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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옷차림

운영자 2020.03.30 09:52:48
조회 152 추천 4 댓글 0
대학입시를 치고 발표 전 막 반창회라고 해서 플라자 호텔에서 모임이 있었다. 이제는 교복을 벗고 어른이 된 폼을 한번 잡아보자는 마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가기는 가야 할 텐데 입을 옷이 없었다. 동네 친구의 집에 갔더니 우연히 벽에 후줄그레한 낡은 양복 윗도리가 걸려 있었다. 한번 다림질도 하지 않았는지 거의 넝마 수준이었다. 그래도 양복은 양복이라는 생각이었다. 그걸 걸치고 호텔의 모임에 나갔다. 고등학교 삼학년에서 같은 반이던 친구들이 모여 담배도 피고 앞에 놓인 맥주도 마시고 있었다. 그 중에 화려한 빛이 나는 것 같은 한 친구가 보였다. 두산그룹 회장의 아들인 박용만이었다. 부드럽고 화사한 빛깔의 양복을 입고 있었다. 조끼까지 받쳐 입고 완전히 다른 존재로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엊그제까지는 바로 앞 뒷자리에서 검정교복을 입고 도시락을 먹는 걸 보던 관계였다. 내가 입고 갔던 누더기 같은 옷이 더 초라하게 보이는 느낌이었다. 나의 위치를 자각하는 한 계기가 됐었다.


대학 사학년 졸업을 앞둔 무렵이었다. 세상살이로 보면 최악의 상태였던 시절이다. 장학금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돈으로 밥을 먹고 해인사의 한 암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시외버스를 타고 두 시간이 넘게 대구로 가서 아내가 조교로 있는 학교 수위실에 도착했다. 당시 나의 옷차림은 지금으로 치면 거의 노숙자와 비슷했다. 얼룩이 진 싸구려 한복 바지에 때 묻은 낡은 졈퍼를 입고 있었다. 빡빡 깎은 머리는 털실로 짠 모자로 감추고 있었다. 혼자 앉아 있는 늙수그레한 수위에게 “미술대학교 남철 교수 방에 있는 신하영을 만나러 왔는데요”라고 말했다. 오십대 쯤의 작달막한 남자가 지나치다가 들었는지 나를 보며 물었다.

“남철 교수요?”

“그렇습니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살펴보고 있었다. 그가 순간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따라오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나를 데리고 운동장을 지나 두리기둥이 있는 붉은 벽돌 건물 안쪽으로 데리고 갔다. 그가 교수실 중의 한 방으로 들어섰다. 교수실의 문에 붙은 슬릿 속에 ‘남철’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아내가 조교로 있는 교수를 직통으로 만난 것이다.

“조교 신하영은 지금 자리에 없네요.”

교수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교수의 표정에는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희미하게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수컷들의 원초적 경쟁 본능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권위에 내가 꼬리를 말고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의 속에서는 빳빳한 자존심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메모를 남길 테니까 전해 줄랍니까?”

그의 눈이 순간 나를 보면서 ‘이놈 봐라 당돌하게’하는 것 같았다. 내가 수첩에서 종이를 뜯어 내용을 쓰고 접어서 교수에게 건네주었다.

“전해는 주죠. 그런데 내가 내용을 좀 알아도 될까요?”

어느새 지도교수의 눈길이 곱지 않았다.

“시내 다방에서 기다릴 테니 오라는 내용입니다.”

“아마 나가지 못할걸요.”

교수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나오고 안 나오고는 본인 판단이 아닐까요?”

그날 아내를 기다리다가 나는 허탕을 쳤다. 나중에 만난 아내는 교수가 뒤늦게 쪽지를 전해 주면서 욕을 하더라는 것이다. 조선 시대 관료주의에 젖은 놈들이나 벼슬에 눈이 멀어 고시 공부를 한다는 비난이었다. 그리고 초라한 나의 행색을 보고 무시하는 욕을 했던 것 같다. 이름난 조각가이고 미적 감각이 있는 사람으로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었다. 그 교수는 조교인 아내를 그의 처남을 비롯해서 다른 사람과 결혼시키려고 노력을 한 것 같았다. 나중에 내가 법률사무소를 차리고 그 교수는 이따금씩 나를 찾는 고객이 됐다. 살아오면서 돈이 없을 때도 또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런 걸 창피하고 부끄러워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릇된 방법으로 엉뚱한 성장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 다 껍데기가 아닐까. 옷보다 몸이 중요하고 몸보다 영혼이 본질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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