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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써커스단의 추억

운영자 2021.07.05 10: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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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서커스단의 추억




초등학교 이삼학년 무렵이었을 거다. 동대문 밖 종묘 부근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비행장과 경마장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마른 붉은 흙이 깔린 그 공터에 이따금씩 동춘 써커스 단이 천막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오락이 없던 인근 주민들을 불러모았다. 나보다 몇 살 더 먹은 동네 형들이 허술한 천막을 들추고 몰래 들어가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었다. 흙바닥에 깐 가마니좌석 위에서 수 많은 구경꾼들이 손에 땀을 쥐고 서커스 단의 묘기를 보고 있었다. 살색 타이즈를 입고 누워서 져글링을 하는 예쁜 소녀들도 있고 마술을 하기도 하고 창극을 하기도 했다. 내게 감명 깊었던 것은 서커스단에서 하는 ‘장한몽’같은 연극이었다. 사랑하는 잘생긴 대학생을 놔두고 예쁜 여자가 부자에게 강제로 시집가는 걸 보고 안타까워 하기도 했었다. 공연이 없을 때 서커스 단 근처를 배회하다보면 져글링을 하고 재주를 넘기도 하던 소녀들이 핼쓱한 얼굴로 천막 밖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뼈가 부드럽냐고 물으면 자기들은 초를 먹어서 그렇다고 대답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당시 나보다 한두살 더 먹었을 여자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오이꽁지와 무우조각이 나의 뇌리 속에 영상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가난한 서커스단이었지만 공연 때 관중의 열기는 드넓은 높은 천막 안에 꽉 찼었다.

이십여년 전 쯤 칼바람이 눈 덮인 들판을 쓸고 지나가는 겨울이었다. 여주법원에서 오후 재판이 있었던 나는 저녁 어스름이 내릴 무렵 차로 이천의 들판 길을 지나다가 황량한 논바닥에 세워진 동춘서커스단의 천막을 보았다. 어린 시절이 떠올라 서커스단 천막 입구로 갔다.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수은주가 영하 십도 아래로 떨어지는 저녁 동춘서커스단의 천막 안쪽은 냉동고 같았다. 그 안에는 관객이 하나도 없었다. 공연을 보려고 들어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입구에 서서 저녁 추위에 손을 비비며 움츠리고 있는 남자에게 공연을 하느냐고 물었다.

“우리 동춘서커스 단은 관객이 단 한 명이라도 공연을 합니다. 그게 서커스를 지켜가는 우리의 자존심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앞에서 돌아설 수가 없었다. 천 원짜리 지폐 두장을 주었는지 세장을 주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그렇게 주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서커스 단 전체가 사람이 접근하면 자동으로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하는 에스컬레이터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한 명 때문에 져글링이 시작됐고 마술사가 무대에 나왔다. 내 앞에서 빨간 망토를 걸친 하얀 강아지 여섯 마리가 나와 재주를 피었다. 서커스 단원이 내게 접이식 철 의자를 가져다 주었고 옆에 석유 그을음이 나오는 난로를 놓아주었다. 껍질이 그대로 있는 팔뚝만한 통나무를 지게처럼 양쪽으로 받쳐놓은 높은 곳에 밧줄이 매어져 있었다. 줄타기 재주꾼이 사다리를 타고 줄위에 올라가 손에 든 부채를 펴서 중심을 잡으면서 단 한 명의 고객인 나를 내려다 보면서 말했다.

“어려서부터 배운 줄타기 재주입니다. 사람들의 박수를 먹고 재주가 무르익었습니다. 단 한 명의 관객이 있다면 아무리 춥워도 마지막까지 이 재주를 보일 겁니다. 보아주십쇼.”

그러면서 그는 줄 위에서 위아래로 몸을 날리면서 아슬아슬한 묘기 춤을 보였다. 관객인 나도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추위에 떨면서 그의 재주를 보고 있었다. 그의 재주가 끝날 무렵이었다. 그가 줄 위에서 말했다.

“이 텅빈 공간에서 혼자 재주를 넘자니까 춥긴 춥네요.”

서커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재주를 넘고난 그의 말이 잊혀지지 않았다.

며칠 전 서해안의 섬 대부도를 갔다가 바닷가 입구에 세워져 있는 동춘서커스단의 천막과 울긋불긋한 깃발을 보았다. 반가웠다. 천막을 숨어 들어갔던 아이도 아니고 혼자 벌판에 서 있는 서커스단을 들어가던 중견 변호사도 아니었다. 입구의 단원은 내게 경로우대라고 하면서 할인된 입장권을 건네주었다. 어린 시절의 창극을 떠올리며 무대가 펼쳐지는 걸 보기 시작했다. 좌석도 가마니나 접이식 철의자가 아니고 극장 같은 등받이가 푸근한 좌석이었다. 시대의 흐름을 타고 공연의 형태가 많이 바뀐 것 같았다. 미국 브로드웨이식 율동이 많았다. 기계적인 조명장치로 화려한 빛의 무대를 꾸몄다. 그게 아닌 경우는 중국풍의 화려한 옷과 재주였다. 공연을 하는 단원들의 얼굴은 어려서 보던 서커스 단원의 손자 손녀나 증손자손녀뻘쯤 되는 것 같았다. 그들 중에 창극을 구경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무대 위에 낮게 맨 줄을 타던 재주꾼이 줄에서 털썩 떨어졌다. 공을 가지고 재주를 피우던 단원이 공을 놓치기도 했다. 연습부족에서 오는 실수가 틀림 없었다. 주위의 관객을 둘러보았다. 내나이 또래거나 그 위쪽이었다. 모두들 지난날의 서커스단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공연을 구경하러 온 것 같았다. 그들은 손자뻘 되는 서커스 단원들의 실수에 관대했다. 그냥 박수를 쳐 주고 실수를 모른 체 해 주는 것 같았다. 젊은 단원들에게 이천의 눈 덮인 벌판에서 한명의 고객 앞에서 재주를 하던 그 정신을 알려주고 싶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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