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에 도착한 아돌프 히틀러는 몇 안되는 그의 친구중 하나였던 아우구스트 쿠비체크와 한 방에 자리 잡았다. 쿠비체크는 흔히 구스틀이라고 불리웠는데, 아돌프 히틀러의 성장기에 관한 많은 기록은 그를 통해 얻어졌다. 그는 음악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아돌프 히틀러와는 달리 꽤 현실적으로 차분히 준비해 나가고 있었다.
구스틀은 아돌프 히틀러가 가끔 어떤 생각이나 꿈에 가득차,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지껄일 때면, 잘 맞장구 쳐주면서 흥미있게 그 이야기를 듣고 하였다. 그러면 아돌프 히틀러는 더욱 흥에 겨워 쉴새없이 지껄여 대는 것이었다.
빈의 웅장한 건물과 왕궁은 아돌프 히틀러의 꿈과 허영을 한없이 크게 하였으나, 현실은 전혀 거기에 걸맞지 못하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빈의 미술학교 입학 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시험에 여러번 낙방하자 히틀러는 결국 유일한 친구인 크비체크와 인연을 끊고 홀로 생활을 하게 된다.)
아돌프 히틀러가 거대한 건물의 특징을 잡아 내어 스케치하는 솜씨는 꽤 뛰어난 것이었으나, 그는 어디까지나 한번도 미술 교육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한 촌뜨기에 불과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림에 관한 기초가 전혀 잡혀 있지 않았고, 전문적인 화가를 양성하는 미술 학교에 입학할 수는 없었다.
입시 과정에서 그가 웅장한 건축물에 대한 동경이 강한 것을 보고, 한 심사위원은 아예 건축가가 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을 흘렸다. 그말을 곰곰이 생각한 아돌프 히틀러는 과연 자신이 동경한 것은 건축물의 웅장함 그 자체이지, 그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건축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바꾸었다.
하지만,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 진학을 하려한다면, 그의 학력은 너무나도 형편없었다. 인문계 학교를 나오지도 않았고, 실업 학교에서의 성적은 우수하기는커녕 바닥을 기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나마 제대로 졸업도 하지 않았기에, 사실상 그가 건축가가 되기는 불가능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실업학교나 인문계 학교에 다니는 방법도 있었다. 사정을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빨리 공부를 마친다면 1년이나 2년만에 제대로된 학력을 졸업장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그냥 그렇게 하겠다는 마음을 몇 번 먹었을 뿐, 독한 마음으로 차근차근 실제로 일을 진행시키고, 그런 활동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는 의지가 부족했고, 그 나이의 애송이답게 변덕이라면 변덕도 심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은, 1907년 12월 21일 새벽. 아돌프 히틀러의 어머니 클라라가 유방암으로 사망하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강한 충격을 받았고, 한편으로 그의 야심과 허영은 더욱 부풀어 올랐다. 그는 완전히 고향을 떠나 빈에 정착하기로 하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스스로 빈에서 보낸 6년간이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불우한 시기라고 이야기하였다. 1907년에서 1913년까지, 19세에서 25세에 이르는 동안 그는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으며, 거지들을 수용하는 부랑자 수용소 같은 곳에서 머무르기도 했다고 그는 이야기 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과장이다. 그에게는 자기 혼자 몸을 감당하기에는 충분한 양의 고아 연금이 지급되고 있었고, 거기다가 가문의 유산도 그가 생활을 꾸려나가기에는 넉넉했다.(분명 히틀러는 빈 생활 몇 년동안은 고아 연금과 유산으로 인해 초임 법관의 급료보다 많은 돈을 받으며 풍족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가 진정으로 괴로웠던 것은, 가장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젊은 시기에, 아무런 비전도, 분명한 목표도 없이, 무위도식하며 시간을 보내는 허망함이었을 것이다.(요하임 페스트는 히틀러가 중산층 시민계급에서 점점 몰락해서 노동자계급으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 했다고 말한다.)
슬라브족과 집시족, 유태인이 가득한 국제도시 빈은 낯설음에 대한 공포와, 젊은이가 세상에 처음 내던져 졌을 때, 사회로부터 느끼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강하게 정신적으로 의존하였던 아돌프 히틀러는, 고아가 되어 홀로 아무것도 없이 빈에 머물고 있었다.
이민족들이 가득한 빈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심한 고독감과 메마름을 느꼈을 것이고, 정말로 세상사는 것이 만만치 않음을 처음으로 깨달았을 것이다.(빈의 어떤 구역에는 유태인이 전체 거주인구의 10%를 넘는 곳도 있었다. 분명 유태인이 거의 없던 린츠와 다르기에 히틀러는 생소함을 느꼈을 것이나 처음부터 극렬한 반 유태주의자는 아니였다.)
유독 허영심이 강한 아돌프 히틀러는 수년을 그렇게 허비하면서 자신이 쓰레기가 된 듯한 강한 모멸감과 비애감을 느꼈을 것이고, 야심만만한 꿈으로 가득차 있던 미래가 산산조각 나면서 좌절감 또한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대개 싸구려 그림을 그려 파는 일을 하였고, 막노동을 한 적도 있고, 거지들과 함께 잔 적도 있다. 하지만 싸구려 그림을 그려 판 것은 자신은 화가이고자 한다는 최소한의 자기 위안일 뿐, 실제로 생계에 보탬이 되는 정도는 미미했다. 막노동이나, 노숙과 같은 것은, 가끔 무일푼에서 백만장자가 된 미국 부자의 이야기 따위에서 자극을 받아 한 번 쯤 해본 일일뿐, 정말로 절박한 빈곤의 상황에서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20대 초반, 빈에서 히틀러가 한 몇 가지 안 되는 보람찬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독서였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일 수도 있고, 당시의 막막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한 어떤 돌파구를 찾기위한 몸부림일 수도 있고, 그 마저 하지 않으면 정말로 사회에서 쓰레기가 될 법도 하다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는 매우 방대하고 양의 독서를 상당히 깊이 있게 해 나갔다. 처음에는 그가 좋아하는 독일 역사 이야기와 게르만 신화 판타지를 섭렵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면서 차근 차근 그는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분야의 도서와 철학, 기술, 과학 분야의 도서로 범위를 넓혀 가기 시작했다.(글의 오류가 있다. 히틀러가 관심있어한 신화나 판타지류에 심취 한 것은 사실이나 다른 학문으로 그리 심화되어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읽는 도서들도 오스타라 같은 반 유대주의를 담은 잡지류들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언제나 치솟는 허영 혹은 야망과 함께 끝없는 지적 호기심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거기다가 그의 머리는 아직 녹슬지 않아서, 그의 왕성한 독서는 그의 지성을 상당히 키워 주었다. (히틀러는 그의 지예가 이미 빈 시절 독서를 통해 완성되었다고 말했다.)
특히 헤겔, 니체, 피히테등의 철학자들에 철학적 이해와, 사회 정치적 관점에 관한 이해는, 그의 학력에 비해 본다면 꽤 상당한 수준에 이를 정도였다. 히틀러는 점차 나이가 들면서 그나마 조금은 철이 들기 시작했고, 그는 자신이 독서를 통해 체득한, 정치, 경제, 사회, 철학의 각종 원리를 갖고 비판적으로 사회를 읽는 안목이 생겼다.
그는 자신 나름의 안목으로 당시 빈을 통찰했고, 나아가 오스트리아와 독일과 유럽을, 상당히 현실적으로, 제대로 읽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 시기의 아돌프 히틀러는 형편없는 백수였다. 그는 항상 백수 특유의 우울한 분위기를 몰고 다녔고, 신경질적으로 돌변할 때도 있었다.
오직 그가 생기를 찾는 것은, 비현실적인 환상으로 위대함과 화려함을 보여주는 바그너의 오페라를 즐길 때 였다. 그는 한때, 자신이 벌어들이는 수입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바그너의 오페라에 도취되어 있기도 했다.(아직 까지는 생활이 풍족했으니..) 그는 자작 오페라를 써보기도 했고, 자신을 위대한 유명인으로 만들 여러 가지 계획이나 아이디어를 세워보기도 했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도 작았고, 무엇보다 실제로 그 스스로가 끝까지 완성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히틀러가 가진 가장 큰 단점이었다. 끈기와 지속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한때 빈의 유명 오페라 연출가밑에서 오페라 연출을 배우려고 했었다. 그러나 결국 실패했다.)
또한가지 중요한 것은, 이때 그가 겪었던 낯설음과 당시 빈에 휘몰아치던 반유태주의의 분위기, 거기다 독서를 통해 얻은 어느 정도의 지식이 교묘하게 얽혀, 나치즘의 기본적인 골격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히틀러는 점차 정치적인 토론에 열성을 가진 젊은이가 되어갔다.
그는 남들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정열적으로 늘어놓기를 좋아했고, 의견이 다른 상대방과 싸우듯이 논쟁하는 일도 잦았다. (글의 오류, 하나쉬는 히틀러의 친구로 히틀러가 그린 그림들을 판매하는 역할을 했다. 무료 숙소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던 히틀러에게 새로운 수입원을 준 사람이다. 그러나 그림 판매과정에서 마찰이 발생해 결국 그들의 인연은 끝난다.)
한번은 하니쉬라는 남자와 격렬한 논쟁 끝에 그와 소송을 하기도 했다. 이 하니쉬라는 남자는 히틀러에 대해 몇가지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는데, 훗날 히틀러가 총통이 된 후에, 사형당한다.
1913년. 히틀러가 25세가 되던 해에,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국법에 따라 오스트리아 군대에 징집되게 되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군대에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그는 그 까닭을 '독일 민족주의가 나아가야 할 바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오스트리아의 군인이 되기는 정말로 싫었다'라고 정치 의식이 가득하게 설명하였다.
하지만 그 멋진 설명은 사실 진실을 약간 왜곡한 것이다. 그가 군입대를 피하고자 한 것은 현대 젊은이들의 전형적인 병역 기피와 다를 바 없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적당한 꿈도 가지지 못한채, 몇 년간의 시간을 허비해 버린 막막한 아돌프 히틀러에게, 군입대는 그야말로 더욱 지독한 시간낭비였다.
자신의 20대 청춘이 아무런 의미없이 날아가버리는 그 꼴을 아돌프 히틀러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많은 현대의 젊은이들처럼, 그도 군생활의 육체적 고달픔이 싫었다기 보다는, 의미없는 그 시간의 낭비가 싫었던 것이다.
그러한 심정을 그는 '오스트리아의 군인이 되기는 싫었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히틀러 자신이 고백하길, 그는 정치적인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뮌헨으로 갔다고 했지만은 분명 뮌헨보다는 베를린에 가야하는게 맞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것은 거짓이다.)
그는 병역을 피하기 위해 해외탈출을 시도했고,
당시 독일 제국에 소속되어 있던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 뮌헨으로 그는 1913년 5월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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