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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fo7MaxhyeXA?si=GxMwdMiPgAPvYZ-A Shadow of the Colossus Remix - For Her SoulVGM REMIX on Spotify: https://open.spotify.com/album/0hiSIeY6lKzA7lKtu24GNhAlso available on: iTunes, Amazon, Google Play, Pandora, DeezerBandcamp (including...youtu.be리처드 1세(Richard I, 1157–1199)흔히 리처드 사자심왕(Richard the Lionheart) 으로 알려진 영국 국왕은 중세 유럽사와 십자군 전쟁의 역사 속에서 전설적인 전사 군주로 자리 잡은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종종 단순히 ‘사자왕’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그의 실제 별명인 Lionheart는 문자 그대로 사자의 심장을 지닌 자라는 뜻으로 단순한 왕권보다는 전장에서의 탁월한 용맹함과 기사도의 상징으로 불린 것이다.리처드는 1157년 플랜태저넷 왕가의 왕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났다출생부터 프랑스 남부의 아키텐 공작령(귀족 지역)의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젊은 시절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낸다. 영어보다 프랑스어와 오크어(Occitan)에 더 능숙했다가장 먼저 태어난 장남 윌리엄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차남 헨리는 젊은 왕(Young King)이라는 별칭으로 아버지와 공동 즉위했으나 1183년에 급사한다. 이어 넷째 아들 제프리도 브르타뉴 공작으로 유망했지만 1186년 말 타고 있던 말에 깔리는 사고로 사망하고 만다.이렇게 형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면서헨리 2세의 아들 중 리처드와 막내 존만이 생존자로 남게 된다. 결국 리처드는 형들의 죽음과 치열한 왕위 경쟁 끝에 부친 사후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게 되며, 플랜태저넷 왕가의 대표적 전사 군주로 성장하게 된다.리처드 1세는 형들의 연이은 죽음 속에서 플랜태저넷 왕가의 실질적 후계자로 떠올랐으며그의 아버지 헨리 2세는 방대한 영토플랜태저넷 도메인(The Plantagenet Dominions)을손에 쥔 유럽 최강 군주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 강대한 권력은 내부의 불화로 와해되기 시작한다.헨리 2세는 아들들에게 영지를 분배했으나 실권은 자신이 유지했고 이는 자식들의 불만을 키웠다. 특히 왕비 엘레오노르가 아들들을 선동하여 헨리에 대항하게 만들었고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그의 후계자 필리프 2세(존엄왕)가 이를 지원했다. 1173년 아들들이 일으킨 반란은 단 3주 만에 진압됐지만 헨리는 왕비를 감금하고도 아들들을 사면하는 결정을 내린다. 이것이 훗날 리처드의 반란을 되살리는 계기가 된다.(영국 국회의사당 옆 동상)리처드는 젊은 나이부터 군사적 수완을 드러냈고특히 자신이 11세 때부터 통치해온 아키텐(Aquitaine)에 강한 애착을 가졌다. 그러나 헨리 2세는 막내 아들 존을 편애하며 이 아키텐을 존에게 넘기라 명령했고이는 리처드의 마지막 반기를 촉발시킨다. 결국 그는 부친을 무너뜨리고 32세의 젊은 나이에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한다.하지만 리처드는 잉글랜드보다는 프랑스를 고향으로 여겼고 프랑스어를 쓰며 프랑스 문화 속에서 성장한 전형적인 앙주 제국 귀족이었다. 그가 잉글랜드에 머문 기간은 통산 6개월 남짓에 불과하며잉글랜드는 그의 십자군 원정을 위한 군자금 조달지에 지나지 않았다.그가 남긴 유명한 말,“만약 그것을 살 수 있는 자가 있다면나는 런던마저 팔아넘기겠다.”그의 실용적 통치관과 잉글랜드에 대한 거리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한편 기독교와 이슬람은 유대교와 같이같은 신을 믿고있었기에이 세종교의 공통된 성지 예루살렘은 엄청난 대격변을 겪고있었다.1099년 제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이 건국되었으나 그 이후 수십 년간 이슬람 세력과의 끊임없는 전쟁과 내부 분열로 점차 약화되었고1180년대 중반 예루살렘 왕국은 외교,군사적으로 혼란 상태에 빠졌고 지배계층 간 권력 다툼으로 제대로된 정치가 이루어지고있지 않았다.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보두앵 4세(Baldwin IV)는 문둥병에 걸린 채로 통치를 했으며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외교적 재능과 군사적 역량은 매우 뛰어났으나 체력적으로는 점점 병세가 짙어지며 쇠약해지고있었다.그는 살라딘과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나날이 죽음이다가오고있었고 후계자에 대한 혼란이 가중되고있었다.이 혼란을 틈타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일한 살라딘은 1187년 대규모 십자군군과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바로 하틴 전투(Battle of Hattin, 1187년 7월 4일)이다.이 전투에서 십자군은 거의 전멸에 가깝게 패배했고성전 기사단과 병력 대부분이 살해 또는 포로로 잡히게된다보두앵을 이은 예루살렘의 무능한 왕 가이 드 뤼지냥도 생포되고 이후 십자군은 사실상 궤멸된다같은 해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기독교 세계는 큰 충격에 빠진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내부 권력 다툼과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비교적 평화롭게 점령하며 명성을 높였고, 이 사건은 유럽 전역에서 성지 탈환을 요구하는 여론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따라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프랑스의 필리프 2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제3차 십자군을 소집한다.이 소식을 처음들었을 때 리처드 1세는 즉위 직후 십자군 원정 준비에 전력을 기울이며 왕국 내 자산을 대대적으로 처분했다. 관직과 작위는 물론, 공공재산과 왕권의 일부까지 매각하며 “돈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판다”는 태도로 전쟁 자금을 마련했고그 결연한 결단은 곧바로 원정으로 이어졌다.그러나 원정의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동맹이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원정 도중 익사하며 독일군은 붕괴되었고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 역시 리처드와의 불화 끝에 십자군에서 이탈해버렸다. 결과적으로 십자군의 주력은 사실상 잉글랜드군 단독이 되었고 리처드는 홀로 전선에 남게 된다.“신이 우리를 인도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신으로 전세를 뒤집는 전투 능력과 전략적 통찰로 십자군 전체의 중심 인물로 떠오른다. 아크 공성전, 야파 전투 등에서 그의 활약은 군사적으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들었고이슬람 측에서도 “전장을 집어삼키는 괴력의 기사”“사자의 심장을 가진 자”라 부를 정도였다.리처드에 대한 기록의 상당수는 그의 적이었던 살라딘의 서기관들에 의해 남겨진 것으로적군의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용맹과 기량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전설이나 과장된 무용담이 아니라당대 이슬람 세계조차 인정한 사실적 평가에 가깝다.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점은 그가 얻은 별명‘사자심왕(The Lionheart)’이 영국이나 유럽 기독교권에서가 아니라전장에서 그를 직접 마주한 이슬람교도들 사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리처드의 전투력이 단순한 과시나 신화가 아니라 적군에게조차 실감나게 각인되었음을 보여준다.1191년 8월 30일, 제3차 십자군 원정 중 벌어진 케사레아 전투(Battle of Kesarea)는 리처드 1세의 전장에서의 명성을 굳건히 한 대표적 사례다.이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던 리처드의 군대는 팔레스타인 해안 도시 케사레아 인근에서 살라딘이 보낸 정찰대 및 매복 병력과 조우하게 된다. 살라딘은 곳곳에 병력을 배치해 포위 공격을 시도했지만리처드는 일체의 주저 없이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그는 선두에 서서 적진을 향해 돌진했고매복한 투르크 병력들을 하나씩 베어넘기며 진형을 흐트러뜨렸다.특히 위기가 닥친 순간은 후위에 있던 브루고뉴 공작의 프랑스군이 투르크 기병대의 급습에 고립되었을 때였다. 이 상황에서 리처드는 혈혈단신으로 적진 한복판에 뛰어들어 혼자 돌파전을 감행적을 향해 돌진하며 순식간에 수 명을 베어넘겼다.당시 십자군 연대기(편력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리처드는 벼락 같은 고함을 지르며 투르크 군에게 달려들었다. 좌우에서 그들을 칼로 찔러 죽였고투르크 군은 마치 블레셋 사람들이 마카비를 보고 도망쳤듯 혼비백산했다. 리처드 왕의 얼굴을 보자 그들은 산꼭대기까지 줄행랑쳤고머리 없는 시체 몇 구만 남겼다.”이는 단순한 과장된 무용담이 아니라당시 십자군 병사들과 서기관들이 남긴 생생한 기록으로 리처드가 전투 중 얼마나 선봉에 서서 실제 무력으로 전세를 돌파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결국 이 날의 승리로 십자군 본대는 적의 방해 없이 안전하게 진군할 수 있었고리처드는 단순한 명목상의 왕이 아니라실질적인 전장 지휘관이자 ‘사자심왕’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전사의 모습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아르수프 전투 (1191년 9월 7일)은 제3차 십자군 당시 십자군과 아이유브 술탄 살라딘 군 사이에서 벌어진 대표적 전투로리처드 1세의 전술적 수완과 지휘력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다.십자군은 케사레아 전투 직후팔레스타인 지역을 넘기라는 리처드의 협상 제안이 거절되자 아르수프로 진격했다. 리처드는 약 2만의 병력을 밀집 대형으로 해안선을 따라 이동시키고기병은 전위·후위에 배치하여 방어를 유지하며 진군했다. 살라딘은 약 3만의 병력으로 공격을 감행했으나리처드는 유리한 반격 시점을 끝까지 기다리며 병력을 통제했다.결정적 순간 구호기사단이 붕괴 위기에 몰리자 리처드는 반격 명령을 내렸다. 십자군은 일제히 돌격했고 리처드 자신도 직접 돌진하며 중앙을 돌파해 전열을 붕괴시켰다. 그는 단 15명의 기병과 함께 후속 공격을 지휘하며 아르수프 숲까지 적을 몰아붙였고살라딘은 7,000명 이상을 잃고 퇴각했다.이 전투는 살라딘의 기록관 바하 앗 딘이 “전장에 악마가 나타났다”고 묘사할 만큼 리처드의 압도적인 전투력이 부각된 사례로십자군이 군사적 주도권을 확보하는 전환점이 되었다.이쯤되면 살라딘의 능력에 의문이 들수도있겠지만그 역시 이슬람을 하나로 통일시킨 제왕중 제왕이다종파 부족간의 분열이 심했던 커뮤니티 사이트들보다더 말안듣는 작자들을 통합한 위대한 술탄이었다는 점이다“너희들의 전능한 술탄은 도대체 뭘하고 있느냐?”1192년 7월, 제3차 십자군 말기살라딘은 전략적 요충지인 야파(자파) 요새를 공격했다. 십자군 수비대는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도시 대부분이 점령당했고일부 병력만이 성채 안에 고립된 채 항복을 고려하고 있었다.이 소식을 들은 리처드 1세는 해상으로 병력을 이끌고 즉각 출동했다. 그는 작은 함대를 타고 급히 상륙병력 규모는 적었으나 기민하게 작전을 전개해 요새에 진입 남은 수비대와 함께 도시를 탈환했다. 살라딘군은 리처드의 예상치 못한 기습과 강한 저항에 밀려 철수했다.전투 중 리처드는 갑옷 없이 선박용 복장을 한 채 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그의 돌발적이고 과감한 행동은 당시 무슬림과 기독교 연대기자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바하 앗딘 같은 무슬림 역사가도 리처드의 용맹함을 솔직히 기술했다.이 전투 이후 살라딘은 리처드의 전투력을 인정하게 되었고 결국 십자군과 이슬람 군 사이의 휴전 협상이 시작되어 람라 조약(1192)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십자군은 해안 도시들의 통제권을 확보했고예루살렘 순례는 허용되었다.리처드 1세는 십자군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말년은 영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루살렘 탈환은 끝내 이루지 못했고고국에서는 동생 존과 프랑스 왕 필리프 2세가 그의 영토를 차지하려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리처드는 예루살렘 진격을 포기하고순례자의 통행권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살라딘과 휴전 협정을 맺고 귀환을 결정한다.배멀미가 심했던 그는 바닷길을 피하고 육로로 귀국하던 중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에게 붙잡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넘겨진다. 과거 원정 도중 리처드가 레오폴드의 깃발을 모욕한 일이 화근이었다. 그는 엄청난 몸값을 요구받았고잉글랜드 국민들의 세금으로 풀려난다. 이때 프랑스 왕은 리처드의 복귀를 두고 “사탄이 돌아왔다”고 표현하기도 했다.귀국 후 반란을 진압한 리처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농부가 파뭍힌 귀족 영지에서의 황금 보물을 발견했는데 해당 자작(작위명)은이 황금과 보물을 내놓으라는 리처드의명을 거역했고 이를 토벌하기위해리모주 지역의 성을 공격하다가 세뇌(돌맹이를 쏘는 쇠뇌)에 맞아 부상을 입는다. 어처구니 없게도 이 상처가 곪아 결국 42세의 나이로 요절하게디ㅗㄴ다그의 최후는 전쟁터의 영웅으로서는 치명적이지 않았지만왕으로서는 다소 허무하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리처드는 말도 안되게 뛰어난 무장이었지만내정에는 무관심했고 재위 대부분을 전쟁에 바쳐 국가 운영에는 소홀했다이 때문에 일부 역사가들은 그를 “사자의 심장은 가졌지만, 사자의 영혼은 가지지 못한 군주”로 평가한다.- dc official App
작성자 : 네거티장애고정닉
남해군 2박3일 캠핑(앵강다숲캠핑장,은모래비치,독일마을)
전역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 동안 소중히 모은 휴가로 여름캠을 다녀왔습니다이번엔 남해로 인생 최초 연박캠 갔다왔는데 생각보다 한국 소도시도 여행하기 괜찮네요먼저 집에서 대전복합터미널로 이동해 남해로 가는 버스를 탑승버스를 남해대교를 건넙니다남해 시내에 도착해 요리 재료에 사용할 회를 포장캠핑장에 도착해 새로 산 제로그램 오크리프2p 피칭함 색감 보고 구매했는데 만족했습니다 모노필라 소재라 더울까봐 걱정했는데 캠핑장이 오래된 방풍림 안에 위치해 있어서 시원했음 ‘~‘뷰도 좋았슴다바다에 있는 곡선 모양 돌탑이 석방렴이라는 원시어로 시설인데 옛날에는 저걸로 물고기를 잡았다나저녁은 시장에서 구매한 회와 감태를 사용해 남해에 온 기념으로 다랭이 덮밥을 만들었습니다먹다가 벌레가 계속 쫒아와서 실내로 대피..2일차… 보통의 1박2일이면 아침은 간단히 해결하고 부랴부랴 짐 정리 했을텐데 오늘은 다르다…연박의 장점을 살려 그동안 만들어보고 싶었던 파파야밀크랑 원신 최애캐 요리 따라서 만들어봤어요오늘은 버스를 타고 크게 한바퀴 돌 예정입니다농어촌 버스라 배차 간격은 엄청 길었는데 시간표 보고 제때에 맞춰서 이동하면 다음 목적지로 바로 갈 수 있습니다택시비가 비싸서 버스를 탔지만 자가용으로 돌면 1시간이면 다 도는 것 같음 이래서 차가 있어야버스타러 가는 길에 본 잠자리들버스타고 은모래비치에 도착했습니다바다는 군대에서 매일 봐 감흥 없을 줄 알았는데 괜찮네요여름휴가 철이라 다들 피서하러 많이 오셨어요괜찮은 뷰 포인트가 있다고 해서 마시면서 산에 있는 도로로 올라갑니다이때 20분 정도 걸었는데 진심 이번 캠핑 최대 고비였음;; 위에선 태양 아래는 아스팔트라 마치 뜨거운 열기 샌드위치가 된 느낌…;;그래도 뷰가 좋아서 용서할게요 ㅋㅋ버스 시간 기다리면서 카페에서 먹은 말차유자빙수입니다 음 맛있었어요 말차크림이랑 먹다보면 밑에 유자젤리가 나와서 재밌었습니다버스타고 구불구불독일마을로 가려면 한번 버스를 갈아타야해서 쑥떡아이스 먹으며 30분 정도 쉬었습니다 버스 갈아타고독일마을 도착했습니다파독광부와 간호사분들이 국내 정착하기 위해 형성된 마을 입니다관련된 다큐를 보고 가니까 더 인상 깊었습니다ㅠㅠ진짜 바다가 보이는 마을입니다 ~ ♫예쁜 집들이 엄청 많더라구요 그리고 독일어로 된 숙소 팻말이 많이 보였습니다독일에서 오신 분들이 숙소를 운영하며 한국에서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기분 좋네요이후에 기념품점에 들려 맥주랑 부어스트 소시지 구매했습니다캠핑장으로 돌아갑니다아저녁은 아잉거 맥주랑 이베리코 먹었습니다2차는 어제처럼 ㅋㅋ 텐트로 도망쳐서 그릴 부어스트 소시지 구워먹고 적당히 먹고 마시다 잠든 것 같습니다저는 캠핑 다음날이면 아침에 매번 일찍 일어나게 되네요다시 잠들기도 무리고 딱히 할 것도 없어 평소에 하지도 않는 산책을 좀 했습니다아침은 간단히 해결하고 짐 정리 후 시외버스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이번엔 완전 버스에서 버스로 끝난 버스캠이네요… 다랭이마을도 갔다오려 했는데 예산 부족으로 아쉽게 패스 했습니다 ㅠㅠ 나중엔 꼭…
작성자 : 쑥떡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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