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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흙수저의 행복론

운영자 2022.12.26 10:14:04
조회 302 추천 1 댓글 0

친한 고교 선배 한 사람이 내게 이런 희망을 말했었다.

“나에게 조금만 돈에 여유가 있다면 말이야 좋은 사람을 찾아 밥을 사주면서 지혜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맨날 만나는 사람들 말고 들꽃같이 숨어있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잖아? 내가 먼저 다가가는 거지.”

참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십이 넘으면서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그걸 실천해 보려고 애를 썼다.보려고 하니까 이웃에도 도시 속의 현자가 많았다. 십여년 전쯤이었다. 변호사회 정문을 들어서다 ‘정의의 붓으로 인권을 쓴다’라는 표어를 봤다. 그 표어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걸 만든 사람의 내공이 느껴졌다. 그의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한 조용한 식당에서 만났다. 거무튀튀한 얼굴에 농사꾼 같이 소박해 보이는 오십대의 변호사였다. 같이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짐작대로 그는 바로 마음의 창문을 바로 열었다.

“저는 깡촌 출신이죠. 아버지가 방탕해서 재산 다 날리고 초등학교 때부터 점심을 먹은 기억이 별로 없어요. 소키우느라고 꼴 베고 나무하러 다녔죠. 아버지가 죽고 고향을 떠나려는데 주막집에서 아버지 외상술값을 갚으라고 해서 몇 푼 안되는 부조금까지 다 줬어요. 다행히 사촌 형이 당시 빈민들을 이주시켰던 성남에서 세탁소를 하는 바람에 그 형을 찾아가 밑에서 일했어요. 당시 그곳은 수도가 없어서 내가 양동이가 달린 물지게로 물을 날랐죠. 당시 그곳에서 빈민들의 폭동이 났는데 버스를 불태우고 대단했어요. 그때 사촌형세탁소에 불이 나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 상황에서도 형이 새로 가게를 얻을 돈의 일부로 검정고시책을 사주면서 공부하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검정고시를 준비하게 됐어요. 삼 년 뒤에 이차대학을 들어가게 됐는데 고시반이 있더라구요.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공부하라고 하는 곳이었죠. 대학 사학년 때 고시에 합격했어요. 그때 내가 고시계라는 잡지에 ‘스타트 라인’이라는 제목으로 합격기를 썼어요. 남들하고 한번도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을 한 적이 없는데 이제는 같은 선을 밟아서 신난다고 말이죠. 앞으로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판사가 되고 열심히 했어요. 대법관까지 갈 마음이었죠.”

흙수저 출신이면서도 그런 능력과 집념을 가진 사람을 주변에서 제법 많이 봤다. 그는 충분히 대법관이 될 능력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도중에 법복을 벗고 변호사가 됐죠?”

내가 물었다.

“사람 좋은 사촌 형이 남한테도 잘해주고 사기도 잘 당해요. 보증을 서 줬다가 집을 날리고 길바닥에 나 앉게 됐더라구요. 형이 그렇게 됐는데 나 혼자 판사를 하면서 명예를 추구할 건 아니더라구요. 사촌형을 돕기 위해 법원을 나와 변호사가 됐죠. 그래도 변호사를 한 덕에 동생들 대학에 보냈어요. 작년에 막내 결혼시키고 주변 정리를 했어요. 십오년 변호사 생활에서 집하고 사무실 빼니까 남은 게 없더라구요. 남들은 돈을 번 줄 아는데 실속은 없어요. 여하튼 저는 판사의 명예를 좇지 않고 주변에 보답을 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돈을 좇지 말고 봉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의의 붓으로 인권을 쓴다’라는 모토를 만들어 변호사회에 줬죠.”

돈에 혈안이 된 세상에서 내남없이 검은마음을 품고 위선을 부린다. 그런데 그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욕심 없는 도시의 은자였다. 그는 소박한 아파트에서 일주일에 두 권씩 책을 읽으면서 공부를 놓지 않고 있었다. 국악을 좋아한다는 그는 매일 단소를 불고 있다고 했다.

“행복을 뭐라고 생각해요?”

내가 그에게 물었다.

“개천 출신의 행복은 비교한다는 자체를 모르는 것이었어요. 남과 비교하면서 불행해 졌죠. 판사가 되고 나서 행복은 남들과의 비교에서 자유로워 지는 거였어요. 불행은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민감해지는 거였죠. 많은 법조인들이 검은 욕심을 감춘 우아한 미소를 지으면서 선망과 존경을 받고 싶어 하잖아요? 선과 정의의 위선자일 수 있죠.”

그는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도시의 은자 같은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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