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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한 분노

운영자 2020.03.02 09:58:39
조회 135 추천 2 댓글 0
변호사협회의 이사를 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협회의 직원 한 사람이 조용히 나를 보자고 했다. 작달막한 키에 머리통이 큰 사람이었다. 주산학원 강사를 하다가 협회 직원으로 와서 역대 회장의 비서역할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협회의 세세한 내막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아무도 없는 협회장 부속실에서 그가 내게 이렇게 내뱉었다.

“이사가 되셔서 뭘 모르고 개혁을 하시려는 모양인데 저희 직원들을 건드리시면 안 됩니다. 정 그렇게 하시려면 저희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제가 역대 회장을 모셔서 잘 아는데 그 양반들이 돈 먹은 걸 다 폭로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협회를 운영하던 임원들의 비리를 모두 공개하겠습니다. 또 저희 직원 노조가 일어나 이사님을 해임하는 운동을 전개하겠습니다. 그러니 잠시 하는 비상임 이사직을 풍파를 일으키지 말고 편안하게 하시다 가시죠.”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그의 표정은 ‘너희 변호사들 모든 비리를 알고 있어, 까불지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자신있는 말투로 보아 어느 정도는 사실인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말을 공개해 공론화할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는 철저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변협도 정치판이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패거리 정치였다. 한 사람이 회장이 되면 선거에 참여한 측근들이 이사직을 맡았다. 나는 우연히 장식용으로 낀 사람이었다. 자기 업무를 하면서 변협에 참여하는 변호사들은 일주일에 한 번 시간을 내기도 힘들어하는 상황이었다. 무관심과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있었다. 내가 문제를 제기해도 편을 들어줄 사람들이 없었다. 멀리 있을 때는 정의를 부르짖어도 나의 이해관계가 연관되면 다르다. 다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소수는 힘을 쓸 수 없었다. 나는 비겁하게 침묵했다.

속으로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지만 나는 그 분노조차 이길 수 없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내가 아는 변호사가 변협회장이 됐다. 그의 새로운 집행부가 구성이 됐다. 어느 날 그와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변협직원으로 겪었던 수모와 모멸감을 말해 주었다. 봉사하기 위해 변협회장이 됐다면 약점 잡힐 일은 하지 말라는 충고였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경리서류를 본 적이 있어요. 임원들의 해외여행 세 번 모두 혼자 참석하지 않으셨더군요. 엔간히 미운털이 박히셨겠어. 그리고 회장 개인이 쓴 공식적인 비용도 거액이더라구. 내 개인적으로는 배임죄로 고소하고 싶지만 사회적으로 창피당하기 싫어 참았어요. 그리고 나는 그 직원에게 약점 잡힌 게 없어요. 평소 입에 혀같이 구는 태도를 보니까 경계해야 겠더라구. 적당한 시기에 내보낼 생각입니다. 그 친구가 회장들의 비리를 잡고 있다면 자기는 어떻겠어?”

성격이 급한 나는 그때 똥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모멸감이 마음속에서 앙금으로 남아 있었다. 그 때 운동권 출신의 한 젊은 변호사가 참으라고 하면서 내게 이런 얘기를 했었다.

“저는 수능시험에서 대한민국 고교생 전체에서 이등을 하고 서울대 물리학과에 들어갔어요. 사람들이 천재라고 그랬어요. 어머니는 너무 기뻐서 잔치를 벌이시구요. 대학에 들어가서 정의에 눈떴죠. 운동권이 되어 거리로 나섰어요. 그런데 시위대를 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너무나 찬 거예요. 나는 옳은데 세상은 왜 내 편이 아닐까? 하고 회의가 들었죠. 감옥에 들어가 징역을 사고 나서 고향에 돌아가 룸펜이 됐죠. 오도바이를 타고 신문 배달을 했어요. 그랬더니 동네 사람들이 천재가 신문 배달로 전락했다고 너무 좋아하더라구요. 그게 내가 본 세상이었어요. 그 후 고시 공부를 하고 변호사가 됐죠. 나만 옳다고 해서 사람들이 편들어 주지는 않아요.”

정의가 강물같이 흐른다는 건 법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관념이었다. 세상은 분노할 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런 속에서 나는 배운 게 있다.

분노에 대항하면 절대 분노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욕망도 마찬가지다. 나는 자신과 싸워 이길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길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너무 서두르지 않고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하나님의 연자 맷돌은 천천히 돌지만 곱게 빻는다. 어느 날 우연히 지하철 안에서 나를 협박하던 그 직원을 보았다. 기름기 없는 푸석푸석한 머리에 초라한 모습이었다. 해임됐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연민과 동정이 마음속에서 물결쳤다. 분수를 지키고 감사하며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 역시 욕망을 이기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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