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말레이 작전중 침몰한 웨일즈 왕자.
원래 http://dragonff.gazio.com/ 의 글이나 이 홈페이지가 날아간지라 갈무리 해둔 걸 올립니다. 말레이 작전은 귀여움의 대상인 치하 전차가 귀여움이 아닌 활약을 보인 몇 안 되는 전장이기도 하지요.
-> 말레이시아 <- 1941. 12. 8 - 1942. 2. 15
연 합 군
일 본
지 휘 관
퍼시발 중장
야마시다 도모유끼 중장
병 력
사 단 4
여 단 6
총원 140,000
화 포 약 1000
전차 및 장갑차 250
항 공 기 400
제 25군
- 근위사단, 5사단, 18사단
총원 60,000
화 포 440
전차 및 장갑차 20
항 공 기
육군 3 비행집단 450
해군 2 연합전대 160
먼저 이곳의 전투를 다루기 전에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당시 지배자이던 영국군이 아시아인에게 가지고 있던 시각이다. 예를 들자면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으나 한가지 일본군에 대한 관점만 들어보겠다. 싱가포르의 백인클럽에서는 어이없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백인들에게 화제의 주제가 되고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 일본의 군함이나 항공기는 유럽에 뒤지고 있다. 일본의 소구경 무기로는 사람하나 제대로 죽일 수 없다. 일본군이 현재 중국에서 수렁에 빠져 있는 것은 일본인의 우둔함 때문이다. 일본군 병사는 시력이 약하고, 눈꼬리가 올라가 있고, 눈이 움패어져 있기 때문에 사격을 제대로 못한다. 또한 비행 역시 마찬가지의 이유로 간신히 이륙만 한다. -
이런 사고방식이 본격적인 전투 이전에 영국군을 비롯한 말레이 주둔군 전체에게 퍼져 있었다. 이것은 연합군에게 말레이에서 일본군보다 우세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를 한 결정적 이유가 된다. 이들 연합군은 개전 일주일 전부터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방어를 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머리 깊숙하게 박혀있던 이 관념은 그들의 자세를 나태하게 만든 것이다. 이 시각은 곧 이은 일본군의 상륙과 또한 일본 해군 2 연합전대의 88대의 공격기가 6번의 공격에 걸쳐 영국해군 최정예 함인 프린스 오브 웨일즈 전함을 격침시킨 일에 의해 영원히 사라졌다.
8일 미명(未明), 야마시다 병단은 일제히 3개 방면에서 상륙을 개시했다. 5사단이 상륙한 타이령 싱고라에서는 타이군이 저항을 했으나, 일본에 우호적인 타이 수상의 명령에 의해 곧바로 정전, 일본군은 싱고라 비행장에 진출하고 곧바로 육군 3 비행집단이 전진해왔다. 또한 5사단의 일부가 타이령 파타니에 상륙하였다. 하지만 영국령 말레이시아 코타바루에 상륙한 18사단의 다꾸미 지대는 영국군의 격렬한 저항에 고전을 겪었다.
코타바루에는 3개의 비행장에 전개한 연합군 항공기가 있었고, 영인군(영국, 인도 혼합 편성군) 1개 사단이 이 진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다꾸미 지대는 이들이 기다리는 함정에 그대로 돌진한 것이다. 이들이 상륙을 개시하자마자, 상륙지점일대에는 격렬한 영국군의 사격이 시작되어 탄막에 휩싸였고, 영국기들이 일제히 폭격을 개시하여 3척의 수송선 중 1척이 침몰하고, 또 한척이 대파되었다. 한때는 상공에서 전황을 관측중이던 일본 정찰기의 승무원이 작전실패라는 보고를 할 정도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다꾸미 지대는 항공지원을 등에 업은 이 1개 사단의 방어를 8일 단 하루의 전투로 제압하고 한밤중에 해안에서 2Km 떨어진 코타바루 비행장을 점령하였다. 이어 9일 정오에는 코타바루 시가에 돌입하여 교두보 확보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다꾸미 지대는 이 상륙 작전에서 전 병력의 16%인 850명을 잃었다.
한편 파타니에 상륙한 사헤끼 수색 연대는 개전과 동시에 타이령을 넘어 진격해온 영국 기계화부대와 조우하여 이를 전멸시키고, 경장갑차 1대를 노획한 후 국경으로 진격했다.
이렇게 분주한 일본군의 수송선단을 노려 출격한 영국 극동함대의 주력은 8일 싱가포르를 출항하여 북상했다. 도중에 일본군의 항공기를 피해 여러차례 남하와 북진을 반복한 이 함대는 마침내 일본군에게 10일 10:15분에 발견되었다. 이를 일본 해군 제 2 연합전대가 공격을 개시하여 13:20분에 프린스 오브 웨일즈를 격침한다. 이보다 1시간쯤 전에 또 다른 전함인 리펄스가 격침되었다. 이 공격에 동원된 일본기는 88기였으며, 손해는 불과 3기였다.
영국군은 이 소식에 크게 충격을 받았으나(당시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독일 비스마르크를 격침한 영국의 상징이었음) 곧바로 미리 계획된대로 방어작전을 개시했다. 영국군은 개전 이전부터 일본군의 타이령 상륙과 코타바루 상륙을 예견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방어계획을 준비했었다. 앞서 기술한 타이령에서 일본군에게 격파된 영국군의 소부대도 그 계획에 의해 진격했던 것이다. 영국군은 짓트라에서 일본군을 막기 위한 방어진지를 6개월 전부터 구축하였고, 이것을 길이 수십Km에 이르는 삼선진지로 구축하여 이곳에서 일본군을 최소 3개월을 저지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 본국과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 원군을 모아 반격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이곳에는 말레이 주둔군 중에서 영국군 최정예인 11영인군이 라이온 중장아래 배치되어 있었다. 라이온 중장은 이 방어진지를 보고 매우 흡족해했다고 하는데, 이 방어진지의 정면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정글 때문에 불과 1Km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삼선종심진지를 구축했기 때문에 라이온 중장은 일본군 저지를 장담했다고 한다. 이 짓트라 진지에 일본군이 도전해 온 것은 11일 미명이다. 그 규모는 5사단의 일부인 사헤끼 수색연대였다.
일본군도 이 짓트라 진지의 견고함과 그 깊이를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공격을 늦추면 이 진지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주력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일부의 병력으로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일본군의 계획은 전차부대를 선두로 하여 70Km 후방에 있는 아롤스타에 진격하여 영국군의 퇴로를 막고 압박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어리석을 정도로 무모한 것이었고 그 작전을 입안한 쓰지 참모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사헤끼 수색연대에 비장하게 훈시를 했고, 자신이 전진하려는 전차대와 행동을 같이 했다. 이 작전이 실패하면 일본군은 3개월 이상을 짓트라에서 소모될 것이 분명했다.
먼저 태울 수 있는 만큼의 보병과 공병을 태운 10대의 전차대가 영국군 진지를 향해 돌격했다. 그 뒤를 역시 10대의 장갑차에 탑승한 보병이 진격했다. 영국군은 도로상에 각종 장애물과 지뢰를 매설하였으나 그것은 보병과 공병들이 처리하고 혹은 정글을 우회하면서 전진했다. 그리해서 제 일선진지에 도달하자마자 쟌룽강의 다리는 파괴되고 있었다. 일본군의 전차가 정지하자 미리 겨냥하고 있던 영국군 포병의 사격이 시작되었고, 도로 양쪽의 정글에서는 기관총탄이 쏟아졌다. 공병은 즉시 강에 뛰어들어 적전가교작업을 시작했고, 전차는 뒤따라온 장갑차와 보병과 더불어 정글의 영국군에게 공격을 가했다. 전투 2시간 반, 19:00가 지나서 정글의 영국군은 모두 전멸했고, 공병에 의한 가교작업도 끝나 전차대는 포격을 무릅쓰고 다시 전진했다. 이 일선진지의 돌파는 영국군에게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로 생각되었고, 이로 인해 후에 입안된 영국군의 작전은 모두 당황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쓰지 참모 자신도 후에 기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영국군은 이를 예상 못해 아스팔트 도로는 파괴되지 않았고, 장애물도 없었다. 오히려 전진하는 일본 전차대를 우군으로 착각하고 손 흔드는 영국군도 있었다. 이를 못본 체 하고 전진하던 일군 전차대는 일선진지로 증원되던 영국군 수송대와 조우해서 경전차와, 장갑차 20량 정도를 파괴하고 계속 전진한다.
11일 22:30, 일선진지를 돌파한 일본 전차대는 짓트라 본진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영국군은 이들이 다리를 건너려는 순간 파괴하려던 폭탄을 전차대가 다리에 접근도 하기 전에 터뜨림으로써 일본전차대에게 이곳에 영국군의 진지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말았다. 일단 영국군은 일본 전차들이 대형을 정비하기 전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고, 숨을 곳이라고는 없는 일본 전차대도 일제히 반격을 개시했다. 영국군의 2파운드 대전차포를 비롯한 각종 포탄이 일본 전차대의 주위에 작렬하였으나, 재빠른 일본군의 전차는 한발도 맞지 않고, 57mm포, 37mm포를 쏘아왔다. 12일 02:00 장갑차에 탑승한 일본 보병 2개중대가 도착하여 우선 도로 양쪽의 영국군 진지에 돌진하였다. 04:30에 전차대는 최후의 포탄을 쏘아 버렸고, 오직 기관총에 의해서만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전차대는 그때까지도 단 한 대도 잃지 않았다. 짓트라 본진지가 고작 10대의 전차를 처리를 못하는 것이다. 또한 날이 밝아 영국군의 반격을 예상하고 있던 일본군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영국전차는 단 한번의 반격도 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전차는 일본전차의 성능을 앞지르고 있었다. 이를 알고 있던 쓰지 참모도 전멸을 각오하고 물러나지 않았는데, 영국군의 반격은 없었다, 12일 10:00 마침내 일본 후속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전차대가 뚫은 곳으로 들어와 일선진지를 모조리 파괴하고 진격해온 것이다. 끝내는 15:00에 영국군은 후퇴를 시작하였다. 이를 전차대는 급히 탄약을 보급하고 추격하여, 13일 아롤스타를 점령했다. 짓트라 방어진지가 불과 1개 전차중대에 의해 뚫린 것이다. 이 방어진지에는 화포 50문, 장갑차.트럭 300대가 유기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식량창고가 고스란히 일본군에게 노획되어 보급이 불안정하던 일본군을 크게 도왔다.
아롤스타를 점령한 일본군은 조금도 쉬지 않고 영국군을 추격했다. 전차부대는 정비를 위해 후방에 남고, 보병이 선두에 섰다. 그 보병은 은륜부대라고도 불린 자전거 부대로서 영국군을 추격하고 빠른진격을 위해 25군 지휘부가 고심 끝에 내놓은 아이디어였다. 마침 말레이는 일본산 자전거의 최대 수입국이어서 부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전원 자전거에 탑승한 5사단 오까베 보병연대는 아롤스타 남방 30km지점의 구룬 전면에서 급히 구축한 영국군의 방어진지를 물리치고 19일에는 타이핑에 육박했다. 또한 19일에 5사단의 일부가 페낭 섬에 상륙해 이를 무혈 점령했다. 20일 타이핑을 점령한 일본군은 그들 작전의 1기 목표인 펠라크강의 다리 확보를 위해 안간힘을 다했으나 그 다리들은 일본군의 눈앞에서 파괴되고 만다. 따라서 2주간에 걸친 일본군의 급진격은 여기서 잠시 휴식을 맞게 되었다. 펠라크강은 강폭이 500m에 달하는 큰 강인 것이다. 일본군은 이강의 도하를 위해 4일을 소비했고, 25일 마침내 도하를 시작하게 되는데, 여기서 영국군은 말레이 최대의 실수를 하고 만다. 이 펠라크강의 대안을 한번의 전투도 치르지 않은 채 내어준 것이다. 일본군은 이강의 도하에 전 병력의 40%를 잃을 것을 예상하였다 한다. 그러나 영국군은 5사단의 정면에서 약간의 저항을 시도했을 뿐, 신예의 근위사단은 무혈성공을 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빌어 26일 말레이 서해안 최대의 도시인 쿠알라쿰프르를 향하여 전진을 한것이다.
한편 동해안을 진격중이던 다꾸미 지대는 별 저항없이 쿠완탄까지 진출, 여기서 본격적인 영국군의 저항에 부딪혔다. 동해안은 서해안과는 달리 도로망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고, 개간된 정글도 없어서 전진에 갖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일본군 특유의 끈질김으로 진격 29일에 드디어 쿠완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군은 1개 여단으로 쿠완탄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겨우 이틀만인 31일 시가를 일본군에게 내어주고 비행장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이 완강한 저항에 일본군은 잠시 주춤했으나, 지대를 두 부대로 나누어 한부대를 정글을 우회시켜 비행장 배후에서 야습케 하여 1월 3일에는 비행장까지 점령한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여단장이 포로가 되고, 1개여단 대부분이 사살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를 이어 일본군은 18사단의 고바연대가 다꾸미 지대의 뒤를 따라 남하한다.
서해안에서는 새로 가세한 근위사단에 힘입어 일본군의 진격은 더욱 급박해지고 있었는데, 처칠로 하여금 '영국해군의 얼굴에 똥칠을 한 사건이다'라고 말하게 한 일본군의 전술이 있었다. 그것은 서해안의 주정 기동부대의 활동인데, 좁은 도로로 2개의 사단이 진격하기 힘들다는 것과, 펠라크강 도하 후 놀고 있는 주정의 활용을 위한 것으로 근위사단 1개대대를 싣고 해상 기동에 나선 것이다. 영국군은 이를 막지 않으면 후방의 퇴로가 끊길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저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비행기와 장갑정을 풀어 이 부대의 차단에 온갖 힘을 쏟았으나, 이 일본군 해상 기동 부대는 쿠알라쿰프르 남방의 몰리브 항에 기습 상륙하여 이를 점령한다. 그리고 곧바로 내륙으로 진출, 간선상의 카쟌을 점령한다. 이 카쟌점령은 영국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끊는 것으로 쿠알라쿰프르의 영국군은 크게 당황하여 퇴각하기 시작한다.
동해안 산악 쪽의 간선도로를 진격하던 5사단은 이포 남쪽 50km 캄바르에서 맹렬한 영국군의 반격에 조우한다. 이 전투는 12월 30일 아침부터 개시되었는데, 미리 고지 위에 기관총 진지를 만들어 놓은 영국군의 반격에 5사단의 전진은 멈추고 말았다. 또한 미리 관측해놓은 포병의 사격 역시 맹렬해서 전진은커녕 일본군을 진지에 접근조차 시키지 않았다. 항공대의 경폭격기가 폭격을 하고 포병이 포격을 해도 영국군은 물러나지 않고 일본군의 전진을 막았다. 그러자 일본군은 그들의 장기인 우회작전을 시도, 또 다시 정글을 우회하여 영국군의 배후에 진출, 일제히 돌격을 하여 1월 3일에는 영국군도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 영국군은 슬림으로 재빨리 물러나 다시 진지를 구축, 5사단의 전진을 저지하려고 했다. 이를 일본군은 사로잡은 영국군 장교에게서 들었다. 이곳에는 인도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 2개 여단과, 포병 3개 대대, 장갑차, 경전차를 100여대나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전혀 멈추지 않고 전차를 선두로 돌격을 개시했다. 1월 7일 05:00에 공병에 의하여 전차장애물이 파괴되자 일제히 전차대가 전진을 시작했고, 뒤를 이어 보병이 돌격했다. 07:30에는 벌써 6km에 걸친 7개의 진지를 돌파하고, 제 1선 여단 사령부가 진치고 있는 트로락 부락을 공격했다. 불과 10분만에 장갑차 3대를 포함하여 200명 전원을 사살한 일본군은 전차대를 이용하여 다시 한번 적 진지에 공격을 하기로 하고, 10대의 전차가 적진지로 돌격을 시작했다. 주위의 영국군애게 기총사격을 가하며 최고속력으로 슬림을 향해 남진하던 이들 전차중대는 리버 부락 옆의 고무밭에 집결중인 트럭 200대, 전차 90대, 트레일러가 달린 야포 20문을 발견하였고, 이들에게 사격을 가해 모두 파괴한 후 계속 슬림을 향해 남진하였다. 이들 파괴된 차량에서 나온 가솔린이 인화되어 전차대에게 위협되었으나, 이를 무릅쓰고 전진, 얼마 후 약 5백-6백명의 수송부대와 조우 이를 격멸하고, 11:30에는 슬림 부락을 점령, 교량확보에 성공했다. 이를 슬림의 섬멸전이라고 한다. 이 전차중대는 곧바로 영국군의 반격을 받는다. 이 전차대는 가볍고 빠른 속력을 이용해 도로에서 마구 움직이며 영국군을 계속적으로 격퇴한다. 그러던 중 한 대의 97식 중전차가 15cm 유탄포를 맞고 파괴되었는데, 그것이 도로위에서 파괴가 되어 도리어 영국군 전차의 전진을 가로막은 장애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끝내는 한밤중에 전진해온 일본 보병부대에게 이들 영국군은 모두 섬멸된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유기시체 500, 여단장 페네트 소장외 포로 600명, 15cm 중포, 고사포 4문, 대전차포 20문, 박격포 15문, 자주포 20문, 트럭 500대, 장갑차 50대, 전차 50대를 노획하는 막대한 전과를 올렸다. 단 10대의 전차가 올린 이 전과는 아마도 2차대전 역사상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쿠알라쿰프르는 곧바로 점령당했다.
위에서 기술한 해상 기동 부대가 본대와 합류한 후 다시 한번 바다로 나서 싱가포르 바로 앞의 파트바하에 상륙하여 이에 진지를 구성했다. 그리고는 연합군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를 사수하였다. 근위사단은 이 별동대를 위하여 급속도로 해안도로를 따라 진격하여, 영국군을 마침내 포위 섬멸하고, 이 별동대를 구출한다. 이렇게 해서 영군군은 말레이 반도에서 수마트라로 탈출하는 항구는 모두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또한 아직 살아남은 연합군 부대는 싱가포르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근위사단과 5사단의 속도로 보아 이들 30000명이 포위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따라서 퍼시발 중장은 이를 싱가포르로 무사히 탈출케 하기 위하여 아끼던 오스트레일리아 8사단을 투입한다. 이 오스트레일리아 군은 게마스 부근에서 일본5사단과 충돌을 하게 되는데, 이 백인 사단은 여지껏 연합군 부대와는 다른 용감성을 보여 수개의 일본군 중대가 전멸된다. 이 오스트레일리아 8사단은 일본 5사단에게 큰 타격을 입힌 다음 일제히 잠복하여 다음 기회를 노렸으나, 일본군 장기인 우회공격과 야습에 밀려 차츰차츰 방어선을 좁히게 된다. 특히 일본군이 노획한 장갑차를 운용하여 공격을 가해오는데 마땅한 대전차수단이 없던 이 오스트레일리아 8사단은 속수무책으로 뒤로 밀리게 된다.또한 영국 본토에서 새로 도착한 허리케인 전투기 51대가 공격군을 무아르강에서 저지하려 했으나, 이들 전투기는 일본군의 1식 전투기, 제로전투기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2주간을 버티던 이 오스트레일리아군은 수에 있어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하며 마침내 싱가포르로 퇴각하고, 1월 31일 마지막 영국병이 다리를 건너자 영국군을 제방을 파괴한다. 그렇게 해서 육지로 연결되어 있던 싱가포르는 다시 섬이 되고, 말레이 본토와 싱가포르에는 바다라는 장애물이 생기게 되었다.
일본군은 공격준비에 꼭 1주일을 소모했다. 일본군은 보급이 여의치 않아 충분한 탄약과 식량이 없었던 것이다. 그 준비기간동안 일본 항공기들은 영국군에게서 노획한 폭탄으로 싱가포르를 공습했다.그리고 4일부터 일본군 포병은 싱가포르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또한 연합군도 싱가포르에 있던 요새포등을 총 동원하여 200문의 대포로 일본군에게 포격을 가해왔다. 일군은 2월 7일 양동작전을 감행하여 싱가포르를 압박할 수 있는 싱섬을 근위사단이 상륙하여 점령했고,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던 8일 23:00 싱가포르에 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5사단은 코오스웨이 교 서쪽 스쿠라이 강으로부터, 18사단은 24시를 기해 더 서쪽에서 일제히 도하를 했다. 총 3회에 걸쳐 도하를 했는데, 영국군이 이들 상륙 주정에 본격적인 사격을 가한 것은 2회부터였다. 1회의 주정 대부분은 피해없이 도하에 성공한 것이다. 9일 12:00 까지는 23,000명의 일본군이 싱가포르에서 제일 높은 180m높이의 부키티마고지를 향해 진격하였는데, 이에 대한 연합군의 어떠한 반격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급히 수리된 조호르 제방교를 보수하여 이제까지 큰 전과를 올린 전차대를 싱가포르로 들여보내 공격에 가담시킨다. 2월 13일 일본군 비행기가 야마시다 장군의 항복 권고문을 퍼시발 장군의 사령부에 투하한다. 퍼시발은 이에 회답치 않으려 했으나, 일본군은 더욱 전진해와 15일 20:30분에 정식으로 항복을 한다.
일본군의 야마시다 장군은 항공지원에 힘을 입어 2배가 넘는 연합군을 괴멸시켰으며, 특히 절대량이 부족하던 전차, 장갑차, 트럭, 화포등을 노획하여 이후 미얀마작전에서 큰 전력이 되었다. 이 70여일간의 전투에서 영국군은 138,708명의 손해를 입었고, 일본군은 9657명의 손해를 입었다.
군말 하나. 쓰지 마사노부란 인간은 쓰레기란 말도 모자란 인간이고 야마시타 도모유키도 쓰지를 '입만 살아있는 놈' 이라고 평했다죠. 여러 모로 악명 눞은 인간이랍니다. 저런 인간이 전범 재판도 안 받고 전후에도 살아남았으니 환장할 노릇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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