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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친일마녀사냥 5 - 화가의 아들

운영자 2019.03.25 10:46:11
조회 110 추천 0 댓글 0
친일마녀사냥


5


화가의 아들


신현확 전 총리에 대한 친일 재판과정을 <月刊朝鮮>에 기고했다. 내가 쓴 글 바로 뒤에 있는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제목은 ‘나의 아버지가 어떻게 친일파란 말입니까?’였다. 그 내용은 이랬다.



<위원장 귀하. 저는 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을 내린 고 정현웅(鄭玄雄) 화백의 아들입니다. 제 아버지는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화가지만 6·25 때 월북했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해금이 될 때까지 40여 년간 이름을 올릴 수도 없었습니다. 월북 후 60년 세월이 지난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위원회에서 보내주신 통지문을 보면 아버지가 대중잡지에 삽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친일파라고 결정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일제시대 서울 뚝섬에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동아일보에 근무하던 아버지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아 눈 밖에 났는지 쌀 한 톨 배급받지 못하고 모든 것을 암시장에서 사서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혀야 할 일인지 의문입니다. 귀 위원회의 결정문은 편집자가 자기의 입맛에 맞추어 그림에 표어나 각주를 써 넣은 것에 대한 책임을 아버지에게 묻고 있습니다. 

일제 말기에 친일이 아닌 잡지가 무엇이 있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런 식의 친일파 몰기는 상식적 판단을 넘어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버지 정현웅은 집안이 빈한(貧寒)해서 일본 유학은커녕 미술학교 근처에도 못가보고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3회 이상 입선과 특선을 했던 서양화가입니다. 아버지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그림에 담아 저항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27세이던 1937년 선전(鮮展)에서 입선한 ‘아코디온 악사’라는 그림은 나라 잃은 식민지 지식인의 절망과 암울한 자신의 모습을 오버랩시켜 묘사하고 있습니다. 1940년 입선작 ‘대합실의 한 구석’은 핍박받는 조선인의 우울한 모습을 그렸습니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식민지 시대 사회현실을 압축한 걸작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위원장님, 그 시대에 독립운동의 일선에 나서거나 옥고(獄苦)를 치러야만 인정받는 애국행위라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화가 정현웅의 정체성에 비추어 볼 때 삽화나 표지화는 생계의 문제였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인들의 목을 조르던 시절에 생(生)을 영위한 지식인들을 오늘의 잣대로 재단하려 한다면 이는 너무 순진한 것이거나, 아니면 악의적인 의도가 있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에 쓰고 싶은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습니까?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대로 그릴 수 있었습니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자유와 선택권이 있었습니까? 

서슬 퍼런 일본 식민지 시대의 숨 막히는 민족의 암흑기를 살았던 동시대 사람들은 ‘친일행위’에 대해 귀 위원회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견해와 시각을 갖고 있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아버지가 그린 수 천 편의 삽화와 표지화 가운데 몇 개만을 가지고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낙인찍는 것은 경솔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몇 편의 친일 삽화와 표지화가 생생히 증거로 있지 않느냐?’라고 하면서 그 당시의 시대상황이나 일생을 통해 보여준 아버지의 면모를 외면한다면 귀 위원회의 결정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나무 몇 그루만 보고 숲 전체를 평가하고, 나무 몇 그루가 병들었다고 숲 전체가 못 쓰게 되었다고 판단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문제 삼는다면 학생에게 기미가요를 가르쳤던 수많은 교사와 관리는 말할 것도 없고 말단 이장, 동장, 반장까지 일제의 녹을 먹고 살았던 사람치고 친일 반민족 행위가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위원회는 깊이 생각하시고 신중하게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며칠 후 사무실로 나이 지긋해 보이는 신사가 들어섰다. 

“저는 이번 달 <月刊朝鮮>에 아버지 정현웅 화백에 대한 편지를 공개한 당사자입니다.” 

글의 주인공이 내 앞에 나타났다. 

“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야 하겠습니다. 밀실에 앉아 몇 사람이 자기네들 자의(恣意)대로 친일파라는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친일파 화가라고 인터넷에 올라 있더군요.”

그가 분노에 찬 표정으로 계속했다. 

“아버지는 원술랑의 출정(出征)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자체로는 무색투명한 거죠. 그런데 일본잡지의 편집자가 그 그림 밑에 ‘나가자, 싸우자’라는 표어를 붙였어요. 그건 그림을 그린 아버지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위원회는 그걸 보고 아버지를 친일파라고 결정했어요. 이의신청을 해도 전혀 먹혀들지 않고 도대체 어디 가서 호소할 데도 없었습니다. 변호사 사무실들을 찾아도 ‘우리는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면서 전부 다 거절하더라구요. 그러다가 月刊朝鮮에 기고한 엄(嚴) 변호사님 글을 보고 찾은 겁니다. 

저는 이제부터 아버지의 회고록도 만들 예정입니다. 위원회의 사람들에게 누가 역사를 마음대로 심판하라고 권한을 줬습니까? 아무리 항변해도 위원회가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겁을 주더라구요. 그래서 신문사를 찾아다녔죠. 가봐야 감옥밖에 더 가겠습니까? 그랬더니 朝鮮日報 간부가 저를 月刊朝鮮에 소개해 줘서 저의 편지가 공개된 겁니다. 위원회가 그 따위면 저는 차라리 아버지 회고록을 써서 독자들로부터 심판을 받겠습니다. 

제가 평양에 간 적이 있습니다. 평양미술관에 아버지의 그림이 걸려 있었어요. 거기서 아버지의 작품은 대접받는 입장이지 친일이라는 얘기가 없습니다. 제가 자랄 때 정말 숨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였지만 동시에 민족주의자였어요. 북한으로 가서도 김일성 우상화하는 작품을 거절하시는 바람에 거기서도 체제에서 밀려난 존재였지요.”

나는 그의 소송을 맡기로 했다. 며칠 후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친일반민족주의자로 내린 결정을 취소하기로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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