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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친일마녀사냥 31 - 일본 풍경

운영자 2019.05.09 16:08:58
조회 125 추천 0 댓글 0
친일마녀사냥


31


일본 풍경


다음날 아침 배는 시모노세키항(港)에 도착했다. 중심가에 산양호텔이 있었다. 앞은 번화가였다. 그 번화가를 동쪽으로 100미터쯤 걸어 골목으로 접어들면 조선사람들이 경영하는 식당들이 있었다. 김연수와 송진우는 허름한 어떤 식당으로 들어섰다. 다다미는 시꺼멓게 때가 타 있었고 벽지 사이로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한일합방 후 일본 귀족이 된 송병준(宋秉畯)이 시모노세키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송병준의 일본인 첩이 시모노세키에서 쓰다야라는 간판을 걸고 여관을 한다는 소문이었다. 송병준은 야마구치현 하기라는 곳에서 노다에치로란 이름으로 누에를 기르고 있다가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통역으로 조선에 갔다고 했다. 

여관에서 하루를 묵은 김연수는 다음날 동경행 기차표를 끊었다. 동해도 선은 기차만 32시간 타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처음 기차를 탄 김연수는 차창을 통해 밀려왔다 흘러가는 바깥풍경에 넋을 잃고 있었다. 역에서 떠나 얼마쯤 후엔 짙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해변이 나타났다. 멀리 가까이 섬들이 아름답게 보였다. 

그는 오사카를 지나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큰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 오르는 공업도시의 광경은 그에겐 경이(驚異)였다. 형이 절망적인 어조로 전해주던 말이 떠올랐다. 소총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환도(還刀)나 죽창을 들고 일본군과 싸우는 의병이 얼마나 한심하냐는 것이었다. 밤과 낮을 반복해서 달린 후에 기차는 드디어 동경의 신바시역에 도착했다. 인력거들이 앞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김연수는 형 김성수와 송진우 셋이서 한방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했다. 형 김성수가 동생 김연수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미국에 갔던 일본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워싱턴 대통령의 후손들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물었어. 미국을 일으킨 워싱턴의 자손이라면 대단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 거지. 일본으로 치면 막부의 초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쓰쯤으로 생각한 거지. 그런데 미국사람들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는 거야. 워싱턴의 자손에 대해 냉담하고 무관심하더라는 거지. 

일본인이나 조선인들은 미국이 공화국이고 대통령은 4년마다 교체하는 민주국가인 데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한 거야. 그런 민주국가를 이해해야 해. 지난해 한일합방이 되고 대한제국은 이제 없어졌지, 통탄이나 비분강개로 나라가 되찾아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뜻만 가지고 어떻게 되는 세상도 아니야. 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은 배움에서 나오는 거야.”

형 김성수는 세상에 대해 눈이 열리고 있었다. 

김연수는 동경의 일어학교에 들어갔다. 3개월 동안 일어공부에 전념하고 새 학기가 되자 아자부(麻布)중학에 입학했다. 캐나다에서 파견된 미션계에서 운영하던 학교였다. 그 학교는 외국의 공관들이 모여 있는 좋은 환경 속에 있었다. 김씨가의 형제는 동경 구석구석을 공부하듯 구경했다. 니혼바시와 긴자에는 ‘간코바’라는 물품판매소가 있었다. 시계탑이 눈길을 끄는 특이한 건물이었다.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제각기 주인이 다른 점포들이 늘어서 있었다. 도기, 거울, 세공, 칠기, 죽세공, 장난감, 그림책, 인형, 문구, 도장, 보석, 상아세공, 시계, 사진, 화장품, 주머니류, 포목, 안경 등 없는 게 없었다. 비교적 저렴한 물건들을 파는 곳이었다. 서양물건들이 잘 팔려 나가는 것 같았다. 아침 8시부터 점포를 열어서 밤 11시까지 판매한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어깨를 부딪치면서 진열대 안의 물건들을 구경했다. 모든 물품이 가격표가 달려 있었다. 신기했다. 

미스코시 백화점은 르네상스식으로 지어진 화려한 대형 건물이었다. 입구 주변에 공들인 조각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면 정신이 나갈 정도로 화려했다. 대형계단을 배치한 큰 홀이 있었다. 홀은 1층에서 5층까지 시원하게 뚫려 있었고, 대리석으로 만든 열 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위에 아치가 이어져 있었다. 건물의 외부와 내부에 거대한 기둥을 세워 건물을 더욱 화려하게 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빛이 아래층까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2층에서 악대들이 쿵작거리며 나팔을 불고 북을 흥겹게 치고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미스코시의 위층은 여러 가지 고급명품을 파는 곳이었다. 미스코시의 자체 상표를 붙여 파는 특화된 물건들이 있었다. 미스코시 비누, 미스코시 학생화, 미스코시 분, 미스코시 버터, 미스코시 냉장고 등의 물품들이 질서정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미스코시 브랜드 상품이 식료품에서 화장품, 잡화, 가정용기구류까지 없는 게 없었다. 미스코시 백화점은 수입물품도 많이 취급하고 있었다. ‘미스코시’라는 이름 자체가 사회 속에서 하나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미스코시 상품은 우수하고 질이 좋다는 이미지를 일본인들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동경에는 미스코시 백화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이마루 백화점도 있고 마쓰야 백화점도 있었다. 형제는 더러 긴자거리에 갔다. 긴자거리는 1층에는 원기둥을 만들고, 2층에는 발코니가 있는 벽돌건물의 집들이 이어져 있었다. 벚꽃나무와 단풍나무가 거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 거리에 있는 ‘기무라야’라는 제과점은 유명한 곳이었다. 종업원이 접시 위에 앙빵을 담아가지고 기무라 제과점에 들어간 김씨 형제들에게 가져다주었다. 단팥을 넣은 만두 모양의 빵은 중앙부분을 약간 움푹하게 파고 거기에 소금으로 절인 벚꽃을 얹어놓았다. 그 빵은 가운데가 쑥 들어가서 ‘배꼽빵’이라고도 하는데 천황도 좋아해서 궁내성에서 쓰는 품목으로 선정됐었다. 앙빵의 맛은 특이했다. 달콤한 팥의 향기가 입안에 가득 번졌다. 그러면서도 벚꽂의 신맛이 단맛과 어울리는 것 같았다. 형이 선생같이 자상하게 동생에게 알려주었다.

“원래 이 기무라 빵집은 기무라 야스베 일가(一家)가 신바시역에 작은 가게를 연 게 그 시작이었어. 가게 이름도 처음에는 분에이도(文英堂)였다고 그래. 원래는 우리로 치면 양반인 무사 출신 집안인데 빵가게를 한 거지.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니까 일본 무사계급은 점점 시들어갔어.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고 무사들의 녹봉이 끊겼지. 그때 야스베의 아들 에이자부로는 요코하마를 돌아다니다가 서양의 베이커리를 봤어.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베이커리에서 브레드를 먹고 티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것이 문명의 최첨단이라고 생각했지. 에이자부로는 그거다 싶어 서양빵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어. 큰 짐수레에 매일 서양식 빵을 구워 하루 종일 끌고 다녀도 빵이 팔리지 않았어. 밥과 된장국이 주식인 일본인들에게 빵은 생소했지. 그러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거야. 가루식품이라는 게 사실 일본인들에게도 신기한 것이 아니었어. 만두반죽도 가루였지. 만두는 즐겨 먹지만 왠지 빵은 익숙하지 않았던 거야. 외국인이 먹는 음식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지. 에이자부로는 빵과 만두를 절충하면 어떨까 생각했대. 그래서 서양 빵 속에 일본 단팥을 넣었지. 그렇게 해서 이 앙빵이 탄생한 거야.”

김연수에게는 동경의 모든 것들이 신기했다. 형이나 형의 친구들은 좋은 선생이었다. 형이 말을 계속했다.

“미국의 페리 제독이 구로후네(黑船)를 이끌고 대포로 일본의 문을 강제로 연 게 가에이 6년(1853년)이었어. 일본인이 처음으로 증기선을 본 해였지. 일본이 항해술을 배우기 시작한 건 그 2년 후인 안세이 2년(1855년)이야. 나가사키에서 처음으로 네덜란드인에게 대양(大洋) 항해의 기술을 배운 거지. 그게 성과를 맺어 안세이 7년(1860년) 정월 일본인들은 처음으로 증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하게 됐어. 태평양 항해 중 일본인들은 미국인의 도움을 받지 않았어. 측량도 일본인의 손으로 했지. 러시아의 피오트르 대제가 네덜란드에 가서 항해술을 배웠어도 일본보다 못한 셈이었어. 일본은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네덜란드의 글자를 공부했지. 그들의 책을 읽을 줄 알아야 했기 때문이야. 사숙(私塾)에서 네덜란드의 책을 사다가 돌려가며 읽고 사전을 찾아서 공부했어. 나가사키에 있는 외국인 서점에서 사전을 사서 수많은 일본인들이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어. 서양책자에 있는 그림들을 베껴서 그대로 만들어 보고 실험해 보기도 했다. 그런 구체적인 얘기들이 많아. 들어 볼래?”

형 성수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연수 너 일본 학교에 와서 피아노 봤지? 피아노를 만든 야마하 씨의 얘기가 여기서 유명해. 몰락한 무사집안 출신인 야마하는 나가사키로 가서 영국인 시계상에서 일하면서 수리기술을 배웠어. 고향에서 시계 수리점을 내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지. 그래서 떠돌이 기술자로 오사카, 고베, 추고쿠, 시코쿠 등 전국을 유랑했어. 

그는 하마마쓰에서 처음 보는 오르간을 고쳐달라는 부탁을 받게 됐어. 그때 처음 본 오르간의 구조에 넋이 빠져버린 거야. 오르간이지만 수리는 시계보다 훨씬 쉬웠어. 수리를 끝냈을 때 야마하는 오르간의 구조를 완전히 복사한 30장의 설계도를 가진 상태였지. 오르간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보고 싶었어. 그 설계도를 가지고 야마하는 장식 가게를 하는 가와이에게 갔어. 가와이는 금속을 다루는 장인(匠人)이었어.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서양악기에 도전했지. 건반에 붙일 셀룰로이드의 대용품은 소뼈로 한 장 한 장 얇게 줄질해서 만들었어. 62일 만에 일본산 1호 오르간이 나왔지. 야마하는 만든 오르간을 가지고 음악조사소에 가서 심사를 받아봤어. 소리는 났지만 조율이 엉망이었지. 야마하는 피아노 조율을 배우기 시작했어. 그리고는 제2호 오르간 제작에 돌입했어. 드디어 서양 오르간에 뒤지지 않은 제품이 탄생했지. 야마하는 1888년 절터에 공장을 만들어 기술자 10명을 데리고 오르간 제작을 했지.”

김연수는 기차를 타고 올 때 오사카 부근 공장지대의 연기를 내뿜는 굴뚝을 잊을 수 없었다. 모든 걸 지탱해 줄 수 있는 경제가 나라의 근본이라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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