때로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글들이 쓰여 진 철 십자나 갈고리 십자가 형태의 묘비들이 서 있는 묘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물론 다른 전선에서도 이와 같은 경우가 역시 있었지만. 사막에서 시체에 달려드는 파리 떼와 위생상의 문제로 인해 매장 식이 빨리 이루어졌다. 매장 조는 사체에서 나는 냄새가 몸 전체에 계속 남아 있었기 때문에 때때로 얼굴에 젖은 천을 써야 했으며 또한 대한 어떠한 약탈도 금지했다. 많은 군목이 아프리카 군단에 배속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카톨릭과 루터교를 포함한 다양한 신앙을 가지진 이들 이었고 . 신약성서의 복음서 부분을 암송했다. 기도는 모든 이가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내어 했으며, 독일군의 전통적인 장례식 때 쓰이는 노래인 " Ich hatt einen Kameraden" (나는 전우를 가지게 되었다.)을 엄숙하게 불렀다.
많은 작가와 목격자들은 매번 개인호 주변의 관목들이 사막에서 부는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전장이 중요한 큰 전투 후 난장판이 된 모습을 몇 페이지 안 되는 분량으로 이를 기술해왔었다. 이것은 주로 적 부대가 전쟁이 벌어지는 주요 지점들을 점령하고 있었고. 식량, 무기 혹은 탄약과 같은 실질적으로 가치 있는 것들을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런 식의 탐구 자세는 모든 것들을 왜곡시켰다. 문서화된 각종 기록들은 정보의 소재였고 적이 뒤에 남긴 어떤 것, 심지어 시체라도 기록을 위한 주요 소재가 된다면 면밀히 조사되었다. 전사한 병사들을 찍은 많은 사진에는 주머니들의 단추가 풀려있고. 안쪽에 있는 주머니를 뒤지기 위해 오버코트나 겉옷이 들어올려져 있고. 별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그의 양측 면에 아무렇게 내던져져 있거나 버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에 대한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1941년 5월에 내려진 명령문에는 한 가족(특히 가족 중에 전투에서 전사한 이가 한영 이하인)중에 미혼인 생존자들은 독일로 보내지지 않고 아프리카에 있는 예비 부대로 보내졌다는 것이다.
Courtesy of Ciaran Byrne from ELITE FORCES OF THE THIRD RE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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