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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잡지기자의 회귀

운영자 2020.03.02 09:59:48
조회 149 추천 1 댓글 0
유명시사잡지의 민완기자 한 사람과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터프가이 같은 모습이었다. 어느 날 그는 술자리를 같이한 검사가 하도 건방지게 굴어 귀를 물어 뜯어주었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편집장은 부하 기자인 그를 칭찬했다. 취재대상을 정면으로 돌파하면서 좋은 글을 쓰는 타고난 기자라고 했다. 그는 당시 권력의 이인자로 불리던 안전기획부장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안전기획부장이 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정사정 했었다. 그는 승승장구했다.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마치고 대통령의 비서관으로 청와대로 갔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십년 만이었다. 내 사무실 아래의 음식점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지내온 얘기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청와대에서 나와 국회의원이 되려고 선거 사무실을 차리고 뛰었었죠. 몇 달 지역을 뛰다 보니까 아무래도 나는 아니라는 걸 알았죠. 사회를 비판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표를 구걸하기 위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뼈 없는 문어같이 변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선거 사무실을 걷어치우고 집안에 틀어박혔죠. 그런데 이번에는 우울증이 심하게 온 거예요. 항상 우쭐대다가 갑자기 적막 속에 있으니까 공황장애가 온 거예요. 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아 먹기도 하고 명상을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를 했어요. 그리고 이제는 병을 극복했어요.”

그가 많이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예전의 그는 옷자락 끝에서 파충류의 꼬리가 보이는 느낌이었다. 원인 모를 공격적 본능이라고 할까 그런 게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어떤 환한 세계에 발을 디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제가 사실은 혼자 컸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재혼을 했어요. 나는 할아버지 집에 그냥 두고 간 거죠. 할아버지는 나를 동네 아이들하고 어울리지 못하게 하고 상자곽 안에 넣고 키웠어요. 그렇게 커서 제 성격이 모가 난 면이 있던 겁니다. 혹시 그동안 제가 건방을 떨어 마음이 상하셨던 적은 없나요?”

예전의 그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이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맑은 강물에 담근 것 같았다. 그렇게 상처를 흐르는 물에 드러내면 치유되기 마련이다.

그의 말이 결론 쪽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저는 우울증을 고쳤어요. 병원 처방만 가지고는 안 돼요. 믿음과 글쓰기가 저의 본질이고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었어요.”

잡지기자 시절 그는 나의 사무실을 찾아와 도스토옙스키를 얘기하곤 했다. 그를 보니까 그와 같은 잡지사 기자로 있었던 정호승 씨의 수필 한 편이 떠올랐다. ‘왜 가장 원하지 않는 일에 인생을 낭비하는가’라는 제목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하기도 하고 잡지사 기자를 하기도 하고 출판사를 경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삼사십대에 여러 가지 일들을 했지만 모두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그랬다고 고백하고 있다. 어느 날부터 그는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고 ‘시인’이라는 이름 외에는 더 이상 붙일 게 없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시가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일들은 그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다. 다른 일을 하면서 시를 쓸 수도 있지만 그는 자기가 가장 원하는 시만 쓰면서 살고 싶은 열망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소중하지 않은 것들에 미쳐서 칼날위에서 춤을 추며 살고 싶지 않다고 하고 있다. 그의 수필집 중에는 아내와의 치열한 이혼소송 과정이 담겨있기도 했다. 내용은 모르지만 그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피를 흘리는 대가를 치른 것 같기도 했다. 희생 없이 이루어지는 소망은 없는 것 같다. 인생의 황혼이 짙을 무렵 두 기자의 문학으로의 회귀를 보았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하더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 선배 다음에 정호승 씨 만날 때 부를 테니까 함께 같이 얘기해요.”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그렇게 말했다. 좋은 두 분의 문학선생을 얻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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