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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친일마녀사냥 113 - 재판장의 생각

운영자 2019.10.14 10:12:27
조회 78 추천 0 댓글 0
친일마녀사냥


113


재판장의 생각


11월 4일이다. 첫 추위가 닥쳐왔다. 대관령에 눈이 쌓인 장면이 뉴스 화면에 나오고 있다. 서초동 언덕의 법원 정문 안에는 잎들을 모두 털어낸 은행나무들이 맨 몸으로 겨울바람을 맞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발길에 밟혀 으깨진 은행열매에서 악취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법원 후미진 곳에 웅크린 행정법원 건물로 들어갔다. 시골 버스정류장 대합실 비슷한 분위기였다. 복도의 한쪽 벽 아래 붙여놓은 벤치에 소송관계인들이 앉아 기록을 펼쳐놓고 웅성대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는 소송기록을 벤치 옆에 놓고 구석에 앉았다. 

“저, 엄(嚴) 변호사님이시죠?”

40대 중반쯤 되는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옆으로 다가와 기록봉투에 적힌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글자 쪽에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위원회에서 나온 직원입니다. 원래는 검찰청 사무관입니다. 위원회에 파견되어 근무를 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위원회에 파견된 검사와 조사 때 만난 적도 있었다. 그 옆에 둥그런 얼굴에 붉은 기가 도는 40대의 남자도 함께 있었다. 역사학자 출신인 그를 몇 번 본 기억이 떠올랐다.

“저는 위원회의 조사팀장이었습니다. 이제부터 다시 변호사님과의 기나긴 전쟁이군요. 저희는 요번에만 나오고 다음번부터는 안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검찰청 직원은 검찰로 돌아가고, 저희 조사팀들을 뿔뿔이 흩어져 자기 갈 길로 갑니다. 뒤의 송무(訟務) 수행은 행정안전부나 법무부에서 맡을 것 같습니다.”

조사팀장이었던 김경현 씨였다. 그가 디지털카메라를 꺼내더니 내 앞에 섰다.

“사진 한 장 찍겠습니다.”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의 사진을 찍을 이유가 없었다. 위원회에 보고하기 위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굳이 나 자신을 숨길 이유는 없었다. 그가 사진을 찍도록 내버려 두었다. 막간을 이용해서 조사팀장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위원회의 조사팀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전부 역사학자들이었습니까?”

이제 그의 경계심이 많이 풀어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학을 전공한 사람도 있지만 사회학을 전공한 사람도 있고 여러 종류입니다. 분야도 정치·경제·사회·문화로 담당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구조론이 뭡니까?”

진영논리에서 구조론이란 이론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구조론도 여러 종류입니다. 정치학에서 사용되는 구조론이 있고, 경제학·사회학에서 사용되는 구조론이 있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일종의 혁명이론이죠.”

“구조론에 의하면 상부구조가 있고 하부구조가 있는데 일제시대 순사나 헌병보다 상부구조에 있던 관리가 더 나쁘다고 보는 이론 같던데요? 개인적으로는 착하고 양심적이라도 그 상부구조에 있으면 친일파로 척결되어야 한다는 게 구조론 같던데….”

“맞습니다. 그런 거죠. 백정 출신들이 일제시대 순사보(巡査補)가 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친일反민족행위자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생계형 친일파라 봐준 겁니다.”

실제적인 행위보다 당시의 사회적 구조상에서의 지위를 더 중시하는 것 같다. 그때 법원 서기가 우리를 찾아와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우리들은 준비절차실로 들어갔다. 본 재판 전에 양쪽의 주장과 증거를 정리하는 절차였다. 사실상의 재판이다.

감색양복에 흰 와이셔츠를 받쳐입고 붉은 넥타이를 맨 김종필 부장판사가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그를 마주보면서 왼쪽의 원고대리인석(席)에 앉았다. 위원회에서 나온 사람들은 오른쪽에 앉았다. 김종필 부장판사가 책상 앞에 쌓여 있는 기록을 대충 들춰보고 있었다. 대부분이 내가 낸 서류들이었다. 일제시대 당시 그 시절을 살았던 김연수(金秊洙) 회장의 삶의 모습들을 되살려 내려고 노력했다. 재판장인 그가 읽었는지 궁금했다. 이미 김연수 회장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를 볼 수도 없고 그의 항변을 들을 수도 없다. 변호사가 할 일은 간접증거인 자료들 속에서 그를 되살려 글로 묘사하고 설명하는 일이었다. 살아서 과묵했던 그는 말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취지시죠?”

부장판사가 내게 확인했다. 사무적인 절차였다.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대충 법원에 낼 내용은 다 써서 내셨네요.”

더 볼 것 없이 빨리 재판을 끝내자는 의미가 그의 말투에서 느껴졌다. 김연수란 인물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그의 내면까지 안내할 책임이 있었다.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내야 할 서류가 많습니다.”

“앞으로 내실 게 많다고 해도 그것들은 보나마나 다 간접증거나 정황증거 아니겠습니까?” 

부장판사는 ‘보나마나’라는 표현을 했다. 이 사건에 찬물을 확 뒤집어씌우는 것 같은 말이었다. 그는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갑자기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재판장인 그가 얼마나 일제시대라는 시대적 상황에 대해 관심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내가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

“한 인간의 친일 여부에 대해 판단하려면 일제시대 그가 처했던 상황 그리고 그의 삶과 공과(功過)를 종합적으로 살핀 후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연수라는 인물이 죽었기 때문에 모든 증거는 당연히 간접증거 내지 정황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수록 그런 편린(片鱗)들을 세심히 살펴 한 인간을 신중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인인 저는 지금도 그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도서관에서 일제시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재판부는 변호사가 조사하고 연구할 시간도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위원회는 얼마 후 없어질 한시적인 조직이었다.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다. 그때 위원회에서 나온 사람이 반박하며 나섰다. 

“저희 위원회에서는 한 인간의 全인격을 판단한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사람이 살던 중 한 시점에서의 어떤 행위가 친일이냐 아니냐만 지적하는 겁니다.”

내가 다시 되받아쳤다.

“친일反민족 행위의 문제는 그렇게 단선적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인간도 오랜 인생을 살면서 순간의 실수나 얼룩같은 오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실수나 오점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더러운 인간이라고 단정한다면 안 될 것입니다. 소설의 한 장만 보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림의 한 조각을 찢어놓고 보면 생명력이 없습니다. 한 인간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부장판사는 진지하게 듣는 표정이 아니었다. 빨리 내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이럴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초장부터 힘이 빠졌다. 판사가 시큰둥한 얼굴로 나를 보면서 내뱉었다. 

“참, 제출하신 준비 서면 중에서 네 번째 것이 여기 끼어 있지 않은데요?”

“저는 정확히 다 제출했는데요.”

하나가 없어졌다는 얘기였다. 불쾌했다. 최선을 다해 쓴 글이고 정식으로 접수했다. 법원서기가 올리지 않은 것 같았다. 판사는 미안하다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 이번에는 재판장이 위원회 측 사람들에게 보고 물었다.

“위원회 측에서는 써 낼 말을 답변서로 다 써 내셨죠?”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걸로 준비절차는 종결해야겠네요.”

그 말에 위원회에서 나온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좀 연기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위원회가 없어지면 후속절차를 정부 어느 부처에서 할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바로 끝내면 안 됩니다.”

“어느 부처에서 후속절차를 어떻게 하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판사가 왜들 그러느냐는 얼굴이었다. 그가 잠시 침묵했다가 선언하듯 말했다. 

“일단 절차를 종결하겠습니다. 이건 유형이 뻔한 사건이에요. 많이 해 봤어요. 다른 부에서 쓴 판결문도 이미 있고.”

나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재판부에서 친일反민족행위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고 해도 인물이 다르고 삶이 달랐다. 판사는 한 인간의 삶보다 그 시절 강제적으로 잠시 입혀진 옷만 보는 것 같았다. 변호사 생활 30년 가까이 얻은 경험에 의하면 이미 끝장난 판결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판결을 대단한 진리의 선언같이 오해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판결은 허무하다. 식견이 짧은 개인이 경솔하게 판단한 휴지조각 같은 판결도 있었다. 개결(介潔)한 자존심을 가진 대학교수에게 ‘교육자적 자질이 없다’라고 쓴 경솔한 판결문 때문에 석궁(石弓)에 얻어맞은 판사도 있었다. 판결문을 쓴 그 판사야말로 나중에 법원에서 쫓겨난 자질부족의 판사였다. 

다른 경우도 있었다. 출세주의자인 판사에 의해 진실이 허위로, 허위가 진실로 바뀌는 경우도 봤다. 그런 판사 한 사람의 독단이 사법부와 국가의 의견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 재판은 국민감정과 여론의 격류 속에서 전개되는 역사 드라마였다. 판사는 그걸 거스를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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